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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an 27. 2019

4. 경제력과 덕질의 상관관계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4


 중학교 때의 나는 전교에서 유명한 지오디 팬이었다. 두꺼운 매직으로 지오디 오빠들(수식어는 지금도 여전히 오빠들이다. 당시엔 친구들이 이름을 그냥 부르면 ‘너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사람인데 함부로 이름만 부르면 좋겠어?’하고 따지고 들었었다. 실로 대단한 사춘기였다)의 이름을 문신처럼 새긴 체육복을 교복 대신 입고 다녔고 오빠들의 얼굴이 두서없이 붙은 필통은 하드보드지를 직접 잘라 만든 것으로 항상 성화 봉송하듯 들고 다녔다. 오빠들의 얼굴을 담은 동그란 뱃지는 환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책가방에 달고 다녔고, 실내화며 교과서며 사물함엔 모두 지오디와 관련된 것들이 붙어있거나 쓰여있었다. 사실 기물 파손에 가깝지만 책상에 지오디 이름을 크게 파놓고 화이트 수정펜으로 여기저기 낙서를 해놓기도 했다. 전학 온 친구에게 ‘너 지오디 좋아해?’라고 눈을 반짝이며 묻는 것도 나였다.


 다른 가수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각각 다른 잡지를 사와 각자의 오빠들의 화보를 나누는 것은 한 달에 한 번있는 중요한 이벤트였다. 그렇게 자른 화보를 책상 위에 고이 올려두고 자리를 비웠는데, 대청소 시간에 반 남자 아이들이 장난을 친다고 그 종이를 창 밖으로 던져버린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특별히 나를 불러 시킨 심부름이라 뿌듯한 마음으로 반에 돌아왔더니 남자 아이들이 너네 오빠 밖에 떨어졌다 라는 것이다. 묵직한 무엇이 발등으로 툭 떨어진 느낌을 처음으로 느끼며 내 몸에 심장이라는 장기가 어디쯤 존재하는 지 처음으로 인지했다. 창 밖 화단으로 우리 오빠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만으로 오빠에게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던, 아마 그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단순한 장난으로 여겼던 아이들은 세상이 무너져라 통곡을 하는 나를 보고 엄청 당황해했었다. 장난을 주도했던 몇몇이 식겁한 얼굴로 뛰어 나가 떨어진 화보를 주워왔지만 나는 하굣길 내내 울음을 그치지 못 했다. 반 친구들이 지오디란 이름으로 내게 장난을 치지 않게 된 것도, 진심으로 나를 리스펙한 것도 그 쯤이었다.


 숨길 수 없는 덕후 유전자가 발현된 것이다. 퐁-하고.

 무튼 각설하고.


 내가 장래희망란에 기자란 이름을 써놓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나같이 평범한 애가 오빠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내가 연예부 기자가 된다면 만날 가능성이 적어도 1%는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게다가 오빠들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써줄 수 있는 힘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그맘때 나는 학원에도 다니지 않아 덕질할 시간이 아주 많았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는 핑계로 엄마를 졸라 PC통신이 가능한 컴퓨터도 샀다. 시간도 있고 무기도 생긴 열다섯의 어린 덕질엔 거칠 것이 없었다. 딱 하나, 가난한 주머니 사정만 빼고.


 “엄마 있지…”

 “왜 또! 용돈 필요해?”

 몇 번이고 말을 골라 겨우 운을 뗐지만 역시나 엄마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가로로 길어진 눈쌀이 내 의중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게.. 팬클럽 모집을 한대잖아. 엄마 나 용돈, 만 오천원만 주면 안 될까? 가입비가 만 오천원이야”

 문제집을 산다던가 준비물이 필요한다던가 하는 불필요한 거짓말은 필요없었다. 바로 솔직하게 얘기했다. 곧 지오디 공식팬클럽인 팬지오디에 가입해야 하니 용돈이 필요하다고. 엄마는 내게 돈을 주며 이번 기말고사에 반에서 5등 안에 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다음의 지오디는 없다는 거였다. 단박에 약속했다.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급해서였다. 입금 마감일인 오늘, 얼른 은행에 가 무통장 입금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등수는 그 다음의 일이었지만 그 다음의 나는 어떻게든 성적을 유지했다. 그래야지만 다음 단계의 덕질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지오디를 매개로 한 딜(deal)에 익숙해져 있었다. 내 가능성을 내어주고 그에 상응하는 돈을 받아야 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앞으로 잘하겠다는 불확실한 가능성에 기대는 것 뿐이었다. 지오디와 성적. 말하자면 엄마와 나의 등가교환. 그런 거였다.


