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61
오후 5시만 넘어가면 하늘이 어둑해지는 계절, 유난히 짧아 지난히 집착하게 되는 가을 끝무렵의 퇴근길, 차 안에 흐르는 재생목록은 템포가 느린 곡들로 바뀐 지 오래다. 더 늦기 전에 오늘은 한 문단, 아니 한 문장이라도 써놓고 싶었는데 저 멀리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10차선이 넘는 사거리.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배달 어플을 켜 음식을 주문했다. 이런 날엔 좋아하는 노래들 틀어놓고 와인 한 잔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글은 내일도 쓸 수 있으니까. 그렇게 또 하루, 글을 쓰지 않은 날이 늘었다.
일상과 같은 덕질은 숨처럼 붙어 있었지만, 글을 쓰는 동력은 희미한 날들이었다. 마음 한편엔 '써야 하는데' 하는 혼자만의 부채의식을 씨앗처럼 품었지만 도통 책상에 앉지 못했다. 변명하자면 올여름은 무척 더웠고, 선선한 가을은 너무 짧았고, 바이러스의 기세는 도통 꺾이지 않은 탓이다. 꾸준히 공개되는 활동 떡밥도 스크롤 한 번, 재생 한 번으로 성의 없이 소비하던 어느 날 울린 트위터 알람.
BTS PERMISSION TO DANCE ON STAGE - LA 공연 개최
이번에도 온라인 콘서트인가, 하며 포스터를 살피는데 11월 27,28일, 12월 1,2일 LA Sofi Stadium이라고 표기되어있다. 그리고 올라온 영상 하나.
그동안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며 이제 permission 없이 춤출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니 곧 만나자는 메시지가 담긴 영상이었다. 며칠 전 UN 총회가 끝나고 켰던 브이앱에서 미국이 시차가 맞다면서 장난스럽게 눈빛을 교환했던 게 확정된 이 공연 때문이었나 보다. 2년 만에 열리는 오프라인 스타디움 콘서트. 이걸 품고 활동하는 게 얼마나 즐거웠을까, 얼른 말하고 싶어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출근 등록을 마치고 사무실 책상에 앉아 달력을 봤다. 연말까지 쓸 수 있는 연차가 11일이나 남아 있고, 중요하게 맡고 있는 프로젝트는 11월 중순이면 결과보고서까지 얼추 끝낼 수 있다. 백신 2차 접종도 정국이 생일에 완료했고, 월급 인상분도 곧 소급해서 들어올 예정이다. 매번 느끼지만, 나랑 방탄소년단 참 잘 맞다. 모든 주변 상황이 공연을 직접 가서 보라고 떠미는 것만 같다. 공연 날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회사 시스템과 항공권 예약 사이트를 같이 띄웠다. 현지 시간을 감안하고 한국에 도착해 PCR 검사를 받고 출근하는 일정까지 체크한 뒤 스케줄을 짰다. 그에 맞춰 일단 휴가 결재부터 상신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공연을 볼 준비를 모두 끝냈다. 글을 써야지, 써야지, 하던 것이 무색하게 책상 앞에 자발적으로 앉아 썼다. 몇 달만의 덕후 일기는 그 준비 과정을 담았다. 기록하지 않으면 휘발된다. 그러면 역시 쓰게 돼 있다.
1. 역대급 티켓팅
PERMISSION TO DANCE ON STAGE(앞으로 퍼온스로 줄여 쓴다) LA 공연 공지가 업로드된 건 9월 28일. 내가 항공권과 호텔, 이스타(ESTA) 결제를 마친 건 9월 29일이다. 이코노미보단 비즈니스 좌석을 타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 그간 모은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쓰려고 했더니 공연 일정에 맞게 출도착 하는 아시아나 비즈니스 좌석이 모두 만석이었단 사실. 이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왕이면 직항 편을 이용해야 했고 출도착 시간대와 가격이 괜찮은 대한항공 이코노미 항공권과 Sofi Stadium과 가까운 공항 근처의 호텔을 예약했다.
호텔 예약 TIP.
