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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an 25. 2019

3. 의미의 전복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3


 서울 생활을 포기한 건 사실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였다. 대학을 졸업할 때 700점 이상의 토익 성적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4학년 2학기 때에 처음으로 토익 시험을 본 사람이 나란 인간이었으니까. 그저 수업 잘 들어서 학점 관리 해놓은 것 말곤 따놓은 자격증? 없고, 높은 어학 성적? 없고, 그 흔한 어학연수 경험? 역시 없고, 인턴 경험? 지원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졸업 후의 계획? 고민해 본 적이 있을 리가. 그러니까 그런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 마냥 비벼보기엔 서울은 매서운 곳이었고, 그래서 나는 졸업을 함과 동시에 주섬 주섬 짐을 싸 고향으로 바로 내려 왔다. 졸업자보다 졸업 예정자가 취업에 더 낫다는 팁도 졸업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실로 대단히 대책없는 인간이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자면, 그땐 그냥 막연히 내가 잘 될 줄 알았다. 남들처럼 준비한 건 없지만 그래도 보고 들은 거 많아 말하는 거는 자신 있으니 면접만 보면 무조건 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면접에 가기 위해선 말이 필요없는 무수한 관문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요즘 초등학생들도 알 텐데 말이다. 그래도 그 자신감이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졸업 후 2년만에 고향에 있는 지역 방송국에 입사했다. 어떤 업무를 하고 싶다는 야무진 꿈은 없었지만 집에서 멀지 않으면서 나름 전공을 살린 곳에 취업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고향에 자리를 잡으면서 서울은 뉴욕이나 런던보다 먼 곳이 되었다. KTX며 SRT며 서울에 닿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점차 더 멀어졌다. 그래도 서울에 좀 더 발 딛고 있었으면 어떻게든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서울에서 점점 자리를 잡아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고향으로 내려온 건 역시나 서울에서 멀어진 만큼 다운그레이드된 것 같았다. 서울 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자연스레 따라 다니는 기분이었다.      


 업무에 익숙해지고, 회사에 익숙해지고, 사람에 익숙해져가는 동안 서울은 특별한 일이 있어야 방문하는 연고 없는 도시가 되었다. 대책 없이 보냈던 시간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는, 내가 살 수도 있었던 도시.      


 잠옷으로 갈아입고 노트북을 켰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촬영했던 장소나 개인적으로 자주 찾는다는 식당 등을 가보고 싶어져 코레일 예매 화면을 켰다. 망설임 없이 시간을 체크해 결제 버튼을 눌렀다. 도착지는 용산역. 지금 방탄소년단은 내게 서울의 의미를 송두리째 바꾸려 하고 있었다. 내가 살 수도 있었던 도시가 아닌 너희가 살고 있는 도시, 기꺼이 찾아야만 하는 도시로.      


 “M, 내 덕질 투어를 함께 해줄 수 있겠니?”

 “언니 나 그런 거 좋아해요”

 그 한마디에 의기 투합된 M과 그 주 토요일, 학동역에서 만났다. 대학 후배인 M 역시 누군가의 덕후라 이런 내 마음을 너무 잘 아는 친구다.      


 학동엔 방탄소년단의 기획사인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있어 멤버들의 초창기 추억과 관련 있는 곳들이 많다. 그 중 신인 시절 점심, 저녁 등을 해결하는 식당으로 직접 소개를 해 방탄 덕후들의 성지가 된 ‘유정식당’이 있다. 실제로 최근 몰타에 방문한 <본 보야지>에서 윤기가 식사를 해결할 곳을 찾는 멤버들에게 ‘거기도 유정식당같은 곳이 있겠지’라는 말을 했다. 멤버들의 과거에 정말 많은 추억을 선사한 장소인 것이다. 학동역에서 유정식당까지는 짧은 걸음으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토요일 점심이라 12시에 딱 맞춰 가면 웨이팅이 있는 거 아닐까 걱정하며 걸음을 빨리 했는데 다행히 살짝 이른 시간이라 두 테이블 정도에만 손님이 있었다.     


 가게 안은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가면 눈이 휘둥그레해질 정도로 방탄소년단의 사진들로 가득 차 있다. 앨범을 사야지만 받을 수 있는 포토카드부터 슬로건, 캐릭터, 증명사진 등이 가게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데, 방송에서 멤버들이 여길 단골로 찾았다고 소개한 이후 다녀간 팬들이 하나씩 붙였던 것들이라고 한다. 이 분위기 덕에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꼭 오고 싶어하는 곳이 되었다. 각 국의 팬들이 찾는 곳이라 그런지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분들도 중국과 일본 사람들이었고 우리 테이블의 주문을 받는 직원도 외국인이었다.  


