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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un 03. 2019

24. 단어 사전 pt.2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24


 나는 원래 노력을 해서 이뤄낸 성취보다 타고난 형질 같은 것에 더 질투를 많이 느낀다. 열심히 공부해서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얻은 사람보다 타고나기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적당하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부럽다고 할까.


 노력은 나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타고나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서 그렇다. 사실 이런 알량한 마음을 대놓고 얘기해본 적은 없다. 말로 꺼내놓는 순간 무척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전락할 테니.


 꽤 오랜 시간 나를 여러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던 이 질투가 최근 들어 많이 옅어졌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그저 태어나보니 가지고 있었던 내 나라, 내 국적, 내 모국어를 부러워하는 사람을 만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윤기의 랩 가사까지 그대로 따라 부를 수 있는 나를, 마음을 담아 고마움을 전달하는 멤버들의 글과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감동할 수 있는 나를, 예전 과거 경험을 꺼내며 농담하며 웃는 그들과 공감하며 깔깔거리는 나를 향해 건네는 그 복합적인 말들은 그래서 겸연쩍었다. 내 즉각적인 반응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배우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얻어내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에 알맞은 대답 따위 할 줄 몰라 어색한 미소만을 건넸던 몇 장면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발휘되는 질투나 부러움이 얼마나 무색한 것인지를.


 모든 마음은 절대적일 때 힘이 있다. 그걸 느낀 날들이었다. 그렇기에 방탄소년단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음을, 그래서 그들의 여러 표현들을 의역과 오역 없이 이해할 수 있음을 그저 운명이나 우연, 안도나 행복이란 단어에 헌사한다.


 활자를 나누고 다시 모아 새로운 단어를 재탄생시키거나 원래 있던 단어도 새롭게 만드는 존재들의 등장. 그래서 이렇게 안도하고 행복을 느끼게 한 그들과 우리만의 단어가 또 무엇이 있냐면...  




 1. 아포방포



 사춘기를 지내고 어엿한 성년을 맞이한 정국이는 골격이 훌쩍 자랐다. 얼굴 선이 또렷하게 각이 진 것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웃을 때 푹 파이는 볼의 세로 선이며 단단해진 귀 밑 각은 동그랗게 쌍꺼풀 진 눈과 대비되는 조화를 이루며 어른이면서도 아이 같고, 아이 같다가도 어른스러운,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한 정국이만의 분위기를 완성시켰다.


 헬스, 복싱, 볼링, 수영 등 다양한 운동을 꾸준히 한 덕에 체력도 강해졌다. 과격한 춤을 추고서도 안정된 호흡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두세 시간의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지치지 않고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 정국이는 그렇게 라이브를 고수하는 방탄소년단의 퍼포먼스에 안정감을 주는 멤버가 되었다. 팬들의 환호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은 채 소매를 반쯤 쥔 손으로 수줍게 손을 흔들던 10대 소년은 카메라를 향해 능청스러운 윙크를 건넬 줄 아는 여유를 가진 프로 아이돌로 거듭났다. 정국이는 방탄소년단과 함께 성장했다.


 빌보드 뮤직 어워드 탑 소셜 아티스트상 수상, 굵직한 음악 시상식 대상 수상 등 2017년은 방탄소년단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준 해다. 비로소 날개를 달고 훨훨 날기 시작했다. 이 화려한 2017년을 보내고 난 방탄소년단에게 찾아온 건 그러나 성취감도 도취도 아닌 허탈감과 부담감으로 점철된 번 아웃 증후군이었다. 조금만 지나면 회사와 계약한 7년이란 숫자를 곧 채우는 시점인 데다가 상상하지 못했던 높이의 아찔함까지 더해지니 박수칠 때 화려하게 떠나는 편이 나을까 하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늘 현실에 어느 정도 발을 내딛고 있던 멤버들의 입에서 '해체'라는 단어가 언급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니 앞으로 가보지 못할 길을 먼저 걸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풀숲을 헤쳐나가느라 상처가 생기고 또 피를 볼 지 언정, 그렇게 처음 발을 내디뎌 마주하는 높은 봉우리의 풍경은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일 테다. 멤버들이 다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속엣 얘기를 일부러라도 더 자주 나누다 보니 오히려 시야가 선명해지는 것 같다. 조금 더 해 봐도 괜찮다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시작한 2018년 <Fake Love>, <IDOL> 활동은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전 세계 수많은 팬들의 사랑에 힘입어 2019년에는 아시아 가수 최초로 그래미 시상식의 시상자로 참석했고, 빌보드 본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주요 도시의 스타디움 투어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겪은 후, 정국이는 팬들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무대에 서는지, 왜 이 모든 힘듦을 감수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다분히 인지한 이후였을 테다. 공식 팬카페엔 게릴라로 채팅을 열어 팬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자주 공유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오늘 어떤 운동을 하였는지, 늦은 밤 퇴근하는 풍경은 어떠한지, 지금 듣고 있는 노래는 무엇인지 같은.


