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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Feb 16. 2019

11. Killing me softly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11

                

 오늘도 또 졸았다. 잠깐 눈만 붙이고 있자는 거였는데 눈 떠보니 30분이 지났다. 점심시간이 또 이렇게 끝나버렸다. 벌써 며칠째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노트북을 켜 유튜브에 접속한다. ‘이어서 시청하기’에 보다 만 영상들이 가득이다. 업무 시간에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 덕질한다고 일 제대로 안 한다는 소리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아 내내 참고 있었던 영상들이다. 책상 파티션에 이미 가득 붙여놓은 앨범 포스터와 사진들만으로도 티는 충분히 냈다. 몰래 트위터 타임라인 새로 고침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이래서 쏜살같이 퇴근했다. 누구와 약속 잡지도 않고, 어딜 들리지도 않고 무언가 하지도 않고. 이어폰을 노트북에 연결했다. ‘이어서 시청하기’에 떠 있는 데뷔 초창기의 보이는 라디오 팬 메이드 자막 영상을 클릭했다.      


 저녁을 걸렀더니 눈이 뻑뻑하고 허기가 진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시간을 확인하니 밤 11시가 넘었다. 잠깐 영상을 중지시켜놓고 냉장고를 뒤져 먹을 걸 찾았다. 침대에 자리를 잡고 봐야 하기 때문에 흘릴 수 있는 음식들은 모두 탈락이다. 고민 끝에 집어 든 건 결국 라면. 봉지를 터 분말스프를 버렸다. 부순 생라면을 와그작 씹으며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오전에 외부 미팅이 있어서 일찍 잠들려고 했는데 오늘도 실패. 신이 나서 마피아 게임을 이어가는 2018 오키나와 시즌 그리팅 영상을 여기서 끊을 순 없다. 핸드폰 시간 앞자리가 00으로 바뀌었다. 하루가 또 지났다.      


 이러다 보니 매일 졸음의 연속이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새벽에 잠깐 일어날 때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데, 그 사이 멤버들의 트위터 게시글 알림이나 새로운 소식이 떠 있으면 ‘이것만 확인하고 바로 자야지’ 하다가 그대로 아침을 맞이한 적도 여러 날이었다. 숨 쉬는 게 기적인 저질 체력의 나는 거의 좀비 상태로 출근한 다음, 몽롱한 상태로 일을 하고 퇴근해 그제야 눈을 빛내며 덕질을 한다.      


 일상생활 불가. 폐인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점심을 먹은 후 카페를 찾았다. 오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간 지 모르겠다. 카페인이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필요했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켜 한입에 털어 넣었지만 각성은커녕 이대로 그대로 소파에 누워 잠들고만 싶다. 부서 직원들의 대화 소리를 건성건성 듣는다. 그나저나 어제 남준이는 새벽 3시가 넘어서 앨범 작업을 끝내고 숙소에 들어갔던 것 같던데. 지금 푹 자고 있겠지.     


 “오늘 치킨 시키려면 두 시간은 먼저 전화해야겠지?”

 “왜 무슨 일 있어?”

 “축구하잖아 카타르전”

 “아 그래요?”     


 재미있는 이벤트 소식에도 깜깜하고   


 “인터넷에서 떠도는 <스카이 캐슬> 스포일러 진짤까?”

 “저도 그거 봤는데, 왠지 맞을 것 같아요. J는 <스카이캐슬> 봐?"

 “아, 저는 안 봐서...”


 요즘 드라마도 잘 모르고     


 “지난주 <놀라운 토요일> 봤어? 키 없다고 샤이니 노래 나오는 거 엄청 웃겼는데.”

 “아 진짜요?”

 “뭐야. 나한테 이거 재밌다고 추천해놓고 안 보는 거야?”  

   

 유일한 낙이었던 예능 프로그램도 안 본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패턴이 되어 버린 지인들과의 대화. 매번 갑분싸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는 통에 아예 입을 다문다. 게다가 방탄소년단이 아닌 이야기는 별로 관심도 없어 대화 집중도가 떨어진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핸드폰 트위터 타임라인을 훑다 보면 어느새 나만 다른 세상에 가 있다. 그날의 대화가 단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로 시간만 축내는 일들의 연속.     


