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 계기
아침에 수영을 마치고 폰을 확인하니 할머니에게 전화가 한 통 와있었다. 그 부재중 알림을 보자마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보통 일 같으면 이른 시간에 할머니에게 전화 올 일이 없기 때문이다. 두려운 마음에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는 중에도 할머니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올까 봐 두려웠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왜?"
"..."
상황파악이 끝난 나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정말 무심하게도 애정의 기운이라곤 1도 없게 느껴지는 '왜'라는 대답이 그리도 반가울 수가 있을까. 알고 보니 할머니는 내 번호를 잘못 지우는 바람에 다시 전화번호를 등록하는 과정에서 통화 버튼을 잘못 누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설명을 듣기 전에 할머니의 털털한 대답에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할머니의 투박한 대답에 그렇게 웃음이 날 줄은 몰랐다. 불안했던 마음이 가셔서 그런지 별 거 없는데도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전화 잘못 걸었다'라는 말 한 마디면 설명이 끝나는 간단한 사연을 한 편의 소설로 길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는 할머니의 말도 평소처럼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원래 같으면 할머니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끊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할머니의 호탕한 웃음도 놀란 나를 안심시켜주는 듯했다.
사실 너무 이른 시간에 찍힌 할머니의 부재중 전화 알림을 보자마자 아버지 생각이 났다. 최근에 아버지가 큰 수술을 치른 후 회복하는 중이라서 '혹시 아버지가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간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할머니에게 전화를 다시 거는 와중에 연차 쓰고 집으로 달려갈 시나리오까지 이미 머릿속으로 다 완성한 상태였다.
다행이다. 별일 없어서.
아버지는 평생토록 아픈 적이 없었던 분이셨다. 과장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는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술 담배는 원래부터 하지 않으셨고 운동을 김종국처럼 하시는 분이라 환갑이 넘으신 나이에도 배에 왕자가 선명했던 분이다. 난 아버지에게 뭐 대든다? 이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덩치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평소에 아버지와 비교도 많이 당한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건장한 체격으로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아버지에 비하면 푸근한 인상을 풍기기 때문이다. 다만 기분 좋은 비교였다. 나를 낮춤으로써 추켜세워지는 대상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으니까.
그런 분이 예기치 못한 병에 걸리셨다. 우리 아버지를 알고 계셨던 분들은 그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너무나도 건강한 분이셨지만 집안 혈통 대대로 내려오는 병이라서 그런지 아버지도 피해 가긴 어려우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현실을 덤덤하게 잘 받아들이셨다. 덕분에 수술도 잘 받아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큰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노력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도 이젠 지켜야 할 것들이 있기에 무너지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나름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작은 일 앞에서는 성급하게 굴지만 오히려 큰 일을 마주하면 차분하게 대처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더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이른 아침에 남겨져 있던 할머니의 부재중 전화는 내가 속으로는 얼마나 두려워하고 불안에 떨고 있었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나도 사람이긴 한가 보다. 처음 아버지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을 땐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한테 가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우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건강에 더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필요하지 않으면 오히려 발길을 떼지 않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속으로는 '내가 이 정도로 냉정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너지면 안된다는 마음에 나를 더 강하게 밀어붙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끝까지 단단할 수는 없었나보다.
확실히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하루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다. 회사로 출근하는 건 그리 달갑진 않지만 그마저도 별 일이 없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새벽부터 일어나 명상과 글쓰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수영이 끝난 뒤 시원한 마음으로 회사로 출근해 업무에 집중하고 퇴근하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채운 뒤 오늘 하루를 잘 보냈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내일을 기대하며 편안히 잠자리에 드는 게 가장 좋은 날이었다. 평소에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이 간단하지만 위대한 진실을 깨닫기가 힘들다는 게 인생이 매력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제발 별일 없어라.
오늘이 귀한 줄 알고,
찰나의 순간에 머무를 수 있는
지혜가 내 영혼에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