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May 07. 2020

46. 너의 위로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46


라디오 DJ가 되어 말을 하는 걸 상상한다. 유일하게 설정된 배경은 말을 하는 시간뿐이다. 오전이나 오후, 저녁이나 밤 같은. 그 이외의 것은 모두 화자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이 말을 듣는 청자도 상상의 영역이다.


밤 9시를 상정해보자. 누군가는 퇴근을 해 집에 누워 있거나 누군가는 열심히 야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친구와 이른 한 잔을 하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일 수도 있고, 방금 막 연인과 헤어졌거나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고 있을 수도 있다. 불특정 다수가 각각 보내고 있는 동일한 시간. 모든 상황을 알 수 없기에 DJ인 나는 그 모두를 아우르고자 이렇게 말을 꺼내게 될 테다.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즐거우셨나요? 아니면 뭔가 힘든 일이 있었나요?”


퇴근을 한 누군가에겐 오늘을 반추하게 하고, 야근을 하고 있는 누군가에겐 대화 상대가 되어 주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에 배경이 되어 주는 마법 같은 첫 문장이다. 시각이 제외된 말은 화자와 청자 서로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시간의 축적은 만남 한 번 없는 친근감을 형성한다. 영상 매체가 대세인 시대에 라디오가 여전히 살아남는 이유일 테다.


나는 학창 시절 라디오를 품에서 빼놓지 않았던 라디오 쳐돌이였다. 점심시간엔 밝고 신나는 노래가 주로 선곡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잠을 쫓았고, 야자 시간엔 힘을 북돋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미래를 꿈꿨고, 하교하는 밤늦은 시간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다 괜찮을 것 같은 위안을 받았다. 삶에 대한 회의감에 잠 못 들던 어린 사춘기를 극복하게 한 건 잠들기 전까지 틀어놓았던 여러 개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저마다의 사연과 저마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사는 게 뭐 별 건가, 다 비슷하게 고만고만하게 사는 거지 하며 삶이란 한 글자의 무거움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책도, 주변의 어른도, 친구도 아닌, 얼굴 한 번 마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얻었던 위안과 위로는 학창 시절을 버티게 하는 큰 힘이었다. 나는 신문방송을 전공한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의 한 방송국에 공채로 입사했다. 그때의 위안과 위로로 이 길을 선택하게 됐음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테다.


시간이 생길 때마다 여행을 떠나기를 몇 년. 한 선배가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일주일에 한 번씩 출연해 여행 정보를 제공하는 코너를 맡아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해 왔다. 어떤 여행지를 선택하고 어떤 노래를 선곡할지 모두 내게 맡길 것이며 주중에 시간 맞춰 녹음을 할 예정이니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잘할 수 있을까'보다 '하고 싶다'였다. 고민하는 척할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선배의 제안을 수락했다.


업무 시간을 쪼개 녹음을 해야 했기에 부서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고, 얼마 있지 않아 첫 녹음이 진행됐다. 수음 시설이 완벽한 라디오 부스에 앉아 첫 여행지로 왜 홍콩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낯선 내 목소리를 인지했다. 노련한 척했으나 녹음이 끝난 뒤 헤드셋을 벗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 대한 몰입이 지나친 탓이었다. 내 코너가 방송되는 시간은 토요일 오후 다섯 시였다. 첫 방송이 있던 날, 청취자의 한 사람이 되어 오랜만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자리를 잡았다. 코너 시그널 음악이 흐르고 약간의 과장이 섞인 소개가 있은 뒤 내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방에 노랗게 노을이 내려앉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지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


방탄소년단에게도 라디오는 중요한 매체다. 멤버 한 둘의 매력을 중점적으로 어필하기보단 멤버 전체가 함께 그룹으로 출연하는 것을 선호했고, 그렇기에 TV 보단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동영상 검색 사이트엔  <키스 더 라디오>, <두시탈출 컬투쇼> 등 아직도 그때의 보이는 라디오를 찾아볼 수가 있다.


