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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Feb 08. 2019

9. RM의 가사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9


 '좋은 노래다’라고 느낄 때, 가사는 얼마큼의 역할을 할까.


 아무리 좋은 음률을 가졌을지언정 요즘 유행하는 말들만 잔뜩 늘어놓은 가사를 가졌다면, 그 노래의 유통기한은 영원할 수 있을까?

 머리를 띵 하게 울리는 한 문장, 생각하지 못했던 언어의 조합, 새로운 단어의 발견. 그런 가사를 가진 노래는 과연 잊힐 수 있을까?  


 방시혁은 남준을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제를 다루는 사고의 깊이와 언어 사용의 유려함, 랩을 한국말로 풀어가는 방식 등이 17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뛰어났다’고.


 7명의 전체 멤버가 음악적 욕심이 있어 모두 함께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특히 남준의 파트에서 그 시적인 표현이나 깊은 상념, 말들의 다양한 변주에 자주 놀랐다. 그럴 때마다 이 어린 거장이 놀라웠다. 하루 24시간을 대체 어떻게 쪼개서 읽고 생각하고 쓰는 건지.


 능력에 감탄해 마지않았던 남준이의 가사를 조금이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이 가사를 담은 노래는 가사들이 찰떡처럼 붙을 수 있는 비트와 음률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꼭 덧붙이며. 그러니 들어보지 않은 곡이라면, 속는 셈 치고 들어봐 주시기를.



1] Trivia 承 : Love


  널 알기 전 내 심장은 온통 직선뿐이던 거야

  난 그냥 사람 사람 사람 넌 나의 모든 모서릴 잠식

  나를 사랑 사랑 사랑으로 만들어 만들어

  우린 사람 사람 사람 저 무수히 많은 직선들 속

  내 사랑 사랑 사랑 그 위에 살짝 앉음 하트가 돼


 자음 ㅁ과 ㅇ, 단어 사람과 사랑을 다루는 이 방식.

직선이었던 사람이 너를 만나 모서리가 잠식 당해 사랑이 된다.


 ‘내’와 ‘네’가 왜 같은 소리를 내고 ‘사람’과 ‘사랑’이 왜 비슷한 소리가 나는지 알겠다는 남자는 ‘love’와 ‘live’도 왜 비슷한 글자인 지도 너로 인해 깨닫는다. 나는 지금 살아 있음으로 너를 사랑하는 거라고.


 너를 사랑하기 위해 사는 거라고.


 사랑, 바람, 자랑, 파랑, 사람.

 후반부에 반복되는 이 단어들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조심스러운 벅찬 감정이 느껴진다, 고스란히.

그 단 한 사람에게 들려주는 세레나데. 사랑의 승(承).



 2] 네 시


  오늘도 난 적당히 살아가 발맞춰 적당히 닳아가

  태양은 숨이 막히고 세상은 날 발가벗겨놔

  난 어쩔 수 없이 별 수 없이 달빛 아래 흩어진 나를 줍고 있어

   I call you moonchild

  우린 달의 아이 새벽의 찬 숨을 쉬네

   Yes we're livin and dyin at the same time

   But 지금은 눈 떠도 돼 그 어느 영화처럼 그 대사처럼 달빛 속에선 온 세상이 푸르니까


 새벽은 이름도 새벽이다. 어제를 닫고 새로운 하루를 여는 그 무렵.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다.

 내 움직임이나 숨소리를 오롯하게 직시하게 하는 고요한 새벽. 도시를 내내 채우던 소음은 잦아들었다.


 이 노래를 부르는 태형이의 목소리를 두고 ‘누구도 사랑할 수 있을 듯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듯하고 뜻 모르게 고요한 것 같고 외로운 것 같고 행복한 것 같기도 하다’라고 썼는데 (7. 우리를 형성하는 음악 / 방탄소년단 늦덕 일기 7) 남준이의 가사를 곱씹으면 기꺼이 고독해진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숨 쉴 수 있는 달의 아이. 태양을 불러와야만 하는 새벽의 운명 한 가운데에서 그 짧은 찰나의 공기를 최대한 들이마시는 나를 상상한다. 한낮을 그래도 잘 견뎌냈다고, 지금 마음껏 편안해지자고. 그 순간 파랗게 반짝이는 나를 상상한다. 검은색보다 푸른색에 가까운 고독.


 괜찮다는 말 한마디 없이 괜찮아지게 하는 마법.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지만, 역시 해가 지고 나서 듣게 되면 내 몸 세포가 좀 더 찌릿하게 반응한다는 게 느껴진다. 멋진 음악이다.



3] Her


  나도 헷갈려 대체 어떤 게 진짜 난지

  널 만나고 내가 책이란 걸 안 걸까

  아님 네가 내 책장을 넘긴 걸까


 사랑은 나를 낯설게 한다. A였던 내가 가장 끝의 Z에 닿을 수도 있는 것.

 사랑을 네가 알려준 걸까, 이미 하고 있던 사랑을 네가 깨닫게 해 준 걸까.


 이 노래는 방탄소년단의 랩 라인인 남준과 윤기, 호석이 같이 작업한 곡이다. 팬 송으로만 취급하기엔 무수한 고뇌가 담겨 있는데 무수하고 거대한 숫자의 사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사랑을 대할 때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과연 진짜 나는 누구일까. 그런 진짜 내 모습을 너는 사랑해줄까. 좀 더 멋진 모습의 나를, 더 꾸며진 나를, 더 나은 나를 만들어 내는 일에서 벗어나 가식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한 노력을 노래한다. 노력하려는 그들 방식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mask가 on해도 off해도 모두 그들이란 걸 아니까 그러니 늘 항상 남이 아닌 자신을 향한 화살표의 끝이 좀 뭉툭해져도 괜찮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이 것이 네 모든 wonder에 대한 내 answer.



