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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Dec 08. 2021

63.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2)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63


마치 공연을 내가 직접 하기라도 한 것 같다. 잔뜩 무거운 몸으로 호텔에 도착해 씻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진 뒤 오전 6시 반에 기상했다. 커튼을 여니 오늘도 파아란 하늘 아래 가지런히 정렬된 비행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공연이 없는 이틀은 좀 더 시내로 이동하고 싶어 다른 호텔을 예약해놓은 터였다. 이틀 후엔 다시 이 호텔로 돌아올 테니 활주로 뷰에 많은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한다.


짐을 펼쳐두는 편이 아니라 다시 짐을 싸는 데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체크아웃 후 우버를 타고 할리우드대로 근처에 위치한 킴튼 에벌리 호텔로 이동했다. LA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인 할리우드 사인(Hollywood sign)을 방 안에서 볼 수 있는 호텔이었다. 시내라고 해도 비벌리 힐스나 페어팍스, 멜로즈 거리랑 한참 떨어져 있어 또 다른 방식으로 긴 이동을 해야 하는 곳이지만, 호텔을 알아볼 때 이 뷰에 마음이 쏙 뺏겨 다른 호텔은 보이지도 않았었다.


이른 시간이라 역시 짐만 맡겨 놓은 뒤 가벼운 짐만 챙겨 할리우드 대로로 향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가 걸어서 금방이었다. 바닥엔 유명한 배우 및 가수의 이름이 가득했으나 내가 아는 이름이라곤 냇 킹 콜이 전부. 그마저도 재즈를 좋아하는 태형이 덕에 요즘 더욱 익숙해진 탓이었다.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만큼 업적을 세운 사람들이지만 그 이름을 밟고 지나간다는 것은 어쩐지 불경하게 느껴진다.


할리우드에서 제일 오래된 레스토랑인 Musso & Frank Grill를 지나쳐 조금 더 걸으니 LA 여행 프로그램에 꼭 나와 눈에 익숙한 거리가 나타났다. <기생충>과 <미나리>가 좋은 결과를 냈던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코닥 돌비 극장이 있는 메인 거리였다. 월요일 아침 이어서일까. 할리우드 배우나 캐릭터 차림을 하고 관광객을 상대하는 호객꾼 대신 허름한 차림의 홈리스가 쪽잠을 자고 있는 이곳은 화려한 명성에 비해 실체 없이 황량하기만 했다. 투어 버스를 홍보하는 부스를 지나니 건너편으로 긴 줄이 보였다. 라인 프렌즈 매장의 오픈을 기다리는 줄이었다. BT21 캐릭터가 포함된 물건들을 이 일정에, 직접 와서 사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사랑의 행렬이다.


오늘은 LA에 공연 관람 겸 여행을 떠나 온 또 다른 지인과 하루 일정을 같이 하기로 한 날이었다. 월요일에 오픈하는 게티 빌라 관람을 미리 예약해 놓았던 터라 할리우드 대로는 여기까지만 보고 우버를 탔다. 베니스 비치에서 말리부 쪽으로 올라가다가 좁은 도로로 꺾어 들어가니 금세 게티 빌라에 다다랐다.


J 폴 게티가 자택 내에 미술관을 세우고 개인 소유의 미술품을 전시한 것이 미술관의 시초라는 게티 빌라는 LA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만큼 차에서 내리자마자 향긋한 장미 향이 먼저 반기는 곳이었다. 짐 검사와 백신 접종 확인을 마친 뒤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 아래의 고풍스러운 건물로 입장했다. 먼저 도착해 정원을 둘러보고 있는 지인과 만나 루벤스 전시가 진행 중인 미술관을 관람한 뒤 정원 중앙을 가르는 수영장 같은 분수와 허브 화단이 꾸며진 소담한 정원을 거닐었다. 메인 건물을 둘러싼 키 큰 나무 사이로 저 멀리 바다가 보여 난간에 기대 한참을 바라봤고, 인적이 없을 때 잠깐 마스크를 내린 채 담벼락에 고개를 내민 분홍 장미에 코를 대어 크게 숨을 들이마시기도 했다. 시간만 맞으면 언제든 무료로 방문할 수 있는 이 넓은 문화적 인프라가 LA의, 미국의 힘이겠지. 


점심은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가 어슬렁거리며 메뉴를 고르고 있던 Great white에서 팬케이크와 그린 빈을 포함한 채소 보울 메뉴를 시켜 먹었다. 베니스 사인이 대각선으로 보이는 야외 좌석이었다. 월요일이라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좌석은 만석이었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 여유로운 브런치를 즐기는 모습이 가득했다. 식사 후 조금 걸어 베니스 비치 스케이트 파크에 도착했다. 보호 장비 없는 맨 몸을 스케이트 보드에 내맡긴 청춘들이 부단히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묘기를 성공하고 난 뒤 그걸 찍은 영상을 에어드롭으로 받아가는 모습도, 서로를 향해 리스펙 하고 손뼉 치는 모습도 한참을 관람하다가 자리를 옮겼다. 


