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메모장에 글 쓰는 이유

ep 8. 그리고 메모장 글쓰기를 추천하는 이유

by 달보

(본 글에서 언급하는 '크롬'은 Google의 공식 웹브라우저 'Chrome'을 일컫습니다.)


제가 맨 처음 글을 썼던 곳은 블로그였습니다. 블로그에 올릴 글이니만큼 블로그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에디터를 활용하여 글을 쓰고 업로드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브런치를 하면서부터는 또 브런치에서 제공하는 에디터를 썼습니다. 블로그도 글을 쓰기에 나쁘진 않다만, 브런치는 가히 글쓰기에 최적화된 플랫폼이라 자부할 만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최소한 저로서는 브런치 에디터로 글 쓰는 게 훨씬 더 글쓰기가 수월했습니다.


그렇다고 브런치 에디터가 블로그 에디터보다 훨씬 더 기능이 참신하거나 다양하고 그렇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기능이 없었습니다. 블로그에서 항상 써오던 기능들이 브런치에는 없는 게 많았습니다. 예컨대 블로그에서 제공하는 인용문 마크가 5개 있다면, 브런치는 3개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근데 그게 비결인 듯했습니다. 브런치는 꾸미는 데 활용할 법한 기능들이 없어서 오히려 더 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아마 에디터를 일부러 그리 담백하게 구성한 게 아닐까 합니다. 설마 그 기본적인 기능들을 구현하지 못해서 그러진 않았을 테니까요.


언제 한 번은 한글이나 워드로 글을 써 본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 쓰지도 않고 바로 접었습니다. 블로그도 브런치도 한글이나 워드처럼 새하얀 백지 같은 화면에서 글 쓰는 건 똑같은데, 희한하게도 한글이나 워드에서의 하얀 바탕은 뭔가 모르게 부담스러웠습니다. 한글이나 워드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과제라도 하는 것마냥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더불어 한글이나 워드는 일일이 저장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별도로 파일을 정리하는 등의 관리까지 도맡아 해야 하니 상당히 번거로웠습니다(어쩌면 이 부분이 가장 큰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한동안은 브런치를 애용했습니다. 초고도 브런치에서 쓰고 발행도 브런치에서 했습니다. 평소 틈 날 때마다 모은 글감도 죄다 브런치의 '작가의 서랍'이라는 가상공간에 저장하곤 했습니다. 근데 작가의 서랍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정렬할 수 있을 법한 기능이 아예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글을 저장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쌓이는 글이 많아질수록 불편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장한 지 오래된 글일수록 마우스 스크롤을 한참 동안 내려야 했으니, 그런 글은 거의 묻히게 되는 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지나서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는 '원노트(One Note)'를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노트는 에버노트 같은 전자필기장 앱입니다. 최대 장점은 실시간으로 동기화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노트북으로 글을 쓰든, 회사 컴퓨터로 글을 쓰든,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든 서로 연동이 돼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에 쓰던 글을 이어서 쓸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단어 하나만 바뀌어도 자동저장이 되니까 브런치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편리했습니다. 브런치에서는 당시의 와이파이 상태가 불량했는지 기껏 글 다 써놓고서는 저장이 되지 않는 바람에 허무하게 날려먹은 적이 꽤 됐었습니다.


원노트는 노트별로, 섹션별로, 글별로 자연스레 분리가 되니 정렬 기능은 두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더불어 저장한 글을 복사하거나 이동하는 것도 수월했으며, 크롬 같은 인터넷 브라우저를 켜지 않아도 작업표시줄에 고정시켜놓고 바로 켤 수 있었으니, 굳이 온라인 플랫폼 에디터를 수고스럽게 이용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필드'를 옮길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원노트는 꼭 저를 위해 맞춤형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이라도 되는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완벽한 프로그램이 어딨겠습니까. 원노트도 쓰다 보니 단점들이 하나둘씩 드러났습니다. 다만 대부분은 자잘한 것들이었고 딱 하나 치명적인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타이핑을 하다 보면 간헐적으로 씹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갈아탈 여지는 충분했습니다. 글쓴이에게 타이핑이 불편한 것만큼 불편한 게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노트를 고집했던 이유는 새끼 치듯 늘어나는 글감 때문이었습니다. 글감으로 활용한답시고 틈만 나면 메모하는 것들이 날이 갈수록 우후죽순 늘어나다 보니까, 그 많은 양들을 편리하게 저장하고 정리할 수 있는 건 원노트만 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은 대안은 메모장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컴퓨터에 계산기처럼 기본적으로 깔린 그 메모장(Notepad) 말입니다.





