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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May 13. 2020

47. 그 여름, 우리가 좋아한 소년들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47


한 해 달력을 넘겨보며 공휴일 확인하기. 그중 금요일이나 월요일처럼 휴가를 내지 않더라도 연속으로 쉴 수 있는 소중한 공휴일 체크하기. 최소의 휴가 사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 찾기. 7년 차 직장인이 갈고닦은 건 상사 비위 맞추기나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아닌 바로 이 휴가의 효율적인 사용 능력이다.


2020년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이어지는 빨간 날은 그런 직장인의 마음을 흥분으로 들끓게 하기 충분했다. 부처님 오신 날, 근로자의 날에 주말 이틀을 지나 어린이 날까지. 중간에 낀 월요일 하루만 휴가를 내면 무려 6일이란 연휴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맘때면 늘 찾았던 홍콩이나 다른 아시아권 나라를 여행하거나 방탄소년단 콘서트에 맞춰 LA도 괜찮을 것 같다 했다. 시카고와 뉴욕, 바르셀로나 항공권을 미리 결제해놓았기에 4월 말의 여행이 아주 급하진 않으니 조금만 더 분위기를 보다 일정을 결정해야겠다 했다. 바이러스의 창궐로 전 세계가 마비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 못 했던 시기의 이야기다.


콘서트를 꿈꾸게 한 달콤한 대가인 일부 수수료가 제외되고 시카고와 뉴욕에 이어 바르셀로나 항공권 취소가 완료되었다. 이미 결제한 미국 콘서트 티켓은 좌석이 그대로 유지된 채다. 언제가 되더라도 콘서트가 개최될 만큼 괜찮아지기를 바라는 희망이 아직 환불되지 않은 티켓값에 녹아있다. 해외를 나갈 수도, 그렇다고 국내를 여행하기에도 부담인 때에 황금연휴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행도 하지 못할 거 휴가 하루라도 아끼자'와 '어차피 여행도 하지 못할 거 앞으로 휴가도 많이 남을 텐데 이럴 때 써야지'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그러다 방탄소년단이 썸머 패키지 최초로 국내에서 촬영한 전라북도 완주를 이럴 때 찾아가 보자 싶었다. 구글 지도를 켜 지리를 가늠해보니 직접 운전해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체력의 바닥을 확인하며 여행하지 않아도 되는 연휴, 매일 조금씩 기억에 남는 일을 남기는 연휴도 괜찮을 것 같다. 생각이 든 순간 바로 휴가 결재를 올렸다. 올해 첫 휴가 사용이다. 노트를 펼쳐 6일간의 일정을 짰다. 방탄소년단 덕에 또다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곳을 가려한다. 


쉬는 날에 늦잠도 좀 자고 늦장을 좀 부려도 되련만 오히려 출근하는 날보다 눈이 더 빨리 떠진다. 시간을 몸이 아까워하는 탓이다.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고 간단히 스트레칭을 했다. 연휴를 앞둔 설렘에 전날 맥주를 몇 잔 마셨음에도 몸이 가뿐하다. 샤워를 하고 몇 개의 프로그램을 챙겨보다 짐을 챙겨 나왔다. 커피 맛이 괜찮다는 카페까지 꽤 걸려 도달했다. 


적당한 맛의 플랫화이트를 마시며 챙겨 온 다이어리에 그간 밀린 내용을 썼다. 그다음 내일 완주에서 보낼 하루 일정을 정리했다. '방탄 투어'로 완주를 미리 다녀온 팬들의 정보가 블로그에 많아 손쉽게 루트를 정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손을 움직여 메모를 하다 보니 어깨가 뻐근하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카페를 둘러보니 몇몇의 테이블에 삼삼오오 앉은 손님들이 보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대형 마트에 들러 과자며 와인이며 남은 날을 함께 할 장을 봤다. 역시 연휴란 이런 거다. 


