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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Nov 06. 2019

36. Finally, love myself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36


 10월 25일 금요일 밤. 대부분의 사무실이 불이 꺼진 회사에 남아 일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몇 초에 한 번씩 한숨을 턱턱 쉬었을 시간이지만 콧노래가 나왔다. 일을 마무리하고 컴퓨터 전원을 끄고 사무실 불을 끄고 주차장에 나오니 열한 시가 넘은 시간. 같이 남아 고생한 직원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방향을 틀었다. 말소리가 묻히지 않게 작게 틀어놓았던 음악 볼륨을 높였다. 공연 셋 리스트 그대로 정리해 둔 재생목록이다. 도로를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차 안에서 각 노래에 맞는 응원법을 쏟아내며, 발음이 씹히는 랩 가사 구간을 여러 번 곱씹으며 연습했다. 오늘 리허설을 마쳤을 멤버들과 같은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리는 덕후의 자세였다. 


 점심 식사를 포기하고 집에 들러 빨래와 청소, 짐 정리를 마쳐놓은 탓에 깨끗하게 정리된 집에 도착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그대로 와식 생활에 빠져드는 엄마를 대신해 여행을 떠나며 대용량 곰탕이나 카레를 끓여놓는 기분으로 미리 부산을 떨어놓았다. 아미밤(응원봉)과 건전지는 잘 챙겼는지, 지갑 안에 티켓은 잘 들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드디어 내일이다.


 이른 아침의 기차역. '들뜸을 숨길 수 없는 표정이다' 싶으면 투명 팩에 조심히 담은 티켓이나 엄마와 맞춰 신은 BT21 운동화가 보였고, '콘서트 가시는 복장이네' 싶으면 에펠탑을 배경으로 찍은 지민이 얼굴이 배경화면에 나타났다. 질 수 없지. 지난 시카고 콘서트에 산 태형이 키링을 점퍼 팔 부분의 고리에 끼웠다. '맞아요. 저도 방탄소년단 콘서트 보러 가는 사람이에요. 행복합니다.' 하는 징표였다. 


 주경기장이 있는 종합운동장역에 점심때 도착했음에도 메인 출구인 6, 7번 출구로 이어지는 통로가 이미 팬들로 빼곡했다. 좋은 게 있으면 나누고 싶은 마음은 덕질에 있어 최고조에 이른다. 자신이 인화해 온 사진이나 직접 만든 슬로건 등을 소소하게 나누어주거나 아예 부채나 슬로건 등을 몇 천 개 단위로 제작해 무료 배포하기도 한다. 나눔을 받기 위해 기다랗게 선 줄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다. 나도 몇몇의 줄에 껴 지민이와 윤기 부채를 받아 들었다. 지난 머스터 <매직샵>에 이어 <Speak yourself> 파이널도 완벽히 축제의 장이었다. 


 포토카드 랜덤 부스, 포토 스튜디오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이벤트 존과 스테이크 덮밥에서 추로스, 커피까지 다양한 라인업으로 준비된 F&B존은 오전 9시부터 열렸고, 공식 MD 상품은 사이렌 오더처럼 반경 2.5km 내에서 직접 주문한 뒤 수령할 수 있게 되어 품절로 구입하지 못했던 팬들이 일찌감치 공연장을 찾게 했다. 한 회당 5만 명에 가까운 팬들이 입장하기에 한꺼번에 몰리지 않게 하려는 넓은 동선을 따라 많은 걸음을 이동했다. 그마저도 공연장 틈새로 스며 나오는 리허설 노랫소리에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멤버들이 직접 써놓은 글귀들을 찍고, 멤버들 얼굴을 담은 배너와 사진을 찍고, 적당히 요깃거리를 챙겨 먹고 나니 입장 시간이 가까워졌다. 부쩍 차가워진 공기에 손바닥을 비비며 티켓을 확인받고 입장했다. 이 거대한 공연장에 사람이 빼곡하게 들어서는 모습이 타임랩스처럼 흘러간다. 티켓팅이 전쟁이 되면서 친구나 가족과 함께 두 세 자리를 연속으로 잡아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이 없다. 내 자리 하나만 있는 것도 감지덕지라서. 짙은 노을이 퍼지는 하늘을 감탄하며 바라보는데, 옆 자리에 앉은 팬과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혼자 보러 오셨어요?"


