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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May 07. 2019

22. Map of the Soul : Persona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22



  <Love yourself> 월드 투어 콘서트의 대미를 장식한 방콕 라차망칼라 경기장. 가만히 있어도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흐르는 더위에 수 만 명의 팬들의 호흡이 더해진 공연장은 몇 명이 쓰러져도 이해 가능한 수준의 열기로 가득했다. 생애 처음으로 콘서트 관람이 목적인 여행을 떠나왔고, 나는 이 수만 명 중의 한 명으로 라차망칼라 경기장 그라운드 자리에 앉아있다.


 공연장의 무더움은 무대 위 멤버들에겐 흥분으로, 무대 밑 팬들에겐 희열로 돌아와 모두의 얼굴을 발갛게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공중에 반뼘 떠 있는 듯한 들뜸이 공연을 하는 내내 느껴질 정도였다. 앵콜 곡까지 끝난 뒤 어쩔 줄 몰라하는 팬들 사이에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한 몇 장의 셀피를 찍었는데, 광대가 한껏 자기 주장하고 있는 사진들만 잔뜩 남았다. 모두가 비슷했을 테다.


 이틀째인 일요일 공연은 몇 번의 소나기 덕에 또 다른 추억을 쌓았다. 함께 비를 맞은 사이라는 말처럼 낭만적인 말이 또 있으랴. 비에 젖을까 핸드폰도 보조배터리도 부채도 손선풍기도 모두 가방에 넣어 자리 아래에 넣었더니 영상과 사진에서 해방되었다. 공연하는 멤버들의 모습은 즉각적으로 다가왔고, 화면을 보느라 정작 놓치곤 했던 모든 상황에 감각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방콕의 모든 환경이 공연 보는 재미를 상기시켜준 듯해 몇 번이고 아- 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공연 그 자체로 오롯했다.


 공연이 끝나고 수 많은 사람들에 섞여 달뜬 얼굴로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이렇게 이틀의 콘서트를 정신없이 봤구나 하며 종종걸음으로 이동하던 중에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BTS (방탄소년단) '작은 것들을 위한 시 (Boy with Luv) feat. Halsey' Official Teaser 1'


 더 보여줄 게 없을 거라는 일부의 평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2014년에 발매한 <Skool Luv Affair> 앨범의 인트로 <Skool Luv Affair>를 다시 샘플링하며 현재의 철학을 자신있게 내보인 남준의 컴백 트레일러 <Persona>가 일주일 전쯤 공개됐을 때, 이번 앨범에 대한 기대는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지금 내 눈 앞에 뜬 '작은 것들을 위한 시'는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인 것이다. 제목의 부제로 붙은 'Boy with Luv'는 역시 <Skool Luv Affair> 앨범의 타이틀곡 '상남자(Boy in Luv)'와 연결된다. 당장에라도 보고 싶지만 이 소란스러운 방콕의 소음을 섞어 듣고 싶지 않다. 걸음을 더 빨리 했다. 호텔 방으로 돌아가 심호흡을 한 후 집중해 들어야만 한다.


 한낮의 트래픽 잼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콕의 밤 거리는 한산했다. 라차망칼라 경기장에서 호텔이 있는 프런칫 역까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고 도착했다. 기사님께 팁을 추가로 전달하고 짐을 빨리 챙겨 내렸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도, 구겨질까 소중히 들고 온 종이피켓도, 바리바리 사 온 굿즈들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가방을 소파에 던져놓고 앉았다. 이미 몇 십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영상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하얀 화면을 가로지르는 로고가 떴다. 분홍색 수트를 갖춰 입은 방탄소년단이 문 닫은 극장 앞 소파에 앉아 있다. 극장 간판에 쓰인 글은 'Persona'. 50초 남짓의 티져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앨범의 음원이 공개되는 4월 12일 오후 6시. 불금을 즐기러 다들 서둘러 퇴근하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어 퇴근을 유예했다. 오후 5시 57초.. 58초.. 59초.. 오후 6시. 정각에 맞춰 새로고침을 한 뒤 앨범 트랙을 순서대로 열맞춰 재생했다. 한 곡 한 곡에 꾹꾹 눌러담은 우리를 향한 세레나데에 몇 번이고 요동치는 심장을 달래며 가사 하나하나 짚어가며 들었다.