 일상이 이렇게 방탄소년단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개인적으로 가장 자주 활용하는 SNS인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피드 내용도 대부분 방탄소년단 위주가 됐다. 원래는 소소한 일상이나 여행 후기 위주로 글과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방탄소년단과 관련된 게시물을 올리다 보니 팔로워들이 하나둘씩 질려서 떠나갔다. 초반에 비하면 아주 눈에 띌 정도로 팔로워 숫자가 줄었다. 용량이 한정되어있는 핸드폰 사진첩은 내 사진 대신 멤버들 사진으로 꽉 채워져 버린 지 오래고, 내 일상은 회사 아님 덕질뿐이라 그럴싸하게 하루를 포장할 만한 것들도 사라져 버렸다.      


 종종 영화를 보고 짧은 감상평을 쓴 후 주변인들에게 추천하기, 적어도 2주일에 한 번은 책 읽기, 그림 그리기, 예능 프로그램 챙겨보기, 와인 마시기, 여행 정보에 항상 촉을 세우기, 여행 가기. 이런 소소한 취미들이 없어지거나 감추어지거나 밀렸다. 날짜 개념도 없어졌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오늘 같다. 매일의 일상이 반복적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엔 퇴근하며 울기까지 했다. 정국이 커버해 부른 아이유의 <이런 엔딩>을 들으면서였다. 차 안을 가득 메운 정국의 목소리. ‘너를 너보다 사랑해 줄 사람 꼭 만났으면 해. 내가 아니라서 미안해. 주는 게 쉽지가 않아.’ 정국이는 노래를 부를 때 음절 끝에 힘을 빼는 소리가 나는데 이 가사에 그 소리가 합해져 부지불식간에 꼭 차인 기분이 들어 끅끅대며 울었다.


 말 그대로 정말 가지가지하고 있다, 요즘.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마치 처음 덕질을 시작한 것 마냥 무모하고 주책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이걸 인지한다는 것이다. 내 일상에 의미를 가져다준 멤버들이 내 일상을 어지럽힐 수 있다는 걸.      


 덕질 외에 스스로에게 의미를 주는 일을 할 것.


 그 문장을 곱씹으며 퇴근 후 집으로 곧장 향하질 않고 카페를 찾았다. ‘노트북 가능한’ ‘주차장 있는’ 키워드를 넣어 검색을 하다 보면 ‘그냥 집에나 갈래’ 하고 말았었는데, 안 해본 것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노트북 하기 적당하면서 커피 맛도 괜찮다는 카페 한 곳을 찾았다. 주차도 무사히 성공했고, 작은 조명이 달려 눈이 피로하지 않을 적당한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딸기잼을 바른 버터 스콘을 우물대며 짧게 글도 쓰고, 혼자 멀지 않게 다녀올 주말 드라이브 코스도 짰다. 저녁 일곱 시가 넘은 시간. 어스름 진 이 시간에 술이 아닌 차를 마시러 와도 괜찮은 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카페 안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데 띠링 핸드폰 알림이 떴다. 방탄TV에서 업로드한 동영상 : [Episode] BTS(방탄소년단) @2018 MMA(멜론 뮤직 어워즈). 제목을 보자마자 여길 어떤 마음으로 찾았는지가 바로 잊혔다. 노트북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만 들었다. 얼른 유튜브에 접속해 ‘방금’ 업로드된 영상을 재생했다.     


 2018 MMA 무대의 연습 과정과 리허설 및 본 무대, 수상 후의 백 스테이지를 담은 30여 분간의 영상이었다. 매 시상식마다 새로운 무대를 준비하는 방탄소년단은 2018 MMA에선 삼고무, 부채춤, 사물놀이, 사자춤 등 한국적인 요소를 세련되게 차용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나도 이렇게 소름이 돋는데 이 무대를 실시간으로 봤을 전 세계 팬들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싶던, 아직도 한 번씩 생각나는 가히 역대급 무대였었다.

