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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an 27. 2019

5. Love yourself in Seoul 관람기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5


 모든 사람에게 청개구리 같은 모먼트가 있기 마련이다.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고 책상에 앉았는데 ‘얼른 공부해!’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면 책을 덮어버리고 싶다거나,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란 푯말이 붙어 있으면 괜히 한 번 밟아보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마음.


 나는 재작년까지 뚜벅이였다. 집에서 회사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게다가 붐비지도 않아 늘 앉을 수 있다)가 있고, 외근이 있으면 카카오 택시를 부르면 되니 운전의 필요성을 전혀 못 느꼈다. 같이 식사를 하러 나가게 되면 대부분 선배의 차를 타면 됐고, 퇴근 후나 주말이면 항상 집에만 있으니 운전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있는 약속은 보통 음주를 동반하기 때문에 차가 있으면 더 불편했고. 제일 막내인 주제에 선배들의 차를 늘 얻어만 타는 나를 못마땅 해 했던 모 상사는 그런 내게 늘 운전면허를 따라고 하루가 멀다 하고 독촉을 하곤 했는데, 나는 그럴수록 운전이 더 하기 싫었다. ‘아니, 운전을 꼭 해야만 하면 채용 요강에 면허증 필수라고 명시를 해놓던가.’ 재작년까진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내 청개구리 모먼트였다.


 작년에 면허를 딴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그냥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원대한 포부나 갑자기 두둑해진 경제사정이나 그런 것들이 아닌, 그냥 ‘있음 좋을 듯’ 해서였다. 그 마음은 어떤 주술보다 강렬했다. 바로 학원에 등록했고, 모든 시험을 한 번에 통과해 한 달만에 운전면허증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주민등록증 외에 신분증 하나 더 생긴 것. (아, 내게 운전을 하라고 늘 입에 달고 다녔던 상사는 회삿돈 횡령 혐의가 드러나 퇴사 처리되었다. 운전 독촉과 횡령 퇴사의 인과 관계는 없지만 어쨌든 하고 싶지 않은 걸 하라고 다그치는 사람치곤 좋은 사람이 없다는 나만의 결론이 나왔다.)


 운전을 하고 내 차가 생겼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모태 집순이(대학 방학 때 정확히 한 달간 집 밖에 나가지 않은 나만의 기록도 가지고 있다)가 차가 있다고 해서 갑자기 바깥으로 나도는 사람이 될 순 없었다. 나란 사람의 근본은 그대로였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더 집을 좋아하게 됐다.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는 시간,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서 내려서 집까지 걸어오는 시간이 생략될 수 있어서 퇴근하면 쏜살같이 집으로 향했다. 바야흐로 초집순이가 된 것이다. 3n살 먹고 밖에도 좀 다니고 사람도 좀 만나지 맨날 집에만 붙어 있냐는 엄마의 외침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내 신경을 자극해 밖으로 내돌리려는 심산이었나 본데 통할 사람한테나 해야지. "그러게 좀 나가면 좋은데” 하고 엄마의 리모컨을 빼앗곤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했다.


 그런 집순이의 엉덩이가 움직인 이유? 아주 당연했다. 운전면허를 딸 때처럼 사소하게. ‘그러고 싶어서’. 황금 같은 토요일, 출근하는 날과 똑같이 일어나 집 정리를 단숨에 끝나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오늘은 방탄소년단 <Love yourself in Seoul> 콘서트 실황을 담은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었다. 부스스 일어난 엄마가 놀란 눈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나 영화 보고 올게” 차키를 챙겨 영화관으로 향했다. ‘친구도 만나고 밥도 먹고 천천히 들어와’ 엄마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영화 시작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그렇게 흥했던 ‘보헤미안 랩소디'도 싱어롱 관에서 보질 않았었다. 여긴 덕후들의 성지인 용산도 영등포도 아니니 어색하게 비벼질까 봐. 하지만 방탄소년단 콘서트를 그냥 조용히 관람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데다 모든 노래를 입모양으로 따라 부를 바에야 진짜 부르고 싶어 질 것 같아 싱어롱 관으로 세 편을 이미 연달아 예매해 놓은 터였다. ‘엄마 나 방탄소년단 보러 온 거야. 아무튼 늦게 들어갈게’ 엄마한테 답장을 보내고 카페에 자리 잡았다. <Love yourself in Seoul> 영화 티켓을 든 학생들이 로비를 분주히 오간다. 싱어롱이 아닌 일반 회차 시간이 곧 다가오나 보다. 일찍 사고 쳤음 딸 뻘인 아이들이다. 좀 이따 상영관에 입장하면 저런 사람도 봐? 그러는 건 아니겠지?


