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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Mar 12. 2019

16. 존버는 승리한다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16


 무조건 버티는 일이 능사는 아니다. 참을 인자가 셋이면 살인을 면하는 게 아니라 호구된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분명, 버팀으로 인해 얻어지는 달콤한 수확이 있다. 월급이나 보람, 애정, 경험 등. 그런 의미에서 요즘 유행하는 ‘존버(존X 버티기)’란 말은 상스럽다기보단 서글픈 다짐에 가까운 말 같아서 곱씹기 나쁘지 않다. 월급쟁이로서, 방탄소년단 덕후로서, 존버로 얻은 과실이 있었다. 남들에겐 별 거 아닐지언정 내 손톱의 가시 같은 영향력을 끼친 최근의 그 존버들이 무엇이었냐면,



 1. 드디어 사무실 자리를 옮겼다.          



 2000년 말, 미디어법 개정은 지상파 방송국 환경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초창기 자리를 잡지 못해 헤매던 종합편성 채널은 거대 자본의 투입으로 드라마 시청층 파이를 제대로 잡았고, 인터넷과 모바일 위주의 플랫폼 환경 변화는 지상파라는 권력을 무너뜨렸다. 서울도 이럴진대. 지역 지상파 방송국의 환경은 더욱 악화됐다. 자체 사업을 하지 않으면 자생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자체 제작률이 높을수록 적자 확률이 높아지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라니. 지상파 환경이 적응할 수 없는 속도로 어려워지고 있는 현재. 올해 7년 차에 돌입한 나는 아직도 막내 사원이다.     


 삐까뻔쩍한 신사옥? 언감생심이다. 지은 지 30년이 넘은 우리 사옥은 요즘 보기 드문 빈티지함을 자랑하고 있다. 여름이면 비가 새고, 겨울이면 웃풍이 인다. 여름과 겨울을 책임지는 중앙 냉난방 환풍구는 과연 닦은 적이 있었을까 궁금하고, 습한 날엔 다양한 크기의 지네를 비롯한 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파브르가 환생하면 가장 좋아하는 곳이 우리 사옥이지 않을까. 장마 기간 한 두 어번만 지내면 책 한 권쯤은 뚝딱 써낼 텐데. 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의 물품이며 기자재며 장비들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어 온갖 역사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치워도 치운 티 안 나고 정리해도 정리한 티 안나는 빈티지의 정수. (아, 장점도 있다. 110 볼트 전자제품을 변압기 없이 쓸 수 있다.)   

  

 새 서버를 들일 장소가 필요해 별도의 사무실에 따로 마련돼 있던 광고 편집실을 우리 국(局)으로 통합하기로 했다. 이 오래된 사옥에서 공간을 찾는 일은 카드 돌려막기 같아서 이 공간 치워 저 공간으로 넣고 저 공간 빼서 이 공간으로 넣는다. 편집기와 책상 등이 지금의 사무실에 추가로 들어와야 해서 책상들을 비롯해 캐비닛, 짐들로 꽉 차 있는 현재의 사무실에 여백을 만들어야 했다. 출처와 용도 없는 물건들이 빼곡히 쌓여 있는 회의실 안 창고를 치운 뒤 그곳에 사무실 내 집기 등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책상 배치를 새로 하기로 했다. 아예 날을 잡고 청소를 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마스크와 장갑을 장착한 부서 전 직원들이 동원됐다. 콜록콜록. 창고에는 도대체 몇 년 묵었는지 모를 굵은 먼지 덩어리들이 구르지도 못 한 채 쌓여 있었다. 우선 이 창고부터 비워야 한다. 부서원들 모두가 창고에서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우와 이건 1992년이래요. 이때 행사 많았네.”

