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잇돌에 얽힌 사랑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 시내로 나갈 때까지 심심산골 들과 산을 뛰어 다니며 유년을 보냈다.
방문만 열고 나가면 산과 들이 내 놀이터였다.
지천으로 피어 있는 토끼풀 꽃을 뜯어 시계를 만들어 차고 보라색 제비꽃으로는 반지를 만들어 끼었다.
하교길에 산그늘에 앉아서 공기놀이도 하고, 내가 읽은 책 이야기를 동무들에게 들려주는 걸 좋아했다.
내가 신데렐라, 소공자, 소공녀, 왕자와 거지, 헨젤과 그레텔, 알프스 소녀 하이디, 백설공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동무들은 내 턱밑까지 다가앉아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살구나무집 바깥 마당에서 동무들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놀이에 어둑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쥐불놀이를 하다가 새옷을 태워 엄마에게 회초리를 맞기도 하고,
큰오빠가 만들어 준 썰매를 타느라 손발이 얼어 터지는 줄도 몰랐다.
밤새 온 세상에 하얗게 눈이 내린 날은 토끼사냥 하는 오빠들을 따라 뒷산을 오르내렸다.
봄이 오면 울타리 곁 작은 화단에 꽃씨를 뿌렸다.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해바라기, 분꽃.....
나는 분꽃을 좋아했다. 낮에는 꽃잎을 오무리고 있다가 밤에 꽃잎을 활짝 피우는 분꽃이 신기해서
달빛 아래 쪼그리고 앉아서 분꽃을 들여다 보다가 고염나무 위로 치닫는 족제비 기척에 얼마나 놀랐던지.
도회지로 나와 학교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나는 그 유년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런데 작은 딸이 네댓살이던 해, 친정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아침 뒤곁으로 나가보니
마악 꽃잎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감꽃이 지천으로 떨어져 있었다.
나는 딸내미와 함께 소쿠리에 감꽃을 주워담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만들어 걸었던 감꽃 목걸이를 딸아이에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한참 감꽃을 줍는데 저마치 처마 밑에 뽀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다듬잇돌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버려져 있었던 걸까?
다듬잇돌 위의 흙먼지를 손으로 쓸어내니 두껍게 쌓인 탓인지 닦여지지 않았다.
나는 남편을 불러서 다듬잇돌을 수돗가로 옮겨 달라고 했다.
남편이 바가지로 물을 퍼서 붓고 내가 수세미로 흙먼지를 닦아내자 그때서야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이 다듬잇돌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각별한 추억과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동안 무심하게 버려져 있었다니, 가슴이 아릿했다.
그 다듬잇돌을 그대로 버려 둘 수 없어서 집으로 가져다가 거실 한켠에 놓아두었다.
아버지 나이 서른 살 적, 혼기를 한참 지난 노총각이 열 살 어린 어머니를 각시로 맞이하고 보니 그렇게 이쁠 수가 없으셨단다.
그 고운 색시가 저녁이면 풀 먹인 옷가지나 이불 홑청을 들고 이웃집에 다듬이질하러 가는 게 싫으셨단다
낮에는 들일과 집안일에 바빠서 밤에나 색시를 곁에 두고 싶은데 다듬이질 하러 이웃집에 마실 가신 어머니가 깊은밤이 되서 돌아오시는게 야속하셨던 아버지는, 며칠 동안 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팔아 그 돈으로 다듬잇돌을 사오셨단다.
커다란 돌덩이를 지게에 얹고 이십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뜻밖의 선물을 받고 좋아할 색시 생각에 무거운 줄도 모르셨다던 아버지.
다듬잇돌을 보고 환하게 웃는 어머니 모습에 당신이 더 많이 행복하셨다던 아버지.
어릴 적 잠결에 듣던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꿈결처럼 아련하다.
7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그 지순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아흔의 어머니는 다듬이질을 잊으셨다.
지금은 내게로 와서 나의 애장품이 된 이 다듬잇돌을 평소에는 화분 받침으로 사용하고 있다.
작은 화분 몇개를 나란히 올려 햇살 퍼지는 창가에 두면 단아한 모양이, 새색시 적 엄마의 모습이 저랬을까, 싶다.
그리고 가끔은 실생활에 사용 할 때도 있다.
다림질할 수 없는 청바지나 두꺼운 셔츠를 탈수해서 가지런하게 개서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양발로 꼭꼭 밟으면 잔주름이 말끔하게 펴지면서 옷의 모양을 잡아준다.
그럴 때마다 나도 어머니처럼 멋있는 다듬이질 소리를 내며 두드려보고 싶다는 엉뚱한 충동이 일지만 도심의 아파트에서 어디 될 법한 소리인가.
그저 햇살 가득한 창가에 놓고 그 위에 바이올렛이나 작은 화분을 올려 아름다운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가만히 손끝으로 다듬잇돌을 만지면 젊은 날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고,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첫 선물을 마련하시던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결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청량하고 경쾌한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가 들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