 자신의 일상에 팬들이 떨어질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나눈다. 감사함과 사랑에 대한 표현 역시 거침없어졌다. 자신을 발전시키고 노력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자 서로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팬들을 늘 바라보는 자신을 '아미바라기'라고 직접 명명한 정국이의 성장 카테고리엔 이런 마음 또한 포함됐다.


 그래미 시상식 참석 전, 녹음실에서 녹음을 하고 퇴근하는 길에 게릴라로 연 채팅에서 얼떨떨하지만 감사하다며 자신의 행복은 모두 팬들이 만들어준 것이라던 정국이가 그 말에 덧붙인 건 '아포방포'였다. '아미 포에버 방탄 포에버'의 준말로 자신이 만든 말이란다.


 무슨 일이 있건 팬들 먼저 생각하는 우리 황금 막내 정국이가 건네 오는 우리의 영원함, 아포방포. 이런 마음을 가진 멤버들과 우리가 있다면 영원이란 손에 잡히지 않는 영역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현재를 항상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지금 같은 마음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그것이 곧 영원을 향한 노력이 될 테다.


 그러니 정국이 말마따나 항상 상기한다.

 우리, 운명 공동체처럼. 언제나 아포 방포!




 2. 머스터(Muster)



 내가 처음 아이돌 덕질을 했던 그 시절. 중학생이었던 나는 유료 팬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목표 등수나 점수를 달성하면 엄마에게 용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팬클럽 가입비는 기간에 따라 만 오천 원에서 삼만 원 정도였다. 팬클럽에 가입하면 우비나 회지, 회원카드 등으로 받아 그것으로 소속감을 갖게 하는 데다가 팬미팅 같은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땐 팬클럽에 가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누군가의 팬이라는 건 팬클럽에 소속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래서 요즘 활동하는 아이돌 가수들에겐 유료 팬클럽이 거의 없다는 건 내게 거의 컬처 쇼크나 다름없었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인터넷 카페나 커뮤니티 등 개인적인 동시에 그룹화된 팬 교류 활동이 다양하게 가능해지게 된 데다, 유료 팬클럽을 운영할 때 벌어지는 기획사의 부담감이 더해진 결과인 것이다. 팬클럽 비용을 내고 가입한 사람들이 회비만큼의 활동과 혜택을 요구할 때를 대비해 처음부터 모집하지 않는 것이다. 굳이 이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팬들은 알아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아이돌을 만들어내는 노하우만큼 팬클럽을 운영하는 방식의 노하우 또한 늘어버렸나 보다. 시장에 경제성이 중요시되는 건 당연하지만, 가수와 팬들의 연대나 유대를 컨트롤하기 어려운 비논리의 영역, 리스트(risk)의 영역으로 치환해 처음부터 배제해버리는 건 사실 조금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은 2013년 데뷔 이후 꾸준히 유료 팬클럽을 모집하고 있다. 아미(Army)는 방탄소년단 팬덤을 지칭하는 용어 이전에 공식 유료 팬클럽 이름이다. 팬클럽 모집 기간을 사전에 공지하고, 공지 기간 동안 팬클럽 가입비를 내고 가입을 하면 회원카드를 비롯한 회지, 포스터, 미공개 영상 등이 담긴 웰컴 기프트 박스를 받고 일정 기간 동안 팬클럽 혜택을 누리게 된다.