 4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일상에 붙어 떨어지지 않은 노래들과의 첫 만남은 이러했다. 고요한 방콕의 호텔,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Map of the Soul : Persona>는 그렇게 마주한 앨범이었다. 이미 국내 활동을 마무리한 이 뒤늦은 시점에 앨범에 대한 감상을 써보려 하는 건, 이제야 답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마냥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부족했던 처음, 활동하는 모습들을 뒤쳐지지 않고 좇았던 날들을 지나 새로운 투어를 시작하기 위해 방탄소년단이 한국을 떠난 지금이 되어서야 이제 좀 내 마음을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어서다. 듣느라 좇느라 따라가느라 바빴다. 몰아치듯 쏟아냈던 그들의 마음을 이제야 차분히 앉아 짚는다.


 뒤늦은 답가가 얼마나 힘을 가지랴마는, 이쯤 되어서 꼭 한 번 얘기해보고 싶었다. 그 큰 마음을 이렇게 받아들인 사람도 있노라고.



1. Intro : Persona


  야 이 짓을 왜 시작한 건지 벌써 잊었냐

  넌 그냥 들어주는 누가 있단 게 막 좋았던 거야

  내가 되고 싶은 나 사람들이 원하는 나 니가 사랑하는 나 또 내가 빚어내는 나

  웃고 있는 나 가끔은 울고 있는 나 지금도 매분 매순간 살아 숨쉬는 Persona



 그저 음악이 좋았다. 비트에 맞춰 가사를 쓰는 것도, 랩을 하는 것도, 멜로디를 만드는 것도 즐거웠다. 꼭 발명가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시작했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것들이 무대 위의 퍼포먼스로 진일보하는 걸 한 가운데에서 꿰뚫어 지켜보고 있자면 가끔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기이했다. 이게 좋아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다보니 인기와 명성이 따라왔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운 감정들을 받는 건 덤이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디에나 있고, 내 이야기의 영향력 또한 그에 비례해 거대해졌다.


 명이 있다면 암이 있다. 이 인기와 명성, 영향력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선 매 순간 노력해야한다. 날 것의 나를 감추고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나여야 한다. 아주 사소한 구설수 하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서툰 행동 하나도 큰 화살이 되어 내게, 팀에게 돌아올 수 있다. 우리 음악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숫자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면서 내 고민도 그에 맞춰 늘어났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이게 과연 나인 것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 서 있나,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들은 다양한 변주를 이뤄내며 늘 나를 따라 다닌다.


 Persona는 '가면'으로 '외적 인격'을 나타내는 말이다. 사회적 관계를 맺는 주체로 사회의 행동 규범에 따르는 또 다른 나. 이번 앨범과 인트로의 제목인 'Persona'란 단어는 누구보다 지금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는 남준이의 고뇌가 느껴져 유독 시리게 다가온다. 2018년 말, 방탄소년단이 화관문화훈장을 수여받던 날, 슈가는 소감으로 '국가대표의 마음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그저 음악이 좋았던 어린 청년들은 이제 음악만 할 수 없는 위치에 자의 반 타의 반 올라서 버렸다.


 지금 남준은 말한다. 그 질문들과 고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답을 내리진 못 했다고.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음악을 좋아해서 시작한 원래의 내가 그저 가면을 손에 쥐었을 뿐이라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게 내 손으로 끌어 낸 가면을 썼을 뿐이라고. 그리고 사실 우리 모두 다 그렇지 않느냐고.


 음악이 좋아해서 시작했던 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가면 속에서 가끔 울기도 하지만 그래서 웃을 수도 있다. 그러니 위의 질문들을 계속해 나가며 음악을 하겠노라고 음악으로 선언했다.


 팬들을 향한 세레나데를 선보이기 전, 음악인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사유를 멈추지 않는 남준이의 성찰적 메시지는 그 무수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향해 이 길을 계속 걸어가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이 앨범의 첫 곡이 이 곡이어야 했던 모든 이유다. 이처럼 완벽하게 포문을 열 수 있을까.