데뷔 100일, 1주년, 2주년 기념 등 특별한 날이 되면 <꿀 FM 06.13>이란 제목을 단 라디오 형식을 띤 영상을 가지고 찾아온다. 토크로 꽉 채 운 꿀 에펨은 방탄소년단의 시그니처 방송이 되었다. 진행자는 윤기, 일명 슙디다. 적재적소를 파고드는 유머와 적절한 타이밍을 아는 진행 능력에 낮은 목소리와 특유의 사유가 더해져 방탄소년단 꿀 에펨 슙디로 더할 나위 없는 진행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뉴 노멀, 비 대면 시대가 되면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라이브 방송을 하며 팬들에게 자주 찾아오는 방탄소년단 멤버들. 금방 여름이 올 것 같은 4월의 어느 토요일 저녁, 마이크 로고가 화면을 가린 라이브 방송이 시작됐다. <슙디의 꿀 FM 06.13>. 윤기가 목소리로만 진행하는 진짜 라디오로 찾아왔다.


맑은 햇살과 시원 따뜻한 바람이 부는 4월이 되었습니다. 2020년 1월에는 그래미 어워즈를 갔었고 2020년 2월에는 약 1년 만에 새 앨범 세븐으로 컴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 3월에는 우리가 다시 마주할 날을 기다리기 시작했죠 (중략) 어떻게 이 상황을 공감하며 일상에서 기운을 차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슙디가 돌아오게 됐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는 트윗 글에 50만 건이 넘는 댓글이 달렸다며, 많은 분들이 슙디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는 슙디 윤기가 천천히 질문 글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질문을 미리 읽고 준비한 것도, 즉흥에서 답을 하는 것도 있었다. 종이를 사각 넘기는 소리,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딸깍거리는 소리, 답을 생각하는 약간의 정적 등. 상상했다, 윤기를. 작업실에 앉아 미리 추린 질문을 읽는 눈동자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을 확인하며 웃고 끄덕이고 씁 혀를 차는 윤기를. 라디오의 매력이 이런 거였지. 잊고 있던 무엇이었다.



Q. 디제이 8년 차 소감은?

A.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좋아해서 그런지 재밌다. 어릴 때 스마트폰 같은 게 없던 시절이라 MP3 라디오 기능 교복 와이셔츠 안에 넣어 빼서 턱을 괴는 척하고 학원이나 학교에서 듣곤 했었다. 그래서 재밌다. 디제이 하는 게 좋다.


Q. 요즘 일상은?

A. 공부를 하고 있다. 영어 공부는 솔직히 잘 안 되고, 쉽지가 않다. 요즘은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정신, 뇌, 철학 쪽에도 관심이 많다. 그림도 그린다.


Q. 요즘 듣는 노래 혹은 요즘 기분에 잘 어울리는 노래는?

A. 요즘 방탄소년단 음악 진짜 많이 듣는다. 왜 사람들이 우리 음악을 들으면서 위로를 받지? 그런 걸 내가 썼지만 그렇게까지 깊게 이해를 못했다. 과연 위로를 받을까 반신반의하며 만들었는데 요즘 듣다 보니 나도 위로가 되더라. 그런 의미에서 봄날을 추천한다. 봄이니까.


Q. 방탄소년단 노래 중 최애 곡은?

A. 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곡이 없어서 꼽기가 어렵다.


Q. 어떤 때 행복이라고 느끼는가

A. 행복이란 감정이 사람마다 주관적이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과 이렇게 소통할 때 가장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 투어를 돌았으면 공연할 때라고 했을 텐데.


Q. 시소 초안의 제목이 플라워였는데 왜 플라워였는지 궁금하다

A. 아, 프로젝트 제목을 별생각 없이 정한다. 배고프면 아임 헝그리 해놓고 그런다. 기분 안 좋으면 키보드 꽝 쳐서 하기도 하고. 그때는 뭔가 플라워를 하고 싶었나 보다. 시소를 만들었을 때 여름 날씨 진짜 쨍할 때를 생각했다. 봄에서 여름 지나가는 그때. 그 느낌으로 플라워라고 했다. 작업을 할 때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을 듣는데 그것들이 시각화가 됐으면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작업할 때 그런 걸 중점적으로 한다. 악기 배치할 때도 그렇고. 그땐 꽃을 떠올렸나 보다.


