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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Mar 26. 2019

18. 설탕보다 중독적인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18


 우리가 클리셰(cliché)라고 부르는 드라마의 흔한 설정이 있다.


 캔디형이든 상처형이든 나름의 서사를 지닌 여자 주인공이 있다. 이 여자 주인공은 자립형이든 모태형이든 역시 나름의 서사를 지닌 남자 주인공을 우연히 만난다. 이 첫 만남은 사건이나 사고로 불릴 정도의 충돌이 수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강렬하고 부정적인 첫 만남으로 인해 남자 주인공은 주로 여자 주인공을 오해하고 까칠하게 대하는데, 두 사람은 이 불편함이 무색하게도 우연이 우연처럼 겹치는 만남을 계속하게 된다.


 남자 주인공이 상사로 있는 회사에 여자 주인공이 취직을 하거나, 집을 계약했는데 알고 보니 사기를 당해 같은 집에 살게 되거나, 어쩔 수 없는 계약 연애를 하게 되거나 그렇다. 어떤 현실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일상을 살아내는 여자 주인공을 보며 남자 주인공은 ‘나를 이렇게 대하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혹은 ‘이 사람은 나를 내 배경이 아닌 나로 대해’ 혹은 ‘내가 알아왔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잖아’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쯤 되면 우린 이 드라마의 흐름을 완벽히 추측할 수 있다. 까칠하기론 세상에 둘도 없던 남자 주인공이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남자로 변모하고, 우연은 인연으로 신분 상승하여 짜잔- 두 사람은 사랑에 성공하게 된다는 결말. <오만과 편견>에서 <미 비포 유>. 또는 <꽃보다 남자>에서 <시크릿 가든>까지. 이 뻔하디 뻔한 러브 스토리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까칠함이란 가면 속에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는 ‘그'에 대한 로망, 밉지 않은 날 섬 안에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가지고 있는 ‘그'에 대한 환상이 고전 그 자체기 때문이 아닐까.


 까칠하고 예민하고 냉정한 데다 현실적이고, 가끔은 세상을 달관한 것처럼 멀어 보였다가 무기력했다가 어려워 죽겠는데, 한번 웃으면 세상이 환해졌다가 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가 사심 없이 따뜻하고 다정한 '그'. 영화나 만화, 드라마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로망의 ‘그’가 실재한다면, 믿으시려나. 클리셰의 결정판인 인물, 바로 방탄소년단의 슈가다.


 쌍꺼풀 없는 작은 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현실적인 조언을 무신경하게 툭툭 내뱉다가도 제이홉에게 장난을 치고 입동굴 만들며 환하게 웃는 슈가를 마치 캔디형 여자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덕후 경력 nn차에 3n살이나 먹어놓고 매일 영상 찾아보느라 뜬 눈으로 출근하게 하는 방탄소년단의 슈가가 대체 누구냐면..  



 [까칠하고 예민하고 냉정한 데다 현실적이고]

 [세상을 달관한 것처럼 멀어 보였다가 무기력했다가 어려워 죽겠는데]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묻어나는 말투. 혀를 끌 차는 말버릇. 무심하게 낮은 목소리. 음식을 즐기지 않는 마른 몸. 깨끗한 하얀 얼굴. 싱글 몰트 위스키를 즐기고 무채색의 옷을 찾아 입는 취향. 약간은 멍 때리는 듯한 무표정. 비켜서 있는 위치. 음악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 어떤 질문에 있어서도 단호하게 내놓는 대답. 활동이 없는 날이면 작업실에 박혀 있어 하늘의 별 따기인 목격담. 다가가기 쉽지 않은 아우라.


 슈가의 디폴트를 짚어보면 이렇다.


 13살 때부터 미디를 다루고, 학창 시절엔 언더 그라운드 래퍼로 활동했던 슈가는 아이돌이 아닌 작곡가가 되기 위해 빅히트의 문을 두드렸다. 오디션을 통과했더니 어느새 춤 연습을 하고 있더라는 웃픈 스토리. 밥을 먹으면 버스를 탈 돈이 없고, 곡을 팔면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기도 했던 슈가는 아이돌을 꿈꿔 본 적이 없었기에 다른 연습생들과는 결 자체가 달랐다. 녹록지 않은 현실에 대한 경험, 좌절과 실패,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의 고민과 방황, 자신의 선택에 대한 순응과 추진. 이 모든 과정을 겪어야 했던 슈가의 나이는 고작 스물 남짓이었다.


