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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un 29. 2021

60. 단어 사전 pt.4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60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 밤새 뜬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핸드폰을 켜 확인한 뒤 출근 준비를 하는, 업무 하는 중간중간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듣는, 곧 업데이트된다는 MD 상품의 목록을 훑어보며 이번 달 카드값이 또 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그런 평범한 하루였다. 아래 제목의 기사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단독]‘보라해’ 상표 특허 출원… 방탄소년단 팬덤 뿔났다(종합) 

방탄 뷔가 만든 신조어 '보라해' 상표 출원한 화장품 업체         


점심시간에 잠깐 둘러본 팬 커뮤니티가 뒤숭숭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한 네일 제품 브랜드가 2020년 9월, '보라해'라는 단어로 상표 특허를 출원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보라하다'는 2016년 11월, 방탄소년단 세 번째 머스터 <ARMY.ZIP+> 공연에서 처음 쓰인 말로 중앙 제어라는 시스템이 따로 없던 당시의 아미밤에 보라색 비닐을 씌워 공연장을 보랏빛으로 물들게 한 팬들의 이벤트를 본 태형이 "무지개의 마지막 색이 보라색인 것처럼 우리 서로 마지막까지 믿고 사랑하자"는 뜻으로 즉석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내가 쓴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이란 책 제목 역시 이 '보라해'에서 따왔다. 2018년 파리 콘서트 중 팬들을 향해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한 태형의 말 중 '사랑'을 '보라'로 고쳐 쓴 것이다. 이제는 언론에서도 방탄소년단이나 아미 앞에 보라하다는 수식어를 쓸 정도로 '보라해'는 우리의 대표적인 언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 말이 어느 브랜드의 상업적 상표로 출원이 됐다니. 팬덤이 뒤집힌 건 당연한 일이었다. 


팬들은 업체에 상표 등록 철회를 정중히 요청하는 항의를 진행했고, 기사가 게재된 지 하루 만에 업체는 사과문을 올린 뒤 상표 출원을 취하하였음을 알렸다. 그리고 약 일주일 뒤인 2021년 6월 4일, 방탄소년단의 소속사인 하이브에서 아티스트 보호 등의 차원으로 특허청에 보라해 상표권을 등록했다. 


SNS의 프로필을 보다 보면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방탄소년단 팬임을 알게 하는 것들이 있다. 코알라, 햄스터, 고양이, 다람쥐 등 멤버 각자와 닮은 동물로 방탄소년단 멤버를 표현한다거나, 보라색 하트의 습관적 사용, '보라해'나 '아포방포'같은 단어들의 사용 유무 등이 그것이다. 우리끼리의 표식 몇 가지, 우리만의 단어 몇 가지면 긴 글을 풀어쓰지 않아도 "맞아요. 저 방탄소년단 팬이에요" 할 수 있게 됐다.


그게 우리다. 원래 사용하던 의미와 전혀 다르게 쓰고 있는지 조차 가물거리는 말과 표현, 새로 만들어 암호처럼 쓰이는 단어, 그걸 습관처럼 사용하고 있는 우리다. 한 번 바뀌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듯 바뀐 채 남은 단어가 여기 또 있다. 사전적 의미에 우리들만의 이야기와 추억이 덧입혀진 단어들이다. 소중한 우리만의 말과 단어가 그새 또 늘었다. 그 몇 가지를 여기 기록한다.




1. 디오니소스 하다


가만히 있어도 뒷목이 뜨끈해지는 후덥지근한 기온. 이제 막 6월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벌써 덥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환기를 시킨 뒤 에어컨부터 켠다. 미지근한 온도로 씻고 나와 와인과 잔을 챙겨 거실로 나온다. 역시 여름엔 자잘한 버블이 간질거리는 샴페인이 딱이다. 얼음을 가득 채운 칠링 백에 샴페인을 담아 놓고 TV를 켠다. 야구 중계나 밀린 드라마, 아니면 또 봐도 좋은 <본 보야지>나 <달려라 방탄> 에피소드를 튼다. 최근에 산 플루트 잔에 샴페인을 쪼르륵 따른다. 탁자 위에 놓인 와인과 잔의 각도가 꽤 예뻐 보인다. 사진을 한 장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다. 글은 짤막하게 적는다.


