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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Dec 08. 2021

64.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3)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64


오늘도 이 할리우드 사인을 보며 눈 뜰 수 있다니. 일어나자마자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오늘 날씨도 참 좋고, 할리우드 사인은 참 하얗구나.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인스타그램 DM 알람이 연달아 울렸다. 비밀번호를 눌러 화면을 켜니 ~확인했냐, ~괜찮냐로 대변되는 주요 메시지들이 꽤 가득하다. 뭐지? 보내준 메시지 속 뉴스 링크를 클릭했다.


[속보] 오미크론 쇼크... 모든 입국자 접종했어도 10일간 격리


12월 3일부터 16일까지 국내에 들어오는 내,외국인은 예방접종 여부와 관계없이 10일간 격리를 해야 한다는 뉴스였다. 한국행 비행기를 이곳 날짜로 3일에 탈 예정이고 한국에 도착하면 4일이니 꼼짝없이 격리에 해당됐다. 한국은 자정이 막 넘은 시간이지만 팀장님께 얼른 메시지를 보내 놓고 올해 남은 휴가와 내년 휴가를 당겨 자가격리가 처리되려나, 머리는 상황을 셈 하면서도 몸은 착실하게 호텔을 옮기기 위한 짐을 쌌다. 이동하는 우버 안에서 걱정 담은 인스타그램 메시지들에 답을 한 뒤 자세한 기사를 더 찾아보니 내국인들은 별도의 시설이 아닌 자택에서 격리를 하면 된단다. 평소에도 집에서 잘 나가지 않는 편인데 집에 열흘 머무르기만 하면 되는 거라니. 못 할 것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속보]란 두 글자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내겐 아직 2회 공연이 남았고, 남은 2회 공연을 즐겨야 했고, 격리를 피하기 위해 공연을 포기하고 일찍 입국할 이유가 없었고(실제로 회사 일 등의 이유로 출국을 앞당긴 분들이 꽤 많았다), 자가격리 '하면 하지' 싶었기 때문이다. 


공항 근처에 다다르니 안개가 빼곡하다. 아까까지 눈부시게 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하필 지금부터 흐리다니. 의미부여라지만 날씨가 꼭 알 수 없는 상황이 된 지금 같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고자 이어폰을 꽂고 공연 셋 리스트를 정리해 놓은 재생목록을 틀었다. 그때 <Save me>가 랜덤으로 흘러나왔다. 꼬깃하던 날 개 줘서. 답답하던 날 깨줘서. 꿈속에만 살던 날 깨워줘서. 널 생각하면 날 개어서. 그렇게 이어진 다음 곡이 <So What>. 차창 너머 하늘을 보니 진짜 안개가 걷히고 파란 하늘이 조금씩 보인다. 일부러 해도 이렇게는 못 듣겠다. 그래 이 가사들 같다. 날은 개고, So What. 


안달 내봐야 1분이 1시간으로 흐르지 않는 것. 팀장님이 보내 올 메시지는 한국 시간에 맞춰 올 테니 그때로 미뤄놓고 일단 방문을 예약해 놓았던 게티 센터를 향했다. 트램을 타고 천천히 언덕을 오르니 하얀 외관의 뮤지엄에 금세 도달했다. 꼭 선이 그어져 있는 것 같다. 저 멀리 비쭉 솟은 다운타운의 마천루 가운데로 하얀 구름이 가로로 길게 걸쳐 있어 여기서 LA의 경관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뮤지엄 내 작품을 감상하지 않더라도 야외 좌석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기에도 충분한 공간이겠다.


게티 센터 하이라이트관은 고흐 옆에 세잔, 세잔 옆에 르누아르, 르누아르 옆에 고갱, 고갱 옆에 드가, 드가 옆에 모네가 있는 인상주의 하이라이트관이었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서 체득했다. 어떤 대단한 카메라도 인간의 눈이 가진 화소 앞에 무용지물이라고. 그렇다면 회화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배와 사람의 형태를 역광에 비친 실루엣으로만 표현한 모네의 작품을 보며 이게 회화가 가진 장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티 센터의 소장품 중 가장 대표적인 고흐의 아이리스는 집에다 그대로 걸어두고 싶어 포스터로 구입했고, 뮤지엄 내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즐겼다.


