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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Feb 12. 2019

10. 단계별 증상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10

                  

 1단계. 불면        

  


 사람을 카테고리화하여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한번 나눠보고 싶다. ‘잘 자는 사람’과 ‘잘 못 자는 사람’으로.      


 나는 너무도 명확하게 전자였다. 베개에 머리를 대면 수 분 안에 잠이 드는 사람이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조수석에 앉으면 졸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어야만 했고, 장거리 비행은 오래 잘 수 있어 오케이 땡큐였다. 뉴욕에서 인천까지 오는 비행기에선 기내식을 먹지도 못하고 잤다. 비즈니스 좌석이라 기내식 먹는 것만 기다렸는데 잠깐 자고 일어났더니 도착 30분 전이라 얼마나 허망했던지.    

  

 잘 잤던 일화를 꼽으려면 셀 수도 없다. 회사에서 부서별로 몇몇을 뽑아 일본 문화 탐방(이라고 쓰고 여행이라고 읽는)을 보내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방을 쓴 타부서 언니가 내 수면을 실제로 직접 보고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호텔 방에 돌아와 씻고 나선 “언니 저 졸려요. 금방 잘 것 같아요” 하더니 정말 ‘금방’ 자더라고.    

  

 졸리면 자고 깨면 일어나는, 단순하고 솔직한 수면 패턴을 가진 나는 불면이라는 건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단어인 줄 알았다. 그리고 역시 이 모든 걸 과거형으로 진술하고 있는 데에는, 지금은 ‘잘 못 자는 사람’으로 카테고리 변경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의 ‘잘 잤던’ 나와 지금의 ‘못 자는’ 나를 가른 가장 큰 이유. ‘신경 쓰임’의 유무 차이다.     


 몇 가지의 (어려운) 질문에 답을 해야만 가입을 할 수 있는 방탄소년단 공식 카페는 RT로 무한정 뻗어 나갈 수 있는 개방적 트위터보다 멤버들이 좀 더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놓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정국이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팬들과 채팅을 하기도 하고 (최근 다우니 품절 대란도 이 채팅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몇몇 팬들의 글에 직접 댓글을 달아주기도 한다. 이 공식 카페에 멤버들이 글을 올리면 알람이 울리게 설정해놨다. 댓글은 9999개까지만 달 수 있어 알람이 울리자마자 글을 확인하고 댓글을 달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해외 일정이 있거나 새벽까지 녹음을 하는 스케줄 덕에 글이 올라오는 시간은 들쑥날쑥. 그래서 항상 무음이었던 핸드폰 설정 습관을 정확히 반대로 바꿔야만 했다. 공식 카페나 트위터, 브이앱 등 멤버들의 새 소식이 올라오면 언제든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음량은 항상 최대로.      


 멤버들 게시글 알람은 아주 일부다. 볼 게 많아서 자는 시간을 줄였다. 그동안 제작한 컨텐츠들 뿐 아니라 공백기인 최근에도 2018년 활동 모습을 편집한 <방탄밤>이나 <BTS 에피소드>가 공개되고 있고, 자체 예능 <달려라 방탄>은 새 시즌을 시작했다. 데뷔 초창기 출연했던 라디오 방송본이나 드라마 패러디 영상, 예전 트위터 글들 거꾸로 거슬러 보다 보면 분명 방금 퇴근했는데 금세 새벽 한두 시가 되어버린다. 눈도 뻐근하고 피곤한데 잠도 오지 않는다. 이미 내일이 된 오늘, 회사에 가면 집중하지 못하고 졸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 더 봐야지 하다 보면 잠에 들 수가 없다. 잠은 초저녁부터 달아나버렸다.    

 

 잠도 의지의 차이일 수 있다는 걸 3n살이 되어서야 깨닫고 있다. 불면의 날이 하루 또 늘었다.      


 P.S


 사람을 카테고리화하여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한번 나눠보고 싶다. ‘눈이 좋은 사람’과 ‘눈이 나쁜 사람’으로. 너무나 명확하게 전자였던 나는 역시나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시력 저하’를 얻었다. 불면에 시력 저하, 안구건조증은 하나의 세트로 달라붙었다.      


 멤버들 덕에 내가 성취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자부심을 내려 놓았다. 이제 잘 못 자고, 눈이 흐릿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호젓하게 안다. 내일은 처음으로 약국에 인공눈물을 사러 갈 예정이다.           