저는 지금 디오니소스 하는 중이에요


와인이 어쩌고, 술을 마시니 어쩌고 많은 말들이 필요 없다. 그리스 신화 등장하는 술의 신 이름 하나면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 하다'는 표현은 2020년 1월 15일 새벽 네 시경, 위버스에 남긴 태형의 댓글 하나로부터 시작되었다.


잠드는 시간이 늦는 태형이는 보통 새벽에 위버스에 접속해 팬들과 대화를 나눈다. 팬들과 게임을 같이 하거나 댓글로 소통하거나 팬들을 위해 그림 그리기 대회 등을 개최하는 등 잠들지 않는 새벽을 팬들에게 할애하여 시간을 보낸다. 1월 15일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어느 팬이 혹시 지금 태형이 깨어있냐고, 잠들지 못하고 있냐고 묻는 글에 태형이 이모티콘을 남기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멤버들이 글을 남기면 알람이 울리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석진이 태형에게 알람 울리지 말고 얼른 자라는 댓글을 남겼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하느냐는 팬의 물음에 가족이랑 한 잔 했다고 태형이 글을 남긴 시간이 오전 4시 28분. '한 잔 했어요'가 '한잔해어뇨'로 쓰인 채였다.


그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건 태형만이 아니었는지 금세 정국이가 등장해 위버스에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석진과 정국도 아직 깨어 있다고 여긴 태형이가 본가 집 너른 식탁에 앉아 리델 레드 타이 그랑크뤼 부르고뉴 잔을 앞에 두고 반려견 탄이를 안고 있는 자세의 사진을 올렸다. 탄이가 미용했으니 봐 달라는 글에는 '정국아'가 '정구강'으로, '탄이 미용함'이 '탄이미용ㅇ함'으로 오타가 나 있었다. 


그러자 정국이


"뭐야 뷔형 ㅋㅋㅋ", "뷔형 지금 디오니소스야?", "나도 디오니소스 할래 ㅠ"


라고 답했다. 손가락이 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자꾸 옆 글자를 눌렀을 태형의 글에서 취기를 느꼈으리라. 와인을 마시는 중을 '디오니소스 중'으로, 나도 와인 마실래가 나도 '디오니소스 할래'로, 와인 마시다가 '디오니소스 하다'가 되었다. 술을 마시다는 의미의 새 표현, '디오니소스 하다'라는 말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냥 취해 마치 디오니소스. 한 손에 술잔, 다른 손에 든 티르소스.

투명한 크리스털 잔 속 찰랑이는 예술. 예술도 술이지 뭐, 마시면 취해.


우리에게 디오니소스는 방탄소년단의 Speak yourself 스타디움 콘서트 첫 곡인 방탄소년단의 노래이자, 포도주의 신, 그리고 '음주'를 뜻하는 단어다.


덧) 


디오니소스 하다와 비슷한 유사어로 '쩨끼럽(째끼럽, Check it up)'이 있다. 남준의 입에 붙은 단어로 모든 동사를 '쩨끼럽'으로 변환하여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밥 먹으러 갔다가 운동 쩨끼럽 하려고요', '우리답게 무대 위에서 열심히 쩨끼럽 하겠습니다', '퇴근 쩨끼럽하자', '제이홉 완전 쩨끼럽했다' 등으로 쓰면 된다. '디오니 소스 하다'가 마시다의 의미에 한정적으로 쓴다면, '쩨끼럽'은 보다 범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단어를 툭툭 만들어내는 우래기들. 아무래도 천재인 게 맞는 것 같다.

 


2. 라지벌랄라


가끔은 전혀 예상치 않은 순간들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지기도 한다. 힘들이지 않고 그냥 툭 했을 뿐인데 어떤 방점을 찍게 되기도 한다. 지민이에게 <달려라 방탄> 방탄 골든벨 편을 찍은 날은 아마 그런 날들 중 하나였을 것 같다. 일명 예능신이 보우하사 지민을 굽어 살펴 뜻하지 않은 유행어를 던져준 날. 