4] Reflection


  세상은 절망의 또 다른 이름

  나의 키는 지구의 또 다른 지름

  나는 나의 모든 기쁨이자 시름

  매일 반복돼 날 향한 좋고 싫음
 

 나란 영화를 제일 잘 찍고 싶지만 찍어놓은 필름은 온통 마음에 들지 않고 편집점도 잘 찾지 못하겠다. 화면 속 나는 하나도 멋있어 보이지 않고 표정과 행동은 어색하기만 하다. 찍을 때도 사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찍기 멋쩍단 이유로 대충 컷을 마무리해 버렸었다. 그리고 남는 건 예측 가능했던 후회다.


 날 쓰다듬어주고 싶지만 가끔 내가 너무너무 미운 때.

 다들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아직도 헤매고 있는 걸까 생각하다 보면 그 생각이 또 생각을 끌어오고,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 다 놓고 그냥 자유롭고 행복해지고만 싶어 진다.

 그렇게 시작되는 나를 들여다보는 과정. 내가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나.


 남준이는 그 답을 다음 앨범에서 힌트를 준다. 우리에게 건네는 그 말, Love yourself.  

 좀 미워해도 괜찮아, 하지만 사랑을 멈추진 말자. 나는 나를 가장 소중하게 대해줘야 할 유일무이한 존재니까.



5] Moonchild


  야경이란 게 참 잔인하지 않니

  누구의 가시들이 모여 펼쳐진 장관을 분명 누군가 너의 가시를 보며 위로받겠지

  우린 서로의 야경 서로의 달 우린 서로의 야경 서로의 달


 자연이 드넓은 곳보다 마천루의 밤 빛을 좋아하는 나는 늘 도심을 여행지로 꼽는데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노동력을 배경으로 한 서글픈 아름다움’을 느끼곤 했다. 어둠을 잊게 하는 무수한 인공 불빛.


 그 불빛 아래에서 가시 돋친 채 일하거나 쉬거나 무언갈 하거나 하지 않는 우리 존재는 우리만이 이해할 수 있다. 가시는 나를 상처낼 수도 있지만, 손톱 끝에 아프게 낀 모래를 빼내게도 할 수 있다.

 

 새벽까지 음악 작업을 하고 퇴근할 때, 노동 집약적인 도시 서울의 밤을 올려다봤을 시선을 함께 좇는다. 이렇게 현실에 발 붙인 가사를 볼 때마다 남준이 고등학생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하고 스무 살이 되어 가수로 데뷔했단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난 역시 사람이 만들어 낸 도심의 야경이 좋다. 블라인드를 모두 올리고 창 밖을 보며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자동차 라이트를 보며 와인 한 잔 하기 좋은 밤이다.



6] 134340


  나에겐 이름이 없구나. 넌 빛이라서 좋겠다.

  난 그런 널 받을 뿐인데. 무너진 왕성에 남은 명이 뭔 의미가 있어.

  죽을 때까지 받겠지, 나 무더운 시선.

  아직 난 널 돌고 변한 건 없지만

  사랑에 이름이 없다면 모든 게 변한 거야.


 명왕성은 태양계의 9번째 행성이었으나, 2006년 행성에서 제외되고 왜소 행성으로 분류되면서 ‘134340’이라는 번호를 부여받았다. 한 때는 예쁜 이름과 함께 존재감도 있었다. 모두가 알았고 기억해 주었다.


 변한 건 하나다. 이름을 지웠을 뿐이다. 지금도 같은 궤도를 돌고 같은 모양이지만 이름 대신 여섯 자리의 숫자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대로 존재감이 사라졌다. 이젠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 앞으로 나는 이름을 잃어버린 존재로서만 존재할 거다, 영원히.


 명왕성의 스토리가 이런 가사로 완성되었다. ‘사랑에 이름이 없다면 모든 게 변한 거’라고.

 우리에게 부르는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내 이름을 괜히 한 번 더 발음하게 한다. 잊히지 않기 위해.



 P. S



 너의 dream 사실은 짐. 미래만이 꿈이라면 내가 어젯밤 침대서 꾼 건 뭐.

 꿈의 이름이 달라도 괜찮아.

 다음달에 노트북 사는 거 아니면 그냥 먹고 자는 거

 암 것도 안 하는데 돈이 많은 거

 꿈이 뭐 거창한 거라고 그냥 아무나 되라고 We deserve a life

 뭐가 크건 작건 그냥 너는 너잖어 / 낙원  LOVE YOURSELF 轉 'Tear



 방탄소년단의 황금 막내 정국이는 슈퍼스타 K 오디션에서 떨어진 직후 7개의 기획사 명함을 받았는데, 그중  당시 가장 작은 기획사였던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을 선택했다. 이유는 하나, '랩몬형이 너무 멋있어서' 였다. 방탄소년단의 남준이가 가진 역할을 단박에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가사가 좋은 곡으로 여섯 곡을 뽑았지만 이 숫자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모든 곡들이 가사를 곱씹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고 곡을 만드는 방탄소년단, 그리고 리더인 남준.

 

 우리 리더가 쓸 다음 가사가 기대된다. 그의 날선 통찰력이 영원히 기억될 노래를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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