Q. 방방콘 할 때 멤버들도 보고 있었을까? 봤다면 어떤 느낌이었는지?

A. 방방콘을 하루 12시간씩 하지 않았나. 일정이 있었는데 한 도중에 보고, 보다가 하고 그랬다. 우린 당사자다 보니까 항상 의구심이나 불신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하는 것들이 사람들에게 감동이나 영감을 줄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콘서트를 한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랬던 열정이나 에너지들이 보이더라.


Q. 일곱 명이 모이면 가장 자주 하는 행동은?

A. 솔직히 진짜 말 많이 한다. 방탄 밤에 안 나가는 게 더 많다. 너무 웃기다 우리끼리 있으면. 요즘 가끔씩 그런 생각까지 한다. 우리 가수 맞긴 할까? 우리 예능인 아닐까?


Q. 슙디 말고 멤버 중에 디제이 멤버를 추천한다면

A. 오후 2시 느낌으로 진 형


Q. 오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예쁜 기억이 뭔지

A.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요즘엔 콘서트를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그걸 지켜보고 있는 여러분, 그리고 아미 밤이 흔들흔들하는 장면. 그게 되게 예쁜 기억인 것 같다.


Q. 꿈과 신념은?

A. 요즘 이게 고민이다. 옛날엔 꿈과 목표가 너무나도 명확해서 그것만 보고 달려왔는데 지금은 꿈이라는 게 뭘까, 과연 목표라는 걸 세우면 어떻게 세워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꿈? 그냥 행복하게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인 것 같다. 옛날엔 신념이 명확했고, 그 신념에 맞춰야 살아야 했는데 가끔씩 그렇지 않을 때 되게 괴로워서 지금은 신념이 모호하다. 이것도 역시 '행복하자' '행복해지자' 이런 것 같다.


Q. 작업이나 뭔가 시작할 때 끝이 두려워 시작을 못하겠으면 어떡하나?

A.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끝이 두렵다. 예전엔 끝이 두려운 걸 시작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끝이 두려우면 사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심리학, 철학 이런 책을 보다 보면 어느 책에서 나오는 진 모르겠지만 의미 있는, 인상 깊은 구절이 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가치 있는 거라고. 끝이 있기 때문에 그 과정들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시작이 미약할지 언정 끝은 창대하길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나도 살고 있다.


Q. 졸업하고 취직 때문에 스트레스 엄청 많이 받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찾는 게 너무 힘들다

A. 이게 진짜 어려운다. 어떻게 보면 지금 살아가는 청춘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하는 생각일 수도 있다. 심리 철학 정신 뇌 이런 것들을 공부하며 심리 상담 자격증을 따는 게 최종 목표다. 나도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좋아하는 일이 어느 순간 좋아하는 일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고. 이 밸런스를 잘 잡아야 하는 거 같다. 노력만으로 되는 문제는 아닌 거 같기에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떠 있는 배가 되길 바란다. 잘 헤쳐나가실 수 있을 거다. 미안하다 답을 드리지 못해서.  예전 같았으면 좋아하는 일 하세요! 아이, 뭐가 더 맞는 거 같아요? 할 수 있는 일? 할 수 있는 일 하세요! 했을 텐데 그 답 또한 내가 내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답은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그 답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을 거다.


Q. 음악을 만드는 사람에게 조언은?

A. 음악은 모든 사람이 만들 수 있다. 다만 좋은 음악 만드는 게 힘든 일이다. 저기 걸어가는 다섯 살짜리 아이도, 저기 지나가는 그리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게 음악이다. 특히 요즘은 허들이 많이 낮아지기도 했고. 내가 뱉는 말, 내가 흥얼거리는 것조차도 음악이라고 생각을 한다. 꿈이 음악을 만드는 거라면 일단 음악을 만들어라. 음악의 평가는 청자들이 한다. 그리고 만든 음악은 발표를 해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이다.