교복 차림을 한 멤버들이 스튜디오에 모였다. 방탄 골든벨은 오래전 <가족오락관>을 생각나게 하듯 추억의 게임들로 진행되는 편이었다. 석진이 MC가 되고 지민 윤기 호석이 한 팀, 남준 태형 정국이 한 팀이 되었다. 제시된 주제에 맞춰 순서대로 답을 맞혀야 하기도 했고, 석진이 그리는 그림에 해당하는 속담이나 단어를 맞추기도 했고, 청기 백기 게임도 했다. 그리고 이런 데에서 빠지지 않는 게임. 음악이 나오는 헤드폰을 끼고 제시된 단어를 잘 전달해 맞추는 고요 속의 외침이 곧 시작되었다.


먼저 지민, 윤기, 호석 팀의 차례였다. 석진은 각 팀의 가장 마지막 순서로 멤버를 거쳐오며 변형된 단어를 잘 알아맞혀야 하는 자리에 섰다. 롤러코스터가 콜라고지정, 교랑교지처, 노래 체인점이 되었고, 공공장소가 종족 탈주, 종족 날수, 노조 탈출이 되었다. 멤버들 중 유독 지민이 잘 못했다. 잘생겼다를 장첸연애로, 스케이트를 지네기빼로 전달했다. 팀의 구멍은 지민이었지만 팀을 살리는 건 석진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게임 센스가 있는 석진이 장첸연애를 다시 잘생겼다로 바꿔 맞추며 점수를 채워나갔다.


그렇게 제시된 다음 단어는 까르보나라. 첫 차례인 윤기가 입을 크게 벌려 까르보나라를 외쳤고 다음 순서인 호석이 금세 제시어를 알아챘다. 지민을 돌려세워 까르보나라를 외쳤으나 지민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호석의 입모양을 천천히 따라한 뒤 나지막이 "토니몬타나?" 하더니 "라지모라라?" 한다. 발음을 채 갈무리하지 못한 채 시간상 마지막에 서 있는 석진을 향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또박또박 뱉은 단어는 '라지벌랄라'. 본인도 이게 대체 무슨 단언가 싶은 의아한 표정으로 라지벌랄라를 몇 번이고 더 발음했다. 이걸 까르보나라로 맞춘 석진이 킬링 포인트. 발음이 변형되어 가는 과정에서 웃음을 일으키는 게임답게 이 날 방송이 나간 뒤 라지벌랄라는 지민의 엉뚱한 전달과 발음 자체의 독특함에 힘입어 금세 유행어가 되었다.


이후 팬들과 멤버들은 라지벌라라란 단어를 밈처럼 쓰기 시작했다. <달려라 방탄> 에피소드 97 <파자마 파티> 편에선 호석이 '벌랄라 벌랄라 라지벌랄라' 노래를 부르는 게 담겼고, <인 더 숲(In the SOOP)>에서는 바깥에서 열 수 없게 잠긴 문 앞에서 암호를 대라는 멤버들의 농담에 "라지벌랄라?"라고 답한 태형가 있었고, 최근 '라지벌랄라타이틀곡부탁'이란 닉네임을 가진 팬이 위버스에 남긴 글에 "라지벌랄라 타이틀 밀어볼게요" 댓글을 담긴 남준도 있었다.


지민 신조어 '라지벌랄라' 뭐길래… 이제는 글로벌 유행어로        2021.02.02


엔터테인먼트 웹사이트 버즈피드 인디아(BuzzFeed India)는 지난달 29일 공식 SNS에 "지민이 말하는 '라지벌랄라'가 내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Jimin saying ‘lachibolala’ lives rent free in my brain)며 지민의 신조어 '라지벌랄라' 파급력을 알렸다.

매체는 방탄소년단을 모르는 동생에게 지민의 '라지벌랄라'를 설명하는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Incredibles) 패러디 사진을 함께 게시해 글로벌 네티즌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2017년에 촬영해 2018년에 방송된 뒤 꾸준히 언급되어 쓰이다가 2021년 기사에도 등장하는 단어. 우리는 이제 까르보나라 대신 라지벌랄라를 먹는다.


배고프다. 오늘 점심 라지벌랄라 어때?



3. 오안취


2020년 9월 1일은 두 가지 이유로 잊을 수 없는 날짜다. 첫째, 우리 막내 정국이 생일이자 둘째, <Dynamite>로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 날의 소감은 <September>라는 제목으로 덕후 일기를 남겼었다. 새벽 3, 4시가 되어도 잠이 들지 않은 채 빌보드 핫 100 1위 소감을 남기는 멤버들의 메시지가 띠링 띠링- 울려댔던 날. 그 메시지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 채 추스르지 못한 날 것의 감정이 우수수 담겨 있어 그 자체가 기념이었던 날. 