이튿날 아침, 몸을 일찍 일으켰다. 완주까지 편도로 1시간 30분이 걸리는데 조금 덜 붐빌 때 다녀오고 싶어서였다. 이러려고 어제 늦지 않게 참을 청했다. 썸머 패키지 화보집이며 핸드폰 충전기, 미니 삼각대와 커피를 챙겨 나왔다. 차에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 앱을 실행시켜 목적지를 검색했다. MP3 검색창엔 방탄소년단을 넣어 운전하는 내내 방탄소년단 노래만 흘러나오게 설정까지 마쳤다. 


운전을 한 지는 2년이 되어가지만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이 넘게 운전을 해본 게 손가락으로 꼽는다. 퇴근하거나 주말이면 집에 콕 박혀 있는 스타일이라 그렇다. 일부러 공을 들여 멀리 비행기를 타고 나가지 않으면 부지런히 움직일 동력이 도무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여름, 누구보다 뜨거웠던 방탄소년단의 조각을 찾고 싶단 마음이 그 모든 게으름을 이긴다. 오전 8시, 드라이브 기어를 놓고 차를 출발시켰다. 


고속도로의 어느 기점을 지나자 구름 많던 흐린 하늘이 거짓말처럼 파랗게 개었다. 한산한 고속도로를 최고 속도로 달렸다. 화려한 퍼포먼스가 어울리는 방탄소년단의 노래들은 이 속도에도 거침없이 없다. <IDOL>, <ON>, <뱁새>등을 소리 높여 따라 부르다 <Danger>의 첫 비트엔 얕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런 드라이브에 완벽하게 딱인 노래다. 응원법을 했다가, 노래를 열창했다가 했다. 어느 순간 머리가 깨끗하게 맑아졌다. 확실한 카타르시스였다.


<Winter bear>를 적은 스케치북에 지민이 선물한 인형 곰 두 마리를 가지고 태형이 이렇게 저렇게 옮겨가며 사진을 찍었던 곳, 그렇게 찍은 사진을 <Winter baer>의 커버로 선택하게 한 곳, <2019 BTS Summer package> 촬영지이자 <Winter bear> 뮤직비디오의 대미를 장식한 곳. 내가 원주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오성제 저수지였다. 


오성제에 다다르자마자 여기구나 했다. 오성제의 뷰 포인트인 소나무 한 그루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입구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하고 짐을 챙겨 나왔다. 아직 오전 10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라 한 둘의 관광객이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공간 없이 나무로 빼곡한 뒷 산에서부터 키 작은 잔디와 풀들이 자라나는 길로 이어져 어디까지가 길이고 어디서부터가 산인지 모르게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저수지는 없었다. 길 가운데에 짚을 엮어 산책로로 만들어놓았고, 저 어디쯤의 민가에선 생활 소음이 들려왔다. 멤버들이 여길 찾았을 땐 장마 기간이라 저수지에선 아득하게 안개가 피어오르는 채도가 낮은 풍경이었는데 쨍한 햇볕에 반짝이는 저수지의 물결은 생의 기운이 가득했다. 상상 속의 풍경은 아니지만 여길 지나다니며 사진과 영상을 남겼을 태형이와 썸머 패키지 화보 촬영을 했을 멤버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소나무를 옆에 두고 찍은 단체 사진은 썸머 패키지의 표지가 됐다. MP3에서 <Winter bear> 1곡 반복 재생을 눌렀다. 괜히 이 길을 몇 번이고 왕복하며 걸었다. 


썸머 패키지 촬영을 위해 멤버들은 이 곳의 아원 고택에 며칠을 묵었다. 아원 고택은 오성제에서 차로 5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인적이 드물 때의 오성제를 느끼고 싶어 서둘러 왔더니 고택 관람이 가능한 12시까지 꽤 시간이 남았다. 저수지를 관망하며 커피 한 잔을 즐기기에 괜찮은 오스 갤러리가 바로 지척에 있어서 그곳으로 이동했다. 너른 정원을 내다볼 수 있는 통 유리창이 있는 카페가 함께 있는 곳이었다. 갤러리에 걸린 작품들을 감상하고 커피와 함께 토스트를 시켰다. 창 밖 풍경 값이 포함된 가격이었다. 