Q. <give it to me> 중 '아직은 성공의 비법은 몰라도 망하는 비법 잘 알 것 같아. 딱 너처럼 놀고 나불대는 게 비법 죽어도 그렇겐 안 살 거야' 란 문구를 책상에 붙여놓고 마음의 비법처럼 사는 중이다. 어떻게 하면 열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

A. 내가 예전에 만든 음악들을 잘 안 듣는다. 생각들이 바뀌니까. 내 기록들이긴 하지만 나도 시시각각 바뀌니까. '열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라, 열정적. 꼭 열정적으로 살아야 할까? 매 순간 불태우면서 살아야 할까? 선택은 본인 몫이긴 하지만 과연 그게 행복과 연관이 있을까? 성취가 자기에게 많은 만족감을 주고 행복을 준다면 열정적으로 살아야겠지만 잔잔한 거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또 마음 편한 게 자기 행복 중 하나라면 굳이 열정적으로 살 필요가 있나, 싶다.


Q. 오빠 목소리 왜 이렇게 좋은지?

A. 그러게. 오늘은 좀 목소리가 막 뜨지도 않고 다운되지도 않고. 오늘 기분 같은 목소리다.


Q. 영감을 받는 방법은?

A. 이 질문은 정말 많이 받는데 그때마다 다 똑같이 얘기한다. 지금 내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있고, 마스크와 종이, 키보드, 스피커, 마우스, 모니터가 있다. 이 모든 게 다 영감이다. 이걸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가사가 된다. 스피커 위에 옷이 올라가 있네? 누군가가 굉장히 바쁜 와중에 스피커 위에 올려두고 갔구나! 이런 게 다 영감이 된다.


Q. 심리 상담 자격증을 왜 따고 싶나?

A. 나 같은 친구들을 만나면 그때는 꼭 해줘야 할 말이 있고 싶어서? 이런 친구들을 봤을 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고 싶어서?


Q. 친구 관계 때문에 힘든데 응원이나 조언 부탁한다

A. 인간관계라는 게 내가 어떻게 조언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라. 그냥 받아들여라. 받아들여야 한다.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가 더 안 되고, 받아들이려고 한 순간 받아진다.


Q. 슬럼프 극복 방법은?

A. 나는 슬럼프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여유 없고, 바쁘고, 당장 닥쳐오는 일들이 많으니까. 하나하나 하면서 슬럼프가 극복이 됐던 거 같다. 정신없이 지나다 보니까, 어쨌든 해내야 하니까, 무조건 해내야 하는 일들이 있으니까. 근데 그렇지 않은 분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슬럼프가 왔을 때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조금 더 집중을 해봤으면 좋겠다. 어떠한 것보다 가장 소중한 게 나니까. 나한테 좀 더 집중하다 보면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Q. 아직도 꿈이 없다

A. 이런 질문도 많이 올라오는데 꿈이 없을 수도 있다. 내가 스무 살, 스물한 살 때면 어떻게 꿈이 없을 수 있어? 했는데 꿈이 없어도 된다. 나 자신한테 좀 더 집중해봐라. 뭔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삶만 가치 있는 게 아니다.


Q. 꿈을 포기했다.

A. 어떤 사연인 진 모르겠지만 굉장한 용기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과감한 포기는 엄청난 용기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파이팅.



윤기의 말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아 그 이후에도 몇 번을 들었다. 들으며 기록했다. 표정이나 제스처 없이, 목소리로도 이런 위안이 가능하다. 아니, 목소리만이기에 이렇게 위안받는다.