 마법 같은 이 첫 문장이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오면 다음은 순식간이다. 콘서트의 기대감이나 분위기를 나누고, 멤버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가지고 온 간식거리를 나누었다. 알고 보니 다른 지역 방송사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는 분으로 지난 슈퍼콘서트를 보러 광주에 방문한 적도 있단다. 퍽퍽한 일상을 이런 이벤트로 버티는 우리라는 비슷한 공감대. 하얗게 빛나던 아미밤의 불빛이 일순 꺼졌다. 까만 어둠이 내린 주경기장. 두웅. 오프닝을 알리는 음악과 함께 불꽃이 터졌다. 끼야아아아. 정제되지 않은 탁한 함성이 자동으로 나왔다. 


 조명에 반짝이는 슈트를 차려입은 <디오니소스Dionysus>와 <Not today>가 끝나고 2년 가까운 긴 투어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게 된 주경기장 무대에서 여러 복합적인, 그러나 벅찬 마음을 숨기지 않은 멤버들의 진솔한 인사가 이어졌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개인 무대. 의상을 갈아입을 시간을 위해 준비한 영상은 파일 콘서트만을 위해 새로 제작됐나 보다. 처음 보는 영상에 입이 떡. 지민이의 <Serendipity>는 더 영롱하고, 남준이의 <Love>는 더 짙어졌고 <쩔어>, <뱁새>, <불타오르네>로 이어지는 메들리에선 3층의 가파른 경사를 의식할 새 없이 신나게 뛰었다. 예상치 못한 <RUN> 무대는 주경기장을 메운 목소리를 한층 더 높게 했다. 


 '다시 RUN RUN RUN 넘어져도 괜찮아. 다시 RUN RUN RUN 좀 다쳐도 괜찮아'. 


 흑조를 연상시키듯 까만 롱 깃털 재킷을 입은 태형이와 성긴 니트를 헐렁하게 입은 윤기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정신없이 소리 지르고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니 어느새 앵콜. 마지막 곡 <소우주>가 시작됐다. 하늘엔 수백 개의 드론이 소우주 가사에 맞추어 모양을 변형했다. 태양계를 이루는 행성을 하나씩 만들었다가 이내 닫힌 문 모양의 방탄소년단의 로고로, 열린 문 모양의 아미 로고가 되었다. 멤버들이 이동 무대를 타고 움직이며 팬들에게 인사를 하는 뒤로, 성대한 불꽃놀이가 거행됐다. 멤버들이 무대에서 완벽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다시, 이 곳. 종합운동장역에 다다를수록 느껴지는 부산스러움이 좋다. 오늘도 출구를 빠져나와 줄을 서 나눔 부채를 받았다. 어제와 다른 디자인이다. 본인 인증을 거쳐 입장 팔찌를 받고, 어제 품절로 미처 못 산 MD 상품을 구매하고, 늦은 점심을 챙겨 먹고 나니 벌써 2만보를 넘게 걸었다.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 체력이 바닥나지 않게 앉을자리가 필요했다. 야구장과 맞닿은 티켓부스 옆, 네모나게 조경된 가로수가 잘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2년 전 여름, 휴가로 떠났던 파리의 팔레 루아얄 가든(Jardin du Palais Royal)이, 그 옆 카페 키츠네에서 마신 따뜻한 라떼 한 잔이 떠올랐다. 네모나게 조경된 가로수가 꼭 그때의 풍경 같아서였다. 대학생이 되면 다들 그러는 것처럼 으레 한 달 두 달씩 유럽 배낭여행도 다녀오고, 금요일 수업쯤 가볍게 째고 김포공항으로 향해 일본이며 중국이며 가까운 여행을 쉽게 다닐 줄 알았다. 학자금 대출 없이 엄마가 보내주는 등록금을 받는 것만으로도 부채감에 잔뜩 휩싸여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지며 용돈을 걱정하게 될 줄은, 그렇게 번 월급과 여행의 기회비용을 따지게 될 줄은, 그래도 남들처럼 경험 한 번은 해봐야지 싶어 최저비용으로 도쿄와 파리를 겨우 다녀온 것이 대학생 때의 유일한 경험이 될 줄 몰랐다. 


