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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Apr 22. 2020

45. 방구석 방방콘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45


나는 평소에 보부상처럼 짐을 이고 지고 다닌다. 시간 날 때마다 읽으려고 들고 다니는 책이나 손 세정제, 텀블러와 다이어리는 물론 기본적으로 장지갑(역시 현금, 카드, 신분증 등으로 빼곡하다), 파우치, 충전기, 에어팟에 공기계 아이폰(MP3 대용이다), 차키까지 들고 다닌다. 짐을 차에다 좀 두고 항상 쓰는 것들이 아닌 것들은 집이나 사무실에 좀 놓고 다녀도 되련만 그게 잘 안 된다. 돌이켜보면 교복 입고 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책상 서랍이나 사물함에 책을 쌓아두지 않고 매일매일 무겁게 가방에 넣고 다녔다.


이 증상은 여행을 가면 더 심해진다. 보조배터리, 미니 가이드북, 필기구, 여분의 에코백(쇼핑할 때를 대비해 가지고 다닌다. 무척 유용하다) 등이 기존의 짐에 추가된다. 본질적으로 욕심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무게감 있는 가방에서 안정감을 느껴서일까. 어깨가 뻐근해 여행의 피로함이 두 배가 되어도 뭐 하나 뺄 수가 없다. 내게는 늘 무거운 가방이 함께였다. 언제 어디서든.


겨울옷을 정리하던 중 바르셀로나에서 사 온 작은 핸드백을 발견했다. '이 가격이면 무조건 사야만 해' 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골라든 가방이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 번을 제대로 들어보지 않은 채 저기 구석에 던져 놓았던 가방이다. 부득불 넣고 다녔던 짐도 좀 빼고 가방도 좀 써볼 겸 먼지를 털어냈다. 지갑, 파우치, 핸드폰, 충전기만 넣었는데도 가방이 꽉 찬다. 그래, 이렇게도 한 번 다녀보지 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보부상의 길을 걸어갈 줄 알았는데 단출한 가방도 꽤 편해 벌써 며칠째 유지 중에 있다. 유일한 단점은 다이어리를 챙겨 다니지 못해 일기가 자주 밀리는 것 하나였다.


모처럼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쳤다. 벌써 일주일이 넘게 일기를 쓰지 못했다. 지난주 월요일에 내가 뭘 했더라. 꽤 괜찮은 빵집을 알아내 회사 선배랑 같이 샌드위치를 먹었던 게 월요일이었던가, 화요일이었던가. 고작 일주일 전 일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첫 글자를 떼기도 전에 핸드폰을 켰다. 사진첩을 열어 스크롤을 한참 올렸다. 찾았다. 빵집 쇼트 케이스를 찍은 사진의 날짜를 확인하니 지난주 화요일이다. 월요일엔 회사에서 꽤 멀리 떨어진 센터에 외근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주차장이 만석이라 근처 길가에 주차하고 위치를 기억하려 찍은 사진 덕에 생각났다. 사진첩을 그대로 켜 둔 채 각 요일에 맞춰 주요 키워드를 기록해 나갔다.


기억은 생각보다 생명력이 짧고, 쉽게 왜곡된다. 사진을 찍고, SNS에 집착하는 일은 어쩌면 시간을 붙잡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지 모른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을 순 없지만, 기록은 할 수 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지난 덕질 역시.


데뷔 때부터 꾸준히 커 온 방탄소년단을 내내 좇지 못한 덕에 2014년 2천 석 규모의 악스홀에서 열린 첫 콘서트 <레드 불렛 Red bullet>이나, 이름 그대로 가장 아름다웠던 청춘 <화양연화 on stage(화온스)> 콘서트나, 성공의 척도라 할 수 있는 체조경기장에 입성한 <화양연화 Epiloge(화에필)> 콘서트와 고척돔도 작게 느껴질 정도로 커진 팬덤을 실감하게 하는 <윙즈 Wings> 콘서트는 전부 직접 관람하지 못한 아쉬움이 늘 남아 있다. 무대에 늘 진심이었던 방탄소년단을 더 먼저 알았다면, 그 서사를 실시간으로 함께 쌓아 왔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고. 이 모든 콘서트는 DVD로 발매되었으나 모두 절판되었다.