어찌 보면 등 떠밀리듯 쓰게 된 메모장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메모장은 제게 있어서 일종의 답이자 물건이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글쓰기를 시작하는 데에는 가히 메모장만한 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메모장은 인터넷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인터넷 타령이냐 할 수도 있지만, 한 번 날려 먹으면 당최 복구할 길이 없는 글쓰기의 세계에서 와이파이의 연결 여부는 상당히 신경 쓰이는 요소입니다. 아무 문제없다가 뜬금없이, 그것도 하필 중요한 순간에 인터넷이 끊긴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근데 인터넷이 필요 없다는 것을 장점이라고 한 데에는 인터넷 끊길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터넷을 연결할 필요가 없다는 게 진짜 장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메모장을 추천할 만한 소지가 다분할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으면 글 쓰다 딴 길로 샐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은 관계없을진 모르겠으나, 저같이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에게 인터넷만큼 글쓰기에 방해되는 건 없습니다. 예전에 블로그나 브런치에 글 쓰던 시절에 글 쓰려고 크롬 열었다가, 찰나의 순간에 유튜브로 넘어가서 황금 같은 시간을 날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솔직히 지금도 좀 그렇습니다).


시간을 허무하게 날리지 않기 위해 그나마 나름의 시스템을 고안한 게 크롬 즐겨찾기 북마크에 블로그 아이콘을 등록하는 거였습니다. 그럼 중간에 거치는 곳 없이 바로 접속해서 글을 쓸 수 있으니 좀 더 나을까 싶었거든요. 확실히 안 하는 것보단 어느 정도 효과가 있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습니다. 크롬을 키는 것부터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에 비해 메모장은 컴퓨터 전원을 켜고 바탕화면만 뜨면 바로 열어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으니, 즐겨찾기를 등록하는 것 따위의 장치는 고안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인터넷을 일부러 끊고도 할 수 있으니 더 좋습니다. 한글이나 워드는 그럼 메모장이랑 무슨 차이냐 할 수도 있는데, 위에서 언급했듯 전 한글과 워드 특유의 백그라운드가 부담스러워 글쓰기가 잘 안 되는 편입니다. 메뉴바 한 줄에 깜빡이는 커서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메모장과는 달리, 한글이나 워드는 상하좌우로 다양한 요소들이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기도 하고요.


카페에서 글 쓰면 유독 집중이 잘 되는 이유가, 카페에서는 글 쓰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글을 쓰러 갔다는 전제 하에) 그런 것처럼 메모장도 똑같습니다. 글쓰기와 더불어 다양한 놀잇감(?)이 즐비한 크롬과는 달리, 메모장은 끄적이는 것 말고는 당최 할 게 없습니다. 글쓰기에 최적화된 온라인 플랫폼이 브런치라면, 글쓰기에 최적화된 '필드(field)'는 메모장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컴퓨터 전원을 켜고 인터넷이 연결되면 웹 브라우저를 열어 블로그에 접속하여 글을 쓰는 것과, 컴퓨터 전원을 켜고 바로 글을 쓰는 건 생각 이상으로 유의미한 격차를 만들어 냅니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과의 오랜 줄다리기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승부가 결정 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눈앞이 깜깜할 정도로 뭘 써야 할지 몰라 막연하더라도, 일단 뭐라도 쓰기 시작하면 쓰기 전엔 상상도 못한 내용이 튀어나오는 게 글쓰기의 매력입니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글쓰기에서는 시작이 곧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고 끝까지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시작이라도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메모장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글쓰기를 주저 없이 시작하는 데는 그만큼 수월한 경로가 없습니다. 혹시 저처럼 글 쓰다 어느새 딴짓(?)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가 잦다면, 메모장에 글 한 번 써 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이왕이면 인터넷도 끊고요.


거듭 느끼지만,

단순한 게 언제나 최고입니다.




[신간 안내]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이전 08화글쓰기는 배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