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Apr 28. 2022

65. 보라해가스(Borahaegas)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65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인 덕질은 글을 멈추게 했다. 매일 대동소이한 에피소드만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내일 같은 일상의 덕질은 마치 클리셰와도 같아 '새로운' 글을 써내기 어렵게 했다. 한마디로 "이거 그때 본 거 같은데?"가 될 게 뻔했단 뜻이다. 차츰 덕질에 글이 사라졌고 브런치에도 접속하지 않은지도 꽤 될 즈음 하나의 알림이 떴다. 지난 LA 공연 준비記에 댓글이 달렸다는 알림이었다.


오늘은 제이님 글 다시 읽으면서 하루 마무리할래요(라베 여행기도 기다린다는 얘기 ^,.^)


전환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새 함성과 기립 없는 서울 콘서트도 있었고, 조용히(?) 라스베이거스도 다녀왔다. 컬래버레이션 혹은 프로듀싱으로 발표되고 발표될 새 곡들이 있었고, 인스타그램이라는 또 다른 연결 창구도 생겼다. 매번 대동소이했긴. 쓸 것은 많았는데 쓰지 않았을 뿐이다.


더 늦으면 이마저의 글도 쓸 수 없을 것 같아 급히 책상에 앉아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고민은 잠시. 요 근래 다이내믹했던 일들에 대해 쓰고자 마음먹으니 이 문단까지 금방이다.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던 짤막한 글들을 골자로 삼아 간략하게 적어놓은 뒤 '글 쓸 때 들으면 좋은 음악' 같은 키워드로 음악도 검색해 틀었다.


이 글은 한 도시를 자신들의 색인 보라색으로 물들이고도 남은, 오직 지금이기에 경험할 수 있던 어느 특별한 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잠실 주경기장이 실내 공연장으로 분류된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2022년 3월 잠실 주경기장에서 개최된 방탄소년단 콘서트는 2019년 이후 3년 만에 대면으로 개최된 데다 전체 좌석의 30%만 오픈되어 역대급 피켓팅을 기록했다. 팬클럽 가입자만 진행할 수 있는 선예매 동접속자 수가 20만 명이 넘었고, 3일 치 전 좌석이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함성 대신 클래퍼로, 환호 대신 박수만, 기립 대신 무릎 바운스로 채울 처음이자 마지막일 콘서트였다.


그리고 같은 날 오전, 라스베이거스 공연 티켓팅이 있었다.


지난 LA 공연 말미에 3월의 서울 콘서트가 예고되었던 것에 반해 올 4월 라스베이거스 콘서트 공지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것도 총 4회. 콘서트 공지가 뜨자마자 달력을 넘겨봤고 상대적으로 덜 바쁜 시기이기에 주저 없이 라스베이거스행을 결정했다. 물론 바빴더라도 어떻게든 갈 핑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2주에 걸쳐 나뉜 일정 중 온라인 스트리밍이 예정된 4회 차 공연이 있는 두 번째 주 대신 첫 콘을 볼 수 있는 첫 번째 주간에 맞춰 짧은 일정을 짰다.

 

오전 8시엔 라스베이거스 티켓마스터 티켓팅이, 오후 8시엔 서울 인터파크 티켓팅이 있었던 3월 3일은 대망의 티켓팅 데이였다. 이선좌와 튕김으로 티켓팅 전쟁이었던 오전과 접속 자체가 피켓팅이었던 오후의 티켓팅을 거쳐 라스베이거스 2회, 서울 2회 총 4장의 티켓을 예매했다. 성공적인 하루였다.


서울 콘서트는 그저 아쉽지만 좋았고, 좋았지만 아쉬웠다. <Wings>와 <고민보다 go>를 가만 앉아서 클래퍼만 두드려대며 들었다. 특히 중반 이후부터 세 찬 비가 내렸던 2회 차 우중 콘서트를 뮤지컬 관람하듯 조용히 앉아 보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라도 대면 공연을 볼 수 있는 게 어디냐는 위안도 그때만큼은 와닿지 않았다. 공연장을 가득 채울 사람들과 함성이 있을 라스베이거스 일정을 더욱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더니. 체크인을 하면 방탄소년단 포토카드를 주는 호텔에, 방탄소년단이 자주 먹는 한식을 코스 요리로 내놓는 레스토랑에, 방탄소년단 사진 전시회와 팝업스토어까지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행될 이벤트들이 속속들이 발표되고, 해외 입국자 의무 격리도 해제되어 콘서트와 라스베이거스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져가는 상황에 이놈의 오미크론이 말썽이었다.


매일 확진자 수가 기록적이었다. 그간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 중 코로나 확진자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옆 부서 동료의 확진을 시작으로 점차 범위를 좁혀오더니 바로 옆자리의 후배가 확진되었고, 매일같이 집에 놀러 오는 여동생마저 확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게다가 이맘때쯤 발현되는 비염은 그 증상이 오미크론과 똑같아 매일이 살얼음판이었다.


출국 전에 오미크론이 확진될 수도 있다는 전제를 묵직한 곳에 담아둔 채였다. 매일 자가 키트를 했고, 집 바깥에선 KF94 마스크를 절대 벗지 않았다. 점심은 매일 집으로 돌아와 혼자 먹었다. 확진자와 비 확진자가 무분별하게 섞인 이비인후과에 방문하는 대신 약국 약으로 비염을 버텼고, 약속도 가족과의 접촉도 없이 2주를 보냈다. 그렇게 유난을 떤 뒤 받은 출국용 PCR 검사 결과는 당연히 음성. 마음 졸이기론 정말 역대급이었던 나날이었다.