 2단계. 손목 터널 증후군     



 오늘도 손목이 시리다. 마우스를 쥔 손목이 시큰거려 또 스트레칭했다. 회사 업무 7년 차. 전화보단 문자가 편하고 말보단 클릭이 좋고 업무 지시는 면대면보다 메일이 낫다. 사람을 직접적으로 상대하는 것보다 모니터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길다 보니 퇴근 무렵에 되면 뻐근한 목과 시큰한 손목을 풀어주어야만 한다.     


 검색창에 손목 터널 증후군을 검색했다.


 손목 터널 증후군의 일반적인 증상.

 ‘손을 반복적으로 사용할 때나, 손목 관절을 장시간 굽히거나 편 상태로 유지할 경우 통증과 감각장애가 심해진다. 증상이 지속되면서 엄지두덩 근육이 위축된다.’

 ‘손이 무감각해지고 손을 꽉 쥐려고 하면 때때로 타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원인은.

 ① 부정 유합된 원위 요골 골절, 감염이나 외상으로 인한 부종이 있을 경우

 ② 반복적 가사노동에 의한 경우

 ③ 컴퓨터 및 스마트폰의 사용으로 손목에 지나친 부담을 준 경우

 ④ 손목 부위의 골절이나 탈구로 수근관이 좁아져서 신경이 눌리는 경우

 ⑤ 감염이나 류머티스 관절염, 통풍 등 활액막염을 초래하는 질환의 합병증으로 인한 경우     


 컴퓨터가 먹통이면 아예 일을 할 수 없는 회사원이자 배터리 방전으로 하루에 3번 정도는 핸드폰을 충전해야하는 덕후의 손목이 남아날 리가. 이런 내 손목을 검사하는 상상을 했다. ‘무조건 쉬어야 낫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답을 내놓는 의사의 입과 ‘그럼 그냥 평생 아프고 말래요’ 건방지게 답하는 내 얼굴이 스쳤다. 이 문단을 쓰는 중간 손목을 세 번 정도 돌렸다.     


 업무 시간이 지나면 이제 본격적인 덕질의 시간이다. 퇴근하자마자 짐 던져두고 씻은 다음 핸드폰 끼고 침대에 눕기. 노트북은 훨씬 더 큰 화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뭔가 멀게 느껴진다. 작은 화면이라도 이리저리 같이 움직이며 가까이 볼 수 있는 핸드폰이 훨씬 낫다. 트위터와 공식 카페를 가볍게 훑고 이제부턴 영상이다. 핸드폰을 협탁에 세워두고 자세를 고쳐 보지만 손으로 들고 있을 때만큼 편하지 않다. 배 위에 타타 쿠션을 올려두고 그 위에 손목을 기댄다. 그나마 덜 무리가 가는 포즈다.      


 불면에 시력 저하, 안구건조증, 거기에 손목 터널 증후군까지. 차근차근 얻고 있다. 덕후의 증상을.        


   

3단계. 단기 기억상실증       


   

 <Love yourself in Seoul> 콘서트 실황 영화를 꼭 열 번째 보고 나온 날이었다. 설 연휴를 앞두고 미리 많이 봐두어야 해서 하루에 세 차례 연달아 영화를 보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차단기 앞에 차를 잠깐 정차해 영화표를 보여주었더니, 이 티켓 중 하나만 적용이 가능하단다.      


 “일행이 같은 영화를 보고 하나씩 티켓을 제시하면 적용이 안돼요.”

 “저 혼자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본 거예요. 시간 보시면 다 다른데.”      

 제목이 같은 티켓을 대충 훑어봤는지 그제야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다. “얼마나 재밌어서 또 봤어요?” 하며 웃음과 동시에 차단기가 열렸다.      


 ‘또 봐도 재밌어?’

 퇴근 후 루틴처럼 영화를 예매해 또 보러 가는 내게 당연한 질문이 붙었다.

 ‘그게, 보고 나면 뭘 봤는지 완전히 잊어버려요’     


 영화를 열 번 볼 수 있었던 건 매번 같은 장면에 매번 똑같이 소리를 지르고, 매번 같은 도입부에 매번 심장을 부여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그랬다. 모든 순서는 머리에 입력되어있고, 노래에 맞춰 따라 불러야 하는 응원법은 그 정확성이 컴퓨터 수준이지만 이 무대에 오르는 멤버들에겐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는다. 호석(제이홉의 본명)이가 본인의 솔로곡인 <Just dance>를 부를 때, 사비로 넘어가는 구간에 무표정하게 얼굴을 굳힌 뒤 흰 슈트를 휘날리며 격렬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거나, 태형이가 <Singularity>를 부르며 자신의 손으로 턱을 잡으며 씩 웃는 잘생긴 옆모습이 클로즈업 된다거나 하면 ‘어쩜 저럴 수가 있지’ 하며 입을 틀어막는다.