 나 또 눈치 보려고 했다. 어차피 상영관을 나서면 모를 사람들이다. 티켓팅에 장렬히 실패해 가지 못 했던 콘서트를 이렇게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온전히 집중해서 봐야지. 방탄소년단 영상 좀 챙겨 보고 나니 금세 영화 시간이 다 되었다. 실제 콘서트장에 입장하듯 들뜬 기운이 가득한 사람들 뒤로 티켓을 검사받고 상영관으로 들어섰다. 떨린다. D열 8번. 평소 같았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앞자리지만 예매 전쟁통에 이 정도 자리가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 하는 자리. 덕질에 있어 '자의적 해석'은 '의미 부여'에 이어 가장 중요한 말이다. 하느님 석으로 불리는 고척돔 4층이나 잠실 주경기장 3층의 시야보단 이 큰 화면을 올려다보는 시야가 훨씬 낫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상영관에 어둠이 내렸다. 드디어 시작이다.


 콘서트 시작 전 상영되는 영상에 나 포함 모두가 꺄악 소리를 질렀다. 싱어롱 관의 매력이 이런 거구나. 금 벨트를 한 왕자님 슈트를 입은 7명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첫 곡은 <IDOL>. 스크린 X관의 3면을 가득 채운 무대를 보고 있으니 방탄소년단의 화려한 군무 디테일이 보인다. 단순히 팔을 내리는 게 아니라 어깨부터 손 끝까지 진동을 준다던지, 고개를 돌릴 때 그냥 휙 돌리는 게 아니라 방향에 리듬이 있다든지 하는 걸 눈동자를 바삐 움직여 눈에 담았다. 잘생긴 얼굴을 거대한 스크린으로 보니 입을 다물 수 없다. 이후 <Save me>와 <I’m Fine>,  <Magic Shop>으로 연달아 이어졌다. 잠실 주경기장을 가득 채 운 팬들의 떼창을 보며 흐뭇하게 짓는 멤버들의 미소는 이 싱어롱 관에 있는 모두에게 햇살처럼 내리쬐고 있었다. 눈부셨다.


 각자의 개성을 제대로 살린 솔로곡 무대는 어쩜 이렇게 멤버 별로 다른 강점을 가졌을까 순수하게 감탄하게 했다. 호석이는 <Just Dance> 무대에서 춤으로 날아다니고, 정국이는 면사포 같은 재킷을 입은 청초한 천사의 <Euphoria> 그 자체다. 유독 클로즈업 컷이 많은 듯한 석진이의 <Epiphany>는 가창뿐 아니라 얼굴도 100점이었고, 태형이의 <Singularity>는 미쳤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끼로 똘똘 뭉친 섹시함 그 자체였다. 움직임이 많지 않아도 음악으로 잠실을 꽉 채우는 남준이의 <Love>와 남는 박자가 없이 예술적 몸짓으로 온통 가득 찬 지민이의 <Serendipity>, 그리고 가히 내 ‘최애 곡’인 윤기의 <Seesaw>는 저음으로 읊조리듯 내내 나른하게 멋졌다. 방탄소년단의 팬을 일컫는 ‘아미(Army)’는 이 7명에 대한 애정이 고르다. 누구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함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다.


