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해서든 대출을 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이유
친한 친구의 동생이 꽤 오랜 시간 동안 불치병에 시달리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갔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기 힘든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우린 다 같이 공허할 법한 마음을 달래고자 상을 당한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고,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넓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담소를 조용히 곁들이며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 한 친구가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맞다. 오늘 월급날이네!"
그의 표정이 밝아지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장례식장인 걸 까먹은 사람처럼 헤벌쭉거렸다. 그 모습을 보는 나도 덩달아 흐뭇해질 정도로 말이다.
"뭐고, 이 새끼. 월급통장이 왜 '0원'이고. 돈 들어온 거 맞나?"
월급이 들어왔다던 친구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친구가 곁눈질로 통장 잔액을 쳐다본 모양이었다.
"아.. 카드값으로 다 빠져나갔나 보네."
월급의 주인공은 희미한 깨달음이 이성을 서서히 강타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는 씁쓸하지 않을 수가 없는 발언을 한 것 치고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대수롭지 않은 듯 넘어갔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난 들어온 월급이 카드값으로 다 빠져나간 친구를 놀리는 다른 친구들에게 동조하는 시늉을 보이며 같이 웃고 있었다. 착잡한 심정이 속을 메우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수입 이상의 카드값을 지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가까운 친척들이나 친구들 또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해진 한도를 초과하는 소비생활을 지양하는 건지 지향하는 건지 구분하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능력 이상의 대출을 받고, 월급 이상의 카드값을 지불하는 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기본소양처럼 여기는 말들을 예전부터 꽤 자주 들어왔다. 그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유일하고도 현명한 방법이라며 나를 세뇌시키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때는 그들의 비현실적인 말에 넘어갈 뻔도 했다. 여전히 소중한 내 월급의 일부를 자동이체로 야금야금 빼먹고 있는 주택청약통장은 그 흔적 중 하나다(주택청약이 필요 없어진 지금은 세액공제 저축통장개념으로 유지만 하고 있다).
사회라는 정글에 진입하면서 다른 건 몰라도 빚만큼은 지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곤 했었다. 쳐다만 봐도 자존감이 올라갈 법한 직함이 찍힌 명함을 내밀며 남들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대출을 받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달리 말해 남들이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건 부러웠지만, 탄탄한 회사의 직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출을 받는 건 부럽지 않았다. 그만큼 빚이 싫었다.
나보다 인생을 한 번 더 살아 보기라도 한 것마냥, 빚을 내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의 술수에 쉽게 말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유가 있었다. 난 빚지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유독 주변인들보다도 강했던 빚에 대한 두려움은 부모님의 의도치 않은 가르침으로 인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두 분 모두 선천적인 성향이 온순했고, 지금도 여전히 두 분은 금실이 좋다. 덕분에 다른 집들이 부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화목한 가정분위기 속에서 난 자랐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계획도 생각도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수입이 점차 늘어나는 것에 비해 오히려 경제력은 점점 쇠약해지는 보호자의 슬하에서 성장한 건 곱씹어볼수록 아찔했다. 그건 어찌 보면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자녀로서는 부모가 살아가는 패턴을 그대로 답습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참 다행히도 난 전생에 덕이라도 쌓은 건지, 출구가 없어 보이는 부모님의 경제적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부모님처럼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유독 강했다. 그리고 20대 초반부터 꾸준히 책을 읽어왔던 영향이 컸다. 그 덕에 일생동안 마주했던 여러 갈림길마다 부모님의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쪽을 선택하며 인생을 꾸려갔다.
사실 우리 부모님 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봐 오던 주변 어른들 거의 대부분이 강력한 가난의 기운을 풍기긴 했다. 그 가두리 안에서 난 말썽도 반항도 없이 참 얌전히도 자랐다. 그런 나를 보며 숱한 어른들은 '착하다', '점잖다'와 같은, 본인들 생각엔 칭찬이라고 여기는 듯한 말을 건네곤 했다.
그러나 그들의 근거 없는 판단이 무색해질 정도로 난, 마치 가문의 전통인 양 전해 내려오는 지독한 가난의 굴레를 벗겨내고자 오만가지의 발칙한 상상을 해가며 마음으로나마 혁명을 일으키곤 했다. 그렇게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집안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별종(?)이 되어 갔다.
그런 서사를 안고 있다 보니, 남들이 아무리 대출 없이는 살지 못한다고 떠들어도 빚을 지는 것만큼은 어떡해서든 피해가며 살아왔다. 대출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음에도, 대출은 한 사람의 인생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블랙홀만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대출을 받아가며 '평균'이라는 영역에 한 자리를 꿰찰지언정, 결국 그조차 수많은 방법 중 하나일 뿐이라며 다음과 같이 나를 다독였다.
새 차 말고 중고차 사면 되지.
세단 말고 경차 타면 되지.
평소 찾는 일도 잘 없는 상가들이 즐비한 곳에 위치한 신축 아파트에 입주하는 대가로 평생 대출빚에 허덕이며 살 바엔, 차라리 빚도 걱정도 없이 알맞은 곳에서 월세 내가며 사는 게 낫지.
객관적인 평균에 속해야 평범하다고 여기는 사람과 결혼했다 남들처럼 빚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주관적인 평범의 가치를 아는 사람을 만나 적당히 살아가면 되지.
라고 말이다.
남들이 누리는 혜택의 절반도 누리지 못할지언정 빚만큼은 지지 않으려 한다. 안 그래도 남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곳에 덩달아 딸려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꽤 준수하게 살아갈 수 있단 믿음에 조금씩 힘이 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주변인들을 보면서 말이다.
평범함을 가장한 비참함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세상이다. 그런 지혜가 없다면, 세상이 건네는 손길이 혜택인지 희생인지 도통 알 길이 없으니.
때문에 난 '한도초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과 마주할 때면 이질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