 공개 방송엔 팬클럽 가입자만 참여할 수 있는 제한을 두기도 하고, 아미피디아처럼 회원 대상의 별도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한동안 잊혔던 이런 팬클럽 운용은 오히려 근래에 보기 드문 방식이 되어 팬들의 소속감을 더욱 확고히 하기에 충분했다. 올해 가입하지 못해 일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팬들은 다음 가입 기간이 언제냐는 질문을 꾸준히 올리곤 한다. 현재 아미는 5기까지 모집됐으며, 올여름 즈음 6기 모집이 시작될 것이다.  


 팬클럽에 가입한 아미들이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팬미팅, 바로 '머스터(Muster)'다. 머스터(Muster)의 사전적 의미는 '소집하다, 집합, 모이다'. 전투나 점호 등 보통 '군대' 용어들과 함께 쓰이는 단어를 아미(Army)와 연결시켜 '팬미팅'이란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올해 머스터는 6월, 부산과 서울에 나눠 총 4회 개최한다. 이번 머스터 콘셉트는 '매직샵(Magic Shop)'. 힘이 들 때 우리가 함께 있는 네 마음의 매직샵의 문을 열고 들어 와 언제든지 쉬어도 된다는 가사를 지닌, 동명의 방탄소년단 팬 송(Fan song) 제목을 따 왔다.


 올해는 공연장 대관 상황이 좋지 않아 팬클럽 가입 숫자를 모두 수용하기에 턱없이 작은 규모의 장소로 머스터 장소가 정해진 데다(서울은 체조경기장, 부산은 아시아드 보조경기장이다), 매크로 등의 방법으로 티켓을 선점한 뒤 비싼 값으로 되파는 악행을 막고자 랜덤 추첨의 방식이 도입됐다. 총 4회의 날짜 중 2회를 선택해 응모하면 당첨 여부가 랜덤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당첨 여부가 발표되던 날에는 울고 웃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쳐났다. 나는 1차 땐 응모한 2회의 머스터가 다 떨어졌다가, 추가로 발표된 2차에서 1회의 머스터가 당첨됐다.


 월드 스타의 반열에 올라 선 방탄소년단의 위치에 걸맞게 늘어난 팬클럽 가입자 수 전체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없을 것이다. 높아진 방탄소년단의 위상과 인기는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의 숙제를 남겼다. 우리만의 축제였던 머스터는


 "너 이번 머스터 당첨됐어?"


 당장에라도 우리를 울고 웃게 할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3. 세일미


 

 진한 눈썹과 높은 콧대, 쌍꺼풀 없이 크고 또렷한 눈, 빽빽하게 들어찬 진한 속눈썹, 작고 도톰한 입술. 태형이의 외모를 칭찬하려고 하면 부족한 내 언어가 한탄스럽다. 내가 보고 느끼는 감정을 확실하게 표현할 단어가 너무 모자라다.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팬사인회나 콘서트가 끝나고 나면 내 사진첩은 무의미한 차이란 있을 수 없다는 듯 고만고만한 사진들을 몽땅 저장하느라 용량이 부족할 정도가 된다. 움직이는 순간순간 찍힌 모든 사진들이 모두 제각각 다 멋있어서 도저히 저장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면 태형이를 향해 '존잘'을 외치는 다양한 언어들이 타임라인을 장식한다. 어떤 언어를 쓰든 어떤 머리색을 가졌든 잘생김을 판단하는 눈은 똑같다.


 엔터테인먼트 관련 투표 전문 ‘더 베스트 폴(The Best Poll)’은 “2018년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미남(the most Handsome Men in the World 2018)”란 투표를 진행했다. 2018년 4월 8일부터 2019년 3월 말까지 1년 가까이, 전 세계 TV, 영화, 스포츠, 정치 또는 모델 출신의 유명인사 150명 중 가장 잘생긴 사람 1명을 고르는 투표였다. 1위는 당당히 방탄소년단 뷔가 차지했다.


 글로벌 미디어 '브라이트 사이드' 선정 '2018년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 10인' 중 1위, 미국 TC 캔들러 선정 '2017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얼굴 100인' 1위, 가리아 Dama.bg 선정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 1위', 엔터테인트먼트 사이트 주최 ‘Most Handsome Men 2018 1위’ 등 각종 차트의 1위를 거머쥔 사람 역시 방탄소년단의 뷔였다.