지금이 아니면 못 살 것 같은 느낌에 콘서트 MD며, BT21 상품에 콜라보 제품들은 그 즉시 바로 구입하는 편이었는데, 그렇게 구입한 후에 대부분 그~대로 서랍행인 경우가 많아 이제는 더 이상 굿즈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절판된 DVD는 도무지 포기할 수가 없다. DVD엔 그들의 지난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지나가는 시간 자체를 붙잡을 순 없지만 기록된 시간은 살 수 있다. 오늘도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중고 거래 사이트와 덕후들이 모인 장터에 들러 DVD 판매글을 찾는다.  


적당한 가격의 화에필 블루레이 DVD와 윙즈 DVD, 2017 메모리즈(윙즈 파이널 콘서트 영상 포함)를 그렇게 구했다. 화온스의 경우 거래 가격이 거의 20만 원 가까이 치솟아 있는데 그마저도 판매글이 올라오면 순식간에 팔리는 터라 아직도 구하지 못했다. 새로고침 한 중고 사이트엔 어제 이미 확인한 글이 가장 최신 글이다. 타이밍 좋게 판매글을 발견하면 좋겠다. 중고 사이트 창을 아래로 내려놓고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BTS_official


방에서 즐기는 방탄소년단 콘서트

방.방.콘

Coming Soon!

#방방콘 #방에서즐기는방탄소년단콘서트



당초 예정대로였다면 4월 10일은 퇴근을 한 뒤 <Map of the Soul> 서울 첫 콘서트를 보러 갈 준비를 할, 가장 설렜을 금요일이었으나 콘서트 취소가 확정되고 콘서트 티켓 값 환불까지 이미 받은 지금은 가장 헛헛한 금요일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콘서트가 없는 내일이 싫지 않게 이 밤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예상치 못한 트위터 알람이 왔다.



4월 18일

1부 2015 BTS LIVE <화양연화 On Stage(화온스)>

2부 2016 BTS LIVE <화양연화 On Stage : Epilogue(화에필)>

3부 BTS 2014 LIVE TRILOGY : EPISODE 2 The RED BULLET(2014 메모리즈)

4부 BTS 3rd MUSTER <ARMY.ZIP+>


4월 19일

1부 2017 BTS LIVE TRILOGY : EPISODE 3 The Wings tour in seoul

2부 2017 BTS LIVE TRILOGY : EPISODE 3 The Wings tour the Final(2017 메모리즈)

3부 BTS 4th MUSTER <Happy ever after>

4부 BTS World tour 'Love yourself' Seoul

 


<Map of the Soul> 서울 콘서트 3, 4회 차가 개최됐을 4월 18일과 19일에 총 여덟 개의 공연을 순서대로 무료 중계한다는 내용이었다. 공연 하나에 세 시간씩 잡으면 하루 12시간씩, 그것도 이틀간 내리 공연을 볼 수 있단 거다. 내내 중고 DVD를 찾아 헤매던 그 화온스에 그 레드 불렛 공연도 포함이다. 게다가 아미밤을 블루투스로 연동하여 실제 콘서트장에 있는 것처럼 활용할 수도 있단다. 공지를 확인하자마자 날짜에 맞춰 집에서 멀지 않은 호텔을 예약했다. 생활감이 잔뜩 묻은 집에서 벗어나 제대로 각 잡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1박 할 간단한 짐만 챙기면 되는데 눈이 빨리 떠졌다. 블루투스 페어링으로 콘서트 분위기 제대로 내 줄 아미밤과 와인도 두 병에 와인잔도 가져오고, 잠옷과 노트북, 충전기와 화장품, 방방콘 보며 메모할 필기구 등을 챙겼더니 짐가방이 세 개가 나왔다. 결국 다시 보부상으로 돌아왔구나 싶다. 체크아웃할 때까지 거의 20시간을 내내 호텔에만 있을 예정이라 호텔 가는 길에 먹을 것도 충분히 샀다. 이젠 정말 방방콘을 즐기는 일만 남았다.


노트북을 켜 방탄소년단 공식 유튜브 채널에 접속했다. 실시간 세 글자가 반짝이는 최신 영상을 선택했다. 방방콘이 시작됐다.