라스베이거스까지 가는 직항 노선이 없어 갈 땐 시애틀을, 올 땐 LA를 경유하는 노선으로 예약을 했다. 시애틀에서 짐을 한 번 찾아 직접 부쳐야 한다는 확인과 함께 받은 두 장의 보딩패스를 가지고 출국 심사를 빠르게 마쳤다. 방탄소년단 아니었음 상상도 못 했을 두 번의 출국. 문 닫힌 상점들과 보는 사람 없는 왕가의 행렬을 지나쳐 탑승구에 자리를 잡았다. 몇몇 분들이 지닌 가방에서 숨길 수 없는 아미의 향기가 느껴져 슬쩍 웃었다.


미국 국토안보부 통계에 따르면 2019년 미국 전 지역 입국 기준 한국인 1,100명당 1명이 입국 거부가 된다고 한다. 그중 입국 심사의 악명이 높은 시애틀을 굳이 경유지로 삼은 건 여행 기념품으로 모으는 스타벅스 빈 데어 시리즈 머그잔을 사겠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입국 목적을 묻는 질문에 BTS 콘서트 보러 왔다고 했다. 그 목적이 없었으면 여기에 서 있지 않았을테니. 내 직업이며 실물 리턴 티켓, 가지고 있는 현금, 혼자 여행하는지 등 많은 질문에 답을 했다. 작년 11월에 찍힌 도장을 보고 당시 미국 입국 이유를 묻자 그때도 LA에 BTS 콘서트 보러 왔다고 하자 그제야 시원하게 웃은 심사관이 질문 폭격을 멈추고 여권에 입국 도장을 꽝 찍었다.


시애틀을 경유한 라스베이거스 행은 흔치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덕질 앞에 헤처 모여-다. 시애틀 타코마 국제공항 국내선 터미널은 할 게 아무것도 없는 작은 규모라 스타벅스만 들른 뒤 일찌감치 탑승구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데 시애틀행 비행기를 탔을 때부터 낯이 익은 한국인들이 열 명은 보였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복장으로 방탄소년단의 팬임을, '나 콘서트 가요'를 신나게 표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훌쩍 늘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이 시공간을 공유한다.


짐을 찾는 곳에서부터 보이는 슬롯머신. 드디어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우버/리프트 표시를 따라 한 층 올라왔더니 바로 우버 탑승장이다. 실업률이 0% 달한다는 라스베이거스. 우버도 그만큼 많기에 웬만해선 5분 내에 우버에 탑승할 수 있다. 콘서트 기간에 맞춰 평소 가격보다 3배에 달한 가격에 울며 겨자 먹기로 예약한 코스모폴리탄으로 이동했다. 라스베이거스 호텔은 대부분 대형 카지노와 수많은 레스토랑이 입점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우버 기사가 호텔 정문에 도착해 짐을 내려주며, 이 호텔은 저쪽이 우버 탑승장이니 우버를 부를 땐 저쪽에서 타면 된다고 친히 위치를 알려주었다. 라스베이거스 호텔은 택시 혹은 우버 탑승장과 하차장을 구분하고 차량이 정차할 수 없는 입구 등을 세분히 구분하고 있다. 미국에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단어인 효율이 사막의 관광 도시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호텔 체크인도 수월하게 마쳤다.


새로운 공간에 입장할 때 요즘 친구들은 넷플릭스 시작 소리인 '두둥'을 쓴다던가. 하지만 클래식은 클래식이다. 호텔 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따라 따라 따~' <미술관 옆 동물원> OST이자 러브하우스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Synopsis>를 흥얼거렸다. 넓은 욕실에서 ㄱ자 소파, 업무용 데스크, 침대를 지나 테라스로 나오니 세상에. 벨라지오 호텔과 분수, 패리스 호텔과 에펠탑, 하이롤러와 플라밍고 호텔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상상 속 뷰 그대로, 아니 그보다 훨씬 근사한 뷰가 펼쳐졌다. 처음 이 뷰 사진을 보고 나서 다른 호텔은 눈에 차지도 않은 터라 호텔 예약만으로도 꽤 큰 지출이 있었는데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벌써 오후 7시. 이 테라스는 더 향유할 수 있으니 더 어두워지기 전 짐만 대충 정리하고 바로 방을 나섰다.


 그렇듯 미국은 생각 이상으로 넓다. 구글 지도상 바로  건물이어도 건물 안은 카지노와 수많은 , 식당들로 가득해 한참을 걸어야 했다. 공연 관람 위주로  일정이라 레스토랑에 방문해 식사를   있는 횟수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사전에 메뉴와 동선 등을 무수히 검색한  고르고 골라 전부 예약을 해놓았다. 첫날 저녁으로 근사하게 비프 웰링턴을 먹고 싶어 예약한 곳은 아리아 리조트 내에 위치한 바르도 브라세리(Bardot Brasserie). 그러나 비프 웰링턴은 2인용이라 주문이 불가했다. 대신 전채는 어니언 수프, 메인으론 추천받은 푸아그라를 올린 스테이크, 와인은 글라스로  잔을 주문했다. 이런 사치의  끼를 위해 떠나오는 것도 있다.