 팬클럽에 가입하는 것만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듣는 용도와 보관 용도를 구분해야 했기에 CD와 카세트테이프는 여러 장이 필요했고, 그 어린 감수성을 자극하는 팬픽(팬 픽션Fan Fiction의 준말) 제본은 구입 기간이 정해져 있었기에 작가 공지가 뜨면 입금 날짜만 기다렸다. 콘서트와 팬미팅은 항상 서울에서 열렸기 때문에 티켓 비용 뿐 아니라 차비와 식비가 추가로 들었고, 오빠들이 한 페이지라도 실린 연예잡지는 포스터까지 가져야만 했다. 오빠들이 모델로 광고를 찍은 과자는 우선 순위로 골랐고(네모난 종이곽에 든 과자는 일반 봉지 과자에 비해 훨씬 비싼 축에 속했다), 학교 근처 이름없는 교복집에서 한 치수 크게 맞춘 교복은 오빠들이 광고하는 브랜드 교복으로 바꿔야만 했다(안 그래도 다른 애들에 비해 어정쩡한 오버핏으로 맞춘 교복은 늘 눈엣가시였다). 최종 보스는 방송국 스튜디오 현장이나 공연을 몰래 녹화해 찍어 판매하는 VHS 비디오 테이프 세트였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그랬다. 그건 오빠들의 숨겨진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달콤함으로 쉬이 변질되었다. 이 모든 행위는 단순히 구매만을 위한 충동이 아니었다. 오빠들과 항상 닿아 있고 싶던 거국적인 마음의 발현이었던 거다.


 엄마한테 용돈을 받는 건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나는 거짓말을 잘 못했고 엄마는 지오디를 위해 돈 쓰는 나를 못 마땅해했다. 성적이 올라도 그랬다. 그 사이 사고 싶었던 굿즈의 입금 기간은 속절없이 끝나버렸고, 가지 못한 방송국 음악방송 후기는 늘 성대했다. 그 후기 속 팬들은 항상 오빠들과 교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갔으면 내가 경험했을, 내가 샀으면 내가 간직했을 그 모든 순간들. 이런 좌절의 경험들의 축적은 어른이 되고 싶게 만들었다. 엄마한테 앓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계좌번호를 받아 적어 놓고 몇 번이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종이를 구겨 버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어른.


 내 시간은 적당히 방향을 헤매며 흘렀다. 글쎄. 나이가 큰 짐처럼 여겨진 건 언제부터 였을까.


 너무 늦어버린 것 같고,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고, 모은 건 더 없는 것 같고, 남들보다 한참 늦어버린 것 같아진 게. 이 익숙해지지 않은 나이로 대체 언제 돌입해버린 것일까. 내 나이로 발음되는 세 글자가 누구보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 세 글자를 상기하면 어디에서부턴가 묵직한 게 차고 올라와 가끔 숨 쉬기 버거워진 건 몇 년 째지. 누가 봐도 어른인 얼굴로 어른인 나이가 되었지만, 어른? 생각보다 시시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멋지지 않고 찌질하고 찌든, 고작 그 언저리에서 머무는 미성숙한 인간일 뿐이었다.


 어쩐지 차 앞유리에 새똥이 떨어지더라니. 부장님한테 착실히 깨졌다. 보고서는 한참 전에 결재 라인을 모두 다 탔는데 그 내용을 물어본 사장님의 질문에 부장님이 대답을 잘 못하셨나보다. 것도 간부회의 자리에서. 이럴땐 만만한 실무자가 타겟이다. 그때 왜 한번 더 설명하지 않았냐며 내 탓을 하는 말에 '자신의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상사가 과연 있긴 한 걸까’ '나는 그런 어른이 되긴 한 걸까’ 시덥잖은 생각을 하고 서 있었는데 부장님께 당장 임원실로 방문하라는 사장님의 호출이 떨어졌다. 부랴부랴 자료를 챙겨 떠나는 부장님의 멀어진 뒷모습을 확인한 후 그제서야 멀뚱히 서 있던 몸을 내 자리에 앉혔다. 부장님을 흉보는 메시지들이 오기 시작하지만 일부러 보지 못한 척 하며 뜻없이 마우스 커서를 움직이다 띠링- 울린 핸드폰의 알람을 확인했다. 유튜브 프리미엄으로 방탄소년단 2017년 윙즈 투어를 다룬 <번 더 스테이지>가 공개된다는 내용이었다. 유튜브 프리미엄은 진작에 가입해두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쌓인 메시지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이런 거 뭐 하루 이틀인가’ ‘애들 영상 올라 와서 기분 좋아졌어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나는 두 가지 의미로서 늦덕이다. 방탄소년단이 데뷔한 지 4년차가 되어서야 덕질을 시작했단 의미에서의 늦덕, 멤버 중 제일 맏형인 석진이보다도 n살이 더 많다는 의미에서의 늦덕이다. 첫 번째 의미로서의 늦음은 지금도 여전히 후회 중이다. 어린 나이와 앳된 외모 덕에 방탄손주단으로 불렸던 그 시절부터 덕질을 했으면 내 일상은 좀 더 의미를 많이 가졌을 테니. 처음 보는 영상을 발견하거나 초창기의 모습에 대해 서로 공감하는 멤버들과 팬들의 낯선 이야기들을 듣거나 하면 그렇게 아쉽고 서러울 수가 없다. 그 시간이 아까워 어쩔 줄을 몰라서. 하지만 두 번째 의미로서의 늦음은 다행이다. 누구의 허락이 필요없는 내 선택의 주인이 된 나이의 덕질은 생각보다 훨씬 풍요로워졌기 때문이다. 저녁에 간단한 먹을거리를 준비해 자리 잡곤 회사에서 화풀이하듯 몰래 보던 <번 더 스테이지>의 다음 부분을 재생시켰다.


