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역할은 극히 한정적이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는데, 나도 그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바이다. 만약 내가 독서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생각과 상상은 도저히 하려야 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한때는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과 비슷하게만 살아가려고 했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들도 다 나처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사는 게 비슷하게 보일지언정 사람들의 생각은 알면 알수록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하게 있다는 것도 책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만약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의 사고방식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계속 읽기만 했었더라면, 내 앞에 놓인 길 중에서 어느 게 나와 맞는지는 결코 알 수 없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책은 그저 길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었다. 그 수많은 선택지 중에 어느 게 나와 맞는지는 직접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는 거였다.
책이 아무리 좋다 한들, 독서는 결국 남의 생각을 텍스트를 통해 간접경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책을 쓴 저자들의 생각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통해 자극받는 내 생각이었다. 더 중요한 건 그런 과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 서서히 알아가는 것이었다.
항상 중요한 건 '나'였다.
본인이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갈린다고 본다.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거나, 세상 곳곳을 누비며 폭넓은 경험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세 가지 방법 모두 과정이 다른 만큼 저마다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어느 게 가장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가보지 못한 곳을 찾아가는 건 그만한 품이 든다. 아무리 먹고사니즘이 해결된 세상일지라도, '나'를 찾겠답시고 생계유지활동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방법으로 가장 적합한 활동이 글쓰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고,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는 책만 읽었다는 것이다. 매일 글을 써 보니, 독서는 글쓰기를 위한 활동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글쓰기는 중요한 활동이었다. 10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이 훨씬 더 도움 되는 일이었다. 원래는 읽기 위해 책을 읽었지만, 이제는 쓰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 정도로 글쓰기는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확실히 남의 생각보다는, 내 생각을 체험하는 게 훨씬 흥미로운 일이었다.
독서가 취미인 사람일수록 글쓰기는 꼭 해봤으면 좋겠다. 세간이 권장하는 삶의 경로가 자신의 본성과 결부되는 게 아니라면, 나와 어울리는 길을 하루빨리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앞뒤가 맞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되면 일상에 행복감이 깃들리 만무할 테니까.
책은 그저 보여줄 뿐이다.
독자는 씀으로써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