 

 Dear myself  

 넌 절대로 너의 온도를 잃지 마

 따뜻히도 차갑게도 될 필요 없으니까


 바라는 건 없다. 다만 자신을 좀 덜 갉아먹을 수 있는 시간 속에서 지금처럼 계속 음악을 해주길, 방탄소년단의 음악으로 일상을 살아낼 수 있게 해주기만을 조심스레 요청할 뿐.



2. 작은 것들을 위한 시 (Boy with Luv)


  Listen my my baby 나는 저 하늘을 높이 날고 있어

  그때 니가 내게 줬던 두 날개로

  이제 여긴 너무 높아 난 내 눈에 널 맞추고 싶어

  Yeah you makin’ me a boy with luv



 자신들이 높은 곳에 당도해있다는 걸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주요 언론들이 주목하고 있는 아미(Army)의 충성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유례없던 역사를 써 나가는 그들을 제대로 서포트하고 싶단 마음이 발동한달까.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의 뮤직비디오는 40시간도 채 되지 않은 때에 1억 뷰를 달성했다. 세계 '최초'이자 '최고'기록이다.


 이런 단단한 팬들에게 방탄소년단은 말한다. 너희가 준 날개로 이 높은 곳에 도달했으나 이 경치를 나만 볼 순 없다고, 우리 같은 높이에서 함께 이 풍경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방탄소년단은 노래한다. 세계의 평화나 거대한 질서보다 널 지키는 게 우선이라고, 네가 항상 궁금하다고, 이카루스처럼 날개에 심취해 파멸의 길로 닿지 않고 이 날개를 달아 준 너희에게 가겠다고. 너무 과하지도 무겁지도, 너덜하지도 소극적이지도 않은 이토록 딱 적당한 표현의 세레나데가 있을까. 방탄소년단은 그저 '작은 것들'로 치환돼 버릴 수 있는 팬들의 사랑을 '작은 것들을 위한 시'로 명명해 헌사했다.


 숫자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은 이 타이틀곡이 질릴 가능성은 0%다. 노래의 첫 음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이미 샤갈의 '도시 위에서' 속 주인공이 돼 있다. 두둥실 떠올라 도시 위를 유영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사랑에 빠진 커플처럼, 방탄소년단과 같은 날개를 달고 주위를 함께 내려다보는 마음이 된다.


 왜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냐며, 날 놓치기 전에 꽉 붙잡으라던 사랑에 안달난 어린 상남자(Boy in Luv)는 네가 뭘 하면 행복해 하는지 조심스레 물으며 이제 조금은 알겠다고, 그저 널 지키겠다는 진짜 상남자(Boy with Luv)가 됐다. 그 상남자의 마음에 기꺼이 웃으며 화답한다. 그저 지켜지기만 하는 상대가 되진 않겠다고, 나도 함께 너흴 지키겠다고.



3. 소우주 (Mikrokosmos)


  칠흑 같던 밤들 속 서로가 본 서로의 빛

  같은 말을 하고 있었던 거야 우린

  가장 깊은 밤에 더 빛나는 별빛 밤이 깊을수록 더 빛나는 별빛

  우린 우리대로 빛나 우리 그 자체로 빛나



 맑은 날 밤. 반짝이는 위성이 별처럼 느껴지는 어둠. 살랑 불어오는 바람. 나뭇잎 떨리는 소리. 저 멀리 자전거가 지나가는 알람 소리. 내 발자국 소리. 무심코 올려다 본 밤하늘의 색감. 그것이 주는 안도감. 이 모든 조화로 인해 온 하루가 위로 되는 듯 했던 그 때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밤의 노래'.


 소우주에서는 서로를 '빛'으로 칭한다. 우리는 70억 명 중에 고작 한 명일지라도, 그 70억 명은 각각 70억 가지의 빛과 세계 삶을 가지고 있으며, 그 빛은 어둠을 이기는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노래한다. 그 노래 가사 속 우리는 우리 각각이 가진 빛으로 서로의 방향을 가늠케하는 이정표다. 빛은 빛을 알아보고, 그 빛은 또 다른 빛과 이어지게 한다.


