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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Apr 16. 2019

20. 단상들 pt.3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20


 1. 망상의 끝



 한 달 가까이 끌어 온 신입사원 채용 절차가 최종 합격자 발표만을 앞두고 있다. 서류 전형, 필기 시험, 실기 시험, 면접까지. 새삼 7년 전에 입사한 내가 용하다. 이런 절차들을 어떻게 통과해서 합격했지 나?


 "어떤 사람이 들어왔음 좋겠어?"


 입사한 이래로 처음 후배를 받는 내게 선배들이 종종 말을 걸어왔다. 일 잘 하고, 눈치 있고, 싹싹하고, 코드가 맞고, 오래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역시,


 "정국이 같은 애요."

 

 다.


 그런 사람이 우리 회사에 입사 신청서를 내겠냐는 선배의 말에 끄덕이고 말았지만, 역시 정국이 같은 애가 들어오면 참 좋겠다. 잘생겼지, 빠릿하지, 뭐든 잘 하지, 대외 관계도 좋지, 체력 좋지. 그러다가 정말 정국이가 후배로 들어오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다가 하루 종일 광대가 내려오질 않았다. 외근 나갈 때 조수석에 앉은 정국이를 몰래 몰래 보거나 회식을 핑계로 술도 같이 마시고 밤 늦게까지 해야 하는 프로젝트도 힘들지 않게 하겠지. 이런걸 생각하며 혼자 키득 키득 웃고 있으니 "후배 들어오니 좋은가 봐" 하고 지나간다.


 내 곁에 실재할 수 없는 존재를 가끔 현실에 이입시키면 좋았다가 슬펐다가 한다. 결국은 한낱 망상이니까. 그래도 옆자리에 앉아 일하는 정국이를 상상하니 잠깐 행복했다. 하마터면 회사가 좋아질 뻔..




 2. 기승전 '태'



 내 지적 허영을 자극하는 분야가 있다면 그건 미술이다. 하나의 정의로 딱 내릴 수 없이 어려운 데다 제대로 배워본 적 없어 여러 책을 읽어도 여전히 물음표를 띄우지만 그렇다. 기본적으로 미(美)를 추구하는 장르라서 일까. 여행지에선 그 도시의 주요 미술관에 가고, 국내에서 열리는 주요 전시회는 꼭 방문해 한참을 머물다가 돌아오곤 한다. 작품을 위해 구성된 공간의 분위기 - 온도나 색감, 조도 등 - 가 본격적인 데다가, 때때로 느끼는 거대한 캔버스의 존재감 같은 것이 이 곳에 있다는 사실 하나를 의미 있게 만들어주기도 해서다. 내 지적 허영을 제대로 채우는 공간은 항상 미술관이고, 지적 허영을 채우는 도구는 대부분 전시회 도록이었다.


 현존 작가 최고 몸값. 작품 경매가 1,019억 원. '최고'란 단어는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를 설명할 때 자연스레 따라붙는 수식어다. 이런 데이비드 호크니의 아시아 첫 대규모 전시가 열린다니. 바로 보러 가야 했다. 전시가 열리는 첫 주말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나와 급한 걸음으로 도착한 서울시립미술관은 이른 시간임에도 티켓을 구매하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서 있었다.


 수 분을 기다려서 티켓을 구매했지만 전시관으로 바로 입장이 불가능했다. 이미 도착해 관람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너무 붐비지 않게 입장에 제한을 두고 있었다. 내 티켓에 적힌 번호는 10분 정도 지나 입장이 가능했다. 1층 구석에 마련된 아트샵에 먼저 들러 아트상품들을 구경했다. 어느 서랍에 넣어두곤 사 온 것 자체를 잊어버리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전시를 보고 나면 대표 작품의 엽서나 포스터를 꼭 구매한다. 이 전시를 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해 서랍에 넣게 되기까지의 시간, 그 시간 동안의 충만함으로 그것들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니까. 입장 시간이 다가와 눈으로 몇 가지의 상품을 찜해 놓았다.