 “어? 전 제 태어난 해 찾았어요. 괜히 신기하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말까지의 특별 전시회부터 콘서트, 각종 대회 및 행사 리플릿의 양이 상당했다. 채 건네지 못한 행사 사은품과 물통 배너는 리플릿들을 거둬내고서야 발견됐고, 곰팡이가 핀 채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었던 건 90년대 중반 개최됐던 서예 대회의 낙선 작품들과 도록, 이젤이었다. 당시 활황이었던 지역 지상파 방송국의 재정적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흔적들이었다. 지금은 먼지만 얹어내고 있는 과거의 것들. 앞장서 팔을 걷었다. 기록용으로 필요한 소량의 자료들을 제외하고 모두 쓰레기통행이었다.      


 창고에 쌓여 있는 잡다한 물건들을 버리는 데에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쌓인 물건들에 가려져 있는지도 몰랐던 창문을 여니 시원한 공기가 통했다. 말끔하게 치워진 창고에 캐비닛을 들였다. 감사를 대비한 최근 3년 간의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다시 꺼내 볼 일 없는 예전 종이 서류들 역시 모두 버렸기에 이 정도 캐비닛만으로 정리가 충분했다. 다들 놀랬다. 우리 사무실이 이렇게 넓고 환했나 하고. 주말엔 사무실 벽 페인트칠을 새로 한다고 한다. 다음 주에 편집기가 들어오고 자리 배치만 새로 하면 된다.      


 “그동안 제일 어려운 자리에 앉아서 고생했으니까 J가 저 안 쪽 자리 앉아”     


 막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의 가운데,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누구나 훤히 보이는 곳이 내 자리였다. 부장님이 가리킨 자리는 오른편엔 벽이, 등 뒤엔 책장이 있는 사무실 가장 끄트머리. 저번 인사이동 때 선배들이 자리를 안 쪽으로 바꿔달라고 할 때 지금의 불편한 내 자리에 대해 별다른 말 하지 않았던 거 다 알고 있었단다. 게다가,     


 “일 없을 때 그 좋아하는 방탄소년단도 실컷 보고”     


 라신다. 숨길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구시렁댔으니 묵묵히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겉으로 티 안 내고 지내온 시간에 대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이젠 회사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적절하게 방탄소년단을 실컷 볼 수 있다니. 직위나 지위가 아닌, 공간의 의미를 넣어 이렇게 얘기해야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상사들과 가장 멀고 덕질하기 좋은 새 자리. 존버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오랜만에 몸을 쓴 데다 뭔가 알 수 없는 후련한 마음이 든 채 마셨던 그 날의 술은 무척이나 달았다.       

    


 P. S          


 금수저 아닌 이상 회사에선 역시 존버가 답이다. 올해 회사의 신입사원 채용 계획이 발표됐다. 드디어 7년 만에 우리 부서도 신입사원을 뽑는다. 7년 차가 되었지만 아직도 막내라는 이유로 회사의 모든 공식 행사에 불려야 했던 과거와 이별할 수 있게 됐다. 세월을 견뎠다기보단 역시 버텼다는 표현을 써야겠다. 신입사원 주관식 필기시험 출제와 시험 감독관, 면접관의 역할까지 내게 주어졌다. 사람을 뽑는 중압감이 어깨에 얹혔다. 이 정도 연차가 된 거다. 이제 나도 선배가 된다. 7년 존버했다.     


     

 대망의 2. You got the tickets!      


    

 여행에 권태가 찾아왔다. 연초가 되면 탁상달력을 넘겨 설이나 추석 연휴의 일정과 공휴일을 체크하곤 했던 내가, 일주일 이상 다녀올 휴가 기간을 가늠하고 가고 싶은 수많은 도시들 중 취사선택을 하느라 무진 애를 먹곤 했던 내가 올해는 아무런 여행 계획을 세우질 않았다. 여행이 유일한 출구였던 때에서 벗어나서 그랬다. 이젠 내게 방탄소년단이 있으니까. 안 봤던 영상이나 글을 찾아보고, 봤던 영상이나 글을 다시 보느라 매시간이 모자라는데, 적어도 사나흘 이상을 써야 하는 여행은 덕질에 사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는 6월부터 9월까지 바쁠 예정이었다. 맡고 있는 행사들의 일정들이 모두 이 시기에 확정되었다. 어차피 여름에 휴가도 못 낼 거. 다른 날짜를 굳이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질 않았다.     