야자수만 보면 걸음을 멈춰 사진을 찍었고, 빈티지한 음악의 리듬에 맞춰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과 대형견과 원반 던지기를 하는 사람들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오래 구경했다. 딱 하루가 지난 뒤 호비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똑같이 서서 이 스케이트 파크를 감상하고 있었던 사진이 올라왔고, 보고자 하는 것들이 비슷해 동선이 참 많이 겹치는데 날짜가 안 겹치는 불운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이미 예약을 해 둔 또 다른 공간이 있어 부지런히 이동했다. 일주일에 이틀, 하루에 각 2회 차, 회차별 10명씩 투어가 가능한 임스 파운데이션(Eames Foundation)에 도착하니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자작하게 깔린 마당이 먼저 보였다. 그 마당에 깔려 있는 열 개의 의자를 보고, '이게 진짜 임스 체어네' 했다. 요즘 SNS에서 가장 대세인 인테리어 스타일이 미드 센츄리고 나도 독립하면서 철제 다리인 가구들로 분위기를 통일시켰는데 1900년대 초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즈음에 활발히 활동한 임스 부부가 만든 이 가구들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클래식은 그렇게 영원한 법이다.


투어는 총 2시간이었다. 우리 투어엔 2명이 불참해 총 8명이 참석했는데 사실 이곳이 남준의 취향에 딱 맞는 곳이기에 지인과 "원래 남준이가 오려고 예약한 건데 바빠서 못 온 걸 거야"하는 진담 같은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해가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커튼 대신 여닫이 문으로 가릴 수 있게 한 거나, 창문을 가로로 길게 만들어 액자화 한 거나, 몬드리안 작품을 보는 듯한 기하학적인 인테리어와 그 반대로 나무의 결을 살려 따뜻한 느낌이 나게 배열해놓은 내부 인테리어까지. 내부 촬영이 불가한 탓에 두 눈에 담아내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여길 다녀가지 않았다면 누구보다 이곳이 취향일 남준이 언젠가 여길 꼭 와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멈추지 않으며.


오후 4시가 넘은 시간. 임스 파운데이션에서 산타모니카 비치까지 걸었다. 막 해가 져 가는 시간이라 어딜 봐도 그림이었다. 서서히 보라색으로, 그렇게 짙은 색으로 물드는 하늘을 사진으로 계속 남겼지만 눈으로 보는 색감을 제대로 담을 수가 없다. 핸드폰 성능은 해가 갈수록 좋아지는데 왜 카메라만큼은 사람의 눈에 도달하지 못하는 걸까. 바다 끝에 해가 걸려 있어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데, 그 가로지르는 짧은 새에 바다 아래로 해가 사라졌다. 그 짧은 찰나에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나 해가 확실히 지고 나야 이 겹겹의 색감 층을 가진 산타모니카 비치의 야경이 드러난다. 지민이 보고 싶었다던 바로 그 바다. 


몇 시간을 봐도, 며칠을 봐도 충분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이쯤에서 등을 돌렸다. 운동화에 넘치게 흘러 들어온 모래를 털어낸 뒤 지인이 미리 알아놓은 곳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산타모니카 비치와 야자수가 내려다보이는 Elephante에서 소비뇽 블랑 한 잔에 향긋한 버섯 피자를 먹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 여기서 저녁을 함께 먹고 있음을 새삼스러워하며. 


하루 종일 많이 걸었더니 와인 한 잔에 충분히 피곤함이 몰려왔다. 다시 돌아온 호텔에서 맡긴 짐을 찾은 뒤 방으로 이동했다. 이 호텔까지 옮겨 오게 한 이유인 할리우드 사인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이건 내일 아침의 선물로 남겨두고, 따뜻한 물로 씻고 나와 누워 오늘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LA에 도착한 이후 꿈 하나 꾸지 않고, 새벽에 깨지 않고 푹 자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 이래서 커튼을 활짝 열어두고 잤다. 눈 뜨자마자 저 언덕 너머의 흰 할리우드 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홀린 듯 일어나 창문 가까이에 다가서 비슷비슷한 사진을 몇 장이고 찍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을 투어 할 예정이고, 내일이면 다시 공항 근처 호텔로 옮길 예정이지만 이걸 보기 위해 굳이 여길 왔다. 영화에서만 보던 풍경이 실제 내 눈앞에 있다. 말해 뭐해. 이게 다 방탄 덕이지. 


