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Dec 07. 2021

62.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1)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62


그 옛날 노래 가사가 왜 자꾸 떠오르는 걸까.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사랑의 이야기 담뿍 담은 편지.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하늘이 푸른지 마음이 밝은지.


내게 LA는 단 한 번도 여행지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도시였다. 차를 렌트하지 않으면 다니기 어렵다는 정보나 약간은 부담스럽게 친화력 있는 미서부의 바이브는 그저 조용히 혼자 걸으며 여행하길 좋아하는 나와 대척점에 있는 곳이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LA를 갈 거면 뉴욕을 가지 싶기도 했다. 게다가 나는 수영을 못하고 뜨거운 햇살을 반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방탄소년단이 2년 만에 오프라인 대면 콘서트를 전 세계 오직 LA에서만 개최하지 않았더라면 역시 단 한 번도 여행지로 생각해 본 적 없었을 도시였다.


LA 일정을 어떻게 준비했는지는 아래의 지난 브런치 글로 대신하고, 마지막까지 빠진 짐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

한 뒤 혹시 모를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직접 운전해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문장으론 이렇게 짧지만 휴게소 한 군데 들르고, 주유까지 하고 나니 네 시간 반이 걸린 운전이었다.)


한적한 공항 내 유일하게 붐비는 대한항공 카운터에서 방탄소년단의 팬임을 옷이나 소품 등으로 표출하고 있는 여럿 사람들 속에 섞여 체크인을 마쳤다. 72시간 내 PCR 음성 확인서를 비롯한 각종 서류를 갖추고, 마스크를 포함한 개인 방역 물품들을 챙기고, 추후 발생할지도 모를 어떤 결과들을 감수한 사람들.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사랑의 행렬이다.


2년 만에 타는 비행기라서인지, 아니면 LA까지 직항으로 닿는 11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것인지 시간은 후딱후딱 잘도 갔다. 기내식 먹고 영화 좀 보고 잠깐 졸고 기내 엔터테인먼트 뒤적거리는 세상 제일 하찮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도착한 LA. 여자 혼자 입국하는 경우 훨씬 까다로운 심사를 거치게 된다는 LA이지만 입국 서류를 꼼꼼하게 준비한 것에 비해 입국 심사는 무척 쉽게 끝났다. 며칠 일정인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묻는 질문에 방탄소년단 콘서트를 보고 남는 시간 관광을 하겠다는 답을 했더니 '너도야?' 하는 얼굴로 무심하게 도장을 찍어주는 것으로 짧은 입국 심사를 끝냈다.


예상 도착 시간보다 훨씬 이른 오전 8시. 공연이 열리는 소파이(So-fi) 스타디움과 가까운 공항 근처 호텔에 짐부터 맡기고 우버를 불렀다. 후기가 좋거나 인스타그램 유명 맛집이든가 하는 이유로 가고 싶은 장소를 잔뜩 표기해놓은 구글 지도를 펼쳐 게 중 베니스 비치와 산타모니카 피어 중간 즈음에 위치한, 동선이 제일 애매해 갈 수 있을까 했던 카페를 목적지로 삼았다. 생각지 못한 남는 시간엔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을 해야 한다.


민트색 타일 외관이 튀는 블루 보틀에 도착했다. 카페 라테를 주문하자 어떤 우유를 선택하겠냐는 질문을 세 번째 만에 알아듣고 일반 우유를 골랐다. 늘 그렇듯 이런 선택 질문이 익숙해질 즈음 떠나게 될 것이다.