 진중한 인터뷰를 제외하면 표현을 낯 간지러워하는 데다가 메시지를 나서서 보내는 편도 아니고, 자유 시간이 생기면 그냥 방에서 쉬거나 음악 작업하는 것을 선택해버린다. 악플 같은 거 보지 말라는 팬의 말에 슈가는 그 예의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악플 쓰는 사람들한테 죄송하지만 보질 않는다. 더 써도 된다. 어차피 나는 보질 않고, 누군가는 그걸 고소를 하고. 모두가 좋은 일이지 않느냐'라고. 설탕처럼 달콤한 이름을 가졌지만 누구보다 심지가 단단한 사람인 슈가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휘둘리지 않고 누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크게 개의치 않아한다. 이런 슈가의 행동은 어떤 기준 같아서 슈가가 웃으면 정말 재밌는 상황이고, 슈가가 아니라고 하면 정말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2016년 여름, 슈가의 믹스테이프가 공개되었다. 믹스테이프는 방탄소년단의 슈가가 아닌 Agust D의 이름으로, 그룹이 아닌 솔로로, 자신의 감정들을 폭발적으로 녹아낸 트랙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데뷔 전과 직후의 시점부터 현재까지, 그때그때 감정을 응축한 노래들이었는데 이 가사들은 슈가가 지녔던 무거움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았던 그때의 자신이, 고작 두 명 앞에서 공연하며 좌절했던 자신이, 오토바이 사고로 어깨가 부서졌던 아픔이 정제되지 않은 채 가시처럼 돋아 있었다.


 잘 나가는 아이돌 랩퍼 그 이면에 나약한 자신이 서 있어 조금 위험해.

 우울증 강박 때때로 다시금 도져. hell no 어쩌면 그게 내 본모습일지도 몰라

 ... 청춘과 맞바꾼 나의 성공이란 괴물은 더욱 큰 부를 원해.

 무기였던 욕심이 되려 날 집어삼키고 망치며 때론 목줄을 거네 - The Last

                                                                                                                                                                             술이나 좀 줘봐 오늘은 취하고 싶으니 제발 말리지 마

 뭐든 좋아 백수 새끼가 술 마시는 건 사치지만

 취하지도 않음 버틸 수가 없어 모두가 달리는데 왜 나만 여기 있어
 모두가 달리는데 왜 나만 여기 있어 모두가 달리는데 왜 나만 여기서 있지 - so far away


 이렇게 풀어냄으로 인해 슈가는 많이 편해졌을까. 나는 이때의 슈가가 너무 아프고 처절하고 외로워서 그의 믹스테이프를 잘 듣지 못한다. 다만 아이돌로서 래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인정할 수 있을 때만큼 많은 시간을 들여 침잠한 후 받아들였을 그 방식은 너무나도 슈가스러웠다.  

 

 2017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무대를 마친 그날 밤, 슈가는 호텔로 돌아와 울었다고 했다. 너무 무서워서. 지금 이 자리는 음악을 시작하면서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는 높이라 절망적인 느낌이 들었다고. 높은 공기의 시원함을 즐겨봄 직도 한데, 그럴 수가 없었던 거였다. 스태프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버는 돈의 단위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고 환호하는 화려한 직업인 ‘연예인’, 게다가 세계 무대를 배경으로 활약하는 6년 차 가수가 이렇게 현실적일 수 있을까.


 쉽게 얻은 게 하나도 없음에 늘 감사하네 - BTS cypher 4


 하지만 2019년, 그래미 시상식의 시상자로 참석한 그 날 저녁, 슈가는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었다. 세계적인 가수들의 무대를 보며 자극을 받은 하루였다며 많은 것을 배우고 간다고. 이제는 무서움으로 울지 않았다. 음악으로 좌절하면 음악으로 추진력을 얻는 게 또 슈가기 때문이다.  

 

 '세상은 꿈을 꾸게 한 적도 가르쳐 준 적도 없습니다. 그리곤 당신 탓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탓이 아니에요. 본인을 자책하지 마세요. 힘들 땐 기대셔도 됩니다. 힘든 사람이 있다면 버팀목이 되어 주세요. 이것이 제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음악이 작은 힘이 되길.'


 이제 막 스물 중반을 넘어가는, 또래들로 따지면 군대 제대하고 막 졸업해서 취업 준비하려 정신없는 설익은 나이일 텐데도 슈가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말은 나보다도 한참이나 어른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던 만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그 행복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자주 생각하는 사람답게 툭 던져주는 메시지의 울림이 크다.


 '우리 함께 날고 있음에 용기를 얻습니다. 추락은 두려우나 착륙은 두렵지 않습니다.'


