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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Aug 17. 2023

한 달에 400만 원씩 꽂히기 시작했다

역시 돈은 전부가 아니었다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일을 해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다 보니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이직한 곳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또 다른 친구의 추천으로 더 큰 공장으로 이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곳은 대구에서 유명한 대기업이었다. 일하고 싶어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직하는 곳의 정확한 연봉은 몰랐지만, 회사의 규모로 봐서는 최소한 지금 다니는 회사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이미 일하던 곳에서 일도 손에 익고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진 건 아까웠지만 현실적인 조건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침 결혼식을 앞두고 있기도 했고, 원래 다니던 회사는 성과금의 유무에 따라 연봉 차이가 극명하게 갈렸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긴다면 좀 더 당당하게 장가를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이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기존에 일하던 곳에서 1년을 채운 뒤에 더 큰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확실히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벌게 됐다. 통장에 찍히는 월급을 보니 대충 어림잡아도 연봉이 7천만 원이 넘어갔다. 한 달에 세금 떼고도 400만 원씩 고정적으로 들어왔고, 성과금도 따로 있었다. 가뜩이나 변동지출이 거의 없는 나였기에 400만 원이라는 금액이 통장에 매달 꽂히니 돈이 불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저축하는 금액만 거의 300만 원 가까이 됐었다. 이렇게만 살면 돈이 모이는 건 꽤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예비신부였던 아내도 그 부분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제 더 이상 제2의 직업을 갖기 전까지 직장을 옮길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의외였던 건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많은 돈을 버는데도 막상 그렇게 기쁘진 않았다는 점이다. 통장에 400만 원이 처음 들어온 날 사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단지 '여기서 일하면 이 정도의 돈이 들어오는구나'하는 게 전부였다. 아마 그때 느꼈던 무미건조한 감정을 좀 더 깊게 관찰했다면 조금 더 일찍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감정은 내면의 상태와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일종의 지표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땐 별다른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많은 돈을 받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건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 반납해야 하는 것이었다. 회사를 다니는 것 말고는 딱히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7시 30분까지 늦게 않게 도착하려면 아침 6시 30분에는 집을 나서야 했고 퇴근하면 아무리 밟아도 집에 도착하면 밤 9시였다. 집 밖을 나가면 최소 14시간이 지나야 돌아올 수 있었다. 더군다나 몸을 많이 쓰는 일이었기에 피로는 날이 갈수록 누적됐다.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면 지쳐 곯아떨어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곳이 특히나 더 힘들었던 건 이전에 비해 업무강도가 너무 강하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하던 일은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모래틀에 1500도 이상의 쇳물을 붓는 것이었다. 기계조작으로 주입하는 방식이라 어느 정도 떨어져 있긴 했지만, 온몸을 두르는 방화복을 입고 용광로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중간중간 정비를 해줘야 하는데, 어쩌다 실수로 발이라도 헛디디면 끝난다고 봐야 했다.


처음부터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는 줄 알았다면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래 내가 배치받은 포지션은 그 공장 내에서도 가장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느 한 직원이 일하다가 쇳물이 튀는 바람에 큰 화상을 입었는데, 치료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말도 없이 퇴사를 해버리는 바람에 그 자리에 공백이 생겨 대체자로 내가 급하게 투입된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지도 못했던 위험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차마 가족들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나름 퇴직 후를 미리 대비하기 위해 오전반 출근 전에 일찍 일어나 보기도 하고, 야간조일 땐 아침에 퇴근하면 바로 잠들지 않고 뭐라도 해보려고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수없이 반복되는 알람소리에 억지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도 차마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출근하면 14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집에 올 수 있었는데,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애를 쓰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내 시간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자는 시간을 조절하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일할 때 정신 차리지 않으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기에 마냥 잠을 줄일 수도 없었다.




유일한 희망은 4일 동안 근무하고 나면 돌아오는 이틀의 휴무날이었다. 4일만 일하면 이틀간 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건 오직 쉬는 날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결코 가만히 놔두는 법이 없었다. 이전에 일했던 공장은 예정에 없던 잔업을 시키거나, 난데없이 조기출근하라며 전화가 온 적은 가끔 있었어도 쉬는 날까지 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로 이직한 곳은 일손에 구멍이 생기면 쉬는 사람을 불러다가 일을 시키는 곳이었다. 교대근무의 특성상 다른 사람이 출근하지 못하면 대체자가 필요한 건 당연했지만 휴무날까지 반납해 가며 일하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가끔 있는 일이었으면 그나마 버틸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그런 대체근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너무 잦았다는 것이다.


운이 좋아서 대체근무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해준다고 해도, 그건 일종의 암묵적인 빚이 되어 결국 나중에는 나도 그만큼 대체근무의 공백을 메꿔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쉬는 날 출근하라는 요청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은 있었지만 실상 의미는 없었다. 나도 나중에 연차를 쓰거나 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 대신 일 좀 나와달라며 직접 부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쉬는 날만 바라보고 일하는 교대 근무자가 쉬는 날마저 보장받지 못한다는 건 너무 치명적이었다.


사회생활 이래로 돈은 가장 많이 벌게 됐지만 그만큼 '시간'을 잃어버렸다. 시간을 벌지 못하면 제2의 직업에 대한 준비를 하나도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살다 간 할 줄 아는 것도, 갈 곳도 없이 회사를 나오게 되는 미래를 마주할 게 너무 뻔했다. 그건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몸을 거칠게 쓰는 일이기 때문에 언제까지 내 몸이 버틸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 회사에서 10년 간 일해온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날이 더운 여름철에는 한 달에 약값만 100만 원씩 나간다고 들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전혀 남일 같지가 않았다. 그런 상황이 바로 내 미래가 될 수도 있을 가능성의 여지는 충분했다.




난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돈 쓰는 것에 커다란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물욕이 하나도 없었기에 갖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전혀 없었을뿐더러 갚아야 할 빚도 없었다. 난 단지 인생을 뜻깊게 살고 싶을 뿐이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서로 더욱더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고, 훗날 만나게 될 우리 아이에게 이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다채로움을 고스란히 직접 보여주고 싶은 게 내가 간절히 욕망하는 삶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남는 거라곤 남들보다 약간 더 많이 받는 월급밖에 없고, 그 이상의 생활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 회사를 계속 다니게 된다면 내가 꿈꾸는 그런 인생은 결코 현실로 만나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능력도 경력도 없는 내게 한 달에 400만 원이라는 월급은 거저 주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의 희생을 치르는 대가일 뿐이었다.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젊음을 회사에 온전히 바치는 몫일뿐이었다. 모든 회사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월급은 잘난 만큼 책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월급의 액수는 그저 회사에 얼마나 삶을 바치느냐에 따른 비례치에 불과했다.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시간과 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회생활의 생태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던 어리석은 망상이자 욕심이었다. 어리석게도 난 그런 사실을 결혼을 코앞에 두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 걸 진작에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누가 옆에서 알려주기라도 했다면 얼마만큼의 시간을 아낄 수 있었을까'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하지만 그간 살아온 세월의 흔적들에 대한 후회를 하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신중하게 생각해도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는 건, 항상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야 할 수 있는 결과론일 뿐이다.


아쉽긴 해도 이게 내 인생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부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리고 모든 건 내가 내린 선택에 의해 벌어진 일들이었던 만큼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토록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언제나 과감하게 결정할 수 있었던 건 어떤 결과가 따라오든 책임지겠단 각오를 한 덕분이었다. 비록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하나씩 배워간다는 점에 의의를 두며 나를 달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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