 그런 와중에 방탄소년단 월드 투어 <Love yourself: Speak yourself>의 일정이 공개됐다. 5월 4일 LA, 5월 11일 시카고, 5월 18일 뉴저지, 5월 25일 상파울루, 6월 1일 런던, 6월 7일 파리. 7월엔 오사카와 시즈오카도 있다. 이 타임테이블을 공개하는 영상을 보곤 이거다 했다. 여행과 덕질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방법이겠다고.

      

 방탄소년단 콘서트 티켓팅에 있어 사전 준비는 필수다. 티켓 사이트에 미리 가입을 해 두고, 티켓 창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핸드폰이라면 에어플레인 모드인 상태에서 와이파이만 연결해두는 편이 낫고, 혹시 모르니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모든 장치를 이용해 사이트를 켜 놓아야 한다. 접속은 복불복이기에 핸드폰이 먼저 일지 노트북이 먼저 일지 데스크탑이 먼저 일지 장담을 할 수가 없다. 웸블리 공연 예매는 3월 1일 오후 5시 30분. 다행히 휴일이었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라던 어린 왕자의 여우가 된 기분이었다. 티켓팅이 오후 다섯 시 반이라면 나는 오후 세 시부터 떨렸다. 1분이 멀다 하고 시간을 확인하며 로그인을 해놓은 사이트가 튕기지 않도록 계속 확인했다. 입이 마르고 심장이 떨려 집 안을 종종걸음으로 휘젓고 다니다가 오후 5시부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25분, 26분… 시간이 흐르고 한 손은 마우스 클릭에 한 손은 핸드폰 버튼 위에 올려두었다. 29분 58초, 59초.. 30분.     


 아,     

 “망했다”     


 접속자 20만 명, 내 앞의 대기자 2만 명. 예매 페이지로 넘어가려면 1시간 30분은 기다려야 한단다. 모니터 속이나 핸드폰 속이나 사정은 마찬가지. 그래도 좌석이 9만 석이니까 1시간 30분 지나면 3층이라도 한 좌석 나오지 않을까. 예매 자체를 실패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더 가까운 좌석이냐 먼 좌석이냐의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부터가 방탄소년단의 인기를 과소평가했다. 전 세계 팬들에게 웸블리는 고작 9만 석인데.   

  

 ‘Don’t refresh this page as you may lose your place in the queue. Thanks for your patience’      

 이 페이지를 새로고침 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지금 화면이 꺼지지 않게끔 해야 한다. 이젠 시간을 버티는 수밖에 없다. 내일이 토요일이라 다행이다. 와인을 꺼내 왔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틀었다. 적어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비책이었다. 조금씩 내려가는 대기자 숫자. 21729..21549..21112..20548..19630..16186..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시계를 확인하지도 못 했다. 숫자가 천 단위로 내려온 순간부턴 내내 화면만 노려봤기 때문이다.      


 아! 드디어 접속됐다. 조금만 기다리란다. 내내 외울 정도로 봤던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 넘어갔다. 두근두근.


 “진짜 망했네”     


 Sold out. 매진이다. 9만 석이 통째로 예매된 거다. 믿을 수 없어 새로고침 했다. 하- 믿을 수밖에 없게끔 페이지가 수월하게 새로고침 된다. 매진된 블록은 클릭 자체가 안돼서 좌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도 없었다. 리셀러 티켓이 한 장씩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순식간에 없어졌다. 한 장씩 감질나게 나왔다가 사라지는 이 리셀러 티켓 덕분에 티켓 사이트를 떠날 수가 없었다. 현재 시간 밤 11시. 이제는 리셀러 티켓조차 나오지 않는다. 티켓팅 실패. 장렬히 인정했다. 방탄소년단은 월드 와이드 울트라 캡짱 슈퍼 스타이고, 나는 웸블리 포도 따위 구경도 못 해 본 한낱 쭈구리 덕후라는 걸.      


