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세월은 없다
흔히들 노가다라고 하는 건축 공사현장과, 공장에서 생산직 교대근무를 비교적 이른 나이에 체험해 본 건 오히려 좋은 경험이었다. 그 당시 열악한 현실에 부딪혀 버티지 못하고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하나 고민할 때쯤엔 나의 생각이 신중하지 못했다며 자책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정확히 어떻게 일하고 상세한 업무환경은 어떤지, 현실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대략 어느 정도인지 미리 파악한 덕분에 다신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일념이 마음에 새겨졌다. 그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마음에 또 하나 추가된 것이다.
일반 회사는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신입사원으로 입사 자체를 하지 못한다. 하지만 현장직은 웬만큼 나이가 차도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일이 힘들어서 나가는 사람이 많은 만큼 인력난에 시달리는 곳이라 사람들을 거의 상시로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달리 말해 나도 만약 그런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면, 훗날 일이 꼬여 갈 곳이 없다고 생각될 때 분명히 교대직이나 건설현장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말이다.
내가 불합리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길을 쉽게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다. 여기가 아니라도 새로 뭔가 배워서 취직을 할 수도 있고 이력서 하나만 넣어도 갈 곳이 있을 나이였다. 그래서 더 재빠르게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나도 현장에 가장 많이 찾아왔었던 40대분들처럼 어느 정도 나이를 채우고서 그곳에 발을 들였다면 서글픈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떡해서든 버텨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삶을 살았다면 글쓰기를 영원히 발견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다.
나이 들어 현장이나 공장을 찾아가는 사람들 중에 특히나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거의 돈 하나만 보고 오는 경우가 많다. 현장은 일당이 쌔고, 공장은 교대근무기 때문에 추가수당이 붙어 일반 회사보다 월급이 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과 현실이 전혀 다르다는 건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른다. 건축 현장 같은 경우에는 수도권이 아닌 이상 떠돌이 생활을 피하기 어렵다. 지방은 공사거리가 많지도 않고, 메이저급 공사는 대부분 서울업체가 내려와서 진행한다. 만약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는 팀에 들어갔다면 일을 많이 하지 않거나, 일당제가 아닌 월급제인 경우도 많다. 공장은 야간근무를 하지 않으면 돈이 안된다. 잔업도 필수다. 잔업과 야간을 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차라리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좋다. 웬만한 직장보다도 못한 월급이 통장에 찍힐 테니까 말이다.
이런 실상을 직접 몸으로 부딪혀 체험해 본 건 나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게을러질 땐 이전에 고생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없던 힘도 불쑥불쑥 나고 잠도 확 달아난다. 내가 어린 나이에 거치고 힘든 곳을 자진해서 뛰어 들어가 잠시라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렇게 힘들고 서글픈 삶인 걸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 모든 실상을 다 파악해 버린 나는 다신 그곳으로 돌아갈 마음도 용기도 없다. 그만큼 잠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나만의 업을 찾아 갈고닦아야 할 의무가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요즘 매일같이 글을 쓰다 보니 자주 듣는 소리가 '부지런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날 전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게 가장 없는 재주가 '반복하는 것'과 '부지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꾸준히 쓸 수 있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나만의 서사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날더러 신중하지 못한 선택으로 인해 허송세월 보낸 걸 미화한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그 거친 기억들은 인생에 다신 없을 소중한 경험이자 재료라고 생각한다.
남들 여름에 에어컨 바람 쐬며 냉방병 걸릴 걱정 하고 있을 때 땡볕 밑에서 뛰어가며 일하고, 남들 겨울에 따뜻하게 일할 때 장갑을 두 겹씩 껴도 얼어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틈나는 대로 녹여가며 일했던 그 경험들은 오늘도 퇴근하고 바로 집에 가고 싶었던 나를 카페로 들어와 한 편의 글이라도 더 쓰게 만들어준다.
허송세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자신이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생각 차이에서 오는 경험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웬만한 모든 경험은 현재의 자신을 더욱 빛나고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소중한 재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은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것들이다. 매 순간 내린 선택들은 당시엔 언제나 최선의 결정들이었다. 직접 발을 담가보지 않으면 결코 모를 만한 일을 미리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며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말자.
아직 살아갈 날은 많이 남았고, 실수는 반복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책임감을 가지고 다음의 방법을 찾아나가겠단 자세가 중요하다.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결국 원하는 인생으로 점점 다가갈 수 있다고 강하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