국내외를 막론하고 방탄소년단의 콘서트가 개최되는 날엔 공연장 근처 숙소를 비롯 많은 숙소들에 예약이 몰리기 때문에 공연 일정에 닥쳐 호텔을 구하는 게 쉽지 않고, 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평소보다 훨씬 높은 값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보통 콘서트 일정 공지가 티켓팅 공지보다 먼저 나오기 때문에 공연을 보러 갈 생각이 있다면 일단 호텔의 무료 취소 가능 룸으로 예약해놓는 걸 추천한다. 이번에 예약한 호텔 역시 내가 예약한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 세 배의 값이 뛰었다.
2년 만에 열리는 오프라인 콘서트를 보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역시 이왕 LA를 가는 만큼 주요 명소들은 방문하고자 싶었다. 멤버들이 공연이나 현지 방송 등을 위해 자주 방문하는 곳이 LA라 곳곳에 멤버들 흔적이 있는 곳도 많았고, 몇 해 전 n차 관람했던 영화 <라라 랜드>의 배경장소나 베니스 비치 등은 일정을 잘 조율하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연이 없는 날엔 다운타운으로 이동하고자 지난 시카고 공연 때 묵었던 프리핸드 호텔의 LA 지점을 추가로 예약했다. 제일 가고 싶은 <The Broad>도 가깝고 아침 일찍부터 여는 힙한 카페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Sofi Stadium이 있는 잉글우드처럼 다운타운도 치안이 좋지 않은 데다가 차량을 따로 렌트하지 않을 계획인 나 같은 1인 외지인들에게는 다운타운의 호텔을 추천하지 않는다는 조언에 비교적 안전하다는 웨스트 할리우드 쪽의 호텔로 예약을 옮겼다. 관광이 목적이 아닌 여행.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이다.
항공권도 호텔도 이스타 비자도 결제를 끝냈으나 공연 티켓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터. 티켓마스터 티켓팅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 이번 티켓팅은 여러 날짜에 나누어 이루어졌다. 작년 Speak yourself 북미 공연의 VIP 티켓을 구매했었던 고객들이 1순위, 일반 좌석을 구매했었던 고객들이 2순위, 팬클럽 멤버십 가입자들 중 콘서트 예매 코드를 받은 사람들이 3순위였다. 나는 작년 시카고와 뉴욕 공연의 VIP 좌석을 예매한 뒤 취소했던 터라 VIP 코드를 받아 1순위로 티켓팅을 진행할 수 있었다. VIP 좌석을 구매했었던 사람들의 수가 한정적이고 상황상 공연을 보지 못할 수도 상당할 것 같아 티켓팅은 비교적 수월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늘 티켓마스터는 예상을 빗나간다.
한국 시간으로 10월 6일 새벽. 나는 일찍부터 일어나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친 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자리를 잡았다. 결제카드도 미리 연동시켜놓았고, 이전에 내가 작성한 Speak yourself 사운드 체크 티켓팅 성공기도 다시 읽었다. 티켓팅 시작 정각이 되자 화면은 웨이팅 라인으로 넘어갔고, 대기 숫자가 줄어들기만을 기다렸다. 수십 분이 지났을까. 드디어 티켓을 고를 수 있는 화면으로 넘어갔고, 적당한 숫자의 그라운드 좌석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좌석을 직접 선택하는 건 모험이란 걸 이미 경험해본 터. Best Seats 중 제일 위에 뜬 좌석을 선택해 결제로 넘어갔다. 주황색 동그라미에 하얀 별표가 있는 좌석. 사운드 체크 패키지였다. 카드 정보가 미리 저장돼 있었기에 CVV 3자리만 넣으면 끝이었다. 침착하게 작성한 뒤 완료 버튼을 눌렀다. 몇 초가 지났을까. 에러 메시지가 뜨며 결제가 실패했다는 문장이 떴다.
다시 전 화면으로 돌아와 그다음 좌석을 골라 결제로 넘어갔다. 이번에도 결제 실패. 그 사이, 좋은 좌석들은 쑥쑥 빠졌다. 혹시 몰라 다른 카드로 결제를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커뮤니티에 들어가 반응을 살펴보니 일부 성공한 사람과 대부분 실패한 사람들이 우왕좌왕한 채였다. 벌써 티켓 결제 실패만 스무 번을 넘어갔다. 이쯤 되면 한국에서 발급된 카드의 예약을 막아놓은 것이 아니냐는 성토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출근 시간. 마음을 조금 비우면서도 도저히 포기가 안 되는 어정쩡한 상태로 일단 예매 창을 끈 뒤 차키를 챙겼다.