 차라리 아예 몰랐으면 좋았을 걸. 비행기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구름의 아름다운 허망을, 낯선 언어가 가득해 이방인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거리를 한 번 맛보고 나니 늘 목말라했다. 회사에 입사하고, 연차 휴가가 발생하는 2년 차가 되자마자 여권에 도망 마를 새 없이 여행을 다녔다. 지난달에 베를린을 다녀왔으면 다음 달엔 싱가포르를 가는 식이었다. 통장은 말라도 핸드폰 사진첩은 날로 부자가 되었다.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타타 백참을 끼고, 멤버 단체 이미지 피켓을 들고, 자신의 슬로건을 자랑하며 걷는 팬들을 둘러봤다. 


 여행의 설렘은 일부였다. 대체 누구를 향한 지 모를, 그때보다 더 나아진 상황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회사 말곤 아무것도 없는 일상에 대한 분풀이였고, 불안의 대체였다. 여행을 도구화했다. 그때 카페 키츠네를 왜 찾았던가.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해서, 사진 찍기 예뻐서였던가. 그때 그 자리에 앉아 무엇을 사유했던가. 아마 예쁜 사진 찍기 좋은 카페쯤을 검색하고 있었겠지. 팔레 루아얄 가든(Jardin du Palais Royal)의 가로수는 인생 사진을 찍기 위한 배경이었는데. 지금 보고 있는 주경기장 앞의 가로수는 온전한 애정을 표출하러 온 배경이다. 올해 나는 콘서트를 보기 위해 다녀온, 여행을 덤으로 했던 방콕과 시카고를 제외하면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일상에 방탄소년단이 깊숙이 들어오면서 나는 여행지를 검색하지 않게 되었다. 그걸 인식했다.


 파이널 콘서트를 위해 새롭게 찍은 영상과 새로 준비한 의상에 넋을 뺐던 어제와는 사정이 달랐다. 화려한 군무로 포문을 여는 첫 곡 <디오니소스Dionysus>의 전주가 시작되자마자 공연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어제 혹시 몰라 챙겼던 망원경은 호텔 방에 놓고 왔다. 멤버들의 얼굴이나 춤을 선명하게 감상하기 좋았지만 시야가 협소해진 탓에 무대 전체를 느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손의 무게감은 아미밤 하나로 충분했다. 앵콜 무대 때 윤기가 "오늘 텐션 되게 좋았다"며 "레전드 공연이 되지 않을까"라 말할 정도로 공연은 내내 들끓는 흥분으로 가득했다. 이동 무대를 타고 저 높은 곳에 있는 팬부터 눈 앞에서 열심히 손을 흔드는 팬들 모습을 눈에 담으려 펜스 앞으로 몸을 빼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멤버들을 향해 환호를 보냈다. 


 영국 정론지 <인디펜던트Independent>의 한 기자가 작년 <Love yourself> 런던 콘서트를 보고 난 뒤 별점 네 개 반을 준 적이 있었다. 기사의 첫 문장은 이랬다. '대규모 팝 가수 콘서트라면,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기에 턱과 심장이 떨어지는 순간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방탄소년단 콘서트에는 그런 순간이 여섯 번쯤 있다'. 충성도 높은 팬과 촘촘히 짜인 퍼포먼스, 일 분도 쉬지 않고 공연을 하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기사는 이렇게 끝맺음됐다. '다음 영국 방문 때 방탄소년단이 공연을 올릴 장소는 스타디움 급이 되지 않을까'라고. <Love yourself> 보다 크게 진화한 <Speak yourself>는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을 거쳐 이 곳 잠실 주경기장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그때 봤던 기자가 오늘의 콘서트를 평가하면 어떤 단어를 사용했을까. 


 여유 있게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밤. 온 힘을 다해 콘서트를 즐겨 이제야 허기가 몰리는지 작은 조명을 촘촘히 켠 포장마차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 음식을 사 먹고 있었다. 목소리가 안 나온다며 걸걸한 소리를 내뱉는 어떤 팬의 말에 공감 섞인 웃음이 나왔다. 호텔 근처에서 샤도네이 한 병을 사서 들어왔다. 이 무대가 마지막인 것처럼, 이 콘서트가 처음일 팬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모든 무대가 소중한 것처럼 최선을 다하는 방탄소년단의 팬으로 자축하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다.


 얼리버드로 예약해 둔 전시회를 보고, 석진이가 다녀간 라인프렌즈 지점을 가고, 평이 좋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아침에 운전을 해 출근을 해서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퇴근하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집순이가 없던 체력을 모두 끌어와 즐겼던 탓이다. 푹신한 호텔 침구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게 나를 꽉 잡아끌어내리는 듯했다. 아직 고작 아침 9신데. 내일도 콘서트가 있으니 점심은 룸서비스로 대신하고 그냥 하루 푹 쉬어버릴까 하는데, 방탄소년단 팝업스토어 <House of BTS>가 호텔에서 도보로 10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다. 


