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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만 가면 몸이 이상해진다

by 달보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역삼동의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였다. 현장 발령을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사무실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편하게 있어요.”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누가 누군지 외우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그 말들이 내심 고마웠다. 설마 일주일 내내 이렇게 앉아만 있을까 싶었지만 정말 그랬다. 9시부터 6시까지 꼼짝 않고 있으니 차라리 청소라도 하고 싶을 만큼 심심했다.


며칠 뒤 졸업식이 있었다. 안 가도 됐지만 대학 생활을 꽤 성실히 보냈다는 마음에 마무리만큼은 제대로 하고 싶어 기차를 타고 고향 대구로 내려갔다. 가족과 동기들은 내 얼굴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입술은 어딘가에 얻어맞은 듯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더 놀란 건 나였다. 나는 평생 입술이 터진 적이 없었으니까. 잘못 먹은 것도 없고 누가 괴롭히지도 않는데 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후로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숱한 곳을 전전긍긍한 끝에 지금의 직장에 이르렀다. 월급은 조금 낮아도 정년까지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곳이었고, 단 한 명을 뽑는 공채에서 운 좋게 합격했다. 이후 입사 전 제출할 서류가 있어 아내와 함께 회사에 들렀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다행히 휴게공간이 아늑해서 아내는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출근은 그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출근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내가 내 눈을 보더니 물었다. “어머 여보, 눈이 왜 그래?” 거울을 보니 한쪽 눈에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밤을 샌 것도 아닌데, 눈이 아픈 것도 아닌데,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판단하긴 이르지만 같은 부서 사람들은 크게 문제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전반적인 근무 환경도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더 납득하기 힘들었다.


다음 날 출근하니 사람들이 정상적이지 않은 눈 상태를 단번에 알아봤다.

"눈이 왜 그렇게 빨개요? 처음이라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 보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첫 직장에서의 엉망인 입술이 떠올랐다. 딱히 맞추고 싶지도 않아 한쪽에 치워둔 퍼즐이 우연히 맞춰지는 기분이 들면서 몽글한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아, 나는 낯선 자리에 놓이면 내가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구나.


왜 낯선 사람들이 많은 직장에 들어서면 내 몸 상태가 평소답지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아무래도 이미지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고, 나를 뽑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보기보다 못난 구석이 많은데 그런 부분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인간이라면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잘 보이고만 싶은 욕심에 짓눌려 스스로 몸을 망가뜨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지 말자. 그동안 충분히 경험했잖아. 감추고 싶은 것들을 감추려 해도 결국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다 드러난다는 걸.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게 많은 기대를 하지도 않는다는 걸.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고 모자란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괜히 쓸데없이 마음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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