 전시회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이름과 수영장과 물을 다룬 시기의 작품들 말곤 처음으로 접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시집을 읽고 혹은 피카소 전시를 보고 와서 영감 받아 작업한 에칭과 판화 작품들은 일러스트 적인 요소가 강했는데, 그 자체로 감각적이라서 넋을 놓고 봤다. 캔버스의 모양을 달리해 작업한 작품들이나, 마치 모자이크처럼 각각의 캔버스를 모아 대형 작품을 한쪽 벽을 가득 채운 후반기의 작품들은 절로 겸허해질 정도였다.


 여든이 넘은 작가는 멈춤이 없었다. 다초점을 실험하고, 물의 영원성을 포착하고, 카메라나 프린트의 신문물을 도입하며 끊임없이 새로움을 개척하고 있었다. 며칠 전 들었던 철학자 최진석 교수의 말 하나가 스쳐 지났다. 세상이 아직 궁금하다면 늙은 게 아니라던. 자신의 작업실 가운데에 나이 든 작가가 서 있는 거대한 프린트 작품을 마지막으로 보고 나오면서 이렇게 질문이 많은 작가보다 훨씬 나이 든 사람은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기에 주요 작품들은 기본적인 배경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입장 제한을 둔 터라 많이 붐비지 않아 <더 큰 그랜드 캐니언> 같은 대형 작품 앞에선 꽤 오랜 시간 머물며 감상할 수 있었다. 두 시간 여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아트샵에 들러 아까 봐 두었던 포스터를 사려고 했는데 그새 품절됐다. 아쉬움에 괜히 머뭇대다가 엽서로 대신하고, 도록 배송을 신청하곤 미술관을 나왔다. 비는 그쳤고, 질척이는 땅과 다르게 하늘은 모처럼 파랗게 열렸다. 물 웅덩이를 피하며 걷는 덕수궁 돌담길은 햇볕에 반짝였고, 갑자기 마른 하늘에 소란스레 웃으며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태형이가 보고 나오면 진짜 좋아할 텐데'


 라고 생각했다.


 지난 수요일부터 Love yoursself 콘서트 때문에 홍콩에 있는 방탄소년단. 수, 목 양일 콘서트가 끝난 뒤 하루 자유시간을 가진 금요일. 쇼핑을 즐기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멤버들의 목격담이 올라오는 가운데,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쉼의 일환인, 해외 공연을 가면 꼭 미술관에 들르는 태형이는 역시 아트 갤러리에서 목격담이 들려 왔다. 4월 컴백 준비하느라 바쁜 태형이가 이렇게 붐비는 국내 전시를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더 큰 첨벙> 보면 좋아할 것 같은데, <카리브해의 티타임> 의 색감에 감탄할 것 같은데, <난봉꾼의 행각> 시리즈 의 선 표현을 유심히 볼 것 같은데, <나의 부모님> 앞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엄마한테 연락할 것 같은데. 보는 내내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런던 웸블리 공연이 끝난 뒤 테이트 모던에서 목격담이 들려 올 태형이를 기다려야겠다. 그곳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을 유심히 봤으면 좋겠다.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는 태형이니까 코톨드 갤러리에 들러 내내 영감 받으며 즐겁게 누비고 왔으면 좋겠다. 그 목격담이 들려온다면 우리 태형이 미술 작품에 둘러싸여 편안하게 쉬고 있구나, 하며 지구 반대편의 이 곳에서 나는 고스란히 행복해질 것 같다.


 힘들 때 기대고 싶은 마음 말고, 긍정에 가까운 감정들을 나눠주고 싶다. 좋은 걸 보고 나면, 맛있는 걸 먹고 나면, '이걸 보면 좋아할 텐데, 이거 맛있으니 먹어봤으면 좋겠는데, 기쁘게 웃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이 만들어졌다. 누구보다 이타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오늘 전시 정말 잘 봤다. 전시 끝 무렵에 한적할 때 다시 한번 들러야지. 지적 허영을 채우고, 이타적인 마음은 더 채우고.