 콘서트가 열리는 기간에 맞춰 단기간 MD 상품을 살펴보고 구입할 수 있게 했던 지난 팝업스토어와 달리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물 전체를 일종의 방탄소년단 소우주로 만들어 놓은 서울 팝업스토어는 꼭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팝업스토어에서만 판매하는 한정 MD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IDOL>,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봄날> 등의 뮤직비디오를 재현해놓은 포토스폿으로 꾸며져 있어 하루 종일 있어도 질리지 않을 곳이다. 게다가 지난주에 멤버들이 직접 다녀가 팝업스토어 내에서 사진을 찍고 곳곳에 친필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손가락만 까딱이며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목적이 생긴 덕후의 몸은 이토록 가볍다.


 콘서트 기간에 맞춰 방문한 해외 팬들과 나처럼 작정하고 시간을 낸 국내 팬들이 합쳐져 팝업스토어 입장 줄은 골목골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대기줄의 가장 끝까지 찾아가기 위해 얕은 오르막길을 한참을 올랐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리지 않게 하기 위해 입장 제한을 두고 있어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가 걸릴 줄이야. 영상을 한참을 보다 보니 2시간, 줄이 좀 줄어 든다 싶으니 3시간, 팝업스토어 근처에 다다르니 2시간, 분홍색 건물의 방탄소년단 로고가 박힌 입구까지 오는 데에 1시간. 그렇게 8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친구에게 이 시간이면 비행기 타고 러시아를 넘어 헬싱키에 다다르고 있을 시간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방탄소년단이 아니었으면 이 기다림을 기꺼워할 수 있었을까. 피부색도 생김새도 다른 여러 국적의 팬들의 설렌 얼굴이, 함께 기다리고 있다는 동지애가 지루할 수 있었던 시간을 버티게 했다.


  <DNA>, <IDOL>, <MIC drop> 등 각 노래 콘셉트에 맞춘 MD 상품들이 디스플레이된 지하 1층에서 물품을 구입한 뒤 지상층으로 올라왔다. 다른 팬들에게 요청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서울 팝업스토어의 이름은 <House of BTS>. 팬들이 있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집'이라는 노래 <HOME>이 3층에 내내 흐르는 이유다. 늦은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그대로 뻗었다. 방탄소년단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하루를 또 살아냈다.


 콘서트 마지막 날이니만큼 이벤트 존에 후회 없이 참여하고 싶어 이른 아침 호텔을 나섰다.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거슬러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남들의 평범한 일상 사이를 여행하고 있다는 자각. 평일 출퇴근 시간의 런던과 뉴욕 지하철에서 느꼈던 그 기분이다. 일부러 보란 듯 멀리 여행했던 날들이 일순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 글이 사라진 하루에서 단어를 발굴해내는 느낌으로 감각 세포가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하루가 진짜 여행이구나, 싶다. 


 본인 인증 후 입장 팔찌를 받은 뒤 부랴부랴 이벤트 존 입장 게이트를 향하는데 벌써 줄이 한참이다. 아직 오전 9시도 되지 않았는데 이벤트 존에 입장하려는 줄이 저만치까지 있다. 어제 8시간을 기다려봐서였을까. 이쯤은 아무것도 아닌 생각으로 제일 뒷 줄에 섰다. 그리고 내 뒤로 그만큼의 줄이 금세 늘어났다. 2시간 정도의 기다림 끝에 포토카드 랜덤 부스에 다다랐다. 남준이 포토카드를 뽑아 들고 나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오늘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사진이라는 생각이 2시간의 기다림을 잊게 했다. 이렇게 내가 관대한 사람이었구나. 오늘도 낯선 나를 또 발견했다. 