멤버들이 게 눈 감추듯 식사했던 한정식집 '궁'이나 '호남각'에서 끼니를 챙겨 먹고 싶었는데 2인 이상이 방문해야 멤버들이 먹었던 메뉴를 시킬 수 있어서 막 구워 나온 이 따뜻한 토스트로 식사를 갈음하기로 했다. 워낙 눈이 즐거운 풍경을 마주한 카페다 보니 핸드폰이나 안경 케이스 등으로 위치 좋은 자리를 맡아두고 한참을 사진을 찍고 구경하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종종 "여기 저희 자린데요" 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말하는 사람도 비키는 사람도 겸연쩍은 제스처가 붙어 있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방탄소년단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사람 구경하며 몇 개의 메모를 했다.


아원 고택은 정오부터 숙박 손님 입실이 시작되는 오후 4시까지만 일반 관람객들이 둘러볼 수 있게 돼 있다. 고택에 입장하기 위해 티켓을 발권한 뒤 아원 갤러리 한편에 앉아 입장 시간까지 대기했다. 금요일이지만 휴일이다 보니 꽤 많은 관람객들이 갤러리를 메우고 있었다.  멤버들은 이 화보 촬영 후, 패러 글라이딩을 마치고, 모주 만들기 체험을 하고 온 멤버들은 갤러리의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림일기를 썼다. 마이크를 채우지 않아 이야기를 나누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었는데, 이런 널찍한 갤러리이기 때문에 그랬구나 싶다. 앉은 멤버들 뒤로 카운터가 보였으니 멤버들이 앉았던 위치는 이쯤이겠다 가늠했다. 


12시가 되자 갤러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줄을 서 고택으로 향했다. 나도 그 행렬에 참여했다. 갤러리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고택까지 꽤 험난한 돌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높은 굽의 뮬을 신고 있었던 터라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대나무 숲도 소복하게 핀 들꽃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걸음에만 신경 썼다. 편하게 운동화를 신고 오면 될 일이었는데. 콘서트장에도 부득불 예쁜 옷을 입고 가는 심리와 똑같아버렸다. 장소에 대한 예의 뭐 그런 비슷한.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떼고 나니 고택에 다다랐음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었다. 화살표를 따라 조금의 계단을 더 오르자 상상했던 것보다 넓지 않은, 그러나 상상했던 것만큼 운치 있는 몇 채의 한옥이 나타났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만난 안채 설화당은 보자마자 '민소매를 입은 남준이가 썸머 패키지 태그를 한 채 셀카를 올렸던 곳이다' 했다. 이 곳에 오면 꼭 사진을 찍는 천지인 만휴당 앞 포토 스폿으로 모두가 서둘러 이동하는 가운데에 나는 바로 이 안채 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남준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을 이 곳이다. 이 마루에 걸터앉아 포즈를 취했던 남준이를 마음껏 느꼈다. 


잠시 땀을 식힌 뒤 마당 안쪽으로 이동했다. 네모난 연못 옆에 기다란 돌 의자가 놓여있고 그 뒤에 소나무 한 그루가 멀찍이 서 있다. 이 돌 의자 앞에 가로로 걸터앉은 태형이의 사진이 단박에 떠올랐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가족이 지나가길 기다린 뒤 슬쩍 앉아 봤다. 


미리 아원 고택을 다녀간 팬이 작성한 블로그에선 사랑채엔 정국과 지민이, 천지인 안방엔 호석과 태형이, 천지인 건넌방엔 윤기와 석진이, 안채엔 남준이가 묵었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담쟁이넝쿨이 있는 별채를 지나가며 본 문의 고리가 낯설지 않은 것이 자물쇠 열 줄을 몰라 문을 부술 듯하던 남준이가 찾은 방이 여기인 것 같다. 화보집만 챙겨 오지 말고 DVD도 다시 보고 올 걸. 각자 반상을 앞에 두고 게임을 하던 마루가 저쪽일까? 이쪽일까? 드론을 향해 다 같이 인사하던 트레일러 속 마루는 저쪽일까? 이쪽일까? 문 틈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거나 기대어 사진 찍은 대문이 여긴가? 저긴가? 했다. 