회사에 도착해 티켓마스터에 문의 메일을 넣었고, 몇 번의 자동 응답 메일을 거쳐 모바일이 아닌 다른 디바이스를 통해 결제를 진행해보라는 답을 받았다. 그제야 크롬을 열어 티켓팅을 시도하니 이번에도 몇 번의 에러 메시지를 받았지만 얼마 후에 결제를 완료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예매에 성공한 공연은 이틀 차인 28일 공연. 바로 3회 차 공연 티켓 예매에 돌입했다. 첫콘과 막콘은 무대와 가까운 자리에 앉고 싶어 과감히 예매를 포기하고 리셀 티켓을 노리자 싶었기 때문이다. 그라운드 좌석은 이미 텅 비어있었고 1층 일부 좌석과 2층 이상의 티켓이 남아있었다. 1층 좌석 중 돌출 무대와 가까운 쪽 좌석을 선택했다. 티켓팅을 시작한 지 일곱 시간은 족히 흐른 점심시간. 겨우 티켓 두 장의 예매를 끝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듯해 꼼짝도 하기 싫었다. 드물게 점심을 거른 날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여느 때처럼 업무를 하는 중간중간 트위터나 커뮤니티에 접속하던 중 방금 올라온 글 하나를 클릭했다. 지금 티켓마스터가 본무대 양쪽 구역의 시야 제한석을 오픈했다는 것이다. 바로 사이트에 들어가 확인하니 본무대 끄트머리에 걸려 본무대와 돌출무대를 모두 보기 괜찮은 좌석들이 선택 가능하게 열려 있었다. 그라운드 끄트머리 좌석보단 단차가 있는 이 좌석들이 훨씬 괜찮을 것도 같다. 막콘을 바로 결제 완료했다. 첫콘까지 결제를 완료할까 하다가 첫날만큼은 프리미엄을 조금 붙이더라도 좋은 좌석에 앉고 싶단 욕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한 회 더 티켓팅을 완료했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다. 사이트를 닫고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첫콘 티켓을 결제하기까지 한 달이 더 소요됐다. 2년 만에 열리는 오프라인 콘서트인 데다 이 이후 콘서트 일정이 오픈되지 않은 상황이란 특수는 공연 티켓의 값어치를 더욱 상승시켰다. 약 4~500달러에 구매가 가능했던 그라운드 티켓의 리셀가는 최대 만 오천 불까지 치솟았고 그 좌석마저도 많지 않았다. 보통 공연이 가까워질수록 리셀가는 안정을 찾아가는 편인데도 이번 공연만큼은 티켓을 구하는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티켓값의 변동이 없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현지인과 직접 거래하는 것도 고민해보았으나 공식적인 루트가 아닌 트랜스퍼는 공연 입장 때까지 불안할 수 있어 이 방법은 과감히 포기했다. 공연에 가까워질 때까지 더 기다릴 것인가, 그냥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티켓을 구입하는 걸 선택할 것인가의 고민은 이만한 좌석을 나중에 구할 수도 없을 것 같단 생각으로 후자의 손을 들었다. 첫 티켓을 구매한 지 딱 한 달이 지난 11월 5일, 결국 티켓마스터 사이트에서 원가의 n배를 주고 첫콘 1층 좌석 한 자리를 결제했다.
'티켓 예매 첫날에 1층이라도 예매했어야 했는데', '적어도 본 무대 옆 시야 제한석이 오픈됐을 때 게 중 괜찮은 좌석으로라도 예매했었어야 했는데'란 후회는 짧게 하고 끝냈다. 마음을 갉는 것으로 따지면 감히 역대급이었던 티켓팅을 마무리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퍼온스 공연 4회 다 보는 사람. 네, 그게 바로 접니다!
티켓마스터 티켓팅 TIP.
핸드폰과 컴퓨터 모두 준비된 곳에서 진행할 것(Speak yourself 공연은 크롬으로 접속되지 않아 핸드폰으로만 예매가 가능했고, 퍼온스는 티켓팅 첫날엔 핸드폰 결제가 막혀있었다. 사실상 복불복이다). 카드 결제 정보는 사전에 등록해놓을 것. 티켓마스터에 메일 보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 그리고 티켓은 보일 때 예약할 것.