구글 지도를 보니 산타모니카 피어까지 30분 정도 걸으면 되겠다 싶어 커피를 비운 뒤 곧장 거리를 나섰다. 사람 몸집만 한 개와 산책하는 사람과 조깅하는 사람, 관광객들이 키 큰 야자수 사이를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11월의 LA는 사계절이 공존하는 날씨라더니. 한낮엔 여름 특유의 나른한 뜨거움이 거리를 데우고 있었다. 한국 음식을 퓨전으로 재해석한다는 식당에 워크인으로 들어가 랍스터 롤에 샤도네이 한 잔을 시켰다. 멋 부리려고 신은 단화에 발바닥과 발꿈치가 쓸려 물집이 두툼하게 잡힌 상태였다. 달큼한 샤도네이에 금세 귓불이 붉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랍스타롤을 마지막까지 맛있게 먹었다. 자리에 앉아 계산을 마친 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곤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립스틱이나 파우더를 덧바를 필요가 없다. 코르셋에서 벗어난 기분이 나쁘지 않다. 식당에서 멀지 않은 산타모니카 쇼핑거리의 어반 아웃 피터스에 들어가 동그라미에 웃는 표정이 그려진 니트 모자를 보고 '와 이거 호비 스타일이네' 하고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양말을 계산해 바로 갈아 신었다.


렌트비에 주유비, 발렛비에 주차비가 드는 렌트카 초행길 운전 대신 맘 편히 우버를 마음껏 부를 작정이었다. 구글과 우버가 없었을 땐 어떻게 다녔었더라. 여행도 상황에 맞춰 변화하는 유기체다. 현재의 나와 결을 같이 하는 타이밍적인 존재.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친 뒤 짐을 정리하고 운동화로 갈아 신은 뒤 다시 우버를 불렀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대체 그런 부지런함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고,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는 거냐고. 나는 답했다. 이건 체력이 아니라 성격이라고. 멀리 떠나온 땅에서 낯섦을 하나라도 더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조바심이 나는 촌스러운 이 성격 탓이라고.


이번 LA는 7박 9일의 일정이었다. 11월 26일 오전에 도착해 27, 28일, 12월 1, 2일 총 4회 공연을 보고 3일에 출국하는 일정. 완벽히 공연 관람을 위함이었다. 이 공연이 아니었다면 떠나오지 않았을 테니. 아침 비행기로 떠날 마지막 날과 공연을 보는 나흘을 제외하면 온전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 고작 사흘이었고 그 사흘 중 하루가 오늘이었다.


여차하면 어두워질 것 같은 오후 3시. 마음이 급해 이동을 서둘렀다. 내가 상상한 캘리포니아 느낌의 정석인 애보키니 대로에 먼저 도착했다. 작은 타투샵과 도넛 가게, 독립 서점과 카페 등이 소박하게 모인 아름다운 거리를 기분 좋게 산책하던 중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는 코너를 발견했다. 저곳이 그 유명한 Salt & Straw 구나. 이곳의 솔티드 캐러멜 아이스크림을 먹어 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 얼른 줄 끝에 섰다. 줄은 금방 줄어 금세 내 차례가 되었다. 순서에 맞춰 주문을 하려고 하니 내 앞 뒤로 선 사람들이 뒤섞여 주문 줄에 먼저 섰다. 나와 눈이 마주쳐 주문을 도와주려던 점원에게 괜찮다고 눈으로 전한 뒤 콘이냐 컵이냐를 잠시 고민했다.


콘보단 컵이 흐르지 않고 먹기 괜찮지, 결정한 후 주문을 하는데 방금 전 상황이 미안했다며 아이스크림을 그냥 먹으란다. 에이, 뭐 대단한 일이었다고. 받아 든 아이스크림을 들고 계산대에 섰더니 그곳까지 따라와 정말 미안했다고 계산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확인해 그제야 고맙다 인사했다. 매장 앞에 앉아 쫀득하고 고소한데 짭짤하기까지 한 아이스크림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공짜라서 더 맛있었다.


발걸음 가볍게 애보키니 대로의 끝자락까지 걸은  그리피스 천문대를 가기 위해 우버를 탔다. 지금 출발하면  시간쯤 걸릴 테니  알맞은 분홍색으로 물들 그야말로 라라랜드 야경을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들떴는데, 추수감사절 연휴에 블랙프라이데이가 겹친 탓에  막힌 도로에서 2시간을 허비해 완전히 해가   천문대에 도착하고 말았다. 본인도 이런 정체는 처음이었다고 말한 우버 기사와 여기까지 드디어 도착해냈다는 일종의 동료애를 느꼈다. 사람들로  디딜  없이 복잡한 천문대를 구경한  야경 보기 좋은 자리를 찾았다. 하늘 대신 땅에 별을 흩뿌려놓은 듯한 LA 낮은 야경을 발아래   <라라랜드> OST 반복적으로 들었다. 어쩌면 영원히 몰랐을 장면 하나가 추억으로 변모하는 중이었다.