 P.S


 이렇게 사람 많은데 볼 수 있나 생각했던 것 자체가 오만이었다. 날 좋은 3월 말의 봄, 남준이 데이비드 호크니 전에 다녀 온 인증샷을 올렸다. 누구보다 자신의 여가 시간을 잘 즐기며, 일과 취미의 균형을 맞춰가는 남준이 다웠다. 내가 보고 느꼈던 감상의 일부가 남준이의 어딘가에 솟아났을 거라 생각하면 비죽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는 월드 와이드 슈퍼스타가 쉬는 날에 하는 일이 갤러리를 찾는 일이라니. 정말 우리 방탄소년단 최고다 최고.




 3. 외로움을 향한 여정이었나

 


 조금 더 머물 수 있었던 서울시립미술관을 서둘러 빠져나온 이유는 방탄소년단 팬들을 위한 행사 <아미피디아 유나이티드 인 서울 (Armypedia United in Seoul)> 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아미피디아는 방탄소년단 팬클럽 이름인 아미(Army)와 인터넷 사용자 스스로 정보를 등록·편집하는 위키피디아(Wikipedia)의 합성어로 QR 코드로 이루어진 총 2,080개의 퍼즐을 찾는 글로벌 팬 행사다. 2,080이란 숫자는 방탄소년단 데뷔일인 2013년 6월 13일부터 아미피디아 공개 전 날인 2019년 2월 21일까지의 날짜 2,080일을 의미한다. 각각의 QR코드엔 방탄소년단과 관련된 문제가 담겨있고, 그 문제를 풀어 퍼즐 조각을 맞추면 해당하는 날짜에 대한 팬들의 이야기를 남길 수가 있다. 방탄소년단과 관련된 기록도 좋고, 사적인 감상도 괜찮다. 아미피디아는 방탄소년단을 알면서 만들어진 수십만 개의 이야기가 총집합된, 거대한 기록 저장소를 만들어가는 참여형 이벤트다.


 지난 윤기 생일 다음날이었던 3월 10일 일요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첫 번째 아미피디아 오프라인 행사가 있었다. 팬들이 한데 모여 방탄소년단이 직접 내는 문제를 함께 풀고,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즐겼던 약 한 시간 여의 행사였다. 방탄소년단이 직접 참석한 행사는 아니지만, 방탄소년단의 이름 아래 모인 팬들은 모두 즐겁게 웃고 노래 부르고 즐겼다. 팬클럽에 가입된 사람들에게만 오픈한 무료 티켓이었지만, 글로벌 스타답게 티켓팅은 치열했다. 운 좋게 첫 번째 행사에 이어 두 번째 행사까지 티켓팅에 성공한 나는 지금 서울에 와 있다.


 버스를 타고 한 번에 상암 문화비축기지까지 도착하려고 했는데, 혹시나 늦을까 싶어 지하철역으로 방향을 바꿨다. 아직 물기가 덜 마른 우산 끝이 바지 끝을 적시며 스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합정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자 bt21 캐릭터를 달고 있거나 보라색으로 포인트를 준 팬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오늘도 만 명의 덕후들이 방탄 없는 방탄 행사를 치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월드컵경기장 역을 빠져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꼬리에 서 옷깃을 여몄다. 비가 그치니 바람에 거세진 터였다. 고데기한 앞머리는 이미 힘을 잃고 축 쳐진 지 오래. 사람들의 뒤를 따라 문화비축기지까지 걸었다. 행사 시작인 3시까진 20분 정도가 남았는데 티켓이 없어 펜스 밖에서 보려는 사람들과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한데 엉켜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시간이 좀 소요되었다. 미리 티켓을 절단하고 가까이 서달라고 외치는 스태프들의 손길만 따라 종종걸음을 걸어 드디어 입장했다.