분위기와 가격에 비해 아쉬운 맛이었지만 무척 친절한 서버 덕에 모든 걸 상쇄하고 기분 좋게 결제했다.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도시답게 대부분이 맨 얼굴이다. 일행들과 웃고 떠드는 사람들, 관광객들을 호객하는 사람들이 거리에 혼재했다. 코로나가 없던 과거로 돌아온 것만 같다. 한 번쯤 마스크를 벗어도 괜찮을까 하는 충동을 코너를 돌 때마다 은은하게 퍼지는 대마초의 향에 꾹 눌렀다. 이 여행을 무탈히 마쳐야 또 다음이 있다.


밤이 되니 라스베이거스의 매력이 더욱 살아났다. 더운 낮에 기죽어있던 밤의 영혼들이 화려한 조명 아래 부활한 것만 같다. 오랜 비행의 찌듦이 묻은 몸을 그제야 개운하게 씻고 테라스로 나와 도시의 밤을 조망했다. 이대로 침대에 누우면 바로 뻗을 것 같지만 새벽 한 시 반에 출발하는 그랜드 캐년 당일 투어가 기다리고 있다. 함께 해외 출장을 다녀왔던 L 선배가 내게 말했다.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는 순간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고, 사람이 그 자체로 '살아난다'고. 30시간 가까이 숙면하지 못했는데도 피곤하지 않다. 나 또 새롭게 살아났다.


추울 것을 대비해 얇은 재킷 하나를 별도로 챙긴 뒤 방을 나섰다.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지만 호텔 로비는 카지노와 바(Bar)를 이용하는 사람들 덕에 오후 한 시와 같은 활기가 돌았다. 우버 탑승장에 앉아 파티 복을 입은 채 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시간 맞춰 도착한 차량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혼자 온 나를 포함해 총 7명이 떠나는 투어. 첫 도착지는 유타 주의 어느 숨겨진 스팟. 칠흑같이 어둔 사위에 쏟아지는 별부터 보러 갔다.


차량이 고속도로에 돌입한 순간부터 모두 잠이 든 듯 정적이 흘렀으나 나는 가만히 MP3를 꺼내 이어폰을 꽂고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새벽에 출발하니 이런 기쁨이 있다. 운전 어렵게 고속도로에 불빛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렇기에 촘촘히 떠 있는 별들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어두워야만 했던 이유다. 어두워야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있다.


여행과 덕질의 공통점이라면 도무지 질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똑같은 걸 또 봐도 좋은 걸 어떡해. 이국의 고속도로 이정표만 봐도 졸린 눈이 이렇게 말똥거리니. 세 시간쯤을 달린 후 이름 모를 어느 곳에 도착했다. 차 시동이 꺼지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이 급작스럽게 들이닥쳤다. 땅에 두 발을 안정적으로 딛자마자 바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곳곳에서 한숨과 같은 함성이 터졌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서 별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과장 조금 보태 손 뻗으면 닿을 듯 별들이 가까워 또 다른 감탄을 자아냈다. 우아하게 뻗어 있는 은하수와 착각이 아니라는 듯 선명한 줄무늬를 단 별똥별이 지척에 있었다. 유타 주, 애리조나 주, 네바다 주. 당일치기 투어로 이 커다란 세 개 주를 넘나들 수 있는 건 한국인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이 틀 때까지 하염없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다음 코스로 이동을 해야 하니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동이 트고 시야가 맑게 갤 즈음 홀스슈 밴드에 도착했다. 근처에 다다를 때부터 달라지는 창 밖 풍경에서부터 어마어마하겠다 싶었는데, 콜로라도 강이 말발굽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는 홀스슈 밴드의 거대함을 바로 마주할 땐 입을 떡 벌렸다. 위험하지 않을 곳까지만 내려가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눈으로 열심히 담은 뒤 앤텔롭 캐년으로 이동했다.


마스크 착용 필수에 가방 반입 금지, 나바호족 가이드가 반드시 동행해야 하며, 동영상 촬영은 엄격히 금지된 앤텔롭 캐년은 까다롭게 관리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빨간 굴곡. 윈도우 배경화면으로 익숙한 이곳에 발을 들여 직접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 좁고 붉은 협곡 사이에 스며드는 일직선의 햇빛. 모두가 걸음을 자주 멈출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앤텔롭 캐년은 곳곳이 포토 스팟이었다.


보통 새벽 3, 4시쯤에 출발하는 투어를 2~3시간 앞당겨 출발한 이유가 앤텔롭 캐년 예약 때문이었다고 한다. 입장은 제한되는데 그만큼 찾는 관광객들이 많아 차라리 일찍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고.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단체 관광객들의 행렬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덕분에 조용한 앤텔롭 캐년을 구석구석 볼 수 있었다. 가까운 버거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다시 차에 탔다. 드디어 마지막 목적지만 남았다.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곧잘 언급되는 그곳, 그랜드 캐년이다.


