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보 Nov 15. 2023

팀장님의 빨래를 널었다

평화를 지키려는 습관이 불러온 영향력


난 사무실에서 혼자 일한다. 본사는 서울에 있고 지방에 별도 지사가 있는데 그곳에서 광주에서 파견근무 오시는 팀장님과 함께 일하는 환경 속에 있다. 평소엔 팀장님은 현장에 주로 나가 계시기 때문에 난 거의 혼자서 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무실은 곧 숙소였고, 팀장님이 이곳에서 생활한다. 혼자 쓰기엔 정말 넓은 보금자리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하니 팀장님이 현장을 조금 늦게 나간다고 사무실에 앉아계셨다. 여느 때처럼 난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내리고 커피스틱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그때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를 발견했다. '잠깐 틈이 생겼다고 고새 빨리를 돌리시는구나, 부지런하시네'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잠시 후 팀장님은 거래처 담당자 분과 통화를 하시더니 생각보다 일찍 현장을 나가셨다. 그렇게 난 평소처럼 혼자 일하고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노래를 틀고 일하는 편인데, 그날따라 난 아무것도 틀지 않고 조용하게 일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는 노랫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팀장님이 복귀하시려면 오후 5시 정도는 돼야 했다. 아마 빨래는 그전까지 널지 않으면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평소에 이것저것 잘 까먹으시더니 오늘 빨래 돌린 건 언제 기억하시려나 싶었다. 순간 '그냥 무시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에게 '왜?'라고 되물었다. 생각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생각의 침묵을 관찰하는 동안 몸은 이미 세탁기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난 아무렇지 않게 건조대에 빨래를 널기 시작했다.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빨래망을 정말 다양하게도 쓰는구나 싶었다. 빨랫감의 양도 종류도 얼마 되지 않는데 뭔 놈의 빨래망을 이리도 많이 쓰는지, 정말 독특한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널었다. 평소 집에서 하던 것처럼 명상하듯이 천천히 널었다. 널다 보니 자리가 애매하게 부족할 게 뻔해 보여서 아내에게 배운 대로 옷걸이를 가져와서 몇 개 걸었더니 건조대가 완벽하게 들어찼다. 나름 뿌듯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의 옷감을 건조대에 너는 건 어찌 보면 찝찝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습관의 힘을 다시 한번 체감했다. 순간 '무시할까'라는 생각부터 든 건 사실이나, 이미 몸이 움직이는 내 모습을 보며 살짝 당황스럽긴 했다. 아마 집안일 중에서 빨래를 가장 많이 하는 거 같은 나였기에 빨래 너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난 보통 집에 가면 눈에 들어오는 집안일부터 처리하는 편이다. 설거지, 빨래, 로봇청소기 먼지통 갈이 등 일단 그것들부터 해야 뭔가 마음이 편하다.  보통 아내는 요리를 많이 해주기 때문에 나머지 잡일들은 내가 해야 마음이 그나마 좀 편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매일 일일이 처리하기엔 은근히 귀찮은 것들이었다. 그런 자잘한 일들을 해놓으면 아내가 편히 쉴 수 있어서 좋았다. 혹여나 카페라도 들렀다 오는 날엔 그 사이 아내가 나머지 일은 다 해놓는 편이다.


우리 집의 평화를 지키고자 매일 하는 일들의 영향으로 사무실의 평화에도 미세하게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희일비 하지 않는 게 과연 좋기만 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