    

 타고난 것에 연습이 더해지면 감히 아무도 따라갈 수가 없다. 댄스 멤버인 호석, 지민, 정국 세 명이 각각 삼고무, 부채춤, 탈춤을 접목시킨 댄스를 연습한다. 서로의 춤을 따라 추고 장난을 치다 가도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니 눈빛이 달라진다. 굳힌 눈빛이 건너편 거울에 가 닿았다. 그 간극에 또 치였다. 정국이는 이때의 연습 장면을 G.C.F(Golden Closet Film, 정국의 작업실인 ‘Golden Closet’의 이름을 딴 영상 작업물)로 공개했었다. 사진은 그때의 분위기를 오롯하게 담을 수 없어 영상을 찍기 시작한 정국이는 본인이 직접 편집까지 마친 영상을 이렇게 한 번씩 멋지게 선물해주곤 하는데, 그때 올린 영상을 이렇게 찍었겠구나, 그 마음까지 느껴졌다.     


 시선을 뗄 수 없었던 연습 장면은 본 무대 단체 리허설 장면으로 이어졌다. 본 공연보다 리허설을 할 때 멤버들의 프로페셔널함이 더 잘 느껴진다. 무대 크기가 넓게 연습했던 것보다 좁은 걸 확인하고 안무 동선을 최소화하자는 정국이의 안을 바로 수용하며 합을 맞춘다. 시상식 하루 전. 사전 녹화와 드라이 리허설, 카메라 리허설까지 긴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잘하지 못해 아쉽기만 해 한다.      


 “이왕 할 거 잘해야지”


 방금 전까지 지민을 향해 장난을 치던 호석이 본인 차례가 되자 단숨에 제이홉이 된다. 춤과 무대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 자신의 재량이 부족한 것 같다며 방금 마친 사전 녹화 장면을 아쉬워한다. 이렇게 잘하는데도.


 턱 끝이 시렸다. 순수한 경외심 때문에. 그러니까 완벽하게 멋있고, 마냥 좋게 느껴지는 순간이면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이 있다. 2018 MMA에서 방탄소년단은 대상을 포함해 7개의 상을 받았지만, 무엇보다도 인기상을 받아 너무 좋다며 팬들을 향해 ‘하루하루에 의미가 되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수상 소감을 전했다.      


 방탄소년단은 내게 하루하루에 의미를 되어준 것 그 이상이다. 모르는 거보다 아는 게 더 많다고 쉽게 자만 부렸던 3n살. 나조차도 감당 못 할 이상한 감정들이 불쑥불쑥 치고 나온다. 감사한 마음을 기쁘게 전하는 멤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도 몰랐던 나를 매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 주는 얼굴들.  


 나 자신의 패턴을 찾을 때가 된 것 같다. 접점. 그러니까 '적당한 폐인'이 되는 노력 말이다. '에이 유튜브 보느라 시간 다 버렸어' '나 아무것도 한 게 없이 날짜 다 보내 버렸네' 하며 멤버들을 원망하는 날이 오지 않게끔. 덕질과 일상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것. 누구보다 부지런해져야 할 때가 됐다. 이왕 할 거 잘해야 한다는 호석이처럼.


 나는 구역 나누기가 필요한 사람이니 밀쳐 두었던 취미들을 교통정리해야겠다. 방탄소년단 영상을 보는 시간을 정하고, 취미를 즐기는 시간도 배분해야겠다. 책 한 권을 생각보다 일찍 읽으면 그만큼 영상을 더 많이 보는 방식도 괜찮겠다. 학원이나 헬스를 등록하는 것도 고려해 봐야지.


 ‘나를 부드럽게 죽여줘. 너의 손길로 눈 감겨줘. 어차피 거부할 수조차 없어. 더는 도망갈 수조차 없어. 네가 너무 달콤해서’     


 <피 땀 눈물>의 가사가 머릿속에 내내 맴도는 날이다. 방탄소년단을 몰랐다면 전혀 없었을 이 변화. 매번 타협에 타협을 거듭하며 조정해 나가야 할 내 일상.


 죽을 거면 너희의 손이라면 좋겠다.

 기꺼이 덕질로 행복하게 죽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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