 우주의 일부이면서도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우주로 여겨지는 것.


 우리는 각자의 빛이며 그 자체로 독립된 주체이자 객체이나, 함께 하고자 하면 기꺼이 빛을 이어 별자리를 이룰 것이다. 빛의 색깔과 크기는 모두 달라도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그들과 우리이기 때문이다.



4. Make it right


  초대받지 못한 환영받지 못한 나를 알아줬던 단 한 사람

  끝도 보이지 않던 영원의 밤 내게 아침을 선물한 건 너야

  이제 그 손 내가 잡아도 될까

  너 없이 헤쳐왔던 사막 위는 목말라 그러니 어서 빨리 날 잡아줘

  너 없는 바다는 결국 사막과 같을 거란 걸 알아



 '바다'와 '사막'은 방탄소년단의 노래 중 여러번 변주되어 쓰이는 가사다.


 <love yourself 承 Her> 앨범에 속한 히든 트랙 <바다>가 대표적이다. 그들의 불안을 솔직하게 내보였던 이 곡에서 방탄소년단은 그들이 닿고자 하는 목표를 '바다'로, 바다를 들이킬 수록 목이 말라가는 지금을 '사막'으로 표현했다. 숨을 내쉬 듯 반복되는 후렴구의 가사는 '희망이 있는 곳엔 반드시 시련이 있네'. 아프고 건조했다.


 이 '바다'와 '사막'은 <Make it Right>에 다시 등장한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상황은 같다. 하지만 한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던 멤버들은 이제 해답을 찾아냈다. 바다를 갖고 싶다고 온통 들이키면 남는 건 아프게 말라버린 목 마른 사막 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혼자 있어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물을 나누고, 함께 헤엄칠 네가 필요하다. 이걸 알았다.


 마음이 아파 <바다>를 잘 못 듣는 나같은 팬을 위해 마치 준비한 노래 같다. <Make it right> 덕에 <바다>도 들을 수 있게 됐다.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결말을 듣고 나서야 주인공의 시련을 올곶게 볼 수 있었던 그 때처럼, 시련을 겪어 낸 후 네가 있어 괜찮다고 말해주는 방탄소년단의 현재 고백을 듣고 난 뒤 그 때의 시련을 마주한다. 이제 <바다>가 아프지만은 않다. 참, 다행이다.



5. HOME


  뭔가 채울수록 더 비어가 함께일수록 더 혼자인 것 같아 반쯤 감긴 눈 잠 못 드는 밤

  니가 있는 곳 아마 그곳이 Mi Casa

  세상은 우리가 세상을 다 가진 줄 아는군

  꿈에 그리던 Big house big cars big rings

  내가 원한 건 모든 걸 가져도 뭔가 허전한 지금 모든 걸 이룬 자가 느낀 낯선 기분

  But 지금 떠나도 돌아올 곳이있기에 나서는 문



 방탄소년단 데뷔곡 <No more dream>의 슈가 파트는 다음과 같다.

 

  I wanna big house big cars n big rings

  But 사실은 I dun have any big dreams


 큰 집이나 차, 보석을 가지고 싶지만 꿈은 없다며, 꼭 남들이 말하는 대단한 무엇을 향해야만 하냐고 말했던 어린 슈가는 성장한 뒤 다시 이렇게 말한다. 꿈에 그리던 집과 차, 보석을 전부 가졌고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어딘가 공허하다고. 그럼에도 다시 힘을 내 나설 수 있는 건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돌아올 곳은 내 집도, 내 차도 아닌 우리가 있는 곳이라고. 아스가르드는 장소가 아닌 사람이라고 말하던 토르의 오드 아이가 스치는 가사다.


 멤버들에게 집을 물어보면 어디를 떠올릴까. 함께 지내는 숙소? 가족이 있는 본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 늘 완벽하게 정리된 호텔? 1년 중 절반 정도를 타국에서 지내는 데다가 한국에 지내더라도 연습이나 앨범 준비, 스케줄 소화 등으로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인 멤버들에게 '집'은 어쩌면 혼동과 혼돈의 단어일 지도 모른다. 내가 가는 곳을 질문하든 내가 있는 곳을 질문하게 하는 시발점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은 단호하게 말한다. '니가 있는 곳, 아마 그 곳이 내 집' 이라고.