 남준(RM의 본명)이 <Love>를 부를 때 ‘you make live to a love, love to a love’의 가사 끝 음을 섹시하게 빼는 부분과 윤기의 <Seesaw> 첫 등장 때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채 노래를 시작하는 부분엔 싱어롱관에서 매번 제일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정국이와 석진이, 지민이 솔로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넋을 놓고 있다.      


 매번 새롭다. 매 무대를 또 봐도 재밌고 이미 봤던 영상을 또 봐도 재밌다. 아니, 다시 보기 때문에 더 재밌다. 상대적으로 앞에 나와 있는 멤버에 집중해 봤던 첫 번째와 다르게 다시 보면 다른 것들까지 보이기 때문이다.      


 뒤에서 조용히 음식에 장난을 치고 있고, 자신의 개그가 먹히지 않아 머쓱해 귀가 빨개져 웃고 있는 게 새롭게 보인다. 무대 왼편에선 이 멤버가 팬들과 소통을 하며 씨익 귀엽게 웃고 있고 무대 오른편에선 다른 멤버가 열창을 하고 있다. 처음엔 왼쪽만 집중한다. 다시 볼 땐 오른쪽에 더 집중한다. 그렇게 보고 나면 다시 세 번째 클릭이 필수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한 분위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시 본다. 네 번째 클릭해서도 똑같은 곳에서 또 웃고 똑같은 곳에서 또 멈출 거다. 도저히 각인이 되질 않는다.           



 4단계. 환청 & 착시  


        

 증상은 아주 간단하다.      


 “네? 뭐라고요? 아- 전 또 정국이라고.”

 “어? 아니네. 난 또 방탄소년단 콘서트 한다고.”     


 모든 사람이 방탄소년단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 같고, 모든 글자가 방탄소년단같다.          



 5단계. 도끼병          



 <Love yourself in Seoul>을 또 봤다. <Magic Shop> 노래가 배경으로 깔리고, 까만 화면에 스크롤이 올라간다. 큼큼. 오늘도 실컷 뛰고 목청껏 따라 불렀다. 이 공연을 위해 무진 노력을 했을 멤버들의 연습 영상을 두 손 모으며 눈에 담았다. 상영관에 불이 켜지고 짐을 싸서 나왔다. 노래를 들으려 MP3를 찾는데 가방 안에 없다. 짐을 줄인다고 파우치를 차 안에 놓고 내렸는데 그 안에 MP3를 넣어놓은 걸 깜빡했다. 하는 수 없지. 다른 사람들 틈에 껴 로비로 향했다. 다른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 다음 회차를 예매한 사람들, 팝콘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그 무수한 소음에 잠깐 혼미해졌다. 너무 갑자기, 급작스레 현실이다.     


 나 하나만을 위한 공연과 노래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주인공이었다, 방금까진. 이 공연과 이 노래 안에서 나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무수한 사람들 중 특징이 하나도 없는, 스쳐 지나가는 1인이 되었다. 이 간극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걸음을 빨리해 얼른 차 안으로 들어왔다. 시동을 켜 노래를 틀었다. 태형이가 선보인 자작곡 <풍경>이 흐르기 시작했다. ‘새벽달이 지난 공원에 지금 내 감정을 담아요 이 노랜 그댈 향해요’ 이 풍경의 주인공은 팬들이라고 했던 태형이었다. 엑스트라였던 나는 다시 가장 존재감이 뚜렷한 배역으로 변모했다.      


 항상 팬들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다정한 말을 건네는 멤버들 덕에 가장 센 증상, 도끼병까지 얻었다. 나는 정말 없어선 안 될 존재고, 멤버들의 진가를 알고 있는 위대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밥을 안 먹어도 늘 배불러 있는 도취.      





 이 모든 증상이 완화될 일은 아마도 없을 듯 하다. 그러니 이제 증상에 적응하는 일만 남았다. 잠 좀 못 자고, 매번 같은 걸 보고, 손목이 좀 아프고, 잘못 보고 잘못 듣고, 대단하게 착각하며 산들 어떠하랴.      


 원래 모든 사랑엔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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