2. 온라인 콘서트는 예행연습
처음 온라인 콘서트를 봤을 땐 그랬다. 이렇게라도 볼 수 있는 게 어디냐, 이걸로도 충분하다고. 그러나 몇 번의 온라인 공연이 좀 더 있은 뒤 맞이한 퍼온스 온콘엔 이랬다. 좋긴 하지, 그래도 공연을 보는 느낌은 안 나.
처음 온라인 콘서트를 봤을 땐 그랬다. TV에 노트북도 연결하고 와인도 세팅하고 그때그때의 기분을 메모하고 아미밤을 흔들고 소리도 질렀다. 그러나 몇 번의 온라인 공연이 좀 더 있은 뒤 맞이한 퍼온스 온콘은 이렇게 준비했다. TV 연결 및 메모지 준비. 끝.
솔직히 말하자면 대면 공연이 없어지고 발매한 앨범들의 가사도 덜 외운 상태고, 꼭 <달려라 방탄>의 다음 회차를 보는 것 마냥 소파 아래 털썩 앉아서 좀 덜 흥분한 상태로 공연을 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연 시작 시간이 되고 VCR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넓은 잠실 주경기장에 <ON>의 전주가 흘러나오고 멤버들이 한 명씩 비치자 갑자기 불끈하며 눈물이 차올랐다. <ON>이 발매되고 2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직도 저 곡을 팬 한 명 없는 무대에서 부르고 있다니. 이걸 처음 듣는 첫콘은 대체 어떤 느낌일까.
공연 전 했던 브이앱에서의 대화도 생각났다. 잠실 주경기장만 여러 번 빌렸었다는 그 대화. 처음부터 없던 거라면 모른다. 한다고 했다가 취소되고 또 다시 준비했다가 엎어지는 것을 여러 번 겪었을 멤버들의 상실감을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게다가 역시 한국에서부터 시작하려고 준비했었다. <ON>에 이어 <불타오르네>와 <쩔어>로 이어지는 오프닝이 끝나자마자 아미밤과 샴페인을 챙겨 왔다. 누가 봐도 작정한 공연.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다음 콘서트는 대면이니 어쩌면 이 온콘이 마지막 온콘일 수도 있다. 일상적인 영상 보듯이 이렇게 루틴 하게 보면 안 되는 거였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이후 원가의 n배 값을 지불한 첫콘 티켓을 구입했다. 다음을 언제나 기약할 수 없고, 이 값을 지불하는 것과 이 첫콘을 실제 보는 것 중 내게 어떤 것이 더 가치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답은 명확했기 때문이다.)
Love yourself 콘서트부터 직접 관람해왔던 내게 <피 땀 눈물>과 <Young forever>는 감회가 새로울 곡이었고, <Dynamite>나 <Butter>, <Permission to dance>, 완벽하게 편곡된 <Black swan>은 콘서트 공식 무대를 처음 보는 기회를 가질 곡이었고, <Airplane pt.2>나 <뱁새>, <So What> 등은 이전보다 더 신나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이었다. 멤버 개인 곡들을 과감히 포기하고 일곱 전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하며 이끌어가는 공연 형태. 이렇게 목말랐었다. 우리도, 너희도.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그 도시에서 들으면 좋을 것 같은 곡목들을 모은 재생목록을 만들곤 한다. 이번 재생목록은 두 개로 나누어 만들어야겠다. 하나는 LA의 날씨에 어울리는 곡들로, 하나는 퍼온스 셋리들로. 온콘으로 예행연습은 마쳤으니 이제 실전 무대만 남았다. 그러니 오늘부터 <Permission to dance> 가사 외우기 특훈 시작.
3. 제이가 J 했다.
상대의 성격을 궁예 하기 위해 혈액형을 묻던 시대에서 MBTI를 묻는 시대로 진화했다. 4지선다에서 16지선다로 비교적 다양한 답을 구하게 바뀐 것이다. 상대의 MBTI를 묻고 자신의 MBTI를 핑계 혹은 방패로 흔히 쓰이게 되자 나도 MBTI 검사를 해봤다. 그리고 할 때마다 조금의 변동도 없이 ISFJ가 나온다.