 이쯤 되니 팬들은 줄여 부르기 시작했다. 세계 1위 미남이란 여섯 글자를 단 세 음절로. '세일미'는 바로 세계 1위 미남 뷔, 태형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막상 본인은 세일미란 말에 무척이나 면역이 되지 않는 표정으로 쑥스럽게 웃는다. 생일 축하해주기 위해 케이크를 들고 온 멤버들이 "세계 1위 미남 건강해라"하면 잔뜩 구긴 얼굴로 부끄러워하며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거나, 제발 그러지 말라며 구석진 곳으로 등을 돌린 채 서버린다거나 한다. 그냥 너무 부끄럽단다.


 지금도 세계 1위 미남을 검색하면 아래의 제목들이 바로 나온다.


 방탄소년단 뷔, 오늘도 빛나는 세계 1위 미남 2019.04.29 | 뉴스1 | 다음뉴스

 BTS(방탄소년단) 뷔, 발걸음도 멋진 세계 1위 미남 2019.04.29 | 스포츠한국 | 다음뉴스

 [포토]뷔, '세계 1위 미남의 위엄'


 태형이의 눈썹이 어떻고 눈이 어떻고 코가 어떻고 입이 어떻고 귀가 어떤지를 구구절절하게 표현할 필요가 없는, 태형이가 이토록 멋있다는 걸 단 세 음절로 끝낼 수 있으니 나 같은 덕후는 얼마나 행복한가. 세계 1위 미남이라고 놀리면 잔뜩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그 잘생긴 얼굴이 보고 싶어 더욱 놀리고만 싶다.


 태형이는 알까? 진심이 담겨있지 않으면 이렇게 놀릴 수 없는 거라는 걸.


 자랑스러운 방탄소년단의 얼굴. 세일미 김태형. 얼굴 리즈를 또 갱신한 태형이의 사진을 오늘도 또 사진첩이 터지랴 저장한다.




4. 방울 / 내님



 방탄소년단이 시상식에서 상을 받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외치는 말은 '아미'다. 항상 팬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 늘 보답하려는 방탄소년단다운 발언이다. '아미'는 이제 내 이름보다 더 내 것 같은 이름처럼 익숙해진 지 오래다. 그러나 만약 팬클럽 이름이 아미가 아닌 다른 이름이었다면 어땠을까?


 지난 3월 말,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렸던 아미피디아에서 최초로 공개된 <BTS TALK SHOW>에서 그 실마리가 살짝 보였다. 팬클럽명의 최종 후보가 '방울'과 '아미'였다고 남준이 말한 것이다. 다양한 보기 중에 어떠한 연유로 방울이 있었고, 또 왜 아미와 함께 최종 후보가 되었는지는 정확한 설명이 없었기에 여전히 미스터리함으로 남았지만, 하마터면 우리는 서로를 방울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방탄소년단이 "아미!" 하는 대신 "All the 방울 out there!" 하면, 같은 소리로 "딸랑딸랑" 대답했을까.


 그렇담 방울도 아미도, 이름이란 걸 가지기 전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방탄소년단이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부터 트위터와 공식 팬카페는 미리 개설되어 일찍이 팬이 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로 활용했다(이때의 트위터와 공식 팬카페를 지금도 쓰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모든 역사가 담긴 곳이다). 연습생 때부터 팬덤이 형성되는 요즘의 상황에 빗대어 보면 아주 기민하게 움직인 것이다. 멤버들은 트위터와 팬카페에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의 근황이나 댓글을 열심히 쓰곤 했다. 신인일 때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어필. 초창기의 방탄소년단 역시 열심이었다.


 데뷔를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2013년 5월, 슈가가 공식 팬카페에 처음으로 글을 올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년의 연습생 기간을 마치고 방탄소년단의 멤버로서 데뷔일이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소회를 짤막하게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두근거린 마음이 잔뜩 묻어나는 이 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녕 내님들아'


 공식적인 이름을 갖기 전의 팬들을 '내 님'이라고 다정하게 표현한 사람이 슈가였다니. 츤데레 정석의 슈가에게 또 치었다. 안 그런 척하지만 사실 아이돌에 가장 최적화된 사람이 슈가란 생각에 느낌표를 찍는다. 공식 팬클럽인 아미가 창단됐고 이젠 불리지 않으면 어색할 정도로 아미로서의 소속감 역시 단단하게 느끼고 있지만, 방탄소년단의 공식 팬카페에선 여전히 서로를 '내 님'이라고 지칭한다. 존중하면서도 친근하게 타자를 부르기에 이만한 말이 있을까.