5월 1일이라는 날짜가 무색하게 햇볕이 뜨겁다. 계절 하나를 월반한 것처럼 낯설다. 아무렴 어떠랴 싶다. 이 넓지 않은 공간 안에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시기의 한국, 그것도 이 곳 아원 고택에서 밤이 되면 텔레비전도 없이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멤버들이 저쪽일까 이쪽일까 할 것 없이 오고 다니며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냈을 테니까. 여기 냄새가 너무 좋다며 이부자리에 벌러덩 눈던 정국이의 꼬물꼬물 한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리는 것 같다. 꼭 어디에 앉아야지, 어디서 사진을 찍어야지 하는 마음 없이 이른 여름의 진한 바람을 느꼈다.


또 다른 썸머 패키지 촬영 장소 위봉산성이 다음 목적지였는데 산성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좁은 공간이라는 사전 정보가 무더운 날씨로 되새겨졌다. 그다음 목적지인 용암 상회로 가는 중간에 드라이브 스루로 느낌만 보고 지나가야겠다 싶었다. 어느새 이중주차까지 되어있는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몇몇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위봉산성 돌담 창문 너머로 슬쩍 보고 지나쳤다. 여기서부터 용암 상회까지 가는 길은 약 30분 정도의 구불구불한 드라이브 코스였다. 운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려 저 아래의 빛나는 대아 저수지와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의 조화를 감상하고 싶었다. 매니저나 스태프가 운전해주는 차량에 탑승했을 멤버들이기에 뒷좌석에 앉아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을까, 풍경을 보며 예쁘다 했을까, 그 와중에 잠을 청했을까 상상하며 조심조심 운전대를 잡았다.


예전 외할머니댁이 딱 이런 느낌이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가가 있고 그 옆에 동네의 사랑방 같은 작은 슈퍼가 있다. 콜라며 과자며 없는 게 없던 그 작은 슈퍼는 용돈만 받으면 단박에 뛰어가던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인 할머니는 나를 엄마의 이름으로 불렀고, 나는 그게 짐짓 못마땅하면서도 신중한 눈으로 주전부리를 고르곤 했다. 동네의 터줏대감 격인 슈퍼. 멤버들이 썸머 패키지의 장소 중 한 군데로 촬영을 했던 용암 상회는 초등학교 입학 전후의 기억을 소환하는 정감이 넘치는 노포였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방탄소년단 화보집을 들고 와 인증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보면 "대체 왜?" 할 듯한 동네였다. 실제로 가게 앞을 기웃거리며 '여기 큰 돌 위에 윤기가 서고 지민이랑 태형이가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는데', '여기 평상엔 남준이랑 정국이, 호석이 석진이가 앉거나 서서 포즈를 취했었는데' 하며 화보집과 비교하며 방향에 맞춰 사진을 찍고 있었더니 상점 안에서 주인아주머니가 궁금한 듯 몸을 내미셨다. 멋쩍은 얼굴을 한 뒤 몸을 돌렸다. 열 걸음 정도 걸으니 아래로 늘어진 느티나무가 있는 작은 냇가가 나타났다. 그 사이를 잇는 다리에서 작은 다리에서 추가로 촬영했던 멤버들의 구도를 가늠해보며 몇 장의 인증 사진을 남겼다. 그러고 보니 올해 들어 이런 물소리를 가까이 듣기에 처음인 것 같다. 바닥의 돌이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맑은 물결이다. 


어디를 더 갈까 하는, 그러니까 매번 여행을 떠날 때마다 느꼈던 가성비 마인드가 사라졌다. 이제 고작 오후 2시지만 나는 충분히 이 짧은 여행을 즐겼다. 차에 들어와 찍은 사진을 보고, 조금 아쉬워 용암 상회를 좀 더 담은 뒤 모든 짐을 조수석에 밀어 두었다. 그리고 와인을 사기 위해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집 근처 백화점으로 설정했다. 일찍 도착할 환한 방에서 와인을 마시고 오늘을 반추하고 싶단 생각에서였다. 대화 상대 없이 이동 수간을 갖춘 1인의 활동 영역은 이토록 짧고도 넓다. 졸졸졸 흐르던 시냇물도,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더위를 좇으려 나왔던 젊은 엄마의 손길도, 길게 내리뜨린 버드나무도 내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어디쯤에 묻어두었다.


