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장인어른의 전화를 내심 기다린다. 수화기 너머로 "넘어오라"는 말이 누군가에겐 섬뜩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겐 반갑기만 하다.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않다 보니 장인어른이 유일한 나의 술친구가 되었다. 외식도 거의 하지 않는 우리 부부는 부모님 덕분에 매번 호강한다. 드린 것도 없는데 받기만 하니 그저 죄송하면서도 감사할 따름이다.
여하튼 오늘도 그런 장인어른의 전화를 받고 집에서 20분 남짓 떨어진 아내 본가로 향했다. 어른들은 더운 계절이면 산 중턱의 다소 거칠지만 정겨운 구석이 많은 집에서 지내신다. 아파트가 여러모로 편하긴 하지만 그곳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산에서 만날 수 있다.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 유려한 산세, 자연 한복판에 들어선 듯한 느낌.
바깥에 있고 싶었지만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어컨 바람으로 가득한 방 안에 있었다. 그러다 잘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잠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이를 모유 수유하느라, 그 핑계로 잠시 밖으로 나왔다. 장모님은 주방에서 꽃게를 삶고 계셨고, 장인어른은 양파가 든 주머니에서 썩은 양파를 골라내고 있었다. 도와줄 게 없냐고 물었지만 사정없이 손사래를 치시는 모습에서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받았다. 영 마음이 불편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어서 보기보다 꽤 편한 의자에 앉아 주변을 천천히 바라봤다.
사람들이 하늘색이라 부르는 색으로 물든 하늘엔 솜사탕 같은 구름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받치듯 초록빛으로 가득한 산들도 보였다. 덥고 습한 날씨를 잊게 만들 만큼 멋진 풍경이었다. 그 광경을 가로지르는 전깃줄이 유일한 흠이었다. 여전히 옆에서 일하시는 어른들이 신경 쓰였지만, 근사한 풍경을 조금 더 눈에 담고 싶었다. 언젠가 이런 자연 속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가만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하늘의 구름을 보다 보면 처음부터 거기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알고 보면 구름들은 저마다 다른 속도와 모양으로 흩어지고 사라지며, 그 시기 또한 제각각이다. 뭐 알아봤자 별 쓸모없긴 해도, 가만히 바라보지 않으면 좀처럼 알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하루하루는 얼핏 보면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것 같지만, 사리사욕과 거리를 두고 매 순간을 의지를 갖고 음미하다 보면, 단 한 순간도 같은 순간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막막하던 인생이 술술 풀리거나, 복잡하던 인생이 단순해지는 건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이 정도면 그래도 살 만하지 않나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또 그러다 보면 마음속 응어리들도 어쩌면 별거 아닐 수도 있고, 별거라 해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지도 샘솟는다.
하늘에 생겨난 구름이 천천히 흐르다 어딘가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내 인생도 순리대로 흘러가다 자연스레 소멸되는 게 아닐까. 뜻대로 되든 말든, 그저 조용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어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짧은 순간이 오늘 하루 중 가장 좋았던 걸 보면, 그 생각도 꽤 그럴듯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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