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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Sep 09. 2024

에세이와 일기 사이

ep 2. 장르의 본질


저는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책도 우연찮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군 복무 시절 초소에 매주마다 '움직이는 도서관'이라는, 책장을 여럿 실은 트럭이 찾아왔었습니다. 한동안은 그 트럭이 찾아오든 말든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상병 때쯤 여유도 좀 생기고 할 게 없어서 그런지, 느닷없이 '책이나 한 번 읽어볼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맨 처음 손에 집어든 책은 기욤 뮈소의 소설이었습니다(제목까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재밌길래 그 한 권을 시작으로 '움직이는 도서관'에 실려 있던 기욤 뮈소의 책은 다 읽어버렸습니다.


근데 소설로 독서를 시작했으면 소설로 푹 빠질 법도 한데, 성장욕구가 넘실거리는 기질 탓인지 희한하게도 전 기욤 뮈소 이후에 자기 계발서로 빠지게 됐습니다. 그땐 책의 장르가 뭐가 있는지도 잘 몰랐을 때였습니다. 소설 말고 에세이나 자기 계발서와 같은 단어는 거의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만 단지 눈길이 가는 제목의 책들만 골라 읽었을 뿐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전부 자기 계발서였습니다. 그렇게 전 의도치 않게 자기 계발 덕후(?)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자기 계발서를 처음 다 읽고 덮었을 땐 큰 실망을 했었습니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데 기억나는 내용마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품 나올 정도로 졸린 거 참아가면서 읽은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일상을 보내면서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자기 계발서의 내용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면서, 평소와는 조금씩 다르게 행동하는 저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라'는 구절이 생각나서,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내뱉으려다 순간 멈칫하고 정말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요. 마치 게임 속 캐릭터가 레벨이라도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신이 나서 제대할 때까지 자기 계발서를 쌓아놓고 주야장천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 계발서는 무조건 좋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보니 자기 계발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특히 미국발 자기 계발서 특유의 명령조 뉘앙스를 싫어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나름 자기 계발서를 꽤 많이 읽었기에 그게 대충 어떤 느낌인진 알 거 같긴 했습니다(실은 저도 이제는 그런 기운을 풍기는 책들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계발서를 배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봤을 땐 자기 계발서라는 장르로 구분된 책들만이 자기 계발서가 아니라, 서점에 있는 모든 책들이 자기 계발서라고 보거든요. '잠재하는 자기의 슬기나 재능, 사상 따위를 일깨워 줌'이라는 게 자기 계발의 사전적 정의이기도 하고, 동화책을 읽다가도 내면의 무언가를 느끼는 경우를 감안하면, 세상 모든 책들이 다 자기 계발서라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어느 겨울날, 어두운 골목길을 헤매던 도중 생뚱맞게 튀어나온 화려한 가게

 

이쯤 되면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글에서 생뚱맞게 자기 계발에 대한 이야기를 뭘 그렇게 늘어놓냐 의아해할 수도 있을 거라 짐작됩니다. 전 장르의 본질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의외로 적지 않은 분들이 일기와 에세이 사이에서 고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더라고요. 특히 브런치에 글 쓰는 분들이나, 글쓰기를 처음 하는 분들이 유독 그런 것 같았습니다.


장르는 분류가 필요한 사람들에 의해 나뉜 구분선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잘 쓴 에세이도 충분히 일기처럼 읽힐 수 있고, 유치한 일기라고 생각했던 글이 누군가에겐 훌륭한 에세이로 와닿는 걸 보면 더 그렇습니다. 나중에 전문적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이제 막 글쓰기를 시작한 분들에게 '일기냐, 에세이냐'의 문제는 신경 쓸수록 되려 방해만 된다고 봅니다.


여건이 된다면 서점에 가서 베스트셀러 칸에 있는 에세이를 읽어보거나, 브런치 메인에 걸린 글을 잠깐 훑어보세요. 개중엔 생각 이상으로 일기 같은 글이 많을 겁니다. 전 그런 글을 읽다 보면 영감을 받기도 하지만, 자신감을 올라가는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평범한 내 글이 에세이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만큼 시간낭비는 없습니다. 그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쓰는 게 좋습니다. 글쓴이에게 있어서 '오늘도 기어코 써냈다'는 사실 말고는 딱히 중요한 게 있을까 싶습니다. 일기 같은 글을 쓸까 봐 걱정할 시간에, 그럴듯한 에세이를 쓰고 싶은 마음에 집착할 시간에, 그저 마음에 있는 것들을 고스란히 꺼낸다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땐 가장 적절하면서도 안전한 태도라고 봅니다. 그럼 일기처럼 편안하게 글을 써도, 누가 봐도 괜찮게 볼 법한 에세이를 쓰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꾸준함은 모든 것을 능가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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