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그녀와의 만남
이직해서 구미에 왔을 때 아는 사람이라곤 단 한 명의 친구밖에 없었다. 그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사이이긴 했지만 관심사가 많이 달랐기에 자주 보진 않았다. 그리고 난 원래부터 혼자 바쁘게 살기 때문에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았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선을 지키며 지냈다. 처음엔 사람들과 친해져야 일을 편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술자리도 함께 했지만 친분이 다져진 후로는 되도록이면 술은 같이 먹지 않았다. 사회생활이 처음이 아니었던 만큼 직장동료와의 관계는 회사를 나오는 순간부터 끝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술자리가 너무 잦기도 했다.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3번 이상씩은 대뜸 술 먹자는 말이 날아왔다. 그런 자리에 모두 껴들었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굳이 손 내미는 사람들을 거부하면서까지 혼자 있으려고 했던 진짜 이유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난 연애를 하고 싶었고 할 거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 어떻게 인연을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관리가 꼭 운동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당장에 할 수 있는 운동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동안 술도 많이 먹어서 살도 좀 쪘기 때문에 어차피 운동은 필요했다. 다만 교대근무여서 시간 맞추는 게 문제였는데 다행히 기숙사 근처에 24시간 헬스장이 있어서 새벽 밤낮으로 운동할 수 있었다. 한동안 퇴근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데만 전념했다. 운동은 취미가 맞지 않았지만, 왠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을 만나도 놓칠 것만 같았다.
독서모임도 가입했다. 30대 직장인이 자연스럽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리는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독서는 나의 확고한 취미이자 특기였기에 모임 주제에 맞는 활동을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서모임에서도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열심히 활동했다. 지정도서를 어떡해서든 완독했고(독서모임 사람들은 의외로 지정도서를 완독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준비된 감상평을 발표했다. 책을 읽다가 좋은 내용이 있으면 공유도 자주 했다. 가능하면 모임이 열릴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모임장 눈에 찍혀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모임의 운영진이 되었다. 이왕 운영진 배지가 달린 김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혼자서 작은 소모임을 하나 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평생 가장 중요한 일이 그날 일어날 줄은 몰랐다.
사실 처음엔 내가 준비한 소모임 공지를 내걸었을 때 사람들이 몰릴 줄 알았다.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만큼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참석을 누르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나름 독서와 관련된 건전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준비를 했지만, 온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애써 기획한 모임을 진행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렇게 희망이 사그라져갈 때쯤에 뒤늦게 참석을 누른 사람이 1명 있었다. 알고 보니 같은 동네에 사는 여성분이었다. 원래부터 단 두 명이라도 모임을 진행할 생각은 있었지만 여성분과 둘이서 모임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어쨌거나 그분이 마지막에 참석을 눌러준 덕분에 준비했던 모임은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처음 보는 여성분과 1:1로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생긴 지도,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
난 나름 건전한 모임을 가지려고 했다. 하지만 내 앞에 앉은 그녀를 보고서는 본능적으로 태세전환에 들어갔다. 그녀를 꼬셔야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얼굴이 예쁘기도 했고,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사람을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었다. 독서모임을 탈퇴하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할 정도였다. 어떡해서든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온갖 애를 썼다.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머리를 굴리고, 말하는 내내 미소를 짓고, 평소엔 찾아볼 수 없는 적극적인 리액션으로 최선을 다해 그녀의 말에 호응하느라 바빴다.
그렇게 3시간이 넘도록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은 이미 밤 11시였다. 근처에 갈 데도 많은데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선은 지키자는 이성의 힘을 빌려 겨우 참았다. 그리고 그녀와 대화하던 도중 알게 된 충격적인 2가지 사실이 있었는데 하나는 소개팅을 한 남자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인 명의의 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연애를 전제로 연락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점도 상당히 거슬리긴 했지만 34평 아파트를 갖고 있다는 게 상당한 괴리감이 들었다. 모은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나와의 현실적인 차이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있어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게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녀와 처음 만난 날 헤어지기 전에 서로 책을 주고받았었다. 그녀는 어떤 생각으로 내게 책을 빌려준 지는 모르겠지만 내 의도는 명확했다. 오로지 다음에 한 번 더 만나기 위해서 빌려준 것뿐이다. 우린 교환한 책을 핑계로 톡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녀와 책을 중심으로 만났으니 책에 대한 이야기를 쥐어 짜내느라 고생 좀 했다. 잊을 만하면 좋은 내용을 공유하고 흥미로운 대화거리가 있으면 거부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물고 늘어졌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을 조금씩 보여줬다.
그녀는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본인 명의의 집과 차가 있었다. 부모님의 도움은 전혀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갖춘 것들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주변에는 조건 좋은 남자들을 소개해 준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에게 그런 쟁쟁한 남자들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진심 어린 마음과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확신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산과 희망은 있다고 생각했다.
조건이 좋다는 이유로 무조건 관계가 성립될 거였으면 그녀는 진작에 누군가를 만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뭐가 맞지 않았는지 나와 만날 때까지도 남자친구가 없었다. 다 갖춘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건 본인에게 심취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내적인 부분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난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을 때면 그저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난 내가 봐도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만큼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진심 어린 마음을 내비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고 믿었다. 내가 수많은 연애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단지 그뿐이다.
그녀와 한 달 동안 만나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우린 소개팅 명목으로 만난 것도 아니었고, 대놓고 썸을 타는 것도 아니었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곤 대화를 나누는 것밖에 없었다. 젊은 남녀가 만나서 떠들기만 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대화의 흐름은 끊기지 않아야 하고 주제는 매번 새로워야 하며 시간을 투자한 만큼의 의미가 깃든 말이 오가야 한다. 그녀와 나는 다행히 그런 면에서 잘 통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대화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난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렇게 질리지 않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휘력, 통찰력, 심리, 마음공부를 독서를 통해 어느 정도 다져놓은 덕분에 그녀의 세상에 조금씩 나를 비출 수 있었다. 다행히 그녀도 내가 그리 싫진 않은 모양이었다.
난 그녀를 처음 본 날부터 좋아했다. 어떤 사람인지 알기도 전부터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알면 알수록 괜찮은 사람이기까지 하니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하지만 왠지 쉽게 마음을 얻어낼 수 있는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녀에게 나를 천천히 한 방울씩 떨어뜨리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녀의 마음이 나로 물들었는지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되었다. 나름 한 달 동안 갖은 노력과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는데,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그녀와 연인관계로 이루어진 건 내가 고향을 뜨고 나서 만나게 된 첫 번째 기적이었다. 우린 만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결혼을 약속했다.
우리의 좀 더 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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