 Home은 House와 달리 집 외에도 가정, 고향이라고도 번역된다. 단순히 몸을 뉘이는 장소로서가 아닌, 편안히 마음도 내려놓고 안정감을 취하고 안식을 얻는 모든 의미로서의 집이 home이다. 이 home이 우리 '곁'이라고 말하는 노래를 감히 무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칠 때면 언제든지 찾아와 쉴 수 있는 집이 되어야 한다. 더울 땐 시원한 수박과 아이스크림을 쥐어 줄 수 있는, 추울 땐 두툼한 담요를 덮어줄 수 있는, 피곤할 땐 푹 잘 수 있게 좋은 침구가 있는, 즐거울 땐 같이 손뼉치며 노래할 수 있는 집으로. 가끔은 괜찮은 척 하지 않고 어리광도 부리며 잔뜩 보채려는 솔직한 표정을 한 채 내 집을 찾아 온다면, 모든 스위치를 켠 채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초인종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문을 열고, '다녀왔어'란 말에 '배고프지. 얼른 들어와'라 답하며.



6. Jamais Vu


  괜찮지만 괜찮지 않아 익숙하다고 혼잣말 했지만 늘 처음인 것처럼 아파

  또 다시 뛰고 또 넘어지고 Honestly

  수없이 반복된대도 난 또 뛸 거라고

  So give me a remedy

  날 살려줘 이번에도 쉽지 않아 다시 기회를 줘

  관둘 거냐고 No no never I won’t give up



 Jamais Vu. 미시감. 기억의 오류(誤謬) 가운데 하나.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모두 처음 보는 것으로 느끼는 의식.


 인생을 게임처럼 처음으로 리셋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칼을 쓴 상대에게 죽임을 당한 게임 캐릭터는 다음 생에선 방패를 무기삼아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한 발자국 더 전진하지 못 해 죽은 게임 속 캐릭터는 다시 돌아 온 그 자리에서 힘차게 뛰어 나가 죽음을 면할 수 있다.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게임 속 캐릭터처럼, 인생도 거침없이 완벽하게 살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게임 속 캐릭터는 자신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캐릭터는 사실 전지전능한 게이머에 의해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고, 혹은 다시 태어난다.


 우린 인간이기에 목숨이 딱 하나 달린 게임을 하는 중이다. 그것도 나를 움직여주는 전지전능한 게이머도 없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아프다고 다시 로딩할 수 없는 최후의 게임 한 판. 답은 없다. 상대방의 칼에 맞더라도, 넘어지더라고, 수렁에 빠지더라도 나아가는 수 밖에. 그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수 밖에.


 면역이 되지 않는 것들은 참 많다. 상사의 꾸중, 눈가 주름, 외로움, 반복되는 실수 등. 매번 습관처럼 해오던 것들이 낯설어지는 때도 많다. 게슈탈트 붕괴현상처럼 단어를 조각조각낼 때 뿐 아니라 머리를 감는 것에도, 종이를 자르는 것에도, 음료수의 뚜껑을 열다가도 찾아온다. 지금 하고 있는 행위를 곱씹으면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생각이 필요 없는 이런 반복적인 일상도 이럴진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는 그만큼 긴 그림자가 따를 수 밖에 없다. 다이렉트로 쏟아지는 거센 조명 덕에 조금만 움직여도 그림자는 크게 휘청인다. 시행착오와 상처, 아픔들은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해지지가 않아 새롭게 아프고 새롭게 상처받고 새롭게 실수하는 것만 같다. 그럴땐 게임처럼 종료버튼을 눌러 꺼버린 뒤 새로 시작하고 싶다. 하지만 실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저 무뎌지기 위한 반복 뿐이다. 처음처럼 여겨지면 처음처럼 아프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몇 번이고 반복되면 언젠가는 익숙해지리라는 생각으로. 미시감이 기시감으로 바뀔 즈음이면 그래도 조금은 진척이 되어 있을 거란 믿음으로.