 아미면 어떻고 방울이면 어떻고 내님이면 어떠랴.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내게 이름을 불러준 그들로 인해 완연한 꽃이 되었으니. 내게 이름을 준 그대들로 인해 그 어떤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지언정 그 이름을 무한정 사랑하게 되었으리라.




5. 반테(Vante)


 

 안테 배드짐(Ante Badzim)은 자신만의 확실한 표현 방식이 있는 포토그래퍼다. 그가 출력해 낸 사진에는 무수한 '덜어냄'이 있다. 산만함은 배제돼 있고, 포착하고자 하는 피사체는 단순하고 또렷하되 여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그의 작품을 향해 누군가는 '뺄셈의 미학'이 담겼다고 말했다.


 사진 밖의 풍경을 상상하게 만드는 포토그래퍼. 안테 배드짐을 단순 명료하게 설명하자면 이렇게 말하면 될까.


 어두워지기 직전의 하늘, 무거운 구름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의 실루엣. 어느 날은 처음 해외여행을 떠난 대가족의 뭉클한 뒷모습 같아 보였다가 어느 날은 세월의 덧없음을 멍하니 되짚고 있는 노인의 무리처럼 보였다가, 어느 날은 수학여행을 떠나온 신이 난 또래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초대되어 그 여백에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 날의 분위기에 따라, 보는 내 컨디션에 따라 다양한 사연을 넣고 뺄 수 있는 사진들. 그의 사진들은 이렇게 사진에 덜 담긴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쨍하지 않은, 표백된 것처럼 흐린 색감도 그의 사진을 도무지 질리지 않게 하는 몫으로 작용한다. 진하고 명확하지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다. 피로하지 않아 안정적이다. 더 욱여넣지 못해 안달나 있는 때에 그의 사진을 보면 '아,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덜어낼수록 아름다운 게 이렇게 많은데' 해버린다.


 "사진은 말없이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 시간을 투자한 만큼 주변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해 주며, 공들인 만큼 진실한 사진을 담을 수 있다."  - 안테 배드짐(Ante Badzim)


 해외 여러 곳을 다니기에 여러 풍경을 마주할 기회가 많은 태형이가 품에서 꺼내는 건 콤팩트한 라이카 카메라다. 순간을 포착하고 영원에 기록하고자 사진에 취지를 가진 지 꽤 되었다. 그런 태형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포토그래퍼가 바로 안테 배드짐이다. 자신의 이니셜이자 가장 좋아하는 화가인 반 고흐의 'V'와 안테 배드짐의 'ante'를 붙여 사진을 찍는 자신을 반테(vante)라고 지칭했다. 태형이가 찍은 사진 밑에는 ‘photo by Vante'라고 쓰여있다.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으로 분류되는지 사실은 잘 모르지만 본능으로 안다. 안정감을 주는 사진이 있는 반면 오래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사진은 다르다는 걸. 그리고 피사체를 욕망하는지, 관음하는지, 연민하는지, 애정하는지 그 시선으로 알 수 있다고.


 요즘처럼 사진이 일회용으로 훅훅 소비되는 때에 필름 카메라로, 단 한 장을 잘 찍기 위해 최선을 다해 구도를 잡고 피사체를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포착하려는 태형이는 그러한 의미로 '좋은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 '반테'다.


 반테의 사진엔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 사이판의 눈부신 햇살을 몸으로 받아들여 후광을 만들어내는 정국이의 등이나 비스듬히 서 카메라를 향해 슬쩍 미소 짓는 호석이의 표정과 구름의 구도, 호수에 입수한 지민이 표정을 풀며 웃거나 수평선과 평행을 이루며 팔을 뻗는 순간이 태형이의 필름에 담겼다. 물을 많이 섞은 물감으로 옅게 칠한 듯 바랜 색감의 사진들은 내 오랜 기억 같고, 잊지 말아야 할 오늘 같아 아련하게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에 반테의 사진이 좋다.

 포토 바이 반테가 출력해내는 사진은 모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금 내가 보는 이 풍경을 '사랑'하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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