고도가 높아져 코가 막힌다 싶더니 벌써 창 밖 풍경이 다르다.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너비의 땅이 아래로 푹 꺼져 있는 모습이 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간다. 그랜드 캐년을 볼 수 있는 스팟들은 여러 군데 있는데 우리가 가는 곳은 관광버스가 정차할 수 없어 단체 관광객들로 붐비지 않는 곳이었다. 그랜드라는 단어가 이토록 완벽하게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펼쳐진 웅장하고 광활한 자연 앞에서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혼자인 나를 본인들 사이에 잘 끼워 다녀 준 띠동갑 친구들 덕에 사진도 많이 찍었다. 지난 LA 공연을 끝내고 그랜드 캐년 투어를 했던 윤기 사진을 보며 여기 즈음일까, 하며 비슷한 포즈를 흉내 낸 사진은 덤이었다.


그랜드 캐년을 이렇게 짧게 보고 돌아가다니. 혹시 라스베이거스를 다시 찾게 되면 그땐 꼭 1박을 해야겠다 다짐했다. 다짐하다 보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잠깐 쪽잠을 잤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눈을 뜨면 3~40분씩이 지나있는 정신과 시간의 방을 지나니 어느새 보이는 라스베이거스 이정표. 각자 묵고 있는 호텔에 차례로 드랍오프했다.


첫 콘서트를 보고 와서 마실 생각으로 미리 사다 놓은 샴페인을 오늘 마시자 싶어 호텔 입구를 그대로 지나쳐 스트립 북쪽을 향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먹어야 하는 것 하면 대표적으로 꼽히는 게 전 세계에 단 네 군데만 있는 고든 램지 버거지만 이미 햄버거는 점심으로 먹은 데다 엄청난 웨이팅을 견딜 자신이 없어 또 다른 고든 램지 브랜드인 고든 램지 피시 앤 칩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메뉴를 포장한 뒤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차만 탄 것 같은데 오늘 걸은 걸음 수가 2만 보를 기록했다.


다시 봐도 절경이다 이 풍경은. 코스모폴리탄의 파운틴 뷰는 도시 성애자인 내게 영영 질리지 않을 풍경이다.  얼음을 가득 채운 버킷에 샴페인을 담고 잔과 따끈따끈한 피시 앤 칩스가 테이블에 차려졌다. 역시 영국 대표 음식은 피시 앤 칩스다- 했다가 와인 한 병을 다 마시고도 부족하면 룸서비스를 시켜야 하나- 했다가 옅은 취기로 음악을 흥얼흥얼 거리던 중 울린 메시지 알림. 지난달 왼손 검지 힘줄이 다친 석진이 무리해서 움직이거나 충격을 받을 시 재수술의 우려가 있어 이번 콘서트에선 최소화한 안무에만 참여한다는 소식이었다.


당장 내일이 공연인데,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모든 안무를 그대로 소화해보려던 본인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을지, 그럼에도 일부만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 정리되었을 때 얼마나 속상했을지 눈에 훤했다. 내일 더욱더 큰 함성을 쏟아야지. 그 생각만 했다. 피곤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빠르게 취기가 도는 것 같아 자리를 금세 갈무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 푹신한 침대에 무려 이틀 만에 처음 눕는다. 이제 드디어 공연이다.


푹 자고 일어나 시간 맞춰 PCR 검사를 마쳤다. 12시간 내에 결과를 받아볼 수 있는 꽤 값이 나간 유료 검사였는데 스트립에서 떨어진 오래된 호텔의 야외 주차장 구석에서 셀프로 검사했다. 제대로 검사가 된 건지 불안해하며 제출하고 다시 우버를 불러 스트립으로 향했다. M&M, 코카콜라, 기념품샵 등을 차례로 들러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M&M에선 배경음악으로 <My universe>가 나왔고, 거리엔 스타디움용 PVC 가방을 들고 다니는 아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점심은 한국계 미국인인 유명 셰프 데이비드 장이 운영하는 모모푸쿠(Momofuku)에서 했다. 바 형태의 작은 레스토랑인 줄 알았는데 규모가 꽤 컸다. 예약 명단을 확인할 때 가능하면 테이블 좌석에 앉고 싶다고 했더니 안쪽의 넓은 홀로 안내받았다. 라스베이거스 메인 스트립을 너른 통창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주문한 포크 밸리 번과 양갈비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리울 정도로 라스베이거스에서 먹은 가장 맛있었던 메뉴였다.


꽤 무리한 일정을 짜 온 건 아닐까 싶었는데 호텔들을 구석구석 구경하지 않으니 다닐만한 여유가 있었다. 공연장인 얼리전트 스타디움까지 도보로 약 40분. 뙤약볕을 걸어야 하지만 구경하며 가면 금방일테다. 길을 걸으며 여기가 Eataly구나, 여기가 뉴욕뉴욕 호텔이구나, 여기 쉐이크쉑은 진짜 뉴욕 지점 같네, 호텔마다 우리 애들 공연 홍보 엄청 되어 있네- 했다. 그리고 허쉬 초콜릿 매장이 보이자 바로 들어왔다.


기념품 할 만한 것이 없나 둘러보는데 한쪽에 자신이 원하는 문구를 넣은 포장지를 주문할 수 있는 기계가 있었다. 이런 쓸데없는 걸 또 못 지나친다. 라스베이거스가 적힌 배경을 먼저 선택하고 여기에 어떤 문구를 넣을까 고민하다가 간단히 MINYOONGI라 적었다. 결제를 완료하고 카운터로 찾아가 내가 저장한 내역의 출력을 요청했다.