 의미 부여는 덕질에 가장 중요한 단어이므로 처음부터 멤버들이 앉았던 자리에 앉고 싶었다. 식당 가운데에 기다란 괘종시계가 있는데 그 앞의 세 테이블에 나눠 앉은 멤버들이 쌈밥과 돌솥비빔밥을 맛있게 먹는 장면을 상기하며 신발을 벗는데 직원이 그 괘종시계 앞의 자리로 안내한다. 그러고 보니 그 옆자리로만 자리를 잡아 식사를 하고 있다. 보통 끝자리부터 자리를 채우는 것과 다르다. 이 식당을 어떤 마음으로 찾아오는지 너무 잘 아는 배려가 묻어나는 부분이다. 멤버들이 즐겨 먹었던 메뉴가 표기돼 있어 그대로 시키고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찾아보지 못한 사진들도 많다. 이거 아까워서 여길 어떻게 붙였나 싶지만, 좀 더 잘 됐을 때 식당을 찾은 멤버들이 이런 팬들의 정성을 보고 좋아했다는 사장님의 인터뷰를 보니 이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싶다.   

   

 돌솥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흑돼지비빔밥을 게눈 감추듯 먹었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며 짐을 싸고 온 후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지하철을 타고 와 흥분된 마음으로 먹는 첫 끼라 더 맛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나는 신인 시절 멤버들이 즐겨왔던 이 곳에서 멤버들이 즐겨먹었던 메뉴를 시켜 먹고 있다. 게다가 자리도 이 괘종시계 앞이다. 이 뿌듯함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모든 찬사를 바치고 싶은 마음이다. 맛있게 먹고 계산을 하고 나오며 식당 안 모습을 좀 더 카메라에 담았다. 솔직히 그대로 뜯어서 가지고 가고 싶은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식당의 문엔 방탄소년단 멤버들의 사인이 붙어있다. 나같은 덕후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듯한 모양새다. 그 마음을 담아 사진을 또 찍었다.     


 다행히 맛이 좋아 M의 기분도 좋은 것 같다. 나 혼자만 신나서 다니면 안 되는 일정이라 M의 기분도 섬세하게 살피게 된다. 시시콜콜한 일상의 얘기를 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방탄소년단 자체 예능 <달려라 방탄>에서 바리스타 체험을 했던 카페로 향했다. 카페가 있는 한남동은 대학 때의 기억이 많이 서린 곳이라 한남오거리 버스정류장에 내린 순간부터 복잡한 마음이 되었다. 서울을 떠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마음들이 불쑥 솟아나려고 했지만 강바람이 세서 옷깃을 여미는 것으로도 정신이 없어졌다. 한남오거리에서 한남역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보이는 카페 엔게더. 금세 도착했다.     


 태형이의 생일이 12월 말이기에 태형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이런 팬 문화는 최근에 생긴 것 같은데, 카페 몇 군데를 지정해 본인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생일을 축하하는 문구를 담은 컵홀더를 제작해 배포한다. 여기도 그런 곳인가보다. <달려라 방탄>의 촬영 장소여서 왔는데, 기분 좋게 태형이의 컵홀더를 추가로 받았다. 멤버 각자가 다른 커피를 만들어보고 서로 맛을 보고 했던 곳이라 내부가 눈에 익다. 지민이가 맛을 ‘예쁘다’고 표현한 로지 라떼는 실제로도 예쁜 맛이었다.      


 여긴 ‘순간아,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란 네온사인이 카페의 한구석에 걸려 있는데, 이 네온사인 앞에서 태형이와 호석이가 서로의 사진을 찍어 트위터에 업로드를 했었다. 두 사람과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사진을 저장해 갔는데 왠지 부끄러워 나갈 때 찍자 싶었다. 하지만 커피를 다 마시고 수다의 결이 떨어질 땐 이미 가게 안에 팬들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꽉 채워 더 쑥스러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사진찍는 걸 아쉽게 포기했다. 기회는 항상 있을 때 잡아야 한다.      


 다음 코스는 이태원의 라인스토어. 우리나라보다 되려 해외에서 더 많이 쓰인다는 라인이지만 목적은 라인 캐릭터가 아니다. 네이버 라인과 방탄소년단이 합작하여 만든 캐릭터 bt21의 상품들이 목표였다. 다른 매장도 많지만 이태원이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 3층에서 멤버들이 촬영을 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초안으로 잡은 캐릭터에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고, 최종적으로 상품이 되어 나오는 모습은 영상으로 모두 남겨졌다. 멤버들이 만든 각각의 캐릭터는 BT21이란 그룹명으로 묶였고 그 캐릭터 하나 하나는 멤버들을 투영하는 존재로 거듭났다. 토요일 오후답게 매장 안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제대로 둘러보기엔 너무 복잡해 급한대로 필요한 것들을 담아 계산하고 3층에 있는 카페로 들어섰다. 캐릭터별로 이름이 있는 메뉴를 한참 보다가 적당한 것으로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멤버들이 촬영을 한 자리로 표기가 된 곳이다. 어쩜 딱 이 자리로. 음료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멤버들의 사인과 캐릭터 초안들, BT21 음료의 사진을 찍으며 모두 웃고 있다. 막 3층에 올라온 외국 여행객 두 사람이 옅게 비명을 지르며 멤버들의 흔적을 좇는다. 그걸 보는 나도 아마 미소지었던 것 같다. 방탄소년단 이름으로 모인 우리는 지금 모두 행복했다.    