<House of Cards>로 시작된 화온스는 <잡아줘>, <Converse High> 등 그 당시 수록곡들로 꽉 차 있어 단박에 다들 왜 그렇게 "화온스, 화온스" 하는지 알겠는 기분이었다. 밴드 세션 음악에 완벽한 라이브, 핸드볼 경기장을 휘젓는 군무에 팬들과 호흡하는 퍼포먼스까지. 붙잡을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서글픔보단 그 당시의 반짝반짝 빛나던 멤버들의 화양연화를 즐겁게 감상하며 열심히 따라 불렀다. 챙겨 온 샴페인을 절반쯤 마시니 벌써 콘서트 중반에 다다랐다. 돌출 무대 가운데 <RUN> 뮤직비디오가 생각나나는 컨테이너가 솟아 올라왔고 그 위에 멤버들이 걸터앉았다. 이어진 곡은 <이사>였다.


상업적이란 집으로 이사 간 대가는 욕 바가지 돈 따라기 라며 날 향한 손가락질

이처럼 이사는 내게 참 많은 걸 남겼지 그게 좋든 싫든 내 삶 속에서 많은 걸 바꿨지

내 삶은 월세 나도 매달려 알아 내 자존심은 보증금 다 건 채 하루를 살아 uh

그래서 다시 이사 가려고 해 아이돌에서 한 단계 위로 꿈이 잡히려 해

이번 이사의 손 없는 날은 언제일까 빠른 시일이면 좋겠다


연습생 때부터 데뷔 초창기를 지낸 논현동의 좁은 숙소를 떠나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한 과정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얹어 만든 노래에 나는 속절없이 울고 말았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감보다 과거 회상의 아득함이 강한 노래라 평소에도 울컥하는 노랜데 와인까지 들어가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사>는 화온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렸기에 이 곳에서 함께 부른 팬들이 너무나 부러운 순간이었다. <힙합 성애자>, <2학년>, <Skool luv affair> 등 신나는 노래로 이어지며 화온스는 계속되었다. 울다 웃다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 불렀다 말없이 감상하다 그랬다. 이제 고작 첫 콘이고, 이렇게 오늘만 세 개의 공연을 더 봐야 하는데 벌써부터 이러지 말자 하면서도 앙코르곡 <Ma city>에 흥분을 자제하지 못했다.


공연이 끝나면 일정 시간의 인터미션이 있었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먹은 용기를 좀 정리했다. 입고 있던 옷도 편안하게 잠옷으로 바로 갈아입었다. 꿈이라 여겼던 체조경기장에 입성한 화에필이고, 특히 앙코르 무대를 하던 중 부모님을 발견한 윤기가 바닥에 엎드려 통곡한 공연이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도 했다. 몇 편의 뮤직비디오 상영이 끝난 뒤 화에필 오프닝이 시작됐다. 시간이 또 순삭 될 거다.


샴페인의 나머지 반이 모두 사라졌다. 화온스의 앙코르 공연 격인 화에필이지만 셋 리스트를 전체 정리해 완전히 다른 공연이었다. <What am I to you>, <Cypher pt.3 Killer>, <If I ruled the world> 등의 노래가 새로 추가됐다. 지금이면 첫 음이 흐르자마자 바로 "김남준 김석진..."으로 이어지는 팬 챈트가 자동으로 나오는 <Save me>지만 이 콘서트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터라 공연장에 모인 모두가 예상치 못한 기쁨으로 가득한 함성만을 질렀다. 지나고 나서 보니 이런 재미도 있다.


<뱁새>는 정말 공연 곡이다. 힘이 넘치는 무대를 보며 그 더웠던 작년 4월의 방콕 라차망칼라 경기장으로 타임워프 했다. 늘 화면으로만 보다가 드디어 처음으로 직접 콘서트를 보기 위해 날아간 방콕이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공연을 보기만 하는 팬들조차 더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격해지는 방탄소년단의 텐션에 전율이 일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이 모습을 기억하자고, 이 본질을 늘 생각하자고, 이 덕질 절대 후회하지 말자고 생각했었다. 화에필 <뱁새>도 똑같았구나, 그런 생각만 했다.