 '꿈이 없어도 괜찮아요 행복하시면 됩니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돌멩이가 되고 싶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그건 현재를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쉬는 날엔 오래 자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작은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 이 무수한 간극에 치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쯤 되면 클리셰 하나는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아픔이 있는 까칠하지만 진중한 ‘그’를 향한 범인류애적인 애정이 솟아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한 번 웃으면 세상이 환해졌다가]

 [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다 사심 없이 따뜻하고 다정한]



 마치 우울하고 무거움의 정점인 사람처럼 슈가를 설명했을까. 슈가는 사실 방탄소년단의 개그 롤이다. 진과 함께 방탄소년단의 자체 예능 ‘달려라 방탄’의 메인 MC이고, 빅히트 대표 미모 ‘민윤지’를 탄생시킨 데다가(여장이 이렇게 어울릴 줄은 본인도 몰랐을 거다), 무한도전의 ‘박명수’에 비견될 정도로 슈가의 컨디션이 좋은 날은 예능이 빵빵 터진다. 웃기려고 억지로 애를 쓰지 않아도 그렇다. 예의 그 심드렁한 말투로 포인트를 집어내면 멤버들은 금세 자지러진다.


 방탄소년단의 곡 중 안무가 섹시한 축에 속하는 <뱁새>의 댄스 브레이크. 가위바위보에 진 슈가가 그 댄스 브레이크의 주인공으로 낙점이 됐다. 노래가 시작되고 진지하게 연습을 하다가 마주한 댄스 브레이크 부분. 가운데에 선 슈가가 갑자기 막춤을 추기 시작한다. 앞니가 돌출되고 입동굴이 한껏 열린 채 헐랭 헐랭 스텝을 밟는다. 흘러나오는 노래에 신이 나서 입술 양 끝을 힘껏 올린 채 눈이 작아져 춤을 추고 있는 이 안무 연습 영상은 내게 우울할 때 보면 좋은 1순위 영상 중 하나가 됐다.


 밝은 제이홉과 있으면 그 시너지가 두 배가 된다. 제이홉의 ‘악개(악성 개인 팬)’으로 불릴 정도로 제이홉을 부르거나 놀릴 때 슈가의 텐션은 105%에 달한다. 2016년의 팬미팅에서 슈가는 제이홉과 함께 옴므를 패러디한 솝므를 결성했다. 랩퍼 두 사람이 핏대를 세워가며 <밥만 잘 먹더라>를 부르는데, 연습실은 자지러지는 고음으로 시끌벅적해졌다. 2016년은 슈가가 믹스테이프를 발표한 해이기도 하다. 깍두기를 담그는 정국이의 옆에서 소파에 앉아 “숨이 잘 안 죽나 봐”하며 놀리고, 바이킹 끝자리의 무서움에 지금 내게 없는 건 용기라며 샤우팅을 한다. 즐거워서 환하게 웃는 슈가의 하얀 얼굴은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있다.


 멤버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방탄 회식> 자리에서 태형이는 멤버들 모두가 다 힘이 되었지만 그중 가장 힘이 됐던 게 슈가에게 받은 예상치 못했던 장문의 메시지였다고 했다. 평소에 메시지 자체를 잘 보내지 않는 슈가라 다들 놀래서 슈가를 바라봤다. 메시지의 마지막 말은 슈가로부터 처음 들은 말이었다며 태형이 그 내용을 말하려고 하자 슈가가 민망함에 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그러니 다들 더욱 궁금해져 태형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슈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마는데, 그 말은 바로 ‘사랑한다’ 였단다. 그 메시지를 받고 태형이는 10분 동안을 울었다고. 그 메시지를 보낸 시점이 바로, 너무 많은 것을 얻어 순간적으로 갈피를 잃어버렸던, 그래서 해체를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던 그때였다. 그 메시지를 태형이 뿐 아니라 정국이에게도 보냈다고 한다. 겉으로 티 내지 않다가 불쑥, 힘든 막내들을 챙겼을 슈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른 멤버들은 진심으로 슈가에게 메시지를 받은 두 사람을 부러워하는데,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슈가는 귀가 빨개져선 얼른 다음 질문으로 넘겼다. 실제로 술을 마시면서 하는 방송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얘기는 두 사람 혹은 세 사람만의 이야기로 영원히 남았을지도 모른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내용이 좀 슬펐다'는 슈가의 말과 ‘먼 미래 지나가는 우리의 시간들을 보며 웃을 수 있기를’ 이란 정국이의 건배사를 미루어 짐작해볼 때, 지금의 힘듦을 그저 견디자는 말이 아닌, 이 모든 것이 과거가 된다는 것을,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적어도 지금을 후회하지 않게끔 지내보자는 다짐 같은 것을 말하지 않았을까.


