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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성이 Oct 13. 2022

피천득의 '인연'

북리뷰

1.

금세 읽어 내려간 책들은 기억에 오래 남지 않았다. 오랫동안 끼고 다니며 곱씹듯 읽어 내려간 책은 한 구절만 들어도 어떤 책의 어떤 구절인지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책은 내 속에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책은 너무 흥미로워 쉴 새 없이 읽어 내려가게 한다. 전자는 마음속에 깊이 남고 후자는 읽을 땐 몰입의 즐거움이 있지만 읽고 난 다음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시중에 읽을거리가 너무 많아 꼭 읽고픈 몇 권만 읽지만 모두 다 내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다.

피천득 님도 넘쳐나는 읽을거리들 중 고전만 읽으라고 문과 학생들에게 일러주지만 그 많은 고전에 파묻혀 “읽어야 될 책을 못 읽어, 늘 빚에 쪼들리는 사람과 같다”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 너무 공감되어 공유한다. 너무 읽고픈 몇 권도 너무 많아 나도 “늘 빚에 쪼들리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결국 내가 읽게 되는 나와 인연이 닿는 책들은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그때 그때 연상되거나 잊힌다.

사람도 이와 같다.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 중 오직 몇 명하고만 관계를 맺고 서로를 읽어 내려간다. 훗날 내 기억에는 내 주변 소수의 사람들만 기억날 것이다. 깊이 읽어 내려갔던 몇 명만..


2.

딸을 둔 아버지의 마음이 모두 이럴까.. 

“결혼을 한 뒤라도 나는 내 딸이 남의 집 사람이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시집살이는 아니하고 독립한 가정을 이룰 것이며, 거기에는 부부의 똑같은 의무와 권리가 있을 것이다. 아내도 새집에 온 것이요, 남편도 새집에 온 것이다. 남편의 집인 동시에 아내의 집이요, 아내의 집인 동시에 남편의 집이다. 결혼은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사랑은 억지로 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끼는 딸이 독립적인 신여성으로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보수적인 아버지이지만 대학에 간 딸에게 점차 자유를 허락하려고 하는 점에서 옛날 사람 치고 마음이 열려있는 것 같아 놀라웠다. 피천득 님의 수필에는 딸 서영이가 자주 나온다. 유학 간 서영이를 생각하며 구입한 인형을 돌보는 모습이 나오는데 서영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느껴져 애틋하다. 딸에게 쓴 편지와 수필을 읽다 보면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이라는 구절이 재차 나온다. 영특한 서영이가 대학에 가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미국에서 지내면서 아버지와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나 보다. 서영이는 아버지가 읽는 영문학 소설도 읽으며 함께 대화 나누는 친구 같은 딸이었나 보다. 이런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는 어떤 마음일까. 


3.

-우정-

“친구는 그때그때의 친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친구는 일생을 두고 사귀는 친구다.” 피천득 선생님도 평생 우정을 꿈꾸셨구나 했다. 피천득 선생님은 다른 이에게 정말 좋은 친구 셨을 것 같다. 나와 같이 평생 우정을 꿈꾸는 이가 있다니 정말 반가웠다. 

또 쓰시길 “우정의 비극은 이별이 아니다. 죽음도 아니다. 우정의 비극은 불신이다.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비극이 온다.” 사실, 요지경 세상 속에서 여러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접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깊이 신뢰하기가 참으로 어려워진다. 서로를 깊이 신뢰하는 사이가 되려면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고 많은 일을 함께 겪어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확실히 알고 이해해야 신뢰할 수 있는 것 같다. 

“이성 간의 우정은 사상의 변모이거나 결국 사랑으로 끝난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연정과는 달리 우정은 담백하여 독점욕이 숨어 있지 않다. 남녀 간의 우정은 결혼 후에는 유지되기가 매우 어렵다. 그 남편의, 그 아내의 교양 있는 아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학 때 알던 소위 남사친들은 내가 결혼하고 거의 모두 연락이 없다. 결혼 후에는 친구라 하더라도 결혼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는 건 부담이고 편하지 않기 때문일 거다. 우정에 대해 잘 모를 때는 독점욕에 시달렸지만 나의 우정이 담백해진 다음부터 만남이 더욱 즐거워진 것 같다. 나이 들어 자식들 모두 시집 장가보내고 나면 남는 이는 친구뿐이랬다. 친구가 있으면 삶이 더 행복하다는 연구 결과도 읽었다. 나에게도 중고등학교 친구가 몇 명 있는데 평생 우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힘들 때 마음에 위안을 주고 조언도 주고 즐거울 때 함께 즐거워해 주어 너무 고맙다.