점심을 예약한 식당이 있는 페어팍스에 가기 전, LACMA 근처에 있는 Urban Light와 제임스 코든쇼 Crosswalk concert를 찍은 CBS를 둘러보기 위해 다시 우버를 탔다.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게티 센터가 전부 오픈한 거냐고 묻는 우버 기사님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게티 빌라도 게티 센터만큼 좋으니 추천한다는 말에 먼저 다녀왔다고 하니 나보고 아티스트냐 묻는다. 그냥 보는 것만 좋아한다고 했더니 자기가 아는 의사는 뮤지컬도 한다고 우리 모두가 아티스트 아니겠냐고 한다. 반 고흐 전시를 홍보하고 있는 광고판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시간이 되면 Hammer 뮤지엄을 방문해보라는 팁도 받았다. 모두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크리에이터다.


Urban Light는 한낮에 보니 아쉽기만 했다. 일렬로 선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는 밤이어야 이 작품의 진가가 더욱 드러나겠다. CBS 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그로브몰과 파머스 마켓을 지나 낯익은 도로에 도착했다. 평소 유튜브를 통해 자주 보던 코든쇼의 Crosswalk musical이라 위치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지지난주에 이 횡단보도에서 방탄소년단은 Butter와 Permission to dance, Dynamite 세 곡을 불렀다. 괜히 횡단보도를 두 번 더 건너고 신호등을 만져보고 버스정류장 사진을 찍었다.


LA 빕 그루망에 선정된 이탈리안 음식점인 Jon & Vinny's는 뮤지엄 예약과 함께 일찌감치 예약을 마쳐놨던 식당이었다. LA에 도착한 태형이 업로드한 흑백사진 속 거리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싶었는데 바로 이 Jon & Vinny's가 있는 페어팍스 거리였다. 비슷비슷한 곳들을 다니는데도 실제로 마주치진 못한다는 덕계못(덕후는 계를 못 탄다)의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었지. 예약 시간에 맞춰 도착했더니 테이블이 마련돼 있어 스파클링 워터와 함께 메뉴를 주문했다. 테이블당 기본으로 제공되는 판콘토마테에 모짜렐라 치즈 스틱, 매콤한 토마토 푸실리 파스타까지. 어느 하나 맛이 없는 게 없어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다.


입국과 마찬가지로 출국 역시 72시간 내 PCR 음성 결과서가 있어야 한다. 월그린이나 CVS 같은 곳에서 무료 PCR 검사를 받을 수 있지만 검사 결과 시간이 보장되지 않기에 결과지를 수령하는 시간이 확실한 유료 검사를 알아봤고 그중 하나투어에서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맞춰 방문 PCR 검사를 받을 수 있는 상품이 있어 바로 예약을 했다. 예약에 맞춰 호텔 정문에 도착해 한국인 간호사를 만나 여권 사본 제출 후 PCR 검사를 순식간에 마쳤다. 


시간 맞춰 예약해놓은 우버를 타고 소파이를 향했다. 오후 다섯 시가 되지 않은 시간인데 자욱하게 낀 안개 덕에 한밤 중이 된 것처럼 어둡다. 이제는 익숙한 거리에 내려 줄이 짧은 게이트를 찾아 걸었다. 그새 요령이 생겨 공연장 안에 입성하는 데에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오늘은 첫날에 앉았던 좌석의 반대 방향이다. 내일은 본 무대와 가장 가까운 좌석이라 오늘은 촬영 욕심을 좀 내려놓기로 한다. 칵테일을 손에 들고 흥얼거리는 팬과 한국어 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따라 부르는 팬 사이가 내 자리였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오직 기록하기 위함이다. 일주일만 지나도 핸드폰 사진첩에 담긴 사진 외엔 금세 잊히는 것이 사람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 대한 것만큼은 도무지 기록이 되지 않는다. 이 모두가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환호했다. 이 단순한 한 문장 말고는 쓸 수 있는 게 없다. 순간순간 훅 들어왔다 휘발되었다 다시 새겨졌다 사라졌다 하는 무수한 감정의 소용돌이. 처음부터 끝까지 쉬는 구석 하나 없이 몰아치는 셋 리스트. 그저 방탄소년단 무대 참 잘하고, 우리 팬들 그 무대 참 잘 즐긴다. 이 말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회사에선 자가격리 기간을 재택근무로 인정해주는 결정을 내려주었다. 집에 도착하면 회사로부터 노트북을 비롯한 업무에 필요한 자료를 배송받아 집에서 업무를 처리하기로 했다. 휴가 소진 없이 자가격리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 회사의 결정과 이런 결정을 내리게끔 애써준 팀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어느덧 한국으로 떠나기 전 날이다. 사실 오늘은 아침 일찍 디즈니랜드를 갔다가 돌아와 공연을 보는 일정을 짰고 예매한 디즈니랜드 티켓을 디즈니랜드 앱에 미리 연동해놓은 참이었는데 LA에 실제로 와서 다녀보니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정인지를 깨달아 과감히 포기했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갔다 와도 힘든 일정인데 애너하임에 있는 디즈니랜드를 마치 공원 산책하듯 다녀올 생각을 했다니.