내 주문 내역을 보더니 갑자기 자신의 허벅지를 치며 함박웃음을 짓던 캐셔가 "민윤기? 너 BTS 팬이구나!" 하며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본인은 태형이가 최애라며, 태형인 정말 골져스- 하지 않냐며 대화를 이끌었다. 한국에서 여기까지 공연 보러 온 거 대단하다고, 자신은 여기 사는데도 티켓을 못 구했고 대신 BTS 덕분에 요즘 엄청 바쁘다며 WWE에 이어 아미로 유명한 '존 시나'로까지 대화 주제가 연결됐다. 슈가(SUGA)란 이름을 보고 BTS 멤버라고 아는 것도 대단하지만 민윤기란 한글 이름의 영문 표기를 보고 방탄소년단인 걸 아는 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이렇게 직접 목격하면서도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근데 그걸 그들이 해낸다. 해냈다.


엑스칼리버 호텔에서 무료 트램을 타고 만달레이 베이 호텔에 내렸다. 호텔에는 곳곳에 얼리전트 스타디움을 향한 이정표와 함께 방탄소년단 콘서트를 홍보하는 표시가 곳곳에 있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출구로 나와 다리만 건너니 바로 스타디움이었다. 공연이 상시로 개최되고 관광에 특화된 도시답게 공연장 내 외부 직원들은 관객들에게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공연장 입구를 찾느라 헤맬 일 없이 처음부터 입장 줄을 세웠다. 티켓 검사와 가방 검사를 한 뒤 입장을 해 자신의 좌석을 바로 찾아갈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첫 콘서트 입장에 두 시간이 걸렸던 LA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완벽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미국 스타디움 중 가장 비싼 스타디움 1위가 LA 소파이(Sofi) 스타디움, 2위가 라스베이거스 얼리전트 스타디움이라던가. 이 두 곳을 모두 방탄소년단 덕분에 와 본다. 어렵지 않게 좌석을 찾아 이동했다. 들어갈 입구 번호가 보이자 그 앞에서 그레이 구스에 탄산수만을 섞은 진한 칵테일 한 잔을 주문했다. 취식과 음주가 자유로운 곳. 여기서 한 잔 즈음은 당연히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예매한 좌석은 본 무대와 돌출 무대의 사이의 1층 구역. 일행과 수다를 떨고 기념사진을 찍고, 뮤직비디오 노래를 따라 부르고, 음식을 먹는 들뜬 소란이 스타디움에 가득했다. 방역 수칙에 반하지 않게, 혹시나 괜한 구설수로 방탄소년단 욕 먹일까 더욱더 조심했던 서울 콘서트 이후의 공연인지라 이 북적임이 반갑기만 했다. 공연 시작 전, 메일로 PCR 검사 결과를 받았다. Negative/Not Detected. 와서도 마스크를 벗은 적 없고 비염 증상도 전혀 없었지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얼음이 녹아 알코올이 희석된 칵테일을 절반쯤 마시니 공연 시작 시간이 가까워졌다. 공연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Dynamite>, <Butter> 뮤직비디오에 맞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추는 열기로 내부가 들끓었다. 전광판 문제로 공연이 딜레이 될 때도 BTS를 연호하고 파도타기를 하는 아미들. 오늘 관객들 텐션을 보니 공연 분위기가 역대급일 것 같다. 예상 시작 시간인 7시 30분보다 약 40분이 늦은 8시 10분. 드디어 공연이 시작됐다.


온라인 스트리밍부터 직접 본 LA, 서울 공연까지. 퍼투댄(Permissin to dane on stage) 공연은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처음처럼 좋다. <ON>에서 <DNA>까지 몰아치는 첫 무대, <Black swan> 시작 전 돌출무대 4면을 활용한 흑조 퍼포먼스, 밴드와 함께 하는 <작은 것들을 위한 시>, <Dynamite>에서 <Butter>로 이어지는 댄스 브레이크, 이동차(토롯코)를 타고 돌며 부르는 <Wings>와 생각지 못했던 앵콜 <Airplane pt.2> 등은 좌석에 대체 앉아 있지를 못하게 했다. 외따로 의자에 앉아 멤버들을 보며 공연하는 석진이의 얼굴이 전광판에 잡히면 더욱 크게 소리도 질렀다.


가만히 있어도 흥분감이 도처에 널려 있는 이 분위기를 멤버들도 알았나 보다. 마지막 곡 <Permission to dance>를 앞둔 멤버들이 각자 오랜만에 들은 함성의 기쁨에 대해 얘기했다. 멤버들의 멘트가 통역되는 사이사이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온 피켓들을 비춰주는데, 정국의 멘트 중간에 'We want to focus on...'에 <Fake love> 복근 사진을 붙인 피켓이 등장했다. 그걸 보고 정국이 자신의 티셔츠를 세 번이나 들추며 짓궂은 미소를 보였다. 함성으로 스타디움 뚜껑을 날릴 수 있다면 아마 그때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래미를 위해 라스베이거스를 찾은 게 아니라 아미를 위해 라스베이거스에 온거라는 남준의 말이 내내 남은, 공연이 늦게 시작된 만큼 더 늦은 시간까지 함께 있었던 첫 공연이었다.