 콘서트 실황은 객석의 팬들 얼굴을 전부 블러 처리하면서 현장음을 죽이고, 멤버들의 멘트 부분을 모두 삭제해 온전히 공연만 관람하는 방식으로 편집돼 있었다. 이 상영관 하나를 통째로 빌려 가장 좋은 자리에 혼자 앉아 있다면 정말 온전히 나 하나만을 위해 공연을 진행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한 영상이다.


 각 개인 무대를 포함하여 팬들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노래들(I need U, RUN, DNA, 흥탄소년단, 진격의 방탄, 불타오르네, 뱁새, 쩔어)과 넋 놓고 볼 수밖에 없는 방탄소년단만의 무대(Airplane pt.2, Fake Love, 전하지 못한 진심, Tear, Mic Drop), 3곡의 앵콜곡(So What, Anpanman, Love yourself)과 함께 공연이 끝난다. 연결점을 모두 편집한, 무대만으로 가득 채운 영상이었지만 이 영상만으로도 두 시간이었다. 2분과도 같은 두 시간. 연습 영상의 엔딩 크레딧이 모두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나가지 못한다. Special Thanks To The Biggest Love, ARMY. 엔딩 크레딧 가장 마지막 문장은 역시 팬들에 대한 감사를 담았다. 검정 스크린 가운데의 흰 글씨가 짧게 반짝이다 사라졌다. 그 마지막까지 벅찬 마음으로 다 보고 나오는데 상영관 출구에서 어린 팬 둘이 개인적으로 준비한 듯한 ‘영원히 지민해’란 슬로건을 나눠 주고 있었다. 얼른 줄을 서 받았다. 사비를 털어서라도 이 애정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 우리, 같은, 팬이기에 알 수 있는 감정이다.

 

 2회 차 싱어롱은 본격적인 콘서트였다. 남준이가 ‘스탠드업’ 하면 모두가 진짜 일어났고, 호석이가 ‘에브리바디 스크림’ 하면 모두가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내 옆자리에 혼자 온 어린 팬은 공연 시작 전, 너무 떨리고 눈물이 날 것 같다며 내게 손을 잡아 달라고 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공연을 봤다. 내 앞자리에 앉은 어린 팬들은 본인들이 직접 준비해 온 멤버들 스티커와 엽서를 건네며 공연 재밌게 보라고 했다. 이 친구들이 앞자리에서 분위기를 제대로 돋궈서(환호성, 응원법, 노래 따라 부르기 모두 다 제대로였다) 두 배로 신이 났다. 이미 한 번 본 영상이기에 아까 보지 못 했던 표정이나 제스처, 사이드 무대를 눈으로 좇았다. 흥은 이미 두 배 이상이 되었다.  


 <Love yourself in Seoul>을 내내 같은 관에서 틀다 보니 싱어롱 3회 차에 들어선 상영관은 이미 열기로 후끈했다. 환기가 제대로 안 되는 곳이기에 점점 데워지나 보다. 밤늦게 끝나는 시간의 회차이기에 아까 본 2회 차보단 연령대가 조금 더 높아졌다. 그러고 보니 누가 보는지, 날 어떻게 볼지에 대한 생각은 처음 상영관에 들어서자마자 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덕질에 나이가 대수일쏘냐. 수식어가 필요 없게 뛰고, 따라 부르고, 즐기고, 환호하고, 넋을 놓고, 즐겼다. 석진이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걸 보고 “잘생겼다” 굵직하게 외친 목소리 하나에 모두가 공감해 마지않았던 3회 차 공연이었다. 그렇게 3회 차까지 보고 나니 입은 니트가 땀에 푹 절었다. 이다음 회차의 관람객들은 어리둥절한 열기를 처음부터 맞닥뜨릴 거다.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에서 곽부옥은 송명자에게 돌아가신 아버지 송송 회장을 화면으로라도 만나니 좋지 않냐고 묻는다. 그에 송명자는 ‘돌아가신 게 더 실감날 뿐이다’라고 답한다. 나도 그럴 것 같았다. 화면으로 신나게 보다가 정말 먼 곳에 있다는 게 실감 나서 허무해져버리는 걸 상상했다. 실제로 그 어렸던 날. 너무 설레고 행복하게 콘서트를 보고 나온 뒤 엄청난 허망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무너졌던 적이 있었다. 나를 향해 답하는 애정을 행복하게 만끽하고 공연장을 빠져나오는데 주위를 돌아보니 전부 나와 같은 표정이어서. 나만의 것이 영원히 될 수 없는, 그 믿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 손 쓸 새 없이 나를 헤집고 들어와 한동안 멍하니 보냈었다. 이때의 경험은 아직도 옅은 공포감으로 남아 내 덕질의 취약함을 곧잘 건드리곤 한다. 그래서 지금도 팬들끼리의 모임에 참석한다거나 정말 제대로 덕질하는 개인의 SNS는 잘 보지 못 한다. 덕질에 있어 가장 무서운 단어, ‘현타’가 올까 봐.