게다가 오늘은 어제 검사한 PCR 검사 결과를 확인한 뒤 페이퍼로 출력을 해야 해(공항에 반드시 종이로 출력된 결과지를 지참해야 한다) 결과가 나오면 바로 서류를 준비하러 이동을 해야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동안 동선상, 시간상의 이유로 못했던 것들을 마저 했다. 서부 여행을 할 때 꼭 한 번은 먹어봐야 한다는 인 앤 아웃에서 더블더블 버거 세트를 먹고 그로브몰을 구경을 한 뒤 홀푸드 마켓에서 식료품을 구입했다. PCR 검사 결과가 메일로 발송됐음을 알린 메시지가 도착했고 메일 첨부파일을 열어 음성(Negative) 결과를 확인했다. 기저질환자라 부스터 샷도 일찍 맞았고, 현지에 도착해 개인 방역을 꼼꼼히 챙겼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음을 졸였던 것도 사실이다. 반가운 결과에 오늘 공연, 정말 마지막까지 즐겨보자 싶었다.


호텔에 들러 비즈니스 센터로 갔더니 프린터 기에 오류 메시지가 떠 있어 결과지 출력이 되지 않았다. 컨시어지에 확인 요청을 하니 본인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대서 결국 컨시어지 쪽으로 메일을 전달하여 출력을 받았다. 디즈니랜드를 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시간이 촉박한 일정이었다면 이렇게 미리 챙기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소요되었다 싶은 생각에 결과지를 가방에 잘 넣은 뒤 방에 들어가는데 방 문 밖에서부터 세찬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카드키를 넣고 들어가니 세면대 수도관에서 뜨거운 물이 잠기지 않고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프런트에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고 담당자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데에만 40분. 그것도 곧 공연을 보러 나가야 하니 최대한 빨리 담당자를 불러 달라는 전화를 한 번 더 하고 나서야 서둘러 준 시간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멕시칸 담당자가 세면대 밑을 뜯어 확인했는데 지금 바로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단다. 어차피 나는 지금 곧 나가야 하고 밤늦게 들어와 내일 아침에 체크아웃할 거기 때문에 세면대를 쓰지 않겠다 하고 일단 물이 새지 않게 조치만 취해달라 했다. 여행 시간이 아쉬워 아침 일찍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더라도 높은 등급의 호텔에 묵는 것을 늘 최우선 순위로 여겼었는데. 세면대를 못 쓰면 어떠하랴. 공연장과 가깝게 이동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곳이다. 다시 스타디움용 가방을 챙겨 호텔을 나섰다. 


오늘은 공연장까지 시내버스를 타기로 했다. 호텔에서 공연장까지 가는 주황색 버스 노선은 코로나로 무료 운영 중이었다. 시내버스는 서민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이니 코로나 시대에 가계에 보탬이 되게 해 주려 무료로 운영하는 줄 알았더니 대면으로 돈을 받기 거부한 버스 기사들의 시위로 말미암은 무료 운영이었다. 늦은 시간이 아니고 호텔에서 공연장까지 다섯 정거장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그마저도 대부분 방탄소년단 콘서트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라 버스는 무척 안전하게 느껴졌다. 캐나다에서 공연을 보러 왔다는 한국 분들과 공연에 대한 얘기를 나누니 금세 도착한 소파이 스타디움. 같은 거리로 우버를 타면 10불은 그냥 넘었는데 이렇게 편히 무료로 도착했다. 공연장 입장 역시 요령이 생겨 오늘도 착석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는 것들이 늘어나면 곧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아마 인생의 끝무렵에서도 그러겠지? 이제 좀 알만하니 끝난다고.