 포기는 일렀다. 웸블리는 그 상징성 때문에 가고 싶었던 거지 꼭 웸블리여야만 한 건 아니었다. 어디든 티켓을 구입하면 그 공연 날짜에 맞춰 여행을 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3월 2일로 넘어가는 새벽부터 순차적으로 뉴저지, 시카고, LA 공연이 티켓 오픈된다. 와인 기운 덕에 눈이 뻑뻑해졌지만 조금만 더 버텨볼 심상이었다. 다시 사이트에 접속하고 예매 창을 열었다. 제발 내 자리 하나만.     


 티켓팅은 순차적으로 꽝이었다. 정각에 맞춰 티켓 구입 버튼만 누르면 페이지가 올스톱이었다. 대기자가 빠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뜬 눈으로 새로고침만 눌렀다. ‘Oh-no! These tickets went fast and we’re unable to find more right now’ 이제는 외워버린 문장. 리셀러 티켓 몇 장을 눈 앞에서 놓친 채 그대로 새벽 6시가 됐다. 백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티켓팅 운은 ‘아미피디아(Armypedia, 방탄소년단 팬 모임의 일종)'에 다 쓴 것 같다고. 포기를 선언하자마자 눈이 그대로 감겼다. 사실은 내내 눕고 싶었다.

    

 그러나 찝찝함 덕분에 세 시간 만에 무거운 눈이 훅 떠졌다. 충전된 핸드폰의 잠금화면을 여니 장렬히 전사한 새벽의 예매 창이 그대로 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카고 예매 창을 열었다. 어라? 리셀러 티켓이 보인다. 한 장, 나왔다가 사라지고 두 장, 나왔다가 사라진다. LA나 뉴저지는 여전히 완벽한 sold out이다. 왠지 시카고에서 한 장은 예매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몽사몽 하던 정신이 돌아왔다. 이제부턴 존버다. 새로고침하여 누르고, 다시 새로고침하여 누르고, 또 새로고침하여 누르고.     


 “어?”     


 20분쯤이 지났을까. 제일 꼭대기 4층 구역 하나가 보라색이 되었다. 얼른 눌렀다. 보라색 점 하나가 보였다. 얼른 눌렀다. 한 장을 담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된다. 화면이 넘어갔다. 사고 회로가 일시 정지됐다. 주소지나 결제 정보를 입력하는 시간이 지체돼 다른 사람에게 좌석이 넘어갔던 적이 많아 불안했는데, 결제 카드 정보가 자동 입력되어 있어서 몇 번의 지문 터치만으로 화면이 넘어갔다. 이 보라색 점을 보기 위해 14시간이 넘는 시간을 버텼는데, 결제 과정은 1분도 채 안 걸렸다.  

   

 [You got the tickets!]     


 아! 됐다. 메일로 받은 큐알코드 티켓까지 확인하고서도 얼떨떨했다. 예매를 성공했다. 4층 좌석이라 잘 보이진 않겠지만, 전체 팬들을 관망할 수 있는 자리라 아름다운 응원봉 불빛을 한 폭으로 눈에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덕질에도 존버가 답이다. 메일로 온 티켓을 소중하게 캡처했다. 이제 얼른 시카고 항공권을 알아봐야겠다.     


     

 P. S          


 사실 4월 방콕 콘서트도 간다. love yourself 월드 투어 대장정을 방콕에서 마무리하는 줄 알고 존버하며 예매한 거였다. 아무렴 어떠랴, 4월에 방콕도 가고 5월에 시카고도 가면 되지. 여행 권태도 사라지고 있다.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LA, 시카고, 뉴저지, 런던, 파리 모두 한 회차씩 공연이 추가됐다. 각 스타디움당 5~9만 석 규모인데 공연을 한 회 더 추가할 수 밖에 없게 하는 화력이었다. 물론 시카고 추가 공연도 예매에 돌입할 거다. 이번에도 존버해야겠다.



 그리고 3. 결과 보고



 시카고 2회차 공연은 그라운드석을 잡았다. 존버에도 스킬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카고행 항공권도, 호텔도 예약을 모두 완료했다. 방탄소년단이 선물한 여행으로 여기며 신나게 일정을 계획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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