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카톡이 날아왔다. ‘집에 왔다 갈래? 단감 따려고 그러는데……’, ‘지금 하는 일이 있어서 네 시쯤 가겠다’고 답을 보냈다. 올해 단감 맛을 못 봤는데 그녀의 문자를 보니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정신없이 차키를 챙겨들고 신발을 신었다.
그녀의 집까지 차로 30분 거리를 달려가면 백운산 능선이 아름답게 보이는 시골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우람한 느티나무에도 알록달록한 가을빛이 듬뿍 차 있다. 마당에 들어서니 친구가 포대에 가득 담긴 단감을 들고 나왔다. 약을 안쳐서 크기는 작아도 맛은 들어서 달다며 다 가져가라고 성화다. 너무 많다고 친구와 실랑이를 하면서 차에 실었다. 친구는 언제나처럼 비니를 쓰고 있었지만 화색이 돌고 건강해 보여 기분이 좋았다.
지난해 바쁘게 보내느라 놀러 갈 시간이 없었다. 몇 달 만에 본 친구는 하얀 얼굴이 더 창백했다. “얼굴이 왜 그래? 더운데 모자는 왜 썼어?” 나의 질문에 그녀는 항암주사 맞느라 머리가 빠졌다고 말하며 신나는 일도 아닌데 ‘깔깔깔’ 웃었다. ‘그런 심한 농담을… 네가 항암주사 맞으면 골골한 나는 벌써 저 세상 갔겠다’고 대꾸하자 그녀가 웃으며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아, 머리카락이 한 개도 없는 머리통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났다. 빼빼 마른 몸에 군인처럼 앞만 보고 걷는다고 나에겐 ‘육사생도’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피부가 하얗고 이목구비가 예쁜 그녀는 ‘왕비’라고 불렸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친했다. 사무실 창밖에 있는 키 큰 가로수에 연둣빛 새싹들이 올라올 무렵 왕비가 결혼 준비로 퇴직을 했다. 그 해 여름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신혼집 주소를 알려왔다. 그 무렵 나의 일상은 토요일마다 사무실 앞 버스 정류장에서 21번 버스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달려가는 철없는 친구였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녀에게 나는 늘 철이 없는 친구다)
그런 나를 왕비는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고 맛있는 점심상을 들이밀었다. 밥도 맛있었지만 아기자기한 살림방은 내 마음에 쏙 들게 예뻤고 그녀의 러브스토리는 아무리 들어도 또 듣고 싶은 동화처럼 질리지가 않았다.
당시 나의 소망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을 나와 독립하는 것이었다.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친구들처럼 자취하고 싶었는데 끝내 이뤄보지 못하고 결혼을 했다. 신랑이 있는 곳으로 오면서 자연스럽게 왕비하고도 멀어졌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객지생활은 말할 수 없이 외로웠다. 팔도 사투리가 다 섞여있는 아파트 아줌마들과 안면을 트기도 전에 연년생으로 아이들을 낳고 육아에 매달려 허덕였다. 그 무렵 왕비가 남편의 근무지 변경으로 내가 사는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남편에게 매일 밤마다 왕비와 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희망고문이 시작됐다. 드디어 양쪽 집 남편들이 쉬는 날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즐거운 시간을 누렸다.
육방예경에 <큰 도움을 주고, 즐거울 때에나 괴로울 때에나 변하지 않으며, 좋은 말을 해주고 동정심이 많은 친구가 되라>는 말이 있다. 친구가 항암치료가 끝나고 수술하러 서울에 가 있는 동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병문안을 갈 수 없었기에 집에서 기도하며 사는 동안 자주 그녀를 만나고 더 많은 즐거움을 나누리라 다짐했다.
집에 와서 감을 깎아 먹으며 왕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가 따준 거라 그런 가? 감이 진짜 맛있다.'라고 했더니, 그녀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으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만리타향에서 맘 놓고 의지하고 아무 때나 찾아가도 되는 친구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로또에 당첨되어도 이런 호사는 절대 누릴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