[V LIVE - 빌보드 1위 아미 모여라] 


그날 오후, 브이 앱 알람이 울렸다. 허겁지겁 접속하니 연습실에 두 줄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멤버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먼저 정국의 생일 축하가 시작됐다. 지민이 직접 가서 골랐다는 빨간 레드벨벳 케이크에 꽂힌 초를 정국이 후 불었다. 생일인데 빌보드 1위란 선물도 받고 좋겠다는 멤버들의 아우성에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는 정국이는 목이 잠겨 제대로 소리를 내지도 못하는 상태였고. 태형과 통화하며 "우리 성공한 거야"하고 운 지민과 "야 왜 울어"하며 울었다던 태형이나, 서로 메시지와 전화를 주고받으며 말도 안 되는 기록에 감격해 울며 서로 고생했다 치하했었다는 다른 멤버들 역시 모두 밤을 새운 부스스한 얼굴들이었다.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들뜸이 있었다. 좋아서 울었고, 그래서 피곤하지만 역시 좋다의 무한 루프. 어안이 벙벙하고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는 멤버들의 앞에 빌보드 핫 100 1위 기념 케이크가 추가로 등장했다. 이 기록을 제일 좋아해 주는 분들이 아미라면 그다음은 바로 자신 일거라는 윤기도, 주변 지인들한테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는 석진이도, 멤버들보다 조금 늦게 확인했지만 그만큼 더 기뻤다는 호비도 함께 촛불을 불었다. 오늘의 두 번째 케이크였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있는 상황이니 좀 쉬어도 될만하지만 이 라이브 방송이 끝나고 바로 안무 연습에 들어간단다. 멤버들 모두 티셔츠나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 등 안무 연습을 하기 위한 복장을 갖춘 채였다. 석진이 짐짓 세상에서 가장 좋은 단어가 있지 않냐며 '오안취'라고 하자, 남준이 옆에서 얼른 거들었다. 오안취라고 아냐며, 그건 '오늘 안무 취소'란 뜻이라고. 모두 박장대소하며 오늘쯤은 연습을 안 해도 괜찮지 않겠냐며 즐거워하는데 함께 웃으면서도 절대 '그러자'는 답변을 하지 않는 호비다. 안무 연습을 이끄는 호비가 끝까지 '오안취'를 허락하지 않자 그 단어는 쏙 들어간 채 라이브가 마무리됐다.  


2021년 페스타 고사 BTS 탐구영역 시험 16번은 초성을 보고 떠오르는 단어를 쓰는 주관식 문제였다. 다섯 개의 소문항 중 마지막 문제는 ㅇㄴㅇㅁㅊㅅ. 답은 오늘 안무 취소. 보라해, 아포방포, 매력 있나? 등과 함께 방탄소년단의 대표 단어로 꼽혀 문제로 출제되었다. 


빌보드 핫 100 1위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워놓고도, 밤새 잠들지 못하고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지쳐 잠든 몸을 이끌고도 멤버들은 연습실에 모였다. 온라인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시기긴 했으나 한 달도 넘게 남은 날이었고, 하루쯤은 축배를 들어도 충분했을 텐데도 오늘 안무 취소란 말에 끄떡도 하지 않는 안무팀장 호비와 그런 호비의 태도에 금세 수긍하고 라이브 방송을 마무리하는 멤버들이었다. 그게 지금의 방탄소년단을 만들었을 것이다.


오늘 안무 취소. 오안취. 멤버들에게 자주 닿지 않았기에 더욱 소중한 말. 가끔은 호비의 너그러운 허락 하에 오안취하는 날도 있길.



4. 외랑둥이


<Butter>가 써 내려가는 기록이 심상치 않다. 한국시간 6월 29일 새벽, 빌보드 핫 100 1위 자리에 <Butter>의 제목이 또 올랐다. 핫 100으로 데뷔한 이래 5주 연속 1위다. 빌보드 핫 100 역사상 1위로 데뷔한 곡 중 5번 연속 1위를 차지한 곡은 전 세계에서 단 11곡뿐이고 그룹으로만 따지면 최초란다. 그 곡이 방탄소년단의 <Butter>다.


