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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Dec 19. 2023

웬만하면 컴플레인 걸기 싫었는데 PART. 1

드디어 우리집에도 건조기 이모님이 입주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직원마다 복지카드를 하나씩 지급한다. 그 카드로 1년에 240만 원을 쓸 수 있다. 240만 원을 한 번에 질러도 상관은 없다만, 난 언제 퇴사할지 몰라서 매달 20만 원씩 끊어 쓰려고 계획한다.


그러나 계획은 계획일 뿐. 한 달에 변동지출로 5만 원도 잘 쓰지 않는 내가 20만 원씩 쓰는 건 무리였다. 돈 쓰는 거라곤 글쓰기 하러 카페 가서 아메리카노 사 먹는 게 전부다.


그런 내게 복지카드는 일종의 애물단지였다. 그렇다고 안 쓰면 손해 보는 거니 뭐라도 사야 했다. 사고 싶은 것도 없는데 억지로 사야 하는 건 나름 고역이었다.


현금으로 바꿀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나마 1년 내내 내 차와 아내 차 두 대의 기름값을 복지카드로 지불하고 치과 진료비, 차 수리비 등으로 몇 번 쓰다 보니 12월까지 190만 원을 쓰긴 했다. 그럼에도 50만 원이 더 남아 있었다.


해가 지나기 전에는 50만 원을 다 써야 했다. 하지만 내 머리론 도저히 살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아서 아내에게 물어봤다.


"여보, 뭐 살 거 없어?"


"없는데."


"갖고 싶은 것도 없어?"


"음, 딱히 없는데?"


아내도 떠오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집에 있는 것도 내다 버리는 마당에.


필요한 것도 없는데 굳이 뭔가를 구매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 시간 바쳐 회사에서 일하는 대가로 받는 복지혜택을 손해 보는 건 아까웠다. 좀 더 궁리를 해봤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아내가 구원의 한 마디를 던졌다.


"건조기?"


결혼할 때 세탁기는 새로 샀었는데, 건조기는 굳이 필요할까 싶어서 함께 구매하진 않았었다. 근데 비가 많이 오거나, 여름철 습도가 높은 날에는 빨래가 잘 마르지 않아서 '건조기를 살 걸 그랬나'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 건조기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50만 원보다는 비싸지만 말이다.


그 얘기가 나온 주말에 아내와 함께 삼성스토어 매장으로 갔다. 우린 매장에 들어간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복지카드와 생활비카드로 건조기를 구매하고 나왔다.


아내가 집에 있던 세탁기와 같은 모델인 건조기의 가격과 재고조사를 미리 해놓은 덕분이었다.




얼마 후, 집으로 건조기 이모님이 도착했다.


설치기사 두 분이 엘리베이터에서 건조기와 함께 내리더니, 바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서 새 건조기의 박스와 비닐을 벗겼다. 일부러 그 앞까지 가져와서 언박싱하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후 두 분이서 커다란 건조기를 번쩍 들어 바닥에 미리 깔아놓은 무빙패드 위에 올려놓고, 베란다로 천천히 옮겨 가 건조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기사님은 건조기를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세탁기의 문을 한 번 열어보시더니, 옆에 있던 수도꼭지에 부딪히면 손상이 갈 수도 있다며 충돌방지패드도 붙여주셨다.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세심함과 친절함이 돋보이는 분이었다.


설치기사님이 솜씨가 좋은 건지, 거대한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건조기 설치는 금방 끝이 났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작업이 끝났다는 말에 새 식구를 맞이하러 베란다로 향했다. 수고하신 설치기사분들에게 드릴 음료수 두 병을 양손에 야무지게 챙겨 들고서.


베란다 입구에서 설치기사님은 '작업은 잘 끝났으니 이제 저흰 가도 되겠죠?'가 느껴지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에 난 '선수분들이신데 여부가 있겠습니까'라는 마음을 녹여낸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응하며 건조기로 눈길을 돌렸다.


별 문제가 있겠나 싶었다.


그러나,

"고생하셨습니다."

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내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종적을 감춰 버렸다.


건조기 이모님이 아파 보였기 때문이다.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불량품이 도착한 것 같았다.




[다음 에피소드]

웬만하면 컴플레인 걸기 싫었는데 PART. 2

'도저히 컴플레인을 걸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


[마지막 에피소드]

웬만하면 컴플레인 걸기 싫었는데 PART. 3

'하마터면 제값 주고 불량품을 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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