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이라는 망상

세상에서 가장 유일하고 특별한 기념일은 바로 '오늘'이다

by 달보


어린이날이고, 생일이고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난 그런 기념일 같은 건 전혀 모른 채 자라왔다. 정말 내게 있어서 기념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날' 혹은 '남의 일'이었다. 친구들의 생일이 다가오면 친구 부모님이 먼저 애들을 모아서 집으로 초대한 후 떡볶이, 피자, 치킨 등의 성대한 생일상을 뽐내곤 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다른 세상을 보는 것처럼 신기할 따름이었고, 난 그저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지금 돌이켜 봤을 때 참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점은 그런 기념일을 하나도 챙겨주지 않은 부모님을 전혀 미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의 무덤덤함은 나의 선천적 기질이었는지, 충분히 질투가 나고 부러워할 법한 광경을 어린 나이에서부터 많이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에 대해서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면 애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나여서 그런지 현재까지도 내게 기념일이란 그저 수많은 평범한 날 중 하루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다. 연애할 때도 기념일에 선물 같은 것을 챙겨주는 건 마음을 얻어내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었을 뿐, 기념일 자체를 특별하게 기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난 평소에 잘 챙겨주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진심을 다할 수 있는 타이밍이 각종 기념일과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다면 참 좋았겠지만, 마음은 그렇게 원한다고 적재적소에 발동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에 책을 만나고 세상과 마음이 돌아가는 원리를 어렴풋하게나마 깨우치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기념일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히려 불행을 초래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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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행복'에 대하여 나만의 생각으로 정의를 내린 것이 있다. 그건 바로 '크게 불행하지도 않지만 행복해야 한다는 집착도 없는 상태'다. 그저 평온한 상태가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있어서 수많은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기념일은 오히려 불행을 초래하는 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념일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평소와는 다른 하루를 기대한다. 받을 게 있는 사람은 받는 것을 생각할 것이고, 줄 게 있는 사람은 그것을 줘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것을 줄지, 실제로 내가 준비한 것을 주면 받는 사람이 과연 좋아할지에 대한 수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그 모든 고민의 결과가 그대로 현실에 나타났으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마음먹는 것처럼 일어나는 일이 좀처럼 없다. 심지어 뭔가 주고받거나 축하할 일이 없는 사람조차도 괜히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서 마음이 붕 뜨곤 한다.


기념일에는 선물을 받아도 문제고, 못 받아도 문제다. 선물을 받으면 기분은 좋겠지만, 그 좋은 기분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마음은 금세 현실로 돌아와 다음 기념일에 대한 부담감의 씨앗을 마음에 심게 된다.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마음을 이리저리 애먼 곳에 던져놓고 복잡하게 생각하기 좋아하는 게 인간인지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음의 짐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소소한 악순환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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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내가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선물을 받지 못하면 상황이 더 좋지 않다. 누가 내게 뭔가를 주는 것이 세상의 이치도 아니건만, 생각이 만들어내는 망상에 사로잡혀 스스로 기분을 망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기념일이 뭔가를 주고받는 날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념일들은 다 필요에 의해, 장사꾼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념일은 '그 누군가'를 위한 날이 아니다. 따라서 당연히 '나'를 위한 날도 아니다.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좋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런 좋은 기분은 금세 가라앉기 마련이다. 한껏 들뜬 마음은 마치 용수철처럼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공허함과 불안감을 안고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반면에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는 것은 결코 불행한 일이 아니건만, 기대의 늪에 빠진 사람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알아서 절망과 좌절감에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아무리 마음공부를 하고 인간심리가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서 빠삭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마음이 일으키는 수많은 반응들에 일일이 대처하기는 힘들다. 그런 개념을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에게는 더욱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무소식'이 그 자체로써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모든 일은 평온함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기 위한 공부이자 숙제인 걸지도 모른다.



세계관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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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기념일에 대하여 똑같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기념일을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처럼 기념일을 아무것도 아닌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가까운 사람과의 생각차이는 특히 기념일 같은 날에 유독 두드러지게 된다.


기념일과 특히 연관이 깊은 관계가 바로 연인관계다. 교제관계가 길어질수록 기념일을 대하는 서로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서로가 생각하는 방향이 일치하다면 기념일도 무탈하게 잘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서로의 생각이 비슷하다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만큼 '해줄 것'과 '받아야 할 것'이 뚜렷하기 때문에 예상했던 만큼의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바로 마찰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념일을 대하는 서로의 생각 차이가 뚜렷하면 그만큼 충돌이 일어날 확률도 높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서 만약 서로의 가치관을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면, 그 일을 계기로 서로를 더욱더 존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두터워질수록 나와 다른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닌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서로의 생각차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만한 비극도 없겠지만 말이다.



기대라는 심리적 칼날에 마음이 베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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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기념일에 울고 웃는 이유가 바로 '기대하는 마음'때문이다. 모든 마음의 동요는 기대하는 심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기대한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만의 기준을 세워놓는 것과도 같다. 문제는 이런 기준을 '자기만의 기준'이 아니라 '모두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개인적인 욕망에 의한 것을 모두의 기준일 거라고 여기면,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런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기념일뿐만 아니라, 내가 당연하게끔 여기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신의 생각에 모든 오류가 있다는 것을 영영 깨닫지 못하게 된다. 모든 탓을 외부로 돌리게 되면 마음은 잠시 편안해질지도 모르겠으나, 결국 모든 주도권을 외부로 넘기는 꼴이 된다.


살면서 괴로운 일들이 자꾸 일어난다면 그 원인을 내 안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삶에서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주범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과 마음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점점 상태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기대하는 심리 따위가 여태껏 나의 마음을 쥐락펴락했던 근본적인 문제였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떤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가 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저 남 탓, 상황 탓만 하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괴로운 마음에 모든 것이 묻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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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언급하지만 내가 정의 내린 진정한 행복은 '크게 불행하지도 않은데, 행복해야 한다는 집착도 없는 상태'다. 특별한 기념일인 만큼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좋은 일들이 생각대로 일어났으면 참 좋겠지만,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마음을 품고 평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더욱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1년 중 한 번밖에 오지 않는 기념일이 되기도 하는 날이, 누군가에게는 나와 전혀 관계없는 시끄러운 잔칫날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가치관은 서로 존중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기념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가만히 숨만 쉬면서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 괜히 쓸데없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자.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기념일이 딱 하루 있다면, 그건 바로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오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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