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즈번 시티 Lexis 어학원의 초급반에서 함께 공부하는 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다 익히지도 못했을 때쯤이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로비로 나가려는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상기된 표정에서도 동남아 특유의 외모가 돋보이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와 그 뒤엔 흥미로운 미소를 짓고 있고 긴 머리에 안경 쓴 여자가 있었다. 친구 관계처럼 보였다.
"Do you have facebook ID?"
영어 수준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한 발성과 발음으로도 또렷이 들리는 말이었다. '왜 페이스북 아이디를 묻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혹시 외국에서는 번호를 이런 식으로 따는 건가?'싶은 생각이 바로 이어서 들었다. 하고 많은 유추 중에 하필 그쪽으로 무게가 실린 건 나를 수줍게 바라보며 웃는 단발머리 여자의 표정과 분위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있는 여자친구 생각에 양심이 찔렸지만, 선뜻 다가오는 외국인 친구를 마다하는 건 좋은 기회를 제발로 걷어차는 것만 같아 아이디를 냉큼 알려주었다. 서로의 아이디를 주고받고 난 후 그녀는 다음의 한 마디를 남기며 도망치듯 떠나갔다.
"you sso cute~~~"
어안이 벙벙했다. 발칙한 나의 상상이 망상이 아닐 수도 있단 생각에 설레기도 하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페이스북을 조금만 뒤져보면 한국에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될 테고, 그녀와는 좋은 친구이자 영어회화 연습 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날부터 우린 SNS를 통해 간헐적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나보다 두 살 많은 그녀의 이름은 루비였고, 대만 사람이었다. 항상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스마트폰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보니 다른 외국인 친구들보다는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학원에서 만날 때면 서로 영어가 불충분해 소통이 적잖이 힘들었지만, 그나마 SNS 메시지로 주고받을 때는 좀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었다. 그녀와 난 서로 처음 보는 사이가 주고받을 만한 질문과 답을 공유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그녀는 나를 자기가 살고 있는 쉐어하우스로 초대했다. 마침 룸메이트들이 다 가고 없다면서. 그녀 혼자였다면 얼토당토 않았겠지만, 그녀와 항상 함께 있는 안경 친구도 함께 있었기에 흔쾌히 수락할 수 있었다. 남녀가 7:3의 비율로 살고 있는 나의 쉐어하우스에 비해 그녀가 살고 있는 곳엔 모두 여자밖에 없었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전망과 정리를 한 것 같은데도 어딘가 너저분한 내부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 난 닭고기가 들어간 커리 같은 걸 먹었던 것 같다. 처음 맛보는 것이었는데, 적당히 맛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어떻게서든 영어로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번역기를 돌렸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그녀들의 보금자리에서 머물렀다.
집으로 초대해준 것도 그렇고, 적절한 타이밍에 도시락을 싸준 것도 그렇고, 고마운 마음에 마스터형에게 허락받고 나도 그녀를 우리집에 초대했다. 시티로 이사 오기 전 한적한 동네의 쉐어하우스였다. 마스터형을 비롯한 함께 지내던 형들은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 새끼, 호주 온 지 얼마 됐다고 벌써 여자를 꼬셔? 와 같은 반응은 예상치 못했는데, 그냥 즐기도록 냅뒀다. 한국에 여자 친구도 있고 루비는 그냥 학원 친구다, 라는 말을 당최 믿을 생각들이 없어 보였다. 형들은 모두 영어에 능통했지만 루비가 거의 나처럼 말을 못했기에 소통이 원활하진 못했다만, 와인으로 적시는 분위기만큼은 내내 괜찮았다. 형들은 이미 그녀를 나의 호주 여자친구로 대하는 것 같았다.
한날 매일 잘만 챙겨가던 점심 도시락을 까먹은 날이 하루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루비는 무슨 심보가 불어서인지, 나를 위해 작은 도시락을 싸서 학원에 들고왔었다. 밖에 나가서 사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불현듯 내민 두 손에 들린 도시락을 봤을 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때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만약 내가 아무도 안 사귀고 있었다면 이 사람과 사귀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후 중급반으로 월반하면서 그녀와 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종종 그녀로부터 SNS 메시지가 왔지만 전처럼 성의를 다해 답장하진 않았다. 영어가 부족하기도 하거니와, 할 만한 말도 거의 다 하고 난 후라 그녀와 나의 관계에서 더 이상 뽑아낼 소재가 별로 없기도 했다.