한국 사람들 중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ISFJ의 특징 중 하나는 계획형이라는 것이다. 알파벳 J가 바로 계획형을 대표하는 알파벳이다. 주말에 할 일을 주중에 미리 정리해놓고 업무 전 리스트를 꼭 작성한 뒤 시작하는 나는 특히 여행에 있어 무척이나 계획적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범위의 일들이 아는 사람 없는 해외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가능한 최대한 준비를 해간다. 하물며 바이러스가 아직 수그러들지 않은 상황인 데다 공연도 봐야 하고, 일부 일정까지 소화할 예정이라면 이전보다 더 많은 계획과 예약, 준비가 필요했다.
항공권, 호텔, 이스타 비자 결제를 끝낸 뒤 보장을 최대로 높인 여행자보험을 결제했다. 그리고 한글 파일을 켜 표를 그렸다. 9칸의 각 첫머리에 날짜를 쓰고 각각 묵게 되는 호텔의 이름을 적었다. 출도착 날짜는 한국 시간과 현지 시간을 구분했고 공연을 봐야 하는 날엔 줄을 하나 더 그어 일정을 따로 표기했다. 미국 스타디움은 작은 지갑 정도의 가방이 아니면 가방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투명한 PVC만 입장이 가능하다. 2년 전에 사용했던 PVC 가방 대신 새로운 가방을 검색했다. 크로스로 메는 형태가 두 손이 자유롭고 비교적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공연에 필요한 내용물을 투명하게 들고 전체 일정을 소화할 순 없을 터. 공연 전 호텔에 들러 스타디움 가방을 챙기는 일정을 위해 이동 시간이 필요함을 각 날짜에 표기했다.
이쯤 되면 어떤 스타일인지 짐작이 가시겠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Sofi Stadium이 있는 잉글우드는 우범지대에 속한다. 그래서 티켓마스터 티켓팅 땐 주차 자리도 추가 구매할 수 있게 돼 있었다. 대중교통보다는 차량을 이용해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공연장까지 도착하는 건 우버나 리프트를 이용하면 되겠지만 문제는 공연이 끝나는 시점이다. 앵콜곡까지 끝나고 공연장을 빠져나오면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 주차된 차를 빼느라, 각자 우버나 리프트를 부르느라 공연장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 자명했다. 최악인 건 인터넷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을 상황이다. 우리나라 같은 인터넷 강국도 콘서트장에선 인터넷이 버벅거리는데, 밤은 깊고 우범지대로 유명한 지역에서 호텔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찾은 것이 아미 버스였다. 미국 내 거주하는 한국 팬들을 중심으로 공연장과 공항 근처 호텔을 왕복 운행하는 버스를 대절한 것이다. 무료 봉사에 가까운 터라 요금도 저렴했다. 주말인 앞 두 공연은 이미 예약이 마감이라 3,4회 차 공연 이동을 바로 예약했다. 왕복 요금이지만 공연장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편도만 이용하겠다는 일정도 체크 완료. 조금 더 찾아보니 현지 한인 업체들도 공연장 버스 이동 예약을 받고 있었다. 팬들이 직접 대절한 버스보다는 비싸지만 안전히 이동할 수 있다는 게 먼저였다. 왕복 요금을 결제한 뒤 역시 편도로만 이용하겠다는 일정도 체크했다.
미국에 도착하려면 백신 접종증명서와 출발 전 72시간 내에 받은 PCR 음성 확인서가 필요하다. 특히 영어로 된 증명서를 받기 위해선 유료 검사소를 가야 했고, 증명서를 메일로 받을 수 있으면서 결과 나오는 시간이 짧게 보장된 곳을 찾아 출발 이틀 전으로 예약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도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출발 전 72시간 내에 받은 PCR 음성 확인서가 필요하다. LA의 경우 무료 검사소와 유료 검사소 등이 많았으나 무료로 검사받는 곳들은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차량을 꼭 탑승해야 한다거나 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 4, 5일이 나오는 등 복불복인 경우가 많아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의 유료 검사소에서 24시간 내에 결과가 나오는 검사로 예약을 마쳤다. PCR 검사지는 꼭 출력을 해야 하므로 호텔 내에서 출력이 가능한 비즈니스 센터도 체크 완료.