원래도 밤이 살아있는 라스베이거스지만 이 수많은 팬들과 함께 걷는 라스베이거스의 밤은 새롭게 안전했다. 공연을 본 대부분의 팬들이 메인 스트립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스타디움에서 호텔까지 천천히 걸었다. 호텔에 벌써 도착한 남준이 브이앱으로 찾아왔으나 데이터가 터지질 않아 실시간으로 보기는 포기했다. 대신 라스베이거스 밤 풍경을 눈에 가득 담았다.


오늘도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오전 8시 30분에 호텔로 픽업 올 차량에 탑승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제 공연장을 향해 걷던 중 남준이 다녀간 근교의 세븐 매직 마운틴스(Seven Magic Mountains)를 2시간 안에 보고 오는 투어가 있음을 소개받았고, 혼자 우버를 타고 다녀오는 것에 비해 가격도 시간도 합리적이라 그 즉시 오늘 아침으로 예약한 터였다. 이름 하야 남준 투어. 나를 포함해 총 6명이 이 짧은 투어에 함께 했는데, 모두 콘서트를 보러 온 아미들이었다.


스타벅스 드라이브 스루에 들러 커피 한 잔씩을 선물 받곤 어제 봤던 콘서트 이야기와 오늘 있을 콘서트 얘기들을 나눴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알록달록한 색들로 우뚝 솟은 7개의 돌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채도 낮은 사막 풍경 가운데에 저 쨍한 노랑과 초록과 분홍이라니. 가까이 다가가니 하늘 높이 우뚝 솟은 거대한 돌덩이들의 크기가 실감 났다. 남준이 인스타그램을 보며 남준이의 사진 구도에 맞춰 사진을 찍다 보니 많은 사람들과 동선이 겹쳤다. 대부분 우리 팬들이구나, 그렇게 또 남준이는 이곳을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면 꼭 가 봐야 할 곳으로 만들어냈구나 싶었다. 정말 걸어 다니는 영향력 그 자체다.


혼자 투어를 온 분들과 사진을 서로 찍어주며 있는데 갑자기 저멀리 여성 분 한 분이 뛰어와 "제이님 맞으시죠?"라며 인사를 건네 왔다. 내 인스타그램을 팔로잉하고 있다며, '어디서 낯이 익은 사람인데-' 하며 봤더니 그게 나였더란다. 반가움에 본인도 모르게 뛰어왔다고. 인스타그램을 일기처럼 쓰기에 착장이나 동선 등을 자주 업로드하다 보니 LA에서도, 서울 콘서트장에서도 가끔씩 알아보는 분들이 생기는데 그 넓고 다양한 선택지 중에 이 날짜, 이 시간의 세븐 매직 마운틴스에의 알아봄은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 콘서트도 즐겁게 보시고 라스베이거스 일정 마무리 잘하라는 인사를 나눴다. 모든 우연은 인연이고, 모든 인연은 소중하다.


다시 돌아온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숙소인 코스모폴리탄 대신 베네치안 호텔을 드랍 오프 장소로 선택했다. 늦은 점심을 이곳에서 할 예정이었는데 그전에 천천히 구경을 하고 싶어서였다. 베네치안 호텔의 외관은 높은 종탑과 리알토 다리, 곤돌라와 곤돌리에까지 있어 꼭 베니스 산 마르코 광장에 도착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베네치안 호텔 1층은 여느 호텔과 다름없는 카지노였지만 2층으로 올라오니 어느새 다시 이탈리아로 순간 이동시켰다.


피렌체의 어느 성당에 들어온 듯 천장화를 감상하며 걷다 보니 베니스 운하에서 영감을 받아 꾸민 그랜드 캐널 상점가가 나왔다. 천장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하는 하늘로 치장되었고, 상점들은 수 백 년 이상의 역사를 쌓은 듯한 유럽식 건물을 흉내 내고 있었다. 일부러 꾸며낸 공간이란 걸 알면서도 감탄사를 내뱉으며 사진을 찍었다. 호석이랑 태형이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스팟에는 비슷한 구도로 사진을 찍고 있는 팬들이 여럿 있었다.


베네치안 10층에 위치한 부숑(Bouchon)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입구로 들어가는 길에서 이미 대접받는 기분이 드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 베니스를 콘셉트로 한 호텔답게 고풍스러운 천장화와 큼직한 샹들리에가 잘 도착했다고 인사해주는 듯했다. 예약을 확인받은 뒤 미리 세팅된 테이블에 앉았다. 저녁에 공연을 보고 내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러 가니 이런 사치를 부릴 수 있는 마지막 한 끼다. 에스까르고와 크랩 베네딕트를 시켜 싹싹 긁어먹었다. 프렌치 레스토랑답게 식전에 따뜻하게 주는 바게트가 정말 맛있었던 곳이었다.


베네치안 호텔은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의 북쪽에 위치한 터라 스타디움까지 거리가 꽤 되었다. 그러나 언제 또 이 길을 걸어보나 싶었다. 여행지에선 없던 체력도 솟아나는 사람인데 이 정도 더위쯤이야. 가까운 CVS에서 물 하나를 산 뒤 자주 수분을 섭취하며 걸었다. 비틀스,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등 이제는 활동하지 않거나 고인이 된 가수들의 트리뷰트 혹은 홀로그램 공연 안내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어떤 스타는 영원히 잊히지 않는 법이다. 내게 방탄소년단도 그러겠지.


