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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an 23. 2019

2. 이토록 이기적인 애정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2


 차에 시동을 걸면 MP3와 블루투스로 연결된 스피커에서 자동으로 방탄소년단 노래가 나온다. 다른 가수들의 노래들을 듣지 않은 지 꽤 되었다. 덕분에 요즘 신곡도 잘 모른다.

 아무렴 어때. 방탄소년단 노래만 들어도 충분한데.


 차 예열을 위해 시동을 켠 채 조금 기다리는데 봄날(Brit Rock Remix)의 전주가 흐르기 시작했다. 왜 몰랐지. 왜 몰랐을까. 이렇게 좋은데 왜 몰랐을까. 방탄소년단을 모른 채 지나온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당황스럽게도 눈물이 갑작스럽게 차올라 시야가 뿌예졌다. 이 노래가 발표되는 날, 앨범을 주문한 후 음원 사이트 업데이트를 기다리다가 올라오자마자 바로 들었다면 어땠을까.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시간이 비통해서 나를 원망했다. 왜 몰랐니. 왜 모른 채 지나왔니.


 필리핀 팔라완에서 썸머 패키지 촬영을 하는 영상을 뒤늦게 보고 있었다. 촬영 날짜가 자막으로 나왔다. 2017년 5월 2일. 엄청 덥고 습한 팔라완이라지만 땀 하나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청량함을 머금은 멤버들을 보다가 나는 2017년 5월 2일에 뭘 했던가 궁금해져 지난 탁상달력을 들춰 봤다. 연차휴가란 네 글자를 적어놓았다. 5월 1일 노동절과 5월 3일 석가탄신일 사이의 화요일이라 연차휴가 하루를 내고 주말 포함 5일을 쉰 것 같은데, 당최 뭘 했는지가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뭐 했지 나?     


 시간을 그렇게 대충 보내온 거다. 방탄소년단도 모른 채, 기억에 남는 휴가를 보내지도 못한 채. 세상 가장 쓸데없는 두 글자가 ‘만약’이지만, 오늘도 가정한다. 만약 그때 알았더라면.     


 방탄소년단은 데뷔를 2013년 6월 13일에 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이 데뷔 일을 기념하는 획기적인 기획을 내놓았는데, 매년 이 6월 13일을 기점으로 약 일주일 정도 ‘페스타’로 이름 붙은 축제를 연다. 평소 좋아했던 다른 가수의 노래를 직접 부른 파일을 공개하거나 페스타만을 위해 새로 작업한 곡을 발표하고, 본인들끼리 자체적으로 라디오 프로그램 형식을 딴 <06.13 mhz 꿀 FM>이나 좀 더 솔직한 모습을 담은 <방탄 회식>을 공개하는, 그야말로 '페스타', 팬들을 위한 축제다.     


 데뷔 1주년을 맞이한 2014년. 당시 꿀FM에서 멤버들은 그해 이루고 싶은 꿈으로 음악방송 1위를 꼽았다. 지금은 3년 연속 대상 수상에 빌보드 차트 1위 가수가 된 그들인데 그땐 음악방송 1위가 목표인 귀여운 신인이었다.      


 만약 그때 알았더라면 하고 투덜만 댔던 늦덕은 여기서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했다. 그 당시에 꿀FM을 보는 팬이었다면 멤버들과 같은 마음으로 음악방송 1위를 바랐겠지만, 지금 꿀FM을 뒤늦게 보는 나는 예언자가 됐기 때문이다.

 

 ‘걱정 마 너희 1위 해’

 ‘조금만 버티면 대상이야’

 ‘세계적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는 가수가 될 거야’     


 지나고 나면 그때 했던 고민들이 영양가 없는 것들이었다는 걸 깨닫곤 하는데, 그들을 대상화하며 더욱 굳건하게 생각한다. 잘 되지 못할까, 1위를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던 그들의 고민은 모두 쓸데없는 거였다. 그때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답한다. 1위와 대상, 훈장, 무수한 타이틀 등 그때의 바람보다 더 큰 보답으로.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방탄소년단을 더 늦지 않게 만나서 다행이다. 늦덕이라도 될 수 있어 다행이다. 이미 흘러버린 시간은 그대로 묻어도 괜찮다. 그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모양을 바꾸는 마음에 자꾸 이름을 붙이는 사람은 나다.     


 모처럼 바쁜 일이 없는 날이라 부서 직원들과 근교로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따사롭다. 외투가 거추장스러워 벗어버렸는데도 춥지 않다. 이른 봄처럼 느껴지는 날씨라 금요일 점심때임에도 불구하고 근교 식당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런 날씨는 무언갈 하고 싶게 만든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사 발령으로 최근 같은 부서가 된 선배와 함께 하는 자리라 선배의 스토리가 대화의 주된 주제였다. 나름 회사 생활 7년 차에 돌입했지만 타 부서 선배들에 대해 잘 아는 게 없다.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대화에 참여하다가 선배가 과거에 서울에 있던 정부 기관의 별정직 공무원이었다는 설명에 눈이 번쩍 떠졌다.      


 “아니 거길 왜 그만 두신 거예요? 그런 신의 직장을”

 우리 회사도 나름 안정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무원은 다른 차원 아닌가. 일했다던 정부 기관 자체도 들어가기 어려운 곳인데. 그 질문에 선배가 약간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답을 주었다.