 <뱁새>에 이어 센 노래들이 연달아 이어진다. 무대에 선 사람들의 체력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쥐어짜는 셋 리스트. 공연을 하는 사람보다 공연을 보는 사람을 위해 선택한 정공법. 정말 방탄소년단답다.


콘서트를 직접 봐도, 혹은 이렇게 영상으로 봐도 늘 과정은 똑같다. 그냥 순식간에, 정신없이 지난다. 10분쯤 지난 것 같으면 30분쯤 지나있고, 1시간쯤 지난 것 같은데 공연 막바지다. 화에필 타이틀을 새긴 흰 셔츠를 입고 앙코르 무대에 선 멤버들. 넓은 체조 경기장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무대를 즐긴다. 조명에 눈이 부셔 손으로 그늘을 만든 윤기가 저만치서부터 걸어온다. 부모님이 계실 구역을 내내 바라보다가 드디어 발견했는지 그 자리에서 멈춰서 큰 절을 올린다. 그리고 그대로 일어나지 못한 채 등 전체를 들썩이며 운다.


화온스에서 부른 <이사>의 여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는데. 배달 오토바이를 몰다 어깨가 부서진 사고를 겪으면서도 포기 못했던 꿈, 고작 선택한 게 아이돌이냐며 받았던 손가락질, 부모님의 고생, 자신이 늘 꿈으로 여겼던 체조경기장에서의 콘서트, 전석 매진이란 결과,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있을 가족들, 지나온 길에 대한 고생과, 목표를 이룬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격,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이 윤기의 등에 얹어있을 것이다. 겨우 추스르고 일어나는 윤기의 얼굴엔 눈물이 범벅이었다.


나만치 해 봤다면 돌을 던져


<We are bulletproof pt.2> 지민의 가사가 입 안에 웅얼대며 남는다.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얼굴들로 팬들을 향해 크게 인사한다. 아, 또 이렇게 화에필이 끝났다. 머스터 매직샵 서울 공연을 체조 경기장에서 했던 것처럼 체조 경기장에서 콘서트를 다시 개최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현재 실시간 방방콘을 보고 있는 동시 접속자 수가 200만 명이다. 잠실 주경기장의 포도알도 한참 부족하다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리는 것만 같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공연은 2014년에 있었던 레드 불렛 콘서트다. 벌써 6년이 지났지만 돌이켜보기 어색하고 부족한 것 하나 부끄러운 것 하나 없다고, 오히려 그때의 우리를 다시 한번 봐 달라는 패기가 느껴지는 순서다. 언제든 무대에 진심이었고, 언제든 최선을 다 했고, 그리고 항상 잘해 왔으니까. 전 세계를 돌며 스타디움 투어를 하는 지금과 하나 다를 것 없으니 지금 보여줘도 충분하다는 이 자존심. 새 와인을 꺼내 왔다. 취기가 돌지만 이 자부심을 기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멤버들이 전량 폐기를 요청한 레드 불렛 콘서트는 악스홀을 가득 채 운 팬들의 일당백 떼창이 최고였다. "A-yo. 여러분 내가 누구? 더 크게 누구?" 하는 힙합전사 지민이의 외침 덕에 다시 한번 크게 웃은 건 이 콘서트의 아주 일부분이었다. 싸이퍼 한 글자를 놓치지 않고 따라 부르고, 히든 트랙 <길>을 콘서트에 참석한 모두가 한 목소리로 부른다. 데뷔부터 함께 해 온 '찐팬'의 모먼트란 이런 것인가.


리스펙이 뭔데?

몰라서 묻는 거야 인마


남준에게 리스펙을 묻던 윤기에게 "이 목소리를 들어 봐" 하고 싶다. 이럴 때 '리스펙 한다' 하는 거라고. 태형이가 방탄소년단에 꼭 들어가고 싶다 생각했던 노래 <팔도강산>으로 방탄소년단의 첫 콘서트 레드 불렛은 막을 내렸다. 무대가 작고 크든, 방탄소년단은 언제나 잘했다 정말.


저녁을 마저 챙겨 먹었다. 공연을 내리 세 번 연속해서 보니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깨가 뻐근하다. 아미밤은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다. 졸린 눈을 비비며 3기 머스터 아미집의 <알아요>, <Tony Montana>, <방탄 유소년단> 유닛 무대까지 챙겨보다가 푹신한 호텔 침구와 취기에 그만 사르르 눈이 감겼다. <둘셋>이 자장가처럼 소리를 줄여 귓가를 맴돌았다.