무료 트램을 타고 만달레이 베이 호텔에 내려 어제와 똑같은 방식으로 걸었다. 어제보다 입장 줄이 좀 길다 싶었는데 사운드 체크가 막 끝난 참이라 입장이 진행되지 않고 있어서였다. 줄을 서 조금 기다리니 금방 앞으로 이동한다. 티켓 검사를 마친 뒤 스타디움으로 들어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아래로 내려왔다. 오늘은 고대하던 그라운드 좌석에서 공연을 보는 날이다. 라스베이거스의 땡볕에 오래 노출되었더니 마스크 안의 얼굴이 벌갰다. 눈썹을 찌르는 앞머리는 아미밤에 둘러놓았던 알제이 머리끈으로 꽉 묶어버리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사 마셨다. 자리는 본 무대와 돌출 무대 중간 즈음. 특히 두 무대가 이어지는 통로와 가까운 좌석이라 가깝게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샘솟았다.


공연이 시작됐다. 본 무대 가운데 전광판이 위로 올라가고 <ON> 무대 효과로 쓰이는 철창 뒤로 멤버들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환호했다. 키가 크지 않은 나는 스타디움 공연 시 대부분 단차가 있는 1층 좌석을 선택해 왔다. 무대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그라운드 좌석을 예매했었던 시카고 솔저 필드 스타디움에서 BT21 머리띠며 높게 뻗은 팔과 핸드폰, 거기에 각자 준비해 온 피켓들 덕에 무대 위 멤버들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전광판만 내내 봤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가까운 좌석이면 일어서는 것도 그리 부담되지 않는구나. 핸드폰을 높게 들고 있는 팬들은 여전했지만 높은 무대 위 멤버들의 모습이 시야에 걸리는 것 없이 선명히 박혔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실물이 눈앞에서 황홀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에 앉아서 공연을 보느냐에 따라 공연을 감상하는 방법이 다를 것이다. 오늘은 나중에 다시 돌려볼 수 있게 동영상 촬영에 신경 쓰며 가까이 다가오는 멤버들의 모습 자체에 집중했다. 다음 공연에선 여러 위치의 좌석에 앉아 봐야지. 공연장 전체를 내려다보며 핸드폰 촬영 대신 순간에 완벽하게 몰입해보기도 하고, 가까이 앉아 멤버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지켜보기도 하며.


열다섯.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버스에 타고 내리던 단체 투어로 미국을 처음 왔다는 남준이. 그 단체 투어의 마지막 도시가 라스베이거스였던 어린 남준에게 '네 삶 그리고 네가 다음에 가게 될 라스베이거스는 정말 놀라울 거'라고 말하고 싶다는 마지막 멘트 중, 어라? 전광판에 나타난 얼굴이 낯이 익다. '나네? 나야!' 이런 중요한 순간에 내가 슬쩍 끼어들어 자리잡았다. 잊을 수 없을 방점 하나가 여기 찍혔다.


2회 차 공연 감상은 좋았다는 뻔한 말 대신 윤기가 했던 말로 갈음하여 쓴다.


"BTS 맛집 먹고 나면 딴 데 못 갑니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지 나흘째, 스타디움 방문 이틀 만에 익숙해진 이 길. 해외 콘서트를 보러 갈 때 공연장과의 접근성도 중요하게 보는 편인데 그런 면에서 라스베이거스는 만 점에 가깝다. 다음에도 라스베이거스 공연이 개최된다면 무조건 다시 와야지. 어제와 같이 많은 팬들과 함께 안전하게 호텔까지 걸었다. 내일 아침 이르게 체크아웃해야 하기에 월그린과 CVS를 지나쳐왔는데 낮에 미리 사 둔 칠리 도그에 맥주 한 캔은 해야지 싶어 호텔 안 작은 가게에서 거의 만 원을 주고 맥주 한 캔을 샀다. 비싸게 주고 산만큼 달게 마셨다.


오전 9시 5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섯 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일어났다. 테트리스 실력을 발휘해 캐리어를 겨우 잠그고 체크아웃을 완료했다. PCR 검사지 발급 시간과 한국행 규정을 꼼꼼히 확인한 뒤 보딩패스를 받아 출국 심사를 마쳤다.


나는 보통 이동 수단에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13시간의 비행 동안 잠을 자는 시간이 30분이 될까 말까 한 정도(물론 비즈니스석 탈 땐 제외. 몸은 정직하다). 그래서 라스베이거스 호텔 예약과 동시에 인천 공항 근처 호텔도 함께 예약했다. 푹 자고 일어나 네 시간에 가까운 운전을 하려고. 사실 지난 LA도 지금과 같은 시간의 비행 편이었는데 그땐 방역 수칙 덕에 거주지로 바로 이동해야만 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상태로 시차에 적응하기도 전에 바로 고속도로 밤 운전을 했다. '아, 이러다 그대로 졸아서 사고 나겠다' 싶은 아찔함을 느끼면서도 자꾸 눈이 감겨 어찌나 혼이 났던지. 라스베이거스 일정을 하루 졸이고 이 휴식을 택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이 가늠하지 못하는 많은 기회비용을 평생 지불하며 산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이전 덕후 일기에 썼듯 내 여행은 '이왕'이란 두 글자에 '그곳'이란 두 글자를 합쳐 '이왕 그곳'에 갔으니 할 만한 것들 찾아내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이번 라스베이거스는 현지 시간으로 수요일 저녁에 도착해 목요일 하루 그랜드 캐년 당일 투어를 다녀오고, 금요일과 토요일 공연을 보고, 일요일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인천에서 하루 묵는 일정이었다. 처음으로 여행에 '이왕'을 덜어냈다. 이게 가능한 거였다.