 “그때 만났던 여자 친구가 갑자기 잠수를 탄 거야. 결혼까지 생각했는데. 그 여자 친구 고향이 여기였거든. 회사 그만두고 내려와 두 달 정도 미친 듯이 찾아 헤맸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여기에 자리 잡게 됐네.”

 그 여자분과 재회하진 못 했고, 다음에 만난 분과 결혼에 골인했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였지만 자꾸 다른 포인트가 마음에 걸렸다. ‘여자 친구가 갑자기 잠수를 탄 데는 다 이유가 있었을 텐데. 회사까지 그만두고 쫓아온 걸 알았으면 굉장히 무서웠을 거야. 이건 선배 혼자만의 이기적인 행동이지’.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선배의 추억 미화에 기름을 부을 것 같아서.      


 커피까지 잘 마시고 사무실로 들어왔는데 아까의 대화가 계속 맴돈다. 이에 흉측하게 낀 고춧가루처럼 불편했다. 선배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게 그 누구보다 일방적인 애정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버려서다.     


 눈이 번쩍 떠진 주말 아침. 주말로 다 미뤄놓은 집안일을 시작했다. 세상에서 제일 티 안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집안일일 거다. 설거지와 청소, 빨래까지 하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방탄소년단 노래를 크게 틀어놓으니 능률이 높아졌다. 중간중간 춤을 따라 추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얼른 정리했다.     


 커피를 내린 후 잔을 가지고 방에 들어와 침대 헤드에 허리를 기대앉았다. 커피를 홀짝이며 트위터 앱을 실행했다. 트위터 타임라인에 새 글이 엄청 쌓여 있다. 밤새 어떤 이슈가 있었나 보다. 천천히 읽으며 파악하니 멤버 한 명의 찍덕(사진 찍는 덕후)으로 유명한 네임드 트위터리안이 알고 보니 사생팬에 까빠라는 것이다. 까빠는 까면서 빤다의 의미인 것으로 추측하며 내용들을 읽어봤다. 부계정 하나를 더 만들어서 타 멤버들의 험담을 하고, 욕설을 비롯한 필터링 없는 단어들을 써 가며 본인이 찍는 멤버를 소비한 것이 발각된 것이었다. 게다가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숙소에 묵으며 공식 스케줄을 따라다니는 건 물론, 개인적인 스케줄까지 따라다닌 듯하다. 그 부계정에 ‘어떻게 여길 왔냐고 묻는 멤버의 놀란 눈이 자신을 향해 있어 기뻤다’라는 말이 친히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가수를 동시에 쫓아다닌 흔적도 있었다.      


 어디를 따라갔다더라, 뭘 했다더라 등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까지 덧붙여져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정도의 글들을 읽어보다가 순수하게 궁금했다. 이런 마음은 어떤 형태인지.      


 아무래도 이렇게라도 인지되고 인식되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미워서라도 날 기억하겠지. 날 보고 굳는 얼굴. 그거 봐. 나를 단박에 알아보잖아. 나는 <아는 사람>의 범주로 분류되어 있어. 불특정 다수인 너네와 달라.’


 관심의 표현으로 고무줄을 끊는 장난을 치는 초등학생 남자아이 같은 마음 같지만 훨씬 복잡하다. 모든 걸 알고 싶은 마음에 나만 알고 싶은 마음이 첨가돼 있어서. 평소에 무얼 하고 누구를 만나는지 모든 걸 직접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비틀어진 애정. 그러면서도 비하 발언을 써 가면서 멤버를 까는 건(굳이 또 다른 계정을 만들어서 이 얘기를 쓴다. 역시 누가 알아주길 바라는 거다. 쟨 뭘 아는구나, 뭔가 있구나라고 알렸으면 하고) 사실은 일방적인 마음이면서 본인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단어를 선정해 버리려는 심리가 아닐까.

 ‘나 사실 그렇게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언제든 떠날 수 있어. 그러니 날 겁내’ 같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부르고 그런 노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싶어 가수가 됐을 텐데. 그런 자신들을 좋아하는 팬이 생기고 좋은 영향력을 주고받는 관계가 생기길 바랐을 텐데. 이런 비틀린 애정을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 거다. 아니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일방향의 애정은 굉장히 이기적이다. 다른 모양인 척 하지만 사실 내가 좋아하는 마음도 일방향으로 이기적인 건 매한가지다. 슬프지만 인정.     


 더 생각해보기를 포기한다. 이런 트위터 글을 타고 타고 넘어가다 기분이 이상해져 휴대폰을 멀리 던져버렸다. 현실의 멤버들은 방송에서 비치는 모습과 달리 너무 피곤할 것 같고, 지칠 것 같고, 표정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고, 사실은 너무 힘들 것 같고. 이 무수한 ‘같고’의 나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버렸기 때문이다. 팬들이 정말 많으니 별의별 일들이 다 있겠지 싶었지만 몇 년간 계속됐을 사생활 침해의 일부분을 직접 확인해버리니 멤버들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가려 받을 수 없는 무수한 애정들이 독처럼 느껴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 말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다만 아침 출근길, 너희들의 노래로 힘을 내는 사람이 있고 새로운 걸 시도해보려는 원동력을 얻는 사람이 있고, 삶에 의미 부여를 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지칠 때 가끔, 떠올려줬으면 좋겠다. 혹시나 닿을까 무서워 멀찌감치 응원하는 팬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가끔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 애정을 포기 못 해 끝까지 이기적일 수밖에 없어 미안한 늦덕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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