올라오는 것도 그 정도였는데. 우버를 기다리는 데에만 한참일 것 같아 무료로 운영 중인 대시 버스를 타고 종점인 Vermont / Sunset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이니 꽤 번화한 곳일 줄 알았는데 같은 밤이 위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방금 전까지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곳에 있었는데 종점에 내려 우버를 호출하고 타는 15분 사이에 본 사람이라곤 다시 버스를 타고 천문대로 올라가는 관광객 몇 명과 홈리스들 뿐이었다. 아직 오후 7시경인데 인적 없는 도로에서 어깨를 떨며 우버를 기다렸다. 내가 위에서 보고 감탄했던 야경의 이면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섞여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보지 않았을, 그저 외면했을 것들.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놓은 레스토랑에서 필레 미뇽 스테이크에 로제 샴페인을 마시는 사치스러운 저녁을 먹고 돌아온 호텔. 씻고 침대에 누우니 비행기 소음이 간간이 들린다. LAX 공항 활주로 뷰는 좋으나 이륙 소음이 단점이라던 후기가 있었는데 각자의 이야기를 담은 여객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근 2년간 얼마나 그리워했었던가. 때마침 LA에서 들으려고 선곡해 온 마골피의 <비행소녀> 가사가 입 안에 맴돈다. 활주로를 떠나 비행기는 이제 어둠 속을 날아요. 저기 어딘가에 내가 아는 사람 손 흔들고 있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다운타운을 향했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공연 티켓팅을 완료한 뒤 제일 먼저 예약한 <더 브로드>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랜드 센트럴 마켓 에그 슬럿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예약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미국의, 미국을, 미국에 의한 미술을 보기에 이만한 곳이 있을까. 구대륙 국가들이 회화에 가지고 있는 막강한 역사를 상대할 수 없으니 잭슨 폴록, 앤디 워홀, 제프 쿤스같은 자국 현대 미술가들을 엄청난 자본력으로 키워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바스키아에게 재즈는 어떤 의미였을까, 앤디 워홀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며 작품 감상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아, 남준이가 트위터에 올렸던 쿠사마 야요이 작품이 이거구나', '호석이가 사진 찍은 제프 쿤스 벌룬 독이네' 했다. 내 시선에 그들의 시선을 얹어, LA에 오면 여길 꽤 자주 찾는 그들이기에 그들은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며 전시실을 돌았다.


엔젤스 플라이트를 타고 내려와 <Black Swan>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Los Angeles Theatre, 다운타운의 명소인 The last bookstore 등을 다니며 다운타운을 걸었다. 귀금속 매장 앞엔 이른 시간부터 사설 경찰이 지키고 서 있고, 블록마다 홈리스가 있으며 분명 번화한데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는 음산한 기운이 있는 다운타운이었다. 길에 인적이 많진 않은데 상점에만 들어가면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북적이는 사람들. LA 여행에 치안이란 단어가 자동 검색어처럼 따라붙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타모니카와 베니스 비치, 그리피스 천문대와 다운타운, <더 브로드>와 홈리스가 공존하는 도시.


이 먼 길을 떠나 온 궁극적인 이유. 2년 만의 오프라인 콘서트 Permission to dance on stage를 보러 가기 위해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미국의 스타디움은 소지품을 확인할 수 있도록 투명한 가방만 휴대가 가능하기 때문에 응원봉과 지갑, 보조 배터리, 물 등으로 간략하게 꾸린 가방을 다시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소파이 스타디움까지는 차량으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 공연장 주변 도로 통제가 심해 우버로 30분이 넘게 걸렸다. 스타디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 걷는데 곳곳에서 다양한 언어들이 들려온다. 이번 공연을 위해 LA에 80여 개국의 팬들이 입국했다던가.


