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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로제 떡볶이와 와인

by 행복나라



우연히 사무실로 협찬 들어온 떡볶이가 있었다. 불고기맛, 크림맛 등 무려 열 손가락이 넘은 떡볶이를 다 먹을 수 없어서 어머니가 다니는 아파트 경로당으로 보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퇴근한 딸 정주를 붙잡고 떡볶이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의 입맛을 사로잡은 떡볶이의 이름도 모르면서 맛있게 매콤하면서 고소한 맛에 죽었던 입맛이 살아났다는 어머니.
기회가 되면 어머니가 말하는 마라로제 떡볶이를 한번 더 배달시켜 드리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건만 한 귀로 듣고 흘리다가 정주는 딸 선아가 온다는 말에 포장해 왔다. 엘리베이터 안에 맛있는 냄새가 퍼지자 함께 먹을 생각에 설레기까지 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었으나 집안은 조용했다. 인기척이 없어서 들고 온 포장용기를 거실 탁자에 두고 선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오자마자 할머니가 떡볶이 이야기를 하셔서 모시고 나와 떡볶이를 먹고 있다고 했다. 국민은행 앞 광장에서 열리는 버스킹도 보고 들어올 거라는 선아에게 서운해져 두 다리에 힘이 쫘악 빠졌다. 할머니 손에 커서인지 엄마인 정주보다도 할머니를 더 좋아하는 선아.

정주는 자신도 어머니처럼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요리에 얽힌 재미난 이야깃거리 하나 없다는 게 괜스레 서글퍼서 싱크대 아래 감춰둔 와인을 꺼내 떡볶이 접시 옆에 놓았다. 그러고 보니 좋아하는 요리는 없어도 좋아하는 술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인류가 시작되는 신석기부터 존재해 온 술. 고구려의 신화에는 술에 취한 유화가 해모수와 잠자리를 가져 주몽이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고대에도 연애에 서투른 남녀가 술 한잔 나누다 친해졌나 보다. 그 반대로 술 때문에 인생 쫑치는 사건들도 많다. 정주는 어머니에게서 술은 위험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학부시절에도 다 마시는 맥주를 한잔도 못해서 동기들에게 구박도 어지간히 받았다. 안주만 축내려면 술자리에 끼지 말라는 핀잔을 받은 게 한이 맺혀서 결혼 후 정주는 남편이 주는 술을 조금씩 받아 먹었다. 한 번은 이웃집 부부와 식사자리를 가졌는데 부부가 어찌나 잘 마시는지 부러웠다. 한약을 먹는 남편을 대신해서 열심히 잔을 비웠을 뿐인데 식당문을 나서니 멀쩡한 아스팔트 바닥이 자꾸만 갈라져 정주는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었다. 만취한 그녀를 업고 온 남편이 밤새 토하고 정신을 잃은 그녀를 보살피느라 회사에 지각까지 했다. 그렇게 혼쭐이 난 후로 술은 정주와 머나먼 남이 되고 말았다.

혼자 먹는 밥이라고 대충 차리지 않는 정주가 와인에 마라로제 떡볶이를 먹으며 사진을 찍어 선아에게 전송했다. 와인병을 본 선아가 ‘엄마, 또 술 마셔?’라는 문자를 보냈다. 몇 년 전에는 정말 미친 듯 술을 찾아 다녔다. 갑자기 심정지로 세상을 떠난 남편을 생각하면 그 황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술 좀 고만 마시라는 가족들에게 술도 음식이라며 살려고 먹는 거라고 대들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정주를 사람들이 위로한다고 불러내어 술을 먹였다. 소주. 맥주. 막걸리만 알았던 정주는 만드는 과정에서 발효주. 증류주. 혼성주로 나늬고 술 종류와 때와 장소와 갖춰먹는 요리에 따라서 술맛이 천지차이로 바뀐다는 걸 그때 알았다. 술에 빠져 살 때 선아가 이제 그만 마시라고 애원을 하며 할머니를 모셔왔다. 정주가 여덟 살 때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홀로 정주 삼 남매를 키워 결혼시키고 난 후에야 매실주로 무료함을 달래셨다. 정주가 직장생활을 할 때 당신 집을 비워놓고 와서 선아를 돌보고 살림하시면서 손수 매실주를 담가 사위랑 맛을 보셨다. 한 번도 자식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은 어머니. 어머니는 매일 취해서 들어와 오열하다 잠드는 정주의 잠자리를 살펴주고 아침이면 해장국을 끓여주셨다. 수십 년을 혼자 산 어머니를 봐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던 정주에게 가족은 그 누구보다 소중한 울타리였다.

혼자서 와인을 따라 마시며 떡볶이를 먹는 건지 떡볶이를 먹기 위해 와인을 마시는 건지 정주는 잠시 헷갈렸다. 술이란 오늘처럼 쓸쓸한 마음을 위로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사나운 짐승처럼 날뛰게도 만든다. 자신의 인생도 단짠단짠한 맛이 있어 술맛이 돌지만 절대 과음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 어떤 술로도 문제를 해결하거나 슬픔이나 고통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지내려면 건강을 잘 챙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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