각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아버지가 모든 장사를 말아먹고, 외할머니 집의 냉장고가 있는 비좁은 방에서 우리 가족 모두가 얹혀 살 때도 그런 적은 없었는데, 얼굴에 공부가 없던 내가 군대를 다녀오더니 공부에 빠져 있는 낯선 내 모습을 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교수님의 요청으로 방과 후 빈 강의실에서 대략 30명쯤 되는 후배들에게 'AutoCAD'와 '3dsMax' 프로그램을 가르쳤다. 학교 근처 카페에서 과제를 하고 있으면 가끔 후배들이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내 과제 하기에도 바빴지만, 프로그램을 다루지 못해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답답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차마 외면하긴 힘들었다. 예전에 컴퓨터 학원에서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만큼 큰 공부도 없다는 걸 느껴서 그런 것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어느새 날 ‘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 번은 내가 옆을 지나가자 노트북 덮개를 급히 닫는 후배가 있어서 이유를 물었더니, 교수님이 검사하는 기분이 들어 부끄러웠다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존재로 인식된다는 게 내심 좋기도 했지만 불편한 게 더 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디자인을 참고하고 싶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작품에 자부심이 없어 보였지만, 내가 보기엔 저마다 독특한 색감을 갖고 있었다. 단지 그 매력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거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일 뿐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수평적으로 대해주길 바랐다. 누군가가 나를 위로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은 썩 내키지 않았다. 그건 곧 별 볼 일 없는 내가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 구도를 바꾸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보았지만, 어느 순간 그것도 부질없고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그냥 상황을 내버려두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아무도 없는 낡은 강의실에서 과제를 하던 시절이 가장 순수하고 좋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빈 건물 안에 틀어박혀 홀로 골몰히 고민하던 시간들. 하지만 전액장학금을 받고 나서부터는 마음에 지저분한 욕망이 들어차면서, 과탑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자주 떠올랐다. 가뜩이나 과제만으로도 뇌에 과부하가 걸릴 것 같은데, 그런 마음에 사로잡힐 때면 온몸이 물에 젖은 듯 무거워졌다.
2학년이 되자 체감상 과제량이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학교를 마치고 곧장 집에 가는 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카페에 가는 건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카페로 가는 시간은 들쭉날쭉했지만, 나오는 시간은 거의 항상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였다. 훗날 가족 중 최초로 안경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매일 같이 어두운 전구색 조명 아래 작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좀 적당히 해도 됐을 텐데, 그땐 그 많은 양의 과제를 쳐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결국 나는 졸업할 때까지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실은 혼자서 원맨쇼를 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경쟁자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성적에 관심 있는 학생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졸업장만 받으면 됐고, 졸업 후에도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비단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도 비슷했다. 교수님과 학생들의 신임을 얻고 최대한의 퍼포먼스를 발휘하면서도 정작 졸업 후 전공을 살리는 게 맞는지, 아니 애초에 그러고 싶기나 한 건지 확신이 없었다.
여하튼 대학교가 요구하는 모범생의 기준을 성실히 충족한 덕에 졸업식도 끝나기 전에 취직은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하던 대로만 하면 비록 남들보다 더딜지언정 언젠가는 잘 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사회는 생각보다 훨씬 험했고, 나는 지방의 한 전문대학에서 조금 날뛰었을 뿐인 애송이에 불과하다는 걸 직장생활을 하며 금세 깨달았다.
분명 내 삶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20대였다.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던 내가 군대를 다녀오더니 책을 읽기 시작하고, 겁도 없이 혼자서 호주를 다녀오고, 공부는 공부대로 하면서 실컷 놀기도 하고, 하물며 옆구리가 시린 적도 거의 없었으니까. 그 시절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들은 말이 있다.
"넌 뭘 해도 잘할 거야."
칭찬이 어색해서 손사래를 치며 겸손 떨기 바빴지만 속으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허황된 믿음에 너무 의지했던 탓인지 그런 말을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가 민망할 정도로, 졸업 후 나는 여기저기 부딪히고 넘어지며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헤매기 일쑤였다. 되려 한때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이들보다도 더 못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신’이라는 과분한 호칭으로 불리던 때에 나는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다. 정말 몇 단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각성한 존재로 거듭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일 뿐이었다. 그저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내가 잠시 공부에 몰두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갖은 노력 끝에 좋은 학점과 평판은 얻었지만, 그 대가로 1.5만큼의 시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학점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독하게 과제에 매달렸던 걸까. 결과물에 대한 집착을 조금만 내려놓았다면, 그 시간에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곱씹어봤다면 미래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마치 우주선의 궤도가 0.1도만 틀어져도 완전히 다른 행성에 도착하는 것처럼.
그 시절만큼 황홀하고 찬란했던 적도 없지만 그 시절만큼 후회스러운 적도 없다. 나는 독서를 통해 ‘나’라는 모양이 좀 더 나은 모습으로 탈바꿈했다고 믿었지만, 알고 보니 독서는 단지 애시당초 내가 지닌 모양의 일부를 자극한 것뿐이었다. 별 볼 일 없던 내가 책을 읽는다고 해서 대단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니며, 보잘것없던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게 야속한 세상의 이치이자 현실이었다.
나대지 말 것.
언제나 겸손할 것.
책은 남들 뒤꽁무니만 좇던 나를 멈추게 했고 굳이 멀고 먼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만큼 나를 고생시킨, 세간에 수많은 기록을 남긴 이들에게 심심한 존경을 표한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길을 돌아가는 수고는 덜었을지 몰라도, 어딘가에 부딪혀 깨지거나 영영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기만 하다가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도 결국 나였다. 더 나은 나를 염원하기보단 그런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게, 더 나은 내가 되진 못할지언정 있는 그대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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