빌보드 차트는 철저히 미국 내 기록이 기준이다. 핫 100은 매주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래 순위를 집계하는 차트로 스트리밍 실적과 음원 판매량, 라디오 방송 횟수 등을 종합해 순위를 낸다.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이 앨범 판매라는 비교적 팬덤에 기반한 차트인 것과 달리 핫 100 차트는 라디오 방송 횟수의 반영 비율이 높은, 보다 폐쇄적인 차트다. 한국어로 된 노래 <Life goes on>이 1위를 차지하고 <Butter>가 5주 연속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거대해진 현지 팬덤의 지지와 이 팬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높은 대중성으로 인한 결과라 할 수 있다. 


5주 연속이라니. 믿기지 않으면서도 기쁨에 서린 멤버들의 위버스 메시지를 먼저 본 뒤 접속한 트위터. 포털 사이트 인기 검색어 역할을 하는 트위터 트렌드 상위권엔 아래의 해시태그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외랑둥이의_수고는_우리가_알아 (#외랑둥이의수고는우리가알아)

#반랑둥이의_수고도_우리가_알아 (#반랑둥이의수고도우리가알아)


외랑둥이는 방탄소년단의 해외 팬을 부르는 말로 해외 팬과 사랑둥이의 합성어이고 반랑둥이는 해외에 살고 있는 한국 팬을 부르는 말이다. 


방탄소년단의 해외 팬들은 다른 K팝 팬들과 결이 조금 다르다. K팝으로 입덕 해 여러 가수들을 동시에 좋아하는 팬들과 달리 방탄소년단이란 그룹 자체로 입덕 해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팬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방탄소년단이 중소 기획사에서 힙합을 베이스로 데뷔한 아이돌이란 이유로 그들의 성과를 시샘하고 조롱하던 시기부터 방탄소년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고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알리며 한국의 팬들과 하나의 공동체로 함께 해 왔다. 


넓은 땅을 가진 나라에서 라디오라는 매체의 힘은 크다. 그렇기에 진입 장벽이 굉장히 높다. 이 라디오 매체를 뚫기 위해 해외 팬들은 각 라디오 매체에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지속적으로 신청해왔고, 라디오에 방탄소년단 노래가 선곡이 되면 라디오 담당자에 꽃다발과 편지를 보내 감사함을 표현하는 등 남다른 팬덤의 모습을 보여왔다. 물을 막는 둑이 작은 틈 하나에 터지듯, 현지 팬들과 에이전시의 노력에 힘입어 방탄소년단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배타적인 음악 시장에 입성하였고 천천히 단계를 밟아온 뒤 빌보드 핫 100 5주 연속 1위 가수가 될 수 있었다. 퀘스트를 깨는 해를 보내오며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낸 방탄소년단과 아미. 방탄소년단의 음반 판매량과 인기를 의심하던 일부 대중들이 방탄소년단의 위치를 수긍하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해외에서 달성한 그들의 기록을 통해서였다. 


2021 페스타 <아미 만물 상점>에서 남준이 말했다. 방탄소년단과 아미가 욕도 많이 먹고 고생했던 시절, 아미들이 자신들을 감싸주려고 마음고생하던 때, 자신들 역시 자신들을 증명하기 위해 이를 갈고 열심히 노력했었었기에 그 시절이 가치가 있었다고. 윤기는 우리도 우리지만 팬분들도 상처가 많았다며, 방탄소년단이 세상의 억압을 막아내야 하는데 팬들이 같이 막아냈기에 방탄소년단과 아미가 운명 공동체라 했고, 석진은 자신들의 성적은 자신들만 잘해서 낼 수 있는 게 아니고 아미가 뒤에서 힘을 써주고 다 만들어준 결과라고 생각한다 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 방탄소년단과 아미가 단순히 가수와 팬이라는 관계를 뛰어넘는 애틋함을 가지고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일부 K팝 해외 팬들이 문화적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하지 않은 상태로 여러 논란을 일으켜 '외퀴'라 불리는 것에 비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고자 노력하는 많은 해외 아미는 그래서 '외랑둥이'라 불린다. 