 

 저녁 어스름이 되니 조금 더 쌀쌀해졌다. 저녁은 멤버들이 사적으로 자주 찾는다는 약수역의 금돼지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멤버들이 직접 트위터에 이곳에서 먹는 사진을 올려주기도 하고, 식당 오너의 인스타그램에 멤버들이 왔다 갔다는 흔적이 자주 업데이트되기도 해서 팬들 사이에선 이미 입소문이 난 맛집이었다. 역시나 A4 한 장이 넘는 웨이팅 리스트가 있어 이름을 올려두고 근처 전집에서 가벼운 1차를 진행했다. 한 시간 20분쯤 지나자 우리 차례가 되었다. 바로 식당으로 가 3층으로 안내받았다. 멤버들이 온다면 3층에 자리를 잡는다고 했는데. 저기쯤 앉아서 돼지고기를 구우며 서로 속에 있는 얘기들을 꺼내곤 했을까.      


 “최근에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언제 왔어요?”

 다 구워진 고기를 자르던 점원에게 M이 질문했다.

 “안 물어봐도 돼. 언제 왔다 간 지 내가 더 잘 알아.”

 그 질문을 가로채 내가 대답했다. 손님이 덕후인 티가 너무 많이 나거나 점원에게 멤버들에 대한 개인적인 질문을 하거나 이러면 나중에 멤버들이 편하게 오기 힘들 것 같아서 싹둑. 점원이 물러나자 M에게 얼른 소맥 한 잔을 건넸다. 몇 년 만에 만나는 M과는 이제야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눈다. 소고기보다 더 부드러운 돼지고기라며 M과 신이 나서 과식하고 과음했다. 이런 곳이기에 긴 해외 투어 일정이 끝나면 버선발로 달려오곤 하는 곳이구나, 멤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적당한 선에서 자리를 마무리하고 숙소에 돌아와 맥주 한 잔씩을 더 나눈 뒤 M이 집으로 돌아갔다. 깔깔거리며 웃던 동행이 없어지니 고요가 찾아 왔다. 침대에 누워 오늘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넘겨 봤다. 사진에 찍힌 나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멤버들이 여기를 다녀갔지, 이걸 봤지, 이걸 먹었지, 그걸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M과 메시지를 보내며 다음 달엔 정국이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와 졸업할 때 갔던 중국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석진의 형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일정을 약속했다.     


 서울살이. 엄마한테 용돈 받기가 미안해 영화관이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학교 수업을 듣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면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져 가끔 보고 싶은 전시회를 다녀오는 것 말고는 학교와 아르바이트 장소, 집만 오고 다녔다. 그걸 핑계 삼아 현실적인 문제에서 도피했다. 용돈 벌기 바빠서 서울에서 뭘 할 수가 없었다고. 현실 도피.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 서울 생활을 포기한 게 아니라 사실은 그냥 다 피하고 싶었던 거다. 실은 난 아무것도 안 한 거였다.      


 오랜만에 웃고 떠들며 바쁘게 보낸 늦은 밤, 호텔 방 창문 밖으로 삼성역 사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도로에 가로등 빛이 환하게 내려앉아 있다. 그 뜻 모를 미련 때문에 늘 외면하고 말았던 서울을 오롯하게 응시한다. 입사 7년 차에 돌입한 회사에선 나름의 업무를 해내고 있고, 월세 걱정없이 고스란히 나를 위해 월급을 쓰고 있고, 이 호텔의 가장 높은 층인 22층의 방에서 저 멀리 한강을 조망하고 있다. 고향으로 ‘다운그레이드’하지 않고 ‘업그레이드’해 여기 서 있다.      


 살 수도 있었던 곳. 미련이 남은 서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각하니 나 괜찮게 살아온 것 같다. 게다가 방탄소년단을 위해 한달음에 서울을 찾은 멋진 덕후잖아 지금 나는. 정국이가 좋아한다는 블랑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내일의 일정을 생각했다. 내일은 호석이가 맛있게 먹었던 자몽타르트를 파는 합정의 카페에 가야지. 이태원 라인프렌즈에 다시 들러 BT21 상품들을 추가로 좀 더 구입해야지. DNA 자켓 촬영을 했던 피자 가게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니 내일은 몇 시에 일어나야 하나.     


 의미의 전복이 일어난 서울의 밤이 눅진하게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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