내가 LA를 온 모든 이유. Permission to dance on stage의 4회 공연 중 4회 차. 이 마지막 공연의 내 좌석은 본 무대 바로 옆 1층 구역이었다. 그것도 5열. 처음 이 자리를 티켓팅하고 나서 애매한 그라운드 좌석보다 훨씬 더 좋을 거야 하며 위안했는데 실제로 앉아보니 시야가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았다. 돌출 무대에서 많은 곡을 소화했던 이전 투어에 비해 이번 공연에선 본 무대 활용도 꽤 많은 편이라 마지막 공연이 더욱 기대되기 시작했다.


내 옆자리에 새크라멘토에서 왔다는 아미님과 말을 터 공연 시작 전 사진도 서로 찍어주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실제로 한국에 있으면 멤버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은지에 대한 질문에 여기까지 날아온 걸 보면 모르겠냐고, 여기선 쉬는 날에 멤버들이 자유롭게 외출도 하지만 한국에선 오히려 더 조심하는 것 같다 했더니 맑게 웃었다. 멤버 모두를 다 좋아하지만 특히 석진이를 좀 더 좋아한다며, 그의 형이 하는 잠실의 식당에 꼭 가보고 싶단다. 조금 비싼 편이긴 하지만 맛있는 식당이니 한국에 꼭 놀러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영어로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말들은 번역기를 써가며 전달했고, 영어 실력이 모자라 미안하다 했더니 자신은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는데 너는 이만큼의 영어를 하고 있지 않냐며 나를 치켜세워줬다.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교환해 팔로잉을 맺었고, 나중에 한국 여행을 준비할 때 도움을 주겠다 약속했다.


워밍업을 위해 틀어주었던 뮤직비디오가 끝나고 조명이 꺼졌다. 오늘은 전 세계 팬들을 위해 콘서트 생중계가 이루어지는 날. 추후에 영상을 다시 볼 수 있을 테고 아주 가까운 시야인 만큼 내 눈으로 보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모니터에 멤버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ON>의 전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시야로 <ON>을 보다니. 대형 마칭 밴드 뒤에서 동선을 다양하게 움직이며 안무를 추는 멤버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열심히 좇았다. 2년 동안 그렇게 팬들에게 보이고 싶어 했던 무대다. 


그동안 먼발치의 뒷모습만 봤던 <Blue & Grey>도, 팬들과 호흡하며 부르는 <작은 것들을 위한 시>도, 첫 전주가 흐르는 순간부터 전율이 흐르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Airplane pt.2>도 본 무대 가까운 좌석에 앉아 있어 더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제일 높은 좌석에선 이 공연장 전체를 버드 아이뷰로 조망할 수 있을 테고, 돌출 무대 근처 그라운드에선 다양한 피켓들을 든 관객들 사이에서 가깝게 호흡할 수 있을 테다. 일단 공연을 볼 수 있다면 좌석 위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 마지막 공연 첫 앵콜곡은 무려 <HOME>이었다. 그곳이 어디건 네가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집(Home)이라는 가사 그대로, 우리 2년이란 시간을 지나 우리의 홈에서 만났다. 그간 힘은 2배로 들면서 덜 보람찬 무대 영상 녹화를 해오며 그간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잊고 있었다던 그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궁극의 인사. 그렇게 앵콜은 <소우주>로 넘어갔다. Speak yourself 투어의 마지막 곡이었던 이 노래. 어쩜 이 밤의 표정이 이토록 또 아름다운 건 저 어둠도 달빛도 아닌 우리 때문일 거야. 가장 깊은 밤에 더 빛나는 별빛. 밤이 깊을수록 더 빛나는 별빛. 반짝이는 아미밤이 이리 저리 가사에 맞춰 출렁였다.


다시 무대에 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공연을 할 수 있어 너무나 축복이고 영광이라고, 와주셔서, 자신의 인생에서 이 역사적인 밤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남준의 꼭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남준은 알까. 그 말, 항상 우리가 돌려주고 싶은 말이라는 거. 내게 역사적인 밤을 선사해줘서 정말 고마워. 덕분이야. 덕분에 이렇게 이 자리에서 이 순간을, 동시간에 함께 하고 있어. 


크리스 마틴이 깜짝 등장해 함께 한 <My universe>와 <Permission to dance>를 끝으로 공연이 마무리됐다. 옆자리 아미님께 조심히 돌아가라고 인사를 하고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길, 트위터 알람이 떴다. See you in Seoul, MARCH 2022. 내년 3월, 서울에서 콘서트가 열릴 거라는 간략한 공지였다. 어쩐지 오늘 이 끝남이 마냥 아쉽지만은 않더라니. 다음이 기약된 인사는 오늘을 더 잘 살고 싶게 한다. 그러니 3월 서울 콘서트에 꼭 내 자리 하나가 있었으면.