낯선 곳에서 숙면을 취하는 일이란 방탄소년단 덕질을 적당히 하는 일과 같다. 내게 불가능에 가깝단 뜻이다. 나는 여행지에서 묵은 최고급 호텔에서도 완벽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아미집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잠든 게 무색할 정도로 어두운 새벽에 깨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방이 건조해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는데 일기예보대로 정말 비가 오려나보다. 공기 냄새에 물기가 스며 있었다. 간밤에 올라온 트윗 글이나 커뮤니티 글을 읽으며 두 시간을 보내다가 까무룩 잠에 들었고 다시 일곱 시에 일어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준비하고 체크아웃을 하자 싶었다. 어차피 집은 지척에 있고, 짐은 차에 넣어두면 되니 홀가분한 몸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짐을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어제 공연을 보며 메모를 한 노트를 챙겼다. 마음은 급하고 취기가 돌아 글씨는 괴발개발이지만 날 것의 감정이 즉흥적으로 녹아 있다. 차를 몰아 가까운 카페에 도착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옆에 두고 노트북을 켰다. 노트 속 몇 단어와 말을 골라내면 금세 문장이 여럿 만들어질 것 같아 우선 이 곳으로 왔다.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일요일 아침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마스크를 쓴 엄마와 아이들이 쟁반에 놓인 음료와 빵을 들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몇 개의 문장을 쓰고 나니 벌써 열 한시다. 집에 가는 길에 히츠마부시를 포장해 가려고 전화 주문을 한 뒤 차에 시동을 걸었다. 회 뿌연 하늘에선 굵은 빗방울을 쏟아내고 있었다.


오늘 방방콘은 2017년 윙즈, 윙즈 파이널 콘서트와 4기 머스터, 그리고 러브 유어셀프(럽셀콘)가 중계 예정이었다. 오늘 공연들은 모두 DVD로 많이 돌려본 터라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특히 럽셀콘은 실제로 직접 관람한 콘서트인 데다 영화관에서 열 번을 넘게 본 콘서트다. 오늘은 공연을 쫓기듯 보지 말고 배경음악처럼 만들어 일상에 녹아내듯이 즐겨야겠다. 식당에 들러 이미 포장된 음식을 찾아 집에 도착했다. 방방콘 시작 10분 전이었다.


윙즈콘은 멤버 전원의 솔로곡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콘서트였다. <Begin>, <Lie>, <First Love>, <Reflection>, <Stigma>, <MAMA>, <Awake>. 솔로곡은 단체곡에서 선보일 수 없는 각자의 매력을 극대화하면서 다른 멤버들이 다른 공연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시간을 벌게 한다. 단체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느라 VCR을 오래 틀어야 하거나 긴 멘트로 시간을 끄는 시간들이 줄어 공연 짜임새가 훨씬 탄탄해졌다. 해가 지날수록 무대 장치며 효과들에 공을 들인 티가 났다. 가성비란 방탄소년단 콘서트에서 없는 단어다.


만약 지금의 콘서트 중 딱 하나를 선택해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윙파콘을 꼽겠다. 어떤 이의 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선곡에, 완벽한 서사가 함께한 콘서트라서. 중소 기획사에서 자신들이 직접 만든 노래, 그것도 힙합이란 장르를 들고 나온 방탄소년단은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됐다. 감히 힙합을 해서, 작은 회사라 만만해서, 잘하니 질투 나서. 타당한 이유 따위 존재하지 않은 채 악의를 받아야 했던 시간들은 방송해서 죄송하다고(<Cypher 4>, '방송하다'는 TV 방송할 때의 그 방송과 방탄소년단이라서 죄송하다는 두 가지의 뜻이 모두 들어있다), 여태껏 무시해줘서 고맙다고 그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는 노래(<땡>)에서 감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 팬들은 이유 없이 쏟아지는 악플과 빈정거림에 대항해 악에 받쳐 싸웠다.