나와 같은 이유로 이곳까지 공연을 보러 온 지인과 만나 짧게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은 뒤 입장을 위해 줄을 섰다. 내가 들어가야 하는 엔트리에 맞춰 1시간 정도를 서 있었는데 내가 들어가야 할 구역 번호가 저쪽이란다. 분명 확인을 하고 섰음에도 어디서부터 줄이 꼬인 건지 모르겠다. 주변에 안내를 해 주는 스태프도 한 명이 없고 줄을 선 팬들이 먼저 자신이 서 있는 줄의 엔트리 번호를 알려주며 통제를 하는 어수선한 상황이라 일단 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입장 줄을 찾아가니 이미 공연장을 몇 바퀴 두를 기세라 가장 끝자리를 찾아 걷는 데에만 15분이 걸렸다. 공연은 7시 30분부터 시작인데 시계는 벌써 6시 40분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줄은 이제 겨우 몇 미터 앞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그때 시야에 걸린 다른 구역 입장 줄에서 갑자기 환호성이 들리더니 간헐적으로 입장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간다. 무슨 일인지 싶어 트위터와 메신저 방을 뒤져 확인했더니 입장 시간이 늦어져 백신 접종증명서나 티켓, 가방 검사를 생략하고 일단 입장부터 시키고 있다는 정보가 확인됐다. 특히 입장 구역에 맞춰 들어갈 필요가 없고 일단 줄이 짧은 곳으로 입장하여 스타디움 내부에서 자리를 찾으면 된다는 내용을 찾았다. 눈앞에 보이는 저 구역은 계속해서 줄이 주는데 내가 서 있는 줄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시간은 어느덧 7시 15분. 이러다 공연이 시작되고 입장할 것만 같다.


내가 서 있는 줄 뒤 쪽에 혼자 서 있는 한국인에게 말을 걸어 확인한 내용을 설명했더니 현재 상황을 전혀 모르고 계셨다. 이래서는 우리 첫 공연을 보러 온 의미가 없다고, 첫 곡인 <ON>을 놓칠 수 없지 않겠냐고 그 분과 함께 줄이 짧은 다른 입장 구역으로 뛰었다. 티켓을 확인하고 5분 만에 입장에 성공한 뒤 함께 뛴 분께 공연 잘 보라는 인사를 건네고 내 구역을 찾아 뛰었다. 공연 전 틀어놓은 <Dynamite> 뮤직비디오에 맞춰 우렁차게 떼창을 하는 팬들 사이를 지나 돌출 무대와 가까운 좌석을 찾아 앉으니 7시 25분. 5분 전이라 숨 좀 고르면 바로 시작하겠지만 그래도 시간 맞춰 들어왔다. 2년 동안 관객 없이 카메라 앞에서만 보여주었던 <ON>을 처음으로 볼 수 있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고, 백신 접종증명서 혹은 72시간 내 PCR 음성 확인서를 준비해왔을 테지만, 이렇게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함성을 지른다는 게 무척이나 어색했다. 혹시 몰라 마스크를 두 겹 썼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그러나 공연장에 불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됨을 알리는 VCR이 재생되는 순간,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길 오게 한 이 순간에 터지는 함성을 숨길 수가 없었다. 코 부분의 마스크를 꽉 눌러 밀착시키고, 함성을 질렀다. 나 이러려고 LA 왔지. 이렇게 목놓아 사랑을 드러내려고.


첫 공연에 다들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닌가 했는데, 멤버들도 우리도 모두 마냥 웃었다. 이 대면이 아직은 약간 어색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해 눈물이 비집고 나올 틈이 없는 데다 2년 간 쌓아 온 흥을 쏟아내는 것만으로 부족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개인 곡 하나 없이 일곱이 쉴 틈 없이 노래해야 하는 셋 리스트는 멤버 모두 이 순간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드러났다. <Black Swan>과 <Butter> 브릿지 안무에 크게 환호하고, 팬들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한 토롯코 앞에선 누구보다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종이 폭죽이 스타디움을 가득 채 운 아래 <Permission to dance>를 같이 부르니 어느덧 첫 공연이 끝났다. 방금 뭘 봤지, 내가 여기 있긴 한 거지.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공연장을 빠져 나왔다.