 벌써 마지막 콘서트구나. 내일 오후면 회사에 출근해 업무 처리를 해야 하는데. 파이널 콘서트 날짜가 공개된 순간부터 이어졌던 그 모든 일정이 오늘로 마무리되는구나. 아직 공연이 채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순간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마지막 이동 무대가 돌 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자리니 오늘만큼은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후회 없기. 오늘 자주 상기하는 네 글자다. 드디어 파이널의 파이널, <Speak yourself>의 마지막 공연이 시작됐다. 노래는 크게 따라 부를수록 고조된다. 입모양으로 웅얼대며 따라 부를 땐 전혀 느낄 수 없는, 차원이 다른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모서리를 잠식당해 사랑이 된다는 남준이의 솔로곡 <LOVE>의 후렴을 누구보다 크게 따라 부르다가, 아미에게 보내는 전광판에 뜬 사랑의 메시지에 목이 메더니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위해 멤버들이 둘씩 나타나는 것을 보며 속절없이 울어버렸다. 늘 어딘가를 찌르는 타이밍이다. 


 웃고 우는 시간이 지나 어느새 마지막 멘트 시간이 되었다. 긴 투어가 끝나는 소회를 밝히는 멤버들의 인사. <Epiphany>를 부르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섭섭했다며 석진이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눈물을 참으려 애써 웃으며 말을 잇는데 <MIC drop>의 '마지막 인사야' 하는 자신의 파트가 갑자기 확 와 닿았다고 하면서 다시 울먹이는 소리가 났다. 긴 투어 내내 웃으며 분위기를 밝게 하는 데에 소임을 다 했던 석진이기에 그 진짜 마음이 느껴져 울컥. 항상 마무리를 도맡아 하는 남준의 소감 차례에 이미 울먹이고 있는 남준이의 빨간 눈에 울컥. 여러분 덕분에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음을 믿어달라며,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진짜 정말 사랑한다고 알아주라며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남준이를 보며 또 울컥. <소우주>의 멜로디도, 폭죽도, 드론 쇼도 제대로 못 보고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 아미를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며 그러니 여러분을 사랑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제발 자신들을 이용해달라'던 남준이의 말이 내내 맴돌았다. 콘서트 전날인 25일, 공항철도의 일일 이용객수가 32만 6386명을 넘어서며 하루 최대 수송실적을 경신했고, 주경기장 인근 3개 호텔의 28일 객실이 만실을 이뤘다. 한국 여행 성수기 기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10월 말 한국행 항공권 검색량이 급상승했고, 그중 20%가 콘서트가 열리는 기간 10월 26일에서 29일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았고, 알고 싶어 했고, 그랬기에 보다 나아진 사람들이다. 그 이상의 말과 이유가 필요 있을까.


 뭐라도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퇴근 후 일본어나 중국어 학원을 다녔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고, 두 달에 한 번 꼴로 해외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을 알고 난 뒤 내 조바심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자취를 감췄다. 정말 배움이 좋아서, 여행이 좋아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를 꾸짖지 않고, 부정하지 않게 됐다. 느긋하게 누워 방탄소년단 음악을 듣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퇴근 후 방탄소년단 영상을 찾아보는 게 얼마나 여유 있는 것인지, 방탄소년단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 이젠 안다. 


 방탄소년단과 관련된 직접적인 일들이 없어도 마찬가지다. 무언가에 안달 나는 일이 없어졌다. 피곤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안식을 취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내가 되었다. 방탄소년단 덕분에 얻은 결과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다면 그건 내가 건네고 싶다. 진정한 Love myself의 길은 이 곳에 있었다. 


 어제 마시다 만 와인을 마저 마신 뒤 푹 자고 일어났다. 숙소로 돌아와 배달음식을 시켜 술 한 잔씩을 했는지 멤버들이 식탁에 모여 앉아 찍은 사진이 새벽 새 올라와 있었다. <Love yourself> 투어의 시작엔 식당 한 층을 통째로 빌려 전 스태프들과 파이팅을 다졌었는데, <Speak yourself>의 파이널엔 멤버들끼리만 조촐하게 마무리했구나. 힘들었다는 말보단 좋았다는 말이 더 많이 나왔을 시간이었길 바라며 오후 출근을 위해 나흘간 풀어놓았던 짐을 꼼꼼하게 쌌다. 


 뉴질랜드에서 찍은 <본 보야지Von vayage>도 남았고, 노래의 다양한 해석을 선보일 연말 시상식 무대도 남았고, 무엇보다 열심히 작업 중이라는 다음 앨범과 다음 활동이 남았다. 재작년의 내가 오늘의 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듯 내년의 내가 전혀 상상되지 않는다. 아무렴, 지금처럼 행복하겠지. 두고두고 남을 이 글의 마침표를 이렇게 찍는다. 


 아, 나는 역시 방탄소년단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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