주요 이동 방식과 PCR 검사 예약을 마쳤으니 이제는 내 일정이었다. 구글 지도를 켜고, 인스타그램을 켜고, 네이버 블로그를 켠 뒤 며칠을 검색했다. LA 지형이 머릿속에 들어오고 LA에서 꼭 먹어보고 싶은 음식들의 리스트가 잡혀갈 즈음 한글 파일이 빼곡히 찼다. 프라이빗하게 이동할 수 있는 투어도, 입장객을 제한하는 곳들이 많아 가고 싶은 미술관도 사전 예약을 끝냈다.
인천공항까지 가는 왕복 버스 노선이 없어진 동네. 이동을 간결하게 하기 위해 자차로 공항까지 가자 마음먹었고, 그 즉시 인천공항 장기주차장의 자리도 예약했다. 돌아올 땐 운전을 위해 비행기에서 알코올 섭취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부도 혹시 몰라 적어두었다.
마스크와 손세정제, 비상약을 구비했고 챙겨야 할 것들의 리스트를 계속 덧붙여가고 있는 지금.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제이가 J 했고, J 할 예정이다.
4. 아미는 위대해
LA 일정을 준비하며 멤버들이 그동안 LA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한 번씩 체크했다. 오래전 스냅백을 쓴 지민이 사진을 찍은 곳은 그로브몰 초입이고, 가장 최근 호석이와 태형이가 다녀온 미술관이 The Broad라는 것은 알겠는데 특정 지명이 드러나지 않는 곳들은 분위기만 추측할 뿐 현지인이 아닌 이상 어디인지를 알 수 없는 곳들이었다.
내가 짠 일정과 멤버들이 방문한 곳들의 동선이 맞으면 성지 순례하듯 다녀보고 싶은데, 하던 찰나 아래의 사이트를 알게 됐다.
https://www.usbtsarmy.com/bts-army-in-usa/los-angeles
LA 내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 멤버들이 방문했던 레스토랑, 공연장과 관련된 정보 등 방탄소년단과 관련한 LA 정보가 가득해 있었다. 현지 팬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깨알 정보들이 구석구석 들어 있는 사이트. 덕분에 작년에 태형이가 배우 최우식과 함께 햄버거를 먹었던 곳이 윌 로저스 기념공원이라는 것도, <ON> 뮤직비디오를 찍은 곳이 Sepulveda Dam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물론 모든 곳들을 방문할 순 없어 일정 중에 잠깐 방문이 가능할 몇 곳만 체크해놓았지만 이 이타적인 정성에 탄복했다.
어느 팬덤이건 잡음이 있다. 그저 좋아하는 대상이 우연히 같았을 뿐 각자가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팬덤이 좋은 건 다수의 기저에 이타심이 있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걸 함께 나누고, 함께 알 수 있게 해 주고, 자발적으로 번역하고 공유하는 따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때 정국이가 정말 맛있게 먹었던 핫도그의 상점의 이름을 이 사이트에서 다시 한 번 찾아보며 생각한다. 역시 아미가 최고다.
5. 이런 여행도 있다 part. 3
면역저하자로 분류돼 백신 부스터 샷을 맞았다. 이 와중에 미국 방문 전에 부스터 샷까지 맞을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바이러스라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건 이 준비記의 디폴트.
현지에 도착하기도 전이지만 그간의 여행들과 비교하자면 지출이 2배 가까이 늘었다. 게다가 바이러스라는 위험 비용까지 생각한다면 어쩜 측정 불가능한 지출일지도 모른다. 비용도, 일정도, 동선도 말도 안 되는 것들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간다. 도전이다.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험. 또다시 이 문장을 꺼내온다. 이런 여행도 있다. 있을 수 있다.
P. S.
<경제 전쟁>의 저자이자 레바논계 미국 금융가인 Ziad K. Abdelnour는 말했다. 행복할 때 약속하지 말고, 화났을 때 답변하지 말고, 슬플 때 결심하지 말라고.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행복할 때 한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책임감이 얼마나 큰 지 아냐고.
공연을 직접 보는 행복이 남은 상태에서 62번째 덕후 일기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이곳에 남긴다. 글을 쓰건 쓰지 않건 내 덕질은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겠지만, 그런 나를 여전히 글 쓰게 하고 덕질하게 하는 행복이 도처에 있다.
그럼! 나는 방탄소년단 덕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