소파이 스타디움이 있는 잉글우드는 우범 지대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공연이 끝나면 밤늦은 시간인 데다 우버 잡기는 하늘의 별따기일 테고 대중교통은 아예 선택지에서 배제했더니 호텔까지 이동하는 것이 가장 걱정됐는데 한인 차량 업체에서 소파이 호텔 왕복 버스를 운영한다는 소식에 일찌감치 예약을 해놓았다. 버스 탑승을 위해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니 공연을 보고 나온 들뜸이 가득한 한국 팬들이 여럿 모여 있다. 분명 호텔이나 공연장에서 스쳐 지날 때 '아, 이 분 한국인이다' 하고 그저 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 이 공연을 보고 나왔다는 일체감과 만족감, 안도감 등이 뒤섞인 동지애에 순식간에 그룹이 형성됐다. 수많은 사람들 덕에 잘 안 터지는 데이터를 뚫고 브이앱으로 찾아온 태형이를 보기 위해 둥그렇게 모여들고, "방금 지민이 들어왔어요" 화면 소식을 건너 건너 전하며 오늘의 여운을 즐겼다. "내일도 이 버스 타시나요? 그럼 저희 내일 봐요" 내일을 기약한 인사가 함께 한.


푹 자고 일어나지 못했는데도 피로하지 않은 셋째 날 아침. 오늘도 또 공연이 있는 날이다. 일요일 아침 식사에 이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아 미리 알아 온 실버레이크의 Sqirl로 향했다. LA에 유기농 열풍을 불러일으킨 시초 격인 곳으로 브리오슈 빵에 수제 리코타 치즈와 수제 잼을 얹은 토스트가 시그니처 메뉴인 브런치 카페다. 인도에 나와 있는 야외 좌석이 한 자리 비어 있어 주문을 한 뒤 착석했다. 인도어보다 아웃도어가 덜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북적이는 그랜드 센트럴 마켓의 에그 슬럿도, 이곳도 모두 어렵지 않게 야외 좌석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적당한 산미가 입맛을 돋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토스트 모두 만족스럽게 먹었다.


배도 부르겠다, 선선한 가을 날씨 같겠다, 일요일 오전이겠다, 걸을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들 덕에 플레이 리스트 틀고 거리를 나섰다. 'Sqirl에서 실버레이크 주요 도로까지 걷기'란 목적만 있었기에 이 동네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더니 상상을 뛰어넘었다. 잘 정돈된 집들, 가지 치는 사람과 조깅하는 사람들, 빨갛고 노란 이름 모를 꽃들에서 풍겨 오는 향기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며 쏟아지는 햇볕들. 기억해 이 온도, 습도. 오감으로 느끼는 이 순간을 박제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동영상을 찍으며 걸었다. 저 멀리 집들 사이로 Hollywood sign과 그리피스 천문대가 보인다.


요즘 인기 있다는 실버레이크 동네에도 홈리스가 있었다. 인텔리젠시아 카페에 갔으나 야외 좌석 앞엔 홈리스가 있는 상황이 불편해 안쪽의 한적한 라 콜롬브 카페로 들어와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셨다. 여행 준비를 하며 맛집으로 검색했던 레스토랑이나 블로그 후기에서 본 상점들도 보고, 현지인으로 북적이는 카페와 BT21 타타 캐릭터가 연상되는 하트가 그려진 Micheltorena Stairs도 지났다. 구글 지도 상으론 가깝게 모여 있는 것 같은데 오늘 또 속았다. 넓은 대로에 넓게 퍼져 있는 상점들을 구석구석 보기엔 시간이 짧다. 그대로 멜로즈 거리로 향했다.