 그리고 이 모든 반복을 하기 위함이 무대를 좋아하는 자신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팬들 때문이다.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소우주>, <Make it right>, <Home>에 이어 그들이 보내는 마지막 세레나데 <Jamais Vu>는 그 전의 노래들과 달리 씁쓸함을 담고 있다. 사랑엔 밝은 면만 있지 않다. 백조의 다리처럼, 따뜻한 사랑을 위해 감수해야하는 부지런하게 아픈 두 다리를 그들은 살포시 내보였다. 그 움직임이 지치지 않게, 처음처럼 다가올 아픔을 보듬어주고만 싶다.


 <Jamais Vu>는 제이홉, 진, 정국 세 명이 참여한 유닛곡이다. 보컬 라인, 랩 라인이 각각 유닛곡을 냈던 적은 있으나 보컬과 랩 라인이 섞인 유닛 곡은 이번이 처음이다. (RM과 뷔가 함께 부른 '네 시'란 곡은 앨범에 실린 곡은 아니었다.) 이 색다른 조합은 앞으로 형성될 여럿 형태의 유닛의 전조일 것이다. 앞으로 또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까. 기대하기 충분하다.



7. Dionysus


  내가 아이돌이든 예술가이든 뭐가 중요해 짠해

  예술도 이 정도면 과음이지 과음 yeah

  새 기록은 자신과 싸움이지 싸움 yeah

  축배를 들어올리고 one shot 허나 난 여전히 목말라


 

 달콤씁쓸한 세레나데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토해낸다. 그래서, 뭐- 라고.


 변하지 않았구나. 힙합으로 시작했던 그들의 본질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구나. 힘 빡 들어가고, 독기에 가득찼던 그 때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구나 하는 마음에 디오니소스를 처음 들을 때의 감정은 '들뜸'이었다. 남준이 말했던 본질과 수미쌍관을 이루는 듯한 구조.


 이 곡은 큰 감상을 요하지 않는다. 포도나무와 포도주, 풍요와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같은 마음으로 그들의 예술에 과음하고자 하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된다.


 그동안의 우리에게 Cheers, 앞으로 펼쳐질 꽃길에 Cheers.


 다만 본격 음주 권주 곡인만큼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와인만 자꾸 마시고 싶어지는 것이 유일한 흠이다.


 그들의 예술에 과음하며, 한 잔 두 잔...

 





 덕질의 농도가 짙어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부지불식간의 찰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알아차리고 나면 언제 이만큼 건너왔지, 하는 자각만 있을 뿐이다. 2017년 말부터 방탄소년단을 좋아해오면서 (지금도 '조금만 더 일찍 알아챘더라면'하다가 '이만한 게 다행이야'하는 양가적 마음이 몇 번이고 앞다투며 싸운다) 꽤나 열심히 덕질을 해왔다고 생각했으나, 요즘의 나는 그때의 나와 완전히 달라졌다.


 매 앨범마다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방탄소년단이기에, 그 앨범을 뛰어 넘는 앨범을 다시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익히 알고 있었다. 더 거대한 것을 좇기보다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은 작은 것들을 노래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논의하고, 결과물로 만들어냈을 그간의 과정을 조금씩 따라온 뒤 맞닿은 이번 <Map of the Soul : Persona>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의 나는 CD를 막 사서 포토카드를 먼저 확인했던 그 때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앞으로도 점점 그렇게 될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내놓는 음악들은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내게로 와 내가 부여한 의미를 지닌 이상, 또 다른 나의 노래가 되었다.


 가수명에 방탄소년단을 클릭한 뒤 전체 재생을 눌렀다. 2019년 4월, 나는 7곡의 내 곡을 또 선물받았다.



 P.S


 앨범을 발매하고 난 뒤, 앨범 작업 과정 등을 설명하는 남준이의 브이라이브 영상을 봤다. 시대착오적일지라도 시와 글을 쓰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언어적으로 아름다웠으면 좋겠기에 가사에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고 했다. 역시 가사에 집중해서 들어줬으면 좋겠으며, 가사가 중요한 앨범이라고도 했다.


 이 노랫말들이 더욱 좋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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