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1
논산훈련소에 입대하기 전엔 나처럼 스무 살에 입대한 이들이 대부분일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입소해 보니 생각보다 동갑은 드물었다. 스물한 살이 가장 많았고 대부분은 그 언저리였다. 자대 배치를 제주도에 있는 부대로 받고서 만난 맞고참은 나보다 대여섯 살이나 많았다. 그의 첫인상은 그리 탐탁지 않았다. 마치 나잇값을 전혀 할 생각이 없는 것마냥 얍삽하게 굴었다. 살다 보면 가끔 억울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조금이라도 자신이 손해 볼 기미가 보이면 기를 쓰고 피하거나 남에게 떠넘기기 바빴다. 삐쩍 마른 체격에 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이는 인상은 그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와 가장 많이 붙어 지내게 됐다. 성향은 분명 다른데도 알면 알수록 다른 사람들보다 호흡이 잘 맞았다. 딱 잘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방향성'이 같다고 해야 할까. 알고 보니 그는 북경대 경제학과에 다니는 소위 엘리트 출신이었다. 당시엔 그런 학교의 위상을 몰랐기에 별 감흥 없었는데, 함께 지내다 보니 겉모습 너머에 있는 똑똑함과 의외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인간관계에선 서툴렀지만 공부와 자기계발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늦은 나이에 입대한 것도 스펙을 쌓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고, 군대에 와서도 쉬는 시간엔 항상 책을 펼쳤다. 그즈음 독서에 흥미를 붙여가던 내게 그는 휴가를 다녀올 때마다 꼭 책을 한 권씩 사주었다. 그렇게 생애 처음으로 선물받은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말콤 글래드웰의 『블링크』였다.
나이가 들수록 그때 그가 건넨 책 선물이 더없이 고맙게 느껴진다. 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게, 괜히 어려운 책을 읽다 흥미를 잃을까 움츠러들던 내게, 혼자였다면 감히 손도 대지 못했을 책을 건넨 덕분에 독서의 폭이 한층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 책을 계기로 말콤 글래드웰의 『티핑포인트』, 『아웃라이어』까지 연달아 읽었고, 비슷한 분야의 책들을 탐독하며 지식의 폭을 점차 넓혀갔다. 만약 그의 책 선물이 아니었다면, 나는 기욤 뮈소의 소설을 시작이자 마지막으로 독서를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는 운동도 꾸준히 했다. 겉보기에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건강을 위한답시고 보충제를 챙겨 먹고 중위권 이상의 체력을 유지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겠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꾸준할 수 있는 그의 자세는 가히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마른 사람도 나름의 방식대로 열심히 운동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반면에 나는 운동에 미쳐 있었다. 입대 후 10kg이나 찐 몸에 충격을 받고는 매일 옥상 헬스장을 찾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여름의 무더위나 한겨울의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풍을 동반한 강력한 제주 바닷바람에 옥상 철제문이 뜯겨 나간 날에도, 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혼자 운동하곤 했다. 그런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는지 한날 소대장에게 불려간 적도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심각한 표정을 하고서는 “넌 왜 그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냐?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라며 물은 걸 보면 말이다.
한편 제대 후 호주 어학연수를 가볼까 한다는 내 말을 들은 맞고참은 둘이서 영어 스터디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북경대 경제학과 출신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분명 배울 점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영어 문장집을 사서 평일엔 각자 공부하고, 주말마다 번갈아가며 시험지를 만들어 서로의 학습 성과를 점수로 확인했다. 처음엔 당연히 그가 압도적으로 점수가 높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매번 두세 개씩 틀리는 데 비해 나는 거의 틀리는 일이 없었다. 그 당시엔 열정이 한참 불타오를 때였다. 외운 문장을 머릿속에서 완벽히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는 잠도 미뤄가며 공부했다. 나와는 처지가 달랐던 고참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서로 성향은 완전히 달랐지만 거시적인 가치관과 인생관이 잘 맞았던 우리는 운동도 공부도 늘 함께 했다. 본인을 제외한 모두를 경계하던 그는 언제부턴가 나에겐 친동생 대하듯 살갑게 굴었고, 나도 점점 그를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옥상에서 함께 운동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기둥에 비스듬히 세워진 전신 거울 앞에서 덤벨을 들고 있었고, 나는 그 옆 벤치에 누워 바벨로 가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먼저 한 세트를 마쳤는지 옆에서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문득 그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기척 때문이었을까.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뜬금없는 한마디가 사정없이 귓전을 때렸다.
"야, 대체 넌 이때까지 뭐하고 살았냐?"
그 순간, 나와 함께 맞물려 돌아가던 세계선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바벨을 들던 팔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허락 없이 맴돌던 생각의 회로마저 일시에 꺼져버린 듯했다. 서사도 맥락도 없이 튀어나온 그의 질문은 보잘것없는 나의 지난 세월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그간 애써 외면해왔던, 내면 깊숙이 밀어넣은 과거를 기어코 끌어올림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후회의 파도를 몰고 왔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 넌 그동안 대체 뭐하고 살았냐...'
우리는 종종 서로의 지난날들을 공유하곤 했었다. 그는 지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일 만큼 납득할 만한 과거를 갖고 있었고, 나는 현재와 도무지 접점을 찾아볼 수 없는 과거를 안고 있었다. 달리 말해 그는 스스로 설정한 궤적에 맞게 잘 나아가고 있는데 반해, 난 궤적을 이탈한 상태였다. 추측컨대 내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꽤나 미심쩍었던 모양이었다. 얌전히 운동하던 나를 향해 꼭 한 번쯤은 나무라고 싶었단 듯, 갑자기 여태 뭐하고 살았냐며 쏘아붙인 걸 보면 말이다. 그때 그의 물음은 얇은 애정이 섞인 꾸지람만 같았다.
결국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들고 있던 바벨을 잠시 내려놓았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운동을 이어갔다. 그 순간엔 어떤 말을 해도 핑계처럼 들릴 것 같았다. 그저 속으로 되뇌기만 할 뿐이었다. 마음 먹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으면서 왜 그동안 모든 걸 외면하고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고 살았을까.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살면서 지난날들을 그렇게까지 후회해본 건.
공부, 좋아하는 일, 장래희망, 꿈, 취미, 친구.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게 없다고 느낄 때마다 난 그저 내가 못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공부를 못했다거나,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했다거나, 친구를 잘 사귀지 못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못한 게 아니라, 그냥 안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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