조직력과 소속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팬덤 문화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그들. <Butter> 5주 연속 1위는 방탄소년단의 노래와 팬들의 지지, 그것으로 말미암은 대중의 선택으로 인해 만들어졌다. 석진은 자신의 수고는 자신만 알면 된다고 했지만,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그들에게 꼭 표현해야 한다.


외랑둥이의 수고는 우리가 알아. 반랑둥이의 수고도 우리가 알아. 



5. 죄임스


2021 머스터 <소우주> 공연은 온라인으로 팬들을 만나는 공연 겸 팬미팅이었다.


오프닝 곡 <Life goes on>부터 <Butter>와 트로피칼 리믹스 버전의 <Dynamite>, 자리에 앉아 부른 <이사>와 유닛곡 <Stay>, <내 방을 여행하는 법>까지 한 시간 여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났다. 야외무대에 선 것만으로도 정말 공연 느낌이 나는지 멤버들은 시종일관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미리 녹음을 통해 전달받은 팬들의 응원소리가 포함된 <병>과 <불타오르네>,  <So what>의 무대가 연이어 이어진 뒤 멤버들이 의상을 갈아입는 동안 VCR이 온에어 되었고 나도 잠깐 숨을 좀 골랐다. 벌써 공연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VCR 영상이 꺼지고 무대 위에 나타난 정전(正殿). 일월오봉도 앞의 화려한 어좌(御座)에 턱을 괴고 앉은 금발의 왕, 어거스트 디 윤기가 등장했다. <대취타>였다.


누구보다 서로의 음악적 결과물에 진심인 멤버들인 건 아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취타>는 멤버 전체가 역할을 맡은 채 참여한 단체 곡으로 불려졌다. 갖가지 물건을 파는 저잣거리를 삿갓 쓴 지민이 <대취타>의 첫 소절을 부르며 지났고, <대취타> 뮤직비디오에 카메오로 출연했던 석진과 정국이 양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다음 소절의 랩을 주고받았다. 


남준은 검을 들고 나타난 사형 집행수 망나니로 죄인의 주변을 빙빙 돌며 "Who's the king? Who's the boss?"를 부를 때 흰 소복 차림에 까만 수염을 붙인 태형은 포승줄에 포박돼 무릎을 꿇고 앉은 그 죄인이었다. "당장 놈의 목을 쳐" 가사에 맞춘 남준의 칼이 휘둘리자 죄인인 태형이 모로 쓰러졌고, 자신의 소절이 시작되기 전 주섬주섬 일어나 맵시를 정리한 뒤 MC 자두답게 랩 파트를 맡아 부르기 시작했다. 


갓에 비단 한복을 차려입은 양반 제이홉의 "위만 보던 난 이제 걍 아래만 보다가 이대로 착지하고파"의 소절이 지나자 왕좌의 자리에서 검을 멘 윤기가 천천히 무대를 향해 내려왔고, 다음 곡을 위해 의상을 갈아입은 멤버들과 함께 <대취타>를 마무리했다. 


멤버 모두 각각의 캐릭터가 있었으나 노랗게 염색한 머리와 이국적인 외모로 다음 <대취타> 소절을 열창한 태형의 괴리된 모습은 '꼭 외국인인 제임스가 죄를 진 것 같다'하여 죄임스란 이름으로 각종 패러디를 쏟아냈다.  

 

너는 조정에 다시 뜬 햇빛 유생 시절 내 꿈들의 재림 

모르겠어 종묘사직 뭔지 혹시 여기도 꿈 속인 건지

꿈은 사막의 푸른 유배지 내 안 깊은 곳에 인의예지


정국의 유포리아에 합성한 <유배리아>나, 콘서트 <전하지 못한 진심>에 합성된 <전하지 못한 죄심>, '6월 조선, 가장 화려한 장단이 펼쳐진다. 내 죽기 전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소? 드랍 더 장단' 등 각종 영화 포스터 패러디에 <방탄소년단 뷔, '대취타' 죄임스 크닐나쓰 밈 '폭발적 인기'> 란 제목의 기사까지 나왔다. 이제 트위터에 죄임스를 검색하면 사용자에 방탄소년단이 나온다.


태형이 <대취타>에 진심이었듯 팬들도 죄임스에 진심이 되었다. 


어쩌겠는가. 뭘 해도 이야기가 만들어져 버리는 남다른 외모를 가진 태형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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