-유머의 기능-

위트와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은 그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 나는 유머가 있는 사람이 참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이 각박한 세상에 유머를 가지기 힘들겠지만 기발한 유머감각을 지닌 사람은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해 주고 긴장을 완화시킨다. “긴장, 초조, 냉혹, 잔인. 현대인은 불행하다. 메커니즘이 발달한 국가에서는 정신 병원이 날로 늘어 가고 있다. 현대 문학은 어둡고 병적인 면을 강조하여 묘사한 것이 너무 많다. 유머 풍부한 작품들이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동시에 ‘센스 오브 유머’를 터득하게 한다면 좀 더 밝은 생활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유머는 인간에게 주어진 혜택의 하나다.” 유머가 풍부한 작품도 참으로 드물다. 나에게 웃음과 일상생활에 활기를 줄 유머 넘치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4.

나는 평생 단 한 번도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친가와 외가 통틀어 시골살이하는 친척이 단 한 명도 없다. 나에게 시골은 대구였고 나에게 진짜 시골다운 시골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운 좋으면 창문 너머로 너른 밭이나 논을 볼 수 있었지만 삶의 터전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요 근래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시골에서 자신이 먹을 농작물을 재배하여 맛있게 요리해먹는 모습을 보고 힐링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 시골은 더럽고 도태된 곳 같이 느껴졌는데 그 영화에서는 너무 따뜻하고 깨끗하고 상처가 치유되는 곳이었다. 서울 사람인 피천득 선생님도 시골살이를 꿈꾸며 이 글을 쓰셨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나에게 고향이라고 할 고향이 없다.” 나는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는데 부천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내 고향은 경기도이고 나는 경기도에서 지금 살고 있지만 진짜 여기가 내 고향인지 모르겠다. 이사를 많이 다니다 보니 나는 떠돌이 같아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고향이 없다. 나에게도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는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5.

멋이 있다는 건 추상적인 개념인데 피천득 선생님은 멋을 예를 들어 잘 설명하였다. 

“멋있는 사람은 가난하여도 궁상맞지 않고 인색하지 않다. 폐포파립을 걸치더라도 마음이 행운유수와 같으면 곧 멋이다. 멋은 허심 하고 관대하며 여백의 미가 있다. 받는 것이 멋이 아니라, 선뜻 내어 주는 것이 멋이다. 천금을 주고도 중국 소저의 정조를 범하지 아니한 통사 홍순언은 우리나라의 멋있는 사나이였다...

멋이 있는 사람은 멋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작고 이름 지을 수 없는 멋 때문에 각박한 세상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광경을 바라다보고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윤리적이고 스포츠맨십이 있고 가난해도 베풀 줄 알고 관대하며 작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다. 이런 멋스러운 사람과 상대하면 마음에 감동이 일고 나도 그 멋에 전염되고 싶어 진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아주 조금 멋진 사람인 것 같다. 정말 조금만 멋진 사람. 나도 피천득 선생님이 그린 멋에 대한 동경이 있지만 내가 그 멋진 사람이 되기에는 더한 노력으로 부족함을 메워야 한다. 멋진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사는 걸 꿈꿔보기도 한다. 피천득 선생은 이러한 멋으로 인해 살 만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세상을 이렇게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주는 멋이 널리 전염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론적으로...

피천득 선생님 글은 소박하고 담백하다. 군더더기 없고 어찌 보면 천진하기까지 하다. 그 속에서 삶의 진리를 찾기도 하고 피천득 선생님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수필집 ‘인연’을 읽는 동안 피천득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는 친구가 된 기분이다. 피천득 선생님은 비록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그의 수필집 ‘인연’을 통해 그와 인연을 맺은 것 같다. 이제 피천득이란 사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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