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평온이 스며들다
시간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된 나는 사무직을 알아보기로 했다. 굳이 사무직이었던 이유는 컴퓨터를 쓰고 주말과 공휴일을 다 쉬며 칼퇴근을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침 집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오토캐드라는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아는 직원을 구하는 곳이 있길래 바로 지원해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난 사회생활 하는 내내 현장에서 굴렀지만 기본적인 컴퓨터 활용능력이 괜찮았다. 더군다나 캐드는 대학교 때 많이 써서 능숙하게 잘 다루는 편이었다.
면접 자리에서 내가 질문한 건 단 한 가지, 야근의 유무였다. 돈보다 그게 더 중요했다. 그때 면접관이었던 팀장님은 야근은 걱정하지 말라며 정상적인 퇴근을 보장하였고, 내 인상을 좋게 봐준 덕에 여러 면접자들 중에서 나를 채용했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빨간 날 다 쉬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돈을 포기하고 시간을 구하고자 이직한 곳이었던 만큼 확실히 이전보다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여태껏 불규칙적이고 거친 삶을 살아오다가,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고 주말과 빨간 날을 다 쉬는 직장을 다니게 되니 확실히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그리고 캐드를 다루는 숙련도와 기본적인 업무처리능력에 대한 평가를 좋게 받아서 수습기간이 한 달 줄고 연봉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기존에 있던 직원분들도 나를 신입사원이 아니라 마치 프리랜서를 대하듯 적당한 선을 지키며 친절하게 대해줬다. 쉬는 시간마다 책을 보든 뭘 하든 아무런 터치를 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운 곳이었다. 달리 말해 나만 잘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이었다.
그 와중에 내가 전 직장을 퇴사한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한 건 새벽기상이었다. 사실 미라클모닝으로 유명한 새벽기상은 예전에도 몇 번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만 할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그 어느 때 보다도 혼자 조용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간절히 필요했다. 아무리 9 to 6 직장으로 옮겨서 이전보다 시간이 많아졌다고 한들, 퇴근 후의 시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거라 생각했다. 편하게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이라도 퇴근하고 나면 피로가 쌓여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집에 혼자 사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저녁시간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아침 6시쯤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났다. 이번만큼은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만 했기에 최대한 무리를 하지 않으려고 신경 썼다. 블로그도 만들어서 새벽기상에 대한 인증글을 포스팅하기 시작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새벽기상을 습관 들이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처음엔 정말 가볍게 인증만 하려는 마음에 타임스탬프라는 어플로 아침에 일어난 사진을 찍어 올리고, 그 밑에 한 줄 정도의 소감만 쓰려고 했다. 하지만 새벽이라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 건지는 몰라도 한 줄에 이어서 나도 모르게 몇 줄을 더 적어 내려갔다.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첫날이라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러나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뭔가를 나도 모르게 쓰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고요한 새벽을 가만히 느끼다 보면 쓰기 전까지만 해도 마음에 전혀 없던 글들이 나도 모르게 술술 튀어나오곤 했다. 그 느낌이 너무 신선했다. 날이 갈수록 글은 점점 길어졌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글을 쓰려고 쓰는 게 아니었다. 단지 새벽을 온전히 느끼기만 했는데, 알아서 손가락이 움직이며 출처를 알 수 없는 글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마치 인생에 새벽을 들였더니 글쓰기가 함께 선물로 딸려온 것만 같았다.
이전 직장을 퇴사할 당시만 해도 평생 해 본 적도 없던 글쓰기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는 새벽에 시간을 벌기 위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새벽에 글을 쓰기 위해 일어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새벽에 글을 쓰고 나서 출근해야만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특히나 글은 주변환경이 어지러우면 잘 써지지 않았기에 새벽에 대한 애정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러다 보니 새벽기상은 습관으로 들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기분 좋은 날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새벽에 글쓰기로 하루를 시작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아마 그때쯤부터이지 싶다.
내 삶에 평온이 스며들기 시작한 게.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내가 드디어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