잠을 청하기 위해 예약한 호텔은 일몰이 아름다워 호캉스로도 많이 선택한다는 네스트 호텔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와 피곤한 몸을 씻고 나니 어느새 저녁 여덟 시. 바깥은 온통 어두워 비릿하게 짠 바람 냄새만이 바다임을 느끼게 했다. 편의점에 다녀 올 생각도 못하고 곧장 호텔로 운전해 온 터라 룸서비스로 비싼 맥주를 시켰다. 오늘까지는 라스베이거스 바이브다. 스피커를 연결해 방탄소년단 노래를 몇 곡 듣곤 고작 맥주 세 잔에 취기가 잔뜩 올라 자리를 금방 정리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잠이 이런 걸까 싶을 정도의 완벽한 잠이었다.


귀국 1일 이내에 거주지 보건소에서 받아야 할 PCR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채비를 하고 긴 운전 길에 나섰다. 네 시간의 운전이 두렵지 않았다. 공연 셋 리스트와 함께라면.


방탄소년단이 콘서트로 라스베이거스에 머물렀던 동안 라스베이거스 공식 트위터는 보라해가스로 이름을 바꿨고, 스트립 곳곳의 전광판에선 보라색 배경에 흰 바탕으로 쓰인 보라해가스(Borahaegas)가 노출됐다. 그 타이밍에 광고를 틀었다면 수많은 수익을 올릴 전광판인데도 그랬다. 곳곳의 호텔은 고유의 색 대신 보라색을 점등했고, 벨라지오 분수쇼는 기존의 음악 리스트에 <Dynamite>와 <Butter> 리믹스를 추가했다.


라스베이거스 공항 역사상 최초로 공항 관제탑 조명을 보라색으로 바꾸었고, 네바다 주지사는 트윗을 통해 방탄소년단의 곡을 추천받는다며 방탄소년단의 방문이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래미 시상식이 열린 MGM 그랜드 가든 아레나에서 개최된 4회 차 라이브 뷰잉(콘서트나 스포츠 경기가 열리고 있는 현장의 라이브 영상을 영사(映寫), 음향 설비가 갖추어진 영화관 등에서 상영하는 이벤트)을 매진시키기도 했다.


방탄소년단이 라스베이거스에 끼친 경제 효과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막에 신기루처럼 만들어져 자국민을 비롯, 전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매일이 떠들썩한 도시가 라스베이거스다. '그' 라스베이거스가 방탄소년단이 콘서트를 여는 날짜에 맞춰 오직 방탄소년단과 아미들을 위해 이런 변화를 주었다는 것이다.


전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었을 라스베이거스 '보라해가스'가 우리들로 인해 탄생했다.


지금보다 분명 추후에 이 업적이 회자될 누군가의 리빙 레전드 시절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기쁨과 방탄소년단 덕질을 동시대에 현재 진행형으로 함께 할 수 있다는 행운을 더한 짧은 여행을 마쳤다.


안녕, 보라해가스!

그렇게 이번에도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SeesawLoveDance



P.S


해외 콘서트가 있을 때 한국에 있으면 제일 좋은 것 중 하나가 와이파이다. 공연이 끝나고 곧장 호텔로 돌아간 멤버들이 켠 브이앱을 끊김 없이 보는 것으로 해외 콘서트를 직접 보러 가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 상쇄한다. 그러나 라스베이거스 3회 차 공연이 끝나고 찾아온 네 명의 멤버들이 '피곤함에 취해 아무 말 대잔치를 펼친' 세상 소중한 브이앱은 한마디에 한 번씩 끊겨댔다. 한국 와이파이가 잘 터지면 뭐해 라스베이거스가 영 꽝인걸. 한국 시간으로 4월 17일 오전 11시. 4회 차 공연은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함께 했다. 현지 공연장은 떠들썩하게 들끓고 있겠지만 정제된 화면 밖에서 나는 조용히 아미밤을 흔들었다.


공연은 단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내가 간 공연과 내가 안 간 공연.


진리는 올 콘이다. 그러니 한 도시 투어를 2주에 나누어하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6월 10일 컴백 소식에 페스타가 더욱 기다려지는 시점. 페스타가 시작되기 전까진 다시 인스타그램에 짤막한 글을 쓰고 휘발성 감상을 남겨놓으며 덕질해 갈 테지만, 써야 한다는 자각을 언제든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있다는 건 여전히 기쁜 일이다.


업로드가 자주 되지는 않지만, 예전 글들은 자주 수정하며 이따금씩 새 글을 올릴 공간으로 계속 존재할 테니 그 이따금씩의 순간에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덕후 일기는 느리게 굴려가겠습니다.


그럼에도 늘 그렇듯 덕질은 계속됩니다. 피-쓰.



TMI) 개인적으로 라스베이거스 대신 라스베가스란 어감이 좋아 내내 라스베가스로 썼는데 브런치 맞춤법 검사가 라스베가스를 라스베이거스로 수정했다. 그래도 보라해가스가 보라해이거스로 수정되지 않아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64.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