 잔뜩 ‘현타’ 올 걸 예상하면서도 <Love yourself in seoul>을 보러 온 거였다. 그럼에도, 내 것일 수 없는 애정을 확인함에도 계속 좋아해야지 하고. 그러나 완벽한 기우였다. 실제로 콘서트를 보고 나온 느낌이라며 아쉬워하는 관객들의 얼굴이 보기가 좋았다, 신기하게도. 적당한 공간 안에서 두 시간 동안 같이 뛰고 소리 지르고 춤춘 연대감 같은 것이 생긴 것 같았다, 놀랍게도. 이런 기분일 줄 몰랐다. 이 실황 영상을 보면서도 내내 좋기만 했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먼 존재처럼 느껴져 하염없이 울곤 했던 그때의 감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기뻐도 슬퍼도 곧잘 우는 내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성숙하게 농익는 과정을 함께 하진 못 했지만, 이토록 아름답게 성장해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는 멤버들이 마냥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기만 했다. 집에서 그냥 빈둥거렸을 이 6시간을 제대로 놀게 만들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런 기분일 줄 몰랐다. ‘현타’가 뭐야. 덕심 2만 퍼센트 충전했다.


 3회 차까지 보고 나니 밤늦은 시간이다. 차에 돌아와 앉아 바로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의 회차를 추가 예매했다. 퇴근해 집으로 곧장 향할 일이 아니다. 아까 제대로 따라 부르지 못해 아쉬웠던, 아직도 가사를 어설프게 알고 있는 노래를 재생시켰다. 걱정과 두려움은 다 내려놓고 응원봉 빛만 별처럼 가득할 행복한 어둠만 선물하고 싶다. 모든 화려함만을 줘도 부족하다. 다음 콘서트는 꼭 티켓팅에 성공해 직접 봐야지. 공연장 한 자리를 채워 멤버들이 ‘행복하다’고 느낄 순간에 하나의 역할을 해야지.


 아- 하루 알차게 보냈다.



 P.S


 1회 차 싱어롱 관람 전, 브이앱 플러스 채널 채팅방에 남준이가 들어와 아주 짤막한 채팅을 하고 나갔다. 곧 촬영에 들어간다는 남준이에게 팬들이 <Love yourself in seoul> 관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를 하니, 본인도 영화를 보고 싶지만 직접 가면 박제될 것 같으니 디비디로 보겠다는 답을 했다. 이 영상은 방탄소년단 멤버들보다 팬들이 훨씬 더 많이 볼 거다. 똑같은 영상을 보고 또 봐도 대체 질리질 않으니. 멤버들의 무의식적인 습관이나 표정 같은 건 팬들이 훨씬 더 많이 알 거다. 본인의 파트가 아니면 잘 모르곤 하는 곡들도 팬들은 전체를 외워 따라 부른다. 공연에서 부르지 않고 연습하지 않으면 잊힐 수록곡 역시 팬들이 더 많이 들어 자신만의 것으로 한참 전에 만들었을 거다.

 

 덕질 대상에 대해 덕질 대상보다 더 많이 아는 것. 덕후는 정말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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