나는 토요일 오후 5시, 여행을 떠나는 도로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친구와 만나러 가는 길에서, 아니면 저녁을 준비하는 어느 부엌의 한편에서 내 목소리가 흘러나올 것을 상상하며 라디오 방송에 임했다. 방송이 진행됐던 4개월 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라디오 부스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마이크 앞에 자리 잡는 것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는 것 모두 익숙해지거나 적응되는 류의 것이 전혀 아니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모니터링도 빼먹지 않고 했다. 그게 청자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니에 카디건을 입고 작업실에 앉아 미리 받은 질문글이나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을 읽으며 말을 골랐을 윤기를 상상한다. 위로가 되는 감동 메시지가 되게 많았다고, 오히려 본인이 힐링한다는 윤기의 말이 진심이란 걸 안다. 듣는 사람뿐이 아니었다. 청자를 상상하고, 이야기가 잘 전달될까 걱정하며 이 시간으로 하루가 괜찮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그때의 디제이도 열심히 말을 전했을 거란 걸, 라디오에 출연하는 동안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친구도 만나고 미리 예약해두었던 전시도 볼 겸 1박 2일이라는 짧은 일정에 맞춰 서울을 찾았다. 월드 와이드 핸섬 석진이의 액자가 가득한 전시장에서 시간 가는 줄 몰라했고, SNS에서 핫하다는 식당에서 밥도 챙겨 먹었다. 스무 살의 어린 기억이 곳곳에 스며있는 강남역에서 만난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여러 번 반복해도 도무지 질리질 않는 옛날이야기를 깔깔거리며 나눴다.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이튿날, 집에 가서 마실 와인을 산 뒤 한산한 시내버스에 올라 타 기차역을 향했다.


내게 라디오는 항상 배경음악이었다. 그러니까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거리를 걸었다. 그러나 슙디의 라디오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요 근래 그 어떤 상황에도 할 수 없었던 완벽한 집중력으로, 모든 행동을 멈춘 채 온 신경을 청각에 쏟았다.


이어폰을 꽂은 뒤 다시 슙디의 꿀 에펨을 재생시켰다. 봄 없이 바로 여름으로 가려나. 초록 잎이 무성한 가로수 사이로 노란 햇살이 반짝거리며 창 안으로 스며든다.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윤기 말의 억양과 속도, 말이 지닌 내용과 흐름 그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며 꿀 에펨을 들었다. 승객이 타지 않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 나들이를 가는지 교통량이 꽉 찬 구간을 지나, 쏟아질 것처럼 풍성한 나무를 지났다. 꿈을 포기하는 데에 용기가 필요했을 거라고, 힘내라는 말보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말하는 윤기의 목소리가 나왔다. 오후 1시가 막 지난 도로의 공기, 승객이 셋 쯤 탔던 그 버스, 그 햇살, 그 순간이 사진처럼 찍혔다.


영원의 영역이다.




P.S



1. 이번 편을 쓰기 위해 꿀 에펨을 조각내 들었다. 말을 받아 적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을 받아 적으며 또 생각했다. 민윤기에게 빠지면 답이 없구나.


2. 꿀 에펨 방송이 있고 얼마 뒤, 아이유의 신곡에 윤기가 프로듀싱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곡 발표일은 5월 4일. 이미 노래가 다 완성되었을 거란 뜻이었다. 요즘의 일상을 묻는 질문에 영화 보고, 멤버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기 시작했다는 앨범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림 그리기에 취미 붙였다는 정도만 얘기했기에 이런 콜라보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어떤 팬이 본인 같았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아이유 아메리카노로 실수인 척 말하거나 협업! 하며 기침했을 거라고, 티 한 번 내지 않은 윤기를 대단하다 말했다. 어설픈 말보다 완벽한 침묵이 훨씬 큰 힘이 있다.


3. 5월 4일 18시 00분. 무한 새로고침 끝에 최신 음악에 아이유의 에잇(Prod.&Feat. SUGA of BTS)이 올라왔다. 이어폰을 끼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밝은 분위기가 품고 있는 아득함. 


영원이란 말은 모래성 작별은 마치 재난문자 같지 

그리움과 같이 맞이하는 아침 

서로가 이 영겁을 지나 꼭 이 섬에서 다시 만나


역대 멜론 진입 이용자 수 1위라는 기록보다 기쁜데 눈물이 나는 기분으로 노을이 지는 강둑을 뛰며 듣고 싶어 지는 이런 노래가 윤기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저녁이다.


 

.



매거진의 이전글 45. 방구석 방방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