국내외에서 좋은 성적이 쏟아지고, 북남미를 포함해 개최된 윙즈 투어도 성황리에 끝이 났다. 그해 가을 발매된 앨범이 바로 <Love yourself '承'>. 타이틀곡 <DNA>로 바야흐로 완벽한 방탄소년단의 시대가 되었음을 선언한 2017년. 윙파콘은 윙즈 투어가 끝나고 <DNA> 활동이 마무리된 2017년 12월의 고척돔에서 개최됐다. 이제는 헤이러들에게 더 이상 볼 일 없다고 말한 <MIC drop>을, <Cypher> 메들리를,  <You never walk alone>을, 처음 노래한 본질을 잊지 않겠다는 <Born Singer>를 함께 불렀다.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남준이의 엔딩 멘트와 '우리 함께라면 사막도 바다가 돼' 완벽했던 슬로건과, "기쁜데..." 하면서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던 정국이가 그곳에 있었다.


이젠 이만큼의 떼창으로 <길>이나 <Born singer>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윙파콘 중계가 끝난 직후 <길>이 무슨 노래냐 묻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팬덤의 몸집은 이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고통받던 과거는 옛 일이 됐다. 버석거리는 사막의 끝에 다다른 자들의 감회가, 한 시점이 매듭 되는 터닝포인트가 담긴 윙파콘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공연이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윙파콘 마지막 날 공연장에 있었다면 온몸에 있는 수분이 모두 빠져 거의 실신 상태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하며.


윙파콘에서 너무 힘을 많이 썼다. 이틀째 이렇게 보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싶다. 전반적으로 반짝반짝 밝은 4기 머스터는 정말 배경음악처럼 틀어두고 집안일을 했다. 책장도 정리하고 청소기도 돌리고 빨래도 돌렸다. <Pied piper>에선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집중했다. 이 노래에 이런 안무가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방방콘의 마지막 공연, 럽셀 콘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럽셀 콘은 편안히 침대에 누워서 보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봐서 이젠 어떤 부분에서 태형이가 웃고, 어떤 부분에서 윤기가 장난치고, 어떤 부분에서 정국이가 손을 올리는지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침대에 누워있으니 노곤노곤 눈꺼풀이 감겼다. 이틀의 피로가 수마로 찾아왔다. 아, 아직 더 봐야 하는데, 더 남았는데, 하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하얗게 불태운 이틀이 지났다. 출근을 위해 일어난 월요일이 이렇게 낯설 수가 없다. 잠시 멍하게 있었다. 콘서트가 끝난 후유증 그 비슷한 우울감이 옅게 스쳤다. 어제 다 보지 못하고 잠든 터라 혹시 방방콘 중계가 끝난 뒤 새롭게 올라온 건 없나 확인하는데 까만 배경에 쓰인 두 줄의 문장에 쿵 했다.


6월, 방탄소년단이

아미의 방 안으로 다시 찾아옵니다.


페스타 기간에도 이렇게 중계가 있을 예정인가 보다. 오프라인에서 직접 보고 즐기는 것만큼 좋은 건 없다지만 이런 시기에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 온 공연장의 열기도 나름의 힘이 있었다. 그걸 경험한 이틀이었다. 6월 페스타 중계라. 목적이 생긴 덕후만큼 무적은 없다. 기지개를 쭉 켜고 스트레칭을 했다. 또 기다릴 이벤트가 남았으니 일주일 시작을 잘해볼까.


이틀 간의 방방콘은 기록적인 수치를 남겼다. 전체 조회수 5,059만 회, 최대 동시 접속자 수 224만 명,

위버스로 연결된 전 세계 아미밤 50만 개, 아미밤 빛으로 연결된 지역 162개, 실시간 공연 감상 해시태그수 646만 건. 방방콘 시작 전 방탄소년단 유튜브 공식 채널의 구독자 수가 2,780만 명이었는데 방방콘이 끝나고 난 뒤 2,840만 명을 기록했다. 이틀 사이에 60만 명이라는 숫자가 증가했다.


직접 콘서트를 관람했거나, 당시에 브이 라이브 등으로 시청했거나 DVD를 구입했거나 하는 사람들이 끊김과 저화질과 시간적 제약을 굳이 감안하며 방방콘을 봤다. 방방콘은 단순히 콘서트 영상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취소된 콘서트의 아쉬움을 일부 극복하면서 같은 시간에 같은 걸 보고, 같은 시간에 같은 후기를 나눌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한 이벤트였다.