 최근 빅히트의 사옥이 이전하면서 슈가의 작업실도 새로 꾸려졌다. 슈가는 3월 본인의 생일을 맞이하여 새 작업실 내부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는데, 생일을 축하하며 들어오는 태형이나 제이홉 모두 슈가의 작업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비밀번호가 쉬워서 그런가’ 하면서도 ‘들어오지 마’라곤 하지 않는다. 그저 ‘문 꽉 닫고 나가’라고 할 뿐이다. 잠금장치가 있어야 하는 사람이지만, 범주에 들어온 사람들은 의외로 쉽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슈가의 영역에 들어선다. 은근하게 다정한 사람. 그런 사람이다, 슈가는.


 <RM의 가사> 편에서 언급한 적 있는 방탄소년단의 노래 ‘Her’은 랩 라인인 RM, 슈가, 제이홉이 작업한 곡이다. 무수하고 거대한 숫자의 사랑에 대해 슈가는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어쩌면 나는 너의 진실이자 거짓일지 몰라 어쩌면 당신의 사랑이자 증오

 어쩌면 나는 너의 원수이자 벗

 당신의 천국이자 지옥 때론 자랑이자 수모

 난 절대 가면을 벗지 못해 이 가면 속의 난 니가 아는 걔가 아니기에

 그저 당신을 위해서 싫어하는 옷도 과도한 메이크업도

 당신의 웃음과 행복이 곧 내 행복의 척도

 이런 내가 이런 내가 당신의 사랑받을 자격 있을까

 언제나 당신의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해 이런 모습은 몰랐음 해 - Her


 팬들을 향한 슈가의 진심은 과장되지 않고 진솔해서 더 와 닿는다. 당장에 대답하고 싶을 정도다.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에게 최고라고. 가면 속의 네가 네가 아닐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 달라고.


 인터뷰하는 정국이의 뒤통수에 입을 맞추고 지나가는 슈가와 연습실에서 장난치는 슈가, 팬들의 댓글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라이브 방송 속 슈가와 <신청곡> 음악을 녹음하는 슈가. 이 전체가 슈가를 이룬다. 이룸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마 아이돌 오디션이란 걸 알았다면 그때 빅히트 오디션을 안 봤었겠지. 힘든 춤 연습 버텨줘서, 방탄소년단 멤버가 되어줘서, 중심 잡아줘서, 이렇게 좋은 음악 들려줘서, 누구보다 팬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심 없이 다정한 사람이라서 슈가가 좋다. 이런 캐릭터로 드라마 쓰면 이미 백번도 더 본 거라며 절필하란 소리 듣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런 사람이 정말 실재합니다. 진짜로요.






 슈가의 생일이었던 3월 9일. 생일 기념 컵홀더, 슬로건, 포토카드 등을 제공하는 카페들을 도장깨기 하듯 찾아다녔다. 내가 걸음 하는 모든 곳은 나 같은 덕후들로 바글바글했는데 슈가 팬임을 증명하는 배지나 징표들을 지니고 있는 팬들의 연령층이 유독 어렸다. 고사리 같은 손에 만 원짜리 지폐를 꼭 든 채 음료를 주문하려 줄 서 있는 어린 팬들의 뒤에 서니 그 어린 떨림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중학생쯤 되었을까. 딱 요즘 아이들처럼 험한 단어들을 섞여 가며 슈가의 귀여움을 찬양하는 말을 귓동냥으로 들으며 이 아이들의 심미안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너네 정말 이른 나이에 제대로 사람 봤구나 하고.


 주문 대기가 밀려 2~30분이 지나서야 겨우 커피를 받아 들고 자리를 잡았다. 슈가의 얼굴이 담긴 컵 홀더를 바로 빼 구겨지지 않게 가방에 잘 담았다. 슈가가 만든 노래들 위주로 일일이 선택해 듣고 있던 차였다. 최근 슈가가 랩 피처링으로 참여한 이소라의 노래 <신청곡>을 재생시켰다. 볼륨을 높였다.


 함께 할게 그대의 탄생과 끝 어디든 함께임을 기억하기를

 언제나 당신의 삶을 위로할 테니 부디 내게 가끔 기대어 쉬어 가기를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오늘도 또 이렇게 특별한 하루를 보내게 해 준 슈가에게 또 노래로 위로받는다.


 이 날 저녁, 서울에서 만난 친구와 식사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우리의 건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민윤기, 생일 축하해’


 윤기야. 앞으로 더 오래오래, 많은 음악 만들어줘. 너의 음악을 통해 진심으로 위로받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게 네가 음악 하는 모든 이유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너의 지금이 고통보단 보람으로 가득 차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가끔 떠올려 줘. 너의 모든 것을 응원해. 올해 스물일곱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윤기야. #민윤기짱짱맨뿡뿡



 P.S


 사실 슈가는 sugar 가 아니라 suga다.

 본인의 농구 포지션인 슈팅 가드에서 따온 말이다.

 아무렴 어떤가. 그가 설탕보다 중독적인 건 사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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