늘 돌아가는 길은 좀 더 수월하다. 그래서 더 아쉽다. 오성제를 도착지로 설정했을 때보다 이 곳에서부터 집 근처의 백화점을 도착지로 설정하니 운전하기 수월한 넓은 도로다. 돌아가는 길 역시 다 듣지 못했던 방탄소년단 노래로 가득 채웠다. 믹스테이프며 커버곡, 트위터에 허밍처럼 올린 목소리까지 모두 넣어둔 까닭인지 하루 종일 방탄소년단 노래만 듣고 있는데도 한 번도 듣지 않았던 곡목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전곡 재생에 하루가 꼬박 걸리는 가수가 부지런한 내 가수다 싶다.  


백화점에 거의 도착하는 와중에 지민이의 유튜브 라이브가 시작됐다. 길을 아는 곳이기에 내비게이션을 얼른 끄고 지민이 영상의 볼륨을 크게 높였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누르는 경쾌한 소리. 새 앨범에 지민이가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됐다며, 각 멤버들의 의견을 모으고 전달하기 위해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했다. 작은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채 라이브 방송임을 잊은 듯한 느낌으로 모니터에 열중하며 파일을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방탄소년단, 틈을 안 준다. 쉴 새 없이 달려온 활동이니 이런 때에 조금 여유를 가져도 되련만, 이렇게 시간이 있을 때 멤버 전체가 역할을 지닌 앨범을 만들고자 한다니. 오늘 같은 날을 또 얼마나 많이 만들어줄까.


집에 돌아와 와인을 오픈해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푹신한 베개에 등을 기댔다. 핸드폰 사진첩에 오늘의 동선이 그대로 녹아 있다. 썸머 패키지 영상을 이제야 다시 봤다. 갔다 오니 금방 알겠다. 갔다 와서 사진을 보고 영상을 보니 동선이 실감 난다. 각자 반상을 앞에 두고 게임을 하던 마루는 천지인 오른편의 마루고 드론을 향해 다 같이 인사하던 트레일러 속 마루는 사랑채다. 문 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거나 기대어 사진을 찍은 대문은 사랑채와 천지인 사이, 카페처럼 이용되는 곳 옆문이었다. 방탄소년단 덕에 낯선 곳 하나를 아는 곳으로 만들었다. 


2019년 여름은 방탄소년단에게 잊을 수 없는 계절이다. 미국, 브라질, 영국, 프랑스 <Speak yourself> 스타디움 투어와 머스터 <Magic shop> 부산 서울 공연에 이어 물놀이를 즐겼던 <달려라 방탄> 촬영과 완주에서 진행된 썸머 패키지, 2020 시즌 그리팅 촬영까지. 가을 한 달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만큼 더욱 뜨겁게 몰입했던 여름이었다. 그 여름은 내게도 잊을 수 없는 계절이다. <Love yourself> 투어 마지막 도시였던 방콕부터 <Speak yourself> 시카고에 <Magic shop> 부산 공연을 함께 했고, 티켓을 구하지 못한 다른 공연은 브이 라이브로 꼭꼭 챙겨보며 더울 새 없이 지나간 여름이었다.


그때의 여름을 조각조각 맞추며 다시 새긴다. 

우리가 좋아한 소년들의 그 여름을, 내 찬란했던 덕질의 그 여름을. 




TMI.


아원 고택의 고택은 고백으로, 사랑채는 사랑해로 자꾸 오타가 났다.

사랑한다고 고백을 많이 했기 때문인가 보다.


남은 연휴는 글 쓰고, 와인 마시고, 영화 보고, 책 읽고, 방탄소년단 영상 보며 보냈다. 

게으르다면 게으르고, 성실하다면 성실한 하루하루였다. 








아원 고택 안채



방탄소년단(@BTS_twt) 2019년 8월 16일 / 썸패


오성제


용암 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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