기억은 생각보다 생명력이 짧고, 쉽게 왜곡된다. 사진을 찍고, SNS에 집착하는 일은 어쩌면 시간을 붙잡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지 모른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을 순 없지만, 기록은 할 수 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지난 덕질 역시.


그 기록들을 통해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일부 체험했다.


이젠 그 체험을, 그 추억을 꺼내 먹을 수 있는 채비가 필요하다. 가격이 어떻게 되든 절판된 DVD 전부를 어떻게든 전부 구하고 말리라. 전투력이 더욱 상승한 월요일 아침이다.




P.S



역시 어른 말은 들어야 한다. by. 박막례 할머니







<참조: 각 공연별 셋 리스트>



The Red Bullet (2014) Setlist


N.O / We are Bulletprrof / We On

힙합 성애자 / Let me know / Rain

이불 킥 / 여기 봐 / Outro : Propose

No more dream / Tomorrow / Miss Right

좋아요 / Cypher pt.3 Killer / 호르몬 전쟁

Danger / 상남자 / 길 / Jump

진격의 방탄 / 팔도강산



화양연화 On Stage (2015) Setlist


House of Cards / 잡아줘 / Let me know

Danger / No more dream / N.O

Converse High / 24/7 Heaven / Miss Right

이사 / RUN / Butterfly / Tomorrow

힙합 성애자 / 2학년 / 흥탄소년단 / 쩔어

Skool luv affair / 호르몬 전쟁 / 상남자

Never Mind / Ma city / I need U



화양연화 Epiloge (2016) Setlist


RUN / Danger / 고엽 / Tomorrow

Butterfly / Love is not over / House of cards

What am I to you / 상남자 / Save me

불타오르네 / 힙합 성애자 / We are Bulletproof pt.2

Cypher pt.3 Killer / If I ruled the world / 뱁새

쩔어 / Ma city / 흥탄소년단 / 진격의 방탄

2 cool 4 skool / No more Dream / Whalelien 52

Miss Right / I need U



Wings (2017) Setlist


Not today / Am I wrong / 뱁새 / 쩔어

Begin / Lie / First Love / Lost

Save me / I need U / Reflection / Stigma

MAMA / Awake / Cypher pt.4

불타오르네 / 타이틀 메들리(N.O, No more dream, 상남자, Danger, Run)

호르몬 전쟁 / 21세기 소녀 / 피 땀 눈물

Wings / 둘셋 / 봄날



Wings Final (2017) Setlist


MIC drop / We are Bulletporrf pt.1 / We are Bulletporrf pt.2

힙합 성애자 / Cypher 메들리 (pt.1, pt.2, pt.3, pt.4)

Begin / Lie / First Love / So far away & Lost

Save me / I need U / Reflection

Stigma / MAMA / Awake / DNA

고민보다 go / 타이틀 메들리(N.O, No more dream, 상남자, Danger, 불타오르네, Run)

피 땀 눈물 / You never walk alone / Best of me

길 / Born Singer / 봄날 / Wings



Love yourself (2018) Setlist


IDOL / Save me & I'm fine / Magic shop

Just dance / Euphoria / I need U

RUN / Serendipity / Love / DNA

타이틀 메들리(흥탄소년단, 진격의 방탄, 불타오르네, 뱁새, 쩔어)

Airplane pt.2 / Singularity / Fake love

Seesaw / Epiphany / 전하지 못한 진심

Tear / MIC drop

So What / Anpanman / Answer : Love myself



ARMY.ZIP+ (3기 머스터) Setlist


이불 킥 / 상남자 / 21세기 소녀

알아요 / Tony Montana / 방탄 유소년단

24/7 Heaven / 쩔어 / 불타오르네

피 땀 눈물 / 둘셋 / 흥탄소년단 / 진격의 방탄



Happy ever after (4기 머스터) Setlist


24/7 Heaven / 좋아요 / 좋아요 pt.2

I need U / Come Back Home / No more dream

MIC drop / 21세기 소녀 / 고민보다 go

DNA / Pied Piper / Best of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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