그 사이 학원에서는 알게 모르게 은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루비가 조쉬(내 영어 이름이 'Josh'였다)를 좋아한다는. 학원에서 별다른 마찰이 없고 주로 SNS 메시지로 대화를 주고받았으니 우리 관계가 그리 특별해보이지 않다는 건 순전히 내 생각뿐인 것 같았다. 이미 학원의 다른 사람들은 그녀와 나 사이를 평범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는 것에 쐐기를 박는 해프닝이 곧이어 일어났다. 한날 학원 사람들끼리 공원에서 스탠딩 파티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루비와 나는 떨어져 있었고 서로 같은 반 사람들끼리 어울려 놀고 있었다. 루비가 지나가며 내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즈음의 난 소문을 의식하고 있어서 최대한 그녀의 접근을 묵살했다. 그러다 달빛이 밝아지고 취기로 오른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한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사람들이 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듯한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몰린 쪽으로 가보니 루비가 취해서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니, 누워 있기만 한 게 아니었다. 누가 봐도 취해 보였던 그녀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칭허~"
그녀는 외국인 특유의 어눌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영어 이름 'Josh'도 아닌, '치호'라는 한글 이름을 거듭 외치고 있었다. 사태 파악이 되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를 목격하고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모습을 주변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재밌어했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지나치고 싶었지만 몸도 가누지 못한 채로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를 차마 내버려둘 순 없었다. 맨날 붙어다니던 안경 친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일으켜 세운 다음, 한쪽손을 내 어깨에 걸치고 일단 사람들이 들끓는 공원에서 벗어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녀의 집은 공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걸어갈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술을 마신건지 부축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다음 날 일어나면 괴성을 지르며 이불킥을 하겠구나 싶은 그림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윽고 그녀가 사는 건물 1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마침 정신이 조금은 돌아왔는지 로비에 들어서니 부축 없이도 혼자 서 있는 그녀를 보며 한숨 섞인 미소가 지어졌다. 여전히 풀린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녀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한 번 확인하고는 갑자기 내게 달려들었다. 방금 전까지 몸을 가누지 못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싼 채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대로라면 무조건 입술이 닿겠구나 싶었을 때 기가 막히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난 본능적으로 내게 달려드는 그녀를 넘어지지 않게끔 힘을 주어 그 안으로 밀어넣어버렸다. 좁은 공간과 넓은 공간에 각자 서 있는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원망과 허탈감이 뒤섞인 표정을 짓던 그녀. 그게 내가 그녀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이성적인 호감을 갖고 있는 줄은 알았다만, 그 정도로 진심일 줄은 몰랐던 데에 대한 당혹감과 더불어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더라면 조금 더 확실하게 선을 긋거나 조치를 취했을 텐데, 돌이켜보니 그녀에게 나의 처세는 하나 같이 애매한 것 투성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친구가 있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다가오리라고는 미처 계산치 못한 내 착오였다.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는 마치 헤어진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먹서먹해졌다. 오다가다 만나면 인사는 주고받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너무 어색해하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학원 등록 기간이 끝나고는 그녀를 볼 일이 더욱더 없어졌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그녀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호주 생활에 한참 무르익었을 때쯤 환한 대낮에 콜라를 사러 마트로 걸어가던 길에 뜻밖의 문자가 도착했다. 루비였다. 이제 자기는 브리즈번을 떠난다고, 가기 전에 생각나서 연락해본다고, 너는 참 좋은 친구였다고,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지내라고.
짧지도 길지도 않은 담백한 문자에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대뜸 다가와서는 페이스북 아이디를 묻는 그녀의 첫인상이 새삼 떠올랐다. 학원이 끝난 후 생계를 이어가느라 알바한다고 정신 없는 와중에 서서히 잊혀가던 그녀와의 추억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떠올라 잠시 젖어들었다. 그녀가 어떤 의도로 연락을 건넨 건지는 몰라도, 그 마지막 인사는 병이고 약이었다. 호주에 적응하는 동안 루비가 얼마나 도움을 줬는지, 나는 또 그녀에게 얼마나 의지를 했는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별다른 말도 없이 원래 없던 사람처럼 서서히 그리고 비겁하게 존재감을 감출 게 아니라, 관계의 선을 확실하게 그었다면 우린 보다 더 많은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녀가 내게 입 맞추려던 그날부로 거리를 뒀던 게 그나마 이렇게라도 관계의 매듭을 지을 수 있었던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시뮬레이션을 돌리다보니 점점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만 더 크게 들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죄라도 지은 듯한 느낌.
언젠가 그녀를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가능한 한 최대로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내게 따뜻하게 대해줘서 너무 고마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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