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터닝포인트라는 게 있을까

모든 일은 천천히 일어나고, 일어나는 순간 사라진다

by 달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는 말을 듣거나 보게 되면 언제나 떠오르는 건 항상 독서였다. 20대 초반 우연히 책을 접하게 되면서 사고방식과 인격이 180도 달라지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었다. 소설책으로 독서를 시작했고, 자기계발서로 독서의 꽃을 피웠다. 그로부터 10년이 조금 더 지난 지금은 웬만한 자기계발서는 거의 다 읽어본 상태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계발서라면 재밌게 읽는 편이다.


자기계발서를 무조건 추천하는 건 아니지만, 내 경우엔 자기계발서 덕분에 내 생각과 세상을 처음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의심을 하게 된 덕분에 전에 없던 통찰력이 생기고 나만의 독보적인 사상이 굳어지는 계기를 맞이할 수 있었기에 자기계발서에 대한 생각은 꽤 긍정적인 편이다.


아마 누군가는 소설책을 통해서, 누군가는 시집을 통해서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뒤늦게 깨달은 게 한 가지 있다면 책의 장르보다 더 중요한 건 더 나아지고 싶은 욕망, 알고 싶은 욕구, 결핍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들이 없다면 무슨 책을 읽어도 소용없을 것이고, 앞서 말한 것들이 충분하다면 무슨 책을 읽어도 결국엔 긍정적인 변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결핍이 많았고, 인정욕구가 강했다. 그래서 꼭 책이 아니라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뭔가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할 만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이제 와서야 해본다. 책도 좋지만, 세상엔 꼭 책만 있는 게 아니다. 책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책이 중요하고 좋은 이유는 사람들이 직접 겪어낸 경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누군 다독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지만, 누군 책 한 권 읽지 않고도 커다란 성공을 이뤄낸 걸 보면 확실히 책은 어떤 중간 매개체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다독으로 성공한 사람, 책을 읽지 않고도 성공한 사람의 공통분모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더 이상 꼭 책이라고만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그와 얽혀 있는 수많은 경험과 선택들이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차지했고, 지금도 꾸준히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




한국인 평균수명으로 따지면 이제 겨우 1/3을 살아온 나이지만, 그 정도 세월이라도 겪어 보니 한 가지 깨닫게 된 게 있다. 그건 바로 세상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과거를 돌이켜보면 난 분명 우연히 책을 집어 들었다고 기억하지만, 아마 이전부터 달라지고 싶고 더 나아지고 싶었던 욕망이 차오르고 넘쳐서 결국 책을 집어 들게 된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반면에 다신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가슴 아픈 추억들도 알고 보면 천천히 계속 어떤 조짐들이 일어나다가 결정적인 계기를 맞아 터진 거라고도 생각한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대부분의 일들이 서서히 일어난다고 생각하니 평범한 하루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오늘 하루에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게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일상을 허투루 보내기가 힘들어졌다. 내게 허락된 모든 시간을 최대한 열심히 살아내고 싶은 욕구가 점점 강해졌다. 오늘을 좀 더 자세히 느끼고 싶어졌다. 언제부턴가 모든 날, 모든 순간이 인생의 터닝포인트처럼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마음가짐은 그에 맞게 점점 달라졌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 속의 깃든 모든 순간을 소중히 대하려는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마음이 강해지면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구는 악순환이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선에서 끝낼 줄 모르는 지혜가 없다면 오히려 더 잘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갉아먹는 상황이 벌어지는 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난 가끔 나를 만난 내 몸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하필 나를 만나서 단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마음 편히 있질 못하는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충분히 열심히 살았으면, 충분히 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시간의 틈이 생기면 '그 시간에 뭐라도 읽거나 써야 하는 건 아닌지'라는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난다. 그런 생각을 품고서도 남는 것도 없는 소비적인 컨텐츠로 시간을 잡아먹을 때도 많다. 그럴 때마다 시원하게 즐긴 것에 대해 시원하게 잊질 못하고 쓸데없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는 자책감으로 나를 두 번 괴롭히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난 주변에 인생이 어찌 되거나 말거나 마음 편히 사는 것만 같은 사람들의 면모를 조금은 떼오고 싶단 생각까지 든다.


나처럼 적당한 선에서 그치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라고 생각한다. 적당한 선까지 했으면, 적당히 쉴 줄도 알고, 적당히 쉬었으면 다시 시작할 줄도 아는 것. 천천히 오랜 시간 인내와 끈기를 기를 수 있는 지혜 말이다. 그런 지혜를 습득하기 위해선 수많은 읽기와 쓰기 그리고 나와 세상에 대한 사유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이런 걸 보면 꼭 지혜는 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혜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과제를 안겨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앞으로도 누군가 내게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묻는다면 여전히 읽기와 쓰기를 언급하겠지만, 사실 이젠 인생의 터닝포인트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굳이 그런 게 있다고 한다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인생의 터닝포인트이지 않을까. 지극히 평범한 하루에 불과한 오늘에 하는 모든 선택들이 여태 살아온 과거를 증명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영향을 끼칠 게 확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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