호텔 1층 카페에 내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 뒤 시간 맞춰 픽업 온 투어 차량에 탑승했다. 한인타운 픽업까지 마치고 나니 오늘 함께 하는 투어 인원은 나 포함 총 다섯 명. 두 명은 결혼 10년 차 부부였고, 한 명은 출장이자 방탄소년단 공연 관람을 위해, 또 다른 한 명은 오롯이 방탄소년단 공연 관람을 위해 LA를 방문한 분들이었다. 차량을 운전하는 가이드께서 이전 투어는 완벽히 '아미'들로만 구성된 투어를 진행했었다며, 한인타운 마켓에서 일하는 분의 말을 빌자면 지난주부터 미국 전 주의 신분증과 세계 각국의 여권을 다 보고 있는 중이란다. 도시 하나 팬들로 가득 메우는 거 방탄소년단에게 일도 아니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 도착하기 전 리버사이드 시에 먼저 도착했다. 상해 임시 정부에 독립자금을 대기 위해 이곳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했던 독립투사들. 이 중 도산 안창호가 있었다. 의복을 잘 차려입어야 무시를 당하지 않는다고 정장 차림을 하고 일했던 꼿꼿한 도산 안창호의 기념 동상이 리버사이드 시 중심가에 있었다. 일부러 투어를 통해 이곳을 들르지 않았다면 이곳에 도산 안창호의 기념 동상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을 거다. 한국어로 적힌 그의 업적을 더욱 꼼꼼하게 읽었다.


닉슨 대통령의 결혼식이 거행됐다는 오랜 역사의 미션 인(Mission Inn) 호텔과 크리스마스 상품으로 가득한 빈티지 마켓 구경을 짧게 마치고 다시 먼 길을 나섰다. 태연의 <Why>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풍력 발전 단지에 차를 세우고 구경하고, 조슈아 트리 카페에 들러 콜드 브루 커피를 사 마셨다. 그렇게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호텔에서 출발한 시간이 9시경이었는데 국립공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내리니 오후 1시가 넘어 있었다.  


가이드님이 직접 준비해오신 재료들을 구워 바비큐로 점심을 먹고, 사진 찍기 좋고 풍경을 보기 좋은 스팟들을 차례로 다녔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닮았다는 조슈아(여호수아) 트리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황량한 모래와, 생김새도 낯선 돌무더기와 색다른 지형들까지. 노을이 지는 키스 뷰(keys view)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어스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세찬 바람 덕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었지만, 까맣게 어두워지기 전 134340 노래 한 곡을 찾아들었다. 꼭 지금이어야 했다. 몇몇 투어 팀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는데, 방탄소년단 투어 MD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간간이 섞여 있었다.


차량 불빛이 아니면 인공 빛이 하나도 없는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차에서 나오며 자연스레 고개가 뒤로 꺾였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촘촘히 박힌 별이 하늘에 펼쳐졌다. 이게 별이구나. 내가 그동안 봐 온 것들은 별이 아닌, 그저 희미한 먼지 같은 빛이었구나. 꼭 강처럼 흐르는 듯한 은하수는 이맘때에만 볼 수 있는 거란다. 오리온자리를, 별똥별을, 그 사이를 반짝이며 지나는 비행기와 소금을 흩뿌려놓은 듯한 은하수까지. 그 모든 걸 넋을 놓고 바라봤다. 본 보야지(Bon voyage) 여행을 위해 떠난 뉴질랜드의 어느 밤에 꼭 별이 쏟아질 것 같다고 떨린 목소리를 냈던 지민이의 음성이 어딘가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가이드님이 다양한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이곳에서 찍는 사진이 하이라이트란다. DSLR 카메라가 세팅되고 작은 손전등 하나가 소품으로 주어졌다. 하늘을 향해 빛을 쏘는 포즈의 사진을 공통으로 찍고 난 뒤, 부부를 제외한 우리 셋은 한 사람씩 BTS의 글자 하나씩 맡아 야경 사진을 찍었다. 셔터에 오래 노출된 손전등의 빛은 허공에 글자를 만들어냈다. 각자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멤버의 이름도 추가로 찍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아미라는 공통점 앞에 어색함이란 없다. LA 시내로 돌아오는 동안 방탄소년단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서로 찍어준 사진들을 공유했다. 모두 마지막 일정까지 잘 마치라는 인사를 나누고 호텔에 드랍오프를 하고 나니 밤 열 한시 반. 내일은 다시 공연을 위해 호텔을 옮겨야 하니 얼른 씻고 누웠다.  


방탄소년단 덕에 덤으로 얻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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