 저번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도 느꼈지만, 방탄소년단 팬들의 연령층이 굉장히 다양했다. 10대 어린 팬들은 물론,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고, 아이와 함께 온 엄마들도 많았다. 국적도 다양했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팬들이 한글 자막의 가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아미밤을 흔들며 따라 불렀다. 그들을 눈으로 좇으며 내 좌석을 찾았다. 3시가 조금 넘자 커다란 전광판에서 행사 시작을 알리는 자막이 떴다. 나도 얼른 가방에서 아미 밤을 꺼내 불을 켰다.


 멤버들이 직접 내는 문제를 풀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건 첫 번째 행사와 다를 바 없었지만, 오늘은 이 행사를 위해 따로 제작한 토크쇼 영상이 추가 됐다. 자신들의 문제를 직접 맞추는 방탄소년단을 통해 이 2,080일의 기록을 비로소 완성하는 것이었다. 정수리로 직접 떨어지는 뜨거운 햇볕에 눈을 가늘게 뜨며 전광판에 집중했다.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은 헤이러(Haters)에게 보내는 방탄소년단의 노래 <땡>과 <Cypher pt.3>, 팬들에게 보내는 노래 <Magic shop>과 <Love myself>로 마무리되었다. 잘 되지 않기만을 바랐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잘돼서 미안하다고 자신감에 차 말하는 노래에 이 모든 것들은 팬들로 인한 것이었다는 걸 감사해하는 노래로 이어지는 선곡이었다. 단언코 2,080일의 완벽한 마무리였다.


 여운이 가시지 않아 행사장을 빠져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나왔다. 동그랗고 말랑거리는 하루가 될 줄 알았는데. 멤버들의 이름을 말하며 오늘의 감상을 나누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노래를 크게 틀어 현장음을 차단시켰다. 저녁도 먹고 쇼핑도 하려고 KTX를 막차로 예매해뒀었는데.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신발 뒷꿈치를 내려다보며 가장 가까운 시간대의 KTX 시간으로 변경했다. 오늘 아미피디아는 유튜브로 생중계가 되었다. 집에서 편안하게 쉬며 노트북으로 생중계를 봤으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집 안에서 나는 오롯하게 애정을 주고 받는 당사자이자 이 관계의 주인이었다. 내가 영상을 보고 좋아하는 그들은 그들로서 존재했고, 그들이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답하는 주체이자 객체 역시 나 하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보니 나는 대다수, 아니 무수한 점들 중 하나이고, 그들이 말하는 사랑을 나눠 먹는 무수한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게 비로소 실감났다.


 방탄소년단이 이 마음을 알면 허탈할 것 같다,고 생각될 정도의 마음이라 설명하는 것 자체가 미안하지만 마음이 마음처럼 마음대로 움직이면 그게 마음이겠는가. 사실 그들도 우리를 향해 고맙고 사랑하고 떼레야 뗼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하긴 하지만 그건 '아미'라는 전체의 본질적인 방향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는 거지, 이런 한 사람의 알량하고 이기적인 마음에 응대하는 건 아니니.


 예상대로였다면 밤 11시 넘어 집에 도착해 바로 씻고 잤을 터였다. 용산역을 막 출발한 열차에 앉아 짙게 노을지는 한강을 바라봤다. 덕질이라는 게, 사실은 외로움을 향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외로움을 견디고, 또 다른 모양으로 태어나는 외로움을 삼키고, 외로움을 기꺼이 인정하는 과정. 바라는 거 없는 애정이라고 자위하며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과정 같은 것.


 이 두 번의 오프라인 행사는 방탄소년단의 인기를 직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동시에 마른 내 존재감 역시 퍼석이게 확인하게 했다. 누가 시켜서 가진 마음이 아니니 누가 시켜서 생긴 외로움이 아니다. 그러니 오늘은 나도 모를 내 마음을 많이 위로해 줘야할 것 같다. 집에 도착 하자마자 와인을 꺼내야겠다. 내일부터 다시 힘내서 덕질하려면 오늘 조금 침잠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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