 넘치는 인기와 비례하게 방탄소년단을 소비하는 품목은 다양하다. 해외 여행 예능인 <본 보야지>나 자체 예능 <달려라 방탄>의 비하인드 영상은 별도의 결제를 진행해야만 관람이 가능하다. <번 더 스테이지>는 유튜브 프리미엄 공개 이후 영화로 개봉을 했고, 2018년 러브 유어셀프 투어를 다룬 <Love yourself in seoul>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멤버 각자가 참여한 bt21 캐릭터는 인형, 잠옷, 휴대폰 케이스 등 다양한 품목들이 되어 활짝 열릴 지갑을 기다리고 있다. 표지 디자인과 이미지를 달리한 여러 버전의 앨범과 전시회, 아미밤을 비롯한 공식 굿즈에 고퀄리티 홈마가 내놓는 슬로건 및 비공식 상품들까지. 콜라 병엔 멤버들의 얼굴이 하나씩 담겨 있고, 면세점과 차량, 은행에도 멤버들의 얼굴이 있다.


 그 때의 CD와 카세트 테이프, 교복, VHS 비디오 테이프에서 달라진 건 오직, 가입하겠습니까? 예, 이체하겠습니까? 예. 클릭하는 나 하나다. 1초의 클릭을 위해 엄마를 찾아가기 전에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할 필요가 없어진 나 하나. 엄마한테 허락맡지 않아도 되는 거. 그거 말곤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그 문장이 너무 크다. 늘 버겁고 속절없기만 했던 내 나이가 처음으로 고마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 나이의 발음을 기꺼워할 수 있게 된 이유. 기분전환으로 앨범을 사고 유료 영상을 무제한으로 보고 굿즈도 원하는 만큼 골라 담을 수 있다. 늦덕으로 기꺼이 소비할 수 있어 다행이다.


 ‘엄마, 나 잡지 살 용돈이 필요해’

 ‘그럼 이것 좀 도와. 도와야 줄게’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포기해야만 했던 등가 교환의 어린 학생은


 "보조배터리, 텀블러, 쿠션, 모니터 피규어, 충전 케이블, 모자, 양말, 풍선. 봉투값까지 다 포함해서 총 30만원입니다. 할부 필요하세요?"

 "할부 괜찮습니다. 근데 봉투는 어떤 게 있어요?"

 망이와 타타 중 고민 끝에 타타로 고른 뒤 신용카드 결제를 마친 어른 덕후가 되었다.


 내 나이를 사랑하는 데 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인정한다.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이 있습니까?”

 “네. 내 돈 벌어 내 새끼 덕질하니 진짜 좋네요”

 내 나이의 경제력이 내 지금의 덕질을 이롭게 한다.

 나이 정말 잘 들었다.



 P.S


 최근 팬카페에서 팬들과 채팅을 하던 정국이 빨래할 땐 좋은 향이 중요하다며 섬유유연제 다우니 어도러블을 추천했다. 이른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사려고 했더니 품절로 구경도 못 해봤다. 덕질엔 어린 체력도, 여문 경제력도 아닌 스피드가 생명이다.

 정작 추천한 정국이도 구경을 못 하게 만든 스피디한 아미의 화력에 찬사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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