이제는 헤매지 않고 도착한 만남의 장소에서 예약 버스에 탑승해 곧장 호텔로 도착했다. 방에 들어갔더니 잠가 놓은 세면대 수도관에서 또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것도 다 에피소드다 싶어 별로 짜증이 나지도 않았다. 다시 프런트에 전화했더니 이번엔 금세 담당자가 찾아왔고 이 방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방을 바로 바꿔주기로 했다. 밤 1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다시 짐을 꾸려 바꿔준 방으로 옮겨야 했지만 어차피 내일 일찍 체크아웃을 할 거 미리 짐을 싼다 생각했다. 완벽한 공연을 보고 왔고 다음의 공연이 예정돼 있는 덕후에겐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새로운 방은 ㄱ자 통유리로 공항 활주로와 공항으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를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이그제큐티브 룸이었다. 그래, 덕분에 업그레이드된 이런 뷰도 보는 거지. 호텔 매점에서 사 온 샹동 하프 보틀에 바게트를 세팅하고 얼른 씻고 나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일정을 나름 조심히,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는 의식을 치를 셈이었다. 유리잔에 샴페인을 따르고 차가운 바게트를 한 입 물었다. 돌아가면 일단 집까지 긴 운전을 해야 했고, 자가 격리라 쓰고 재택근무라 읽는 열흘을 보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차치할 수 있는 멋진 일정을 보냈다.


나와 방탄소년단과 이 사랑의 행렬에 동참한 모든 이들을 위해 치얼스.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마친 뒤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 톰 브래들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공항 규모가 작다 보니 사람들이 북적여 마치 코로나 이전 시대의 공항인 것만 같았다. 72시간 내 PCR 음성 확인서를 최종적으로 확인한 뒤 캐리어를 부치고 출국 수속을 마쳤다. 지인들에게 줄 선물 몇 가지와 나를 위한 마그네틱을 구입하고 마지막으로 판다 익스프레스에 들러 미국 스타일 중식을 먹었다. 방탄소년단이 미국에 막 진출했을 시기, 미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판다 익스프레스를 꼽았던 태형이 덕분에 내게도 미국에 오면 꼭 한 번은 맛을 봐야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커피 한 잔까지 후식으로 사 마시고 나니 어느덧 보딩 콜. 


인천공항에서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방탄소년단의 팬임을 옷이나 소품 등으로 표출하고 있는 여럿 사람들 속에 섞여 탑승을 마쳤다. 72시간 내 PCR 음성 확인서를 비롯한 각종 서류를 또 갖추고, 마스크를 포함한 개인 방역 물품들을 다시 챙기고, 열흘의 자가격리를 감수한 사람들. 


이것은 여행이 아니었다. 사랑의 행렬이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운전을 해야 했기에 늘 마시는 화이트 와인 대신 콜라로 대신하며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옅은 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세상 가장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도착한 인천 공항.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니 긴 줄이 보였다. 입국 수속 전 방역 심사를 한 번 더 거쳐야 하기에 기다리는 대기줄이 무척 길었다. 차례에 맞춰 줄을 선 뒤 입국에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 들었다. 이 정도면 한 시간은 넘게 기다리려나 했는데 30분도 되지 않아 금세 내 차례가 되었다. LA 공항 호텔에서 체크인하는 데에만 한 시간이 걸렸었는데. 이 속도를 보니 한국에 도착한 것이 실감 났다. 


서류 확인 후 여권에 PCR 제출자와 국내 예방접종 완료자 스티커를 붙이고 자가격리 통지서를 한 번 더 작성한 뒤 짐을 찾아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버스를 타고 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잡아 짐들을 이고 지고 나르는 일 없이 셔틀버스를 타고 장기 주차장에 내려 내 차에 짐을 다 실으니 다음에도 공항까지 직접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단 한 번도 이 먼 곳까지 운전할 수 있을 거라 시도도 못했었는데. 


운전뿐 아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처음으로 해본 것들이 무수했다. PCR 검사지를 비롯한 서류와 마스크 손 소독제 소독 스프레이가 포함된 방역 물품 준비도, 온전히 공연 관람만을 위한 숙소 선택 및 동선도, 하루를 마감하는 와인을 대신한 숙면도. 이 시기니까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들의 집합.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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