멜로즈 거리 서편 끝엔 성지순례로 꼭 들러야 하는 편집샵 맥스필드(Maxfield)가 있다. 특히 이곳 주차장에 세워진 까만 조각상은 호비가 매년 LA에 방문할 때마다 꼭 사진을 찍는 단골 포토 스팟이다. 핑크 월로 유명한 폴 스미스 매장에서부터 맥스필드까지, 또다시 비벌리 힐스에서 로데오 드라이브까지 걸었다. 실버레이크에서도 한 둘 씩 보였던 홈리스가 비벌리 힐스로 넘어오니 자취를 감췄다. 미드나 영화에 나올 법한 집들을 구경하며 선곡해 온 노래를 신나게 흥얼거리며 걸었다. 궁극엔 발바닥을 끄는 것처럼 무겁게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이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어제 스타디움 주변 분위기나 내부 위치 등을 확인했으니 소파이로 향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제보다 일찍 도착했더니 팬들과 함께 하는 사운드 체크 전부터 리허설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특히 메간이 피처링한 버전의 <Butter>가 몇 번이고 반복되어 오늘 <Butter>는 이 버전인가 보다 하는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어제 입장이 늦어져 어느 입장 구역은 티켓과 백신 접종 증명서를 제대로 체크도 안 하고 들여보내 소파이 운영 방식에 대한 불만이 많이 터져 나왔더니 오늘은 사운드 체크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바로 입장이 시작됐다. 오늘도 공연을 보는 지인과 만나 함께 입장해 소파이 명물이라는 핫도그를 미국 스케일의 버드 라이트 맥주와 함께 먹고, 공연을 제대로 즐기자는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좌석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무대 정면의 2층 가운데 좌석이었다. 세로로 길고 좁은 형태라 소파이는 모든 좌석에서 무대를 보기 좋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돌출 무대는 영상도 찍고 사진도 찍으며 보겠지만 먼 메인 무대에서 공연을 할 땐 핸드폰을 집어넣고 제대로 즐겨보기로 한다.


어제 마저 못 즐긴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다 털어내려는 듯 이틀 차의 열기는 공연 시작 전부터 대단했다. 멤버들의 이름을 넣어 외치는 팬 챈트나 랩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떼창을 했다. 내 옆자리에 한국 분이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더니 알고 보니 10만 명대가 넘는 팔로워를 가진 네임드 홈마였다. 본인이 제작한 슬로건과 스티커를 선물로 주었고 나는 대신 그분이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는 동안 그분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주며 환호했다.


멤버들도 우리도 몸이 풀린 느낌이었다. 확실히 어제보다 한 톤 높은 텐션이었다. 누구보다 크게 뛰고 소리 높여 노래 불렀다. <잠시>나 <Stay>처럼 함께 처음 부르는 노래들부터 <불타오르네>나 <뱁새>처럼 오래 함께 부른 노래들까지 쉴 틈이 없었다. <Save me>의 'Thank you 우리가 돼 줘서'와 <Permission to dance>의 'We don't need permission to dance' 가사는 따라 부르다 울컥해 눈부신 조명을 향해 눈을 한참 뜨고 있었다.


어제 앵콜곡은 <We Are Bulletproof: The Eternal>과 <Answer: Love Myself>였는데 오늘은 <Young forever>와 <봄날>이다. 게다가 오늘은 내 아픔을 감싸줄 유일한 손길이라던 <Save me>에서 난 이제 괜찮으니 내 아픔 다 이겨낼 수 있다는 <I'm fine>으로 연결되게 불렀다. 이래서 모든 공연은 각각 다르고, 그래서 그 공연을 모두 놓칠 수 없다. 여전히 두 시간 반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는 것이 믿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어제보단 조금 더 즐길 수 있었다. 벌써 두 번째 공연이 끝났다.


다운타운에 있는 호텔까지 순식간에 돌아갔는지 우리가 여전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윤기가 브이앱을 켰다. 공연 끝난 복장 그대로 호텔 방에 들어와 공연을 본 팬들과 공연이 보고 싶을 팬들을 향해 바로 인사를 건네려 서둘렀을 마음. 우리도 여전히 데이터가 터진 누군가의 핸드폰 주위로 둥그렇게 모여 간헐적으로 끊기는 윤기의 목소리를 들으러 귀를 기울였다.


마스크 쓴 위로 모두의 눈이 소파이 조명보다, 별보다 반짝이는 밤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61. PTD on Stage LA 관람 준비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