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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Apr 14. 2020

44. 내 맘대로 어워즈(Awards)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44


나는 학창 시절 모범생이었다. 사전적 의미의 '학업이나 품행이 본받을만한 학생'이었다는 건 아니다. 선생님이 하라는 것 이외의 것들을 하지 않았다는 뜻에서다. 등교 시간에 늦지 않았고, 숙제를 미루지 않았고, 수업 시간에 졸지 않았다. 교복 치마 길이는 무릎 아래에 딱 맞추어 다녔고, 머리카락 귀밑 3cm를 유지해야 했던 교칙에도 불평 없이 따랐다. 선생님한테 혼나는 것이 싫었고, 무엇보다 나는 기본적으로 규칙이 주어지면 그것을 지켜야 마음이 편해지는 유형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다. 학교 정문에서 집 대문까지 짧은 걸음으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았음에도 제일 먼저 등교했고, 수업 전 복도 가운데에 놓인 함에서 괘도를 챙겨 오거나 자료로 쓰일 OHP 필름이나 VHS 테이프를 챙기는 것을 도맡아 했다. 친구들이 모두 하교한 뒤 시험지를 채점하는 선생님 옆에서 번호대로 점수를 정리하는 학생도 나였다. 


방학식이 있는 날, 반에서 키운 화분들을 친구들과 함께 모두 우리 집으로 옮겨가는 것 역시 내 몫이었다. 방학 숙제 외에 화분 식물을 죽이지 않고 키우는 숙제까지 덤으로 얻었음에도 그랬다. 거기에 소명이나 당위성은 없었다. 그저 선생님이 내게 '그렇게 했으면 한다'라고 해서였다. 그 순간 내가 지켜야 하는 규칙이 하나 추가 성립됐을 뿐이다.


규칙을 잘 따르니 상을 받았다. 매일의 숙제였던 일기를 빼먹지 않고 썼더니 일기 상을 받았고, 제출이 자유였던 표어나 포스터 만들기에 꼬박꼬박 참가했더니 꽤 자주 상을 받았다. 수업 교재 챙기기를 맡아했더니 노력상 같은 것을 받았고, 반장 임명장이나 글짓기 대회 상장 등을 받았다. 규칙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는데 상을 받았다. 가방에 상장이 담긴 하굣길의 발걸음은 누구보다 가벼웠다. 알아주길 바란 적 없는데도 그랬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보상, 누군가에겐 유희, 어떤 사람에게는 계기. 상은 그런 거였다. 


공을 치하하는 상을 주기 적절한 연말이 지난 지 한참이지만, 내 맘대로 이름 붙인 어워즈를 연다. 맞다. 사실 이 내용으로 글을 쓰고자 규칙이며 보상이며 하는 긴 서두를 가져왔다. 


인증받은 적 없고 권위 없고 '대체 네가 뭔데?' 대표성 없고, '그거 왜 해?' 쓸데없고, '이 시기에?' 명분 없지만, 상 받아서 기분 좋지 않을 사람 없지 않냐는 무책임한 말로 모든 말을 갈음한 채 내 맘대로 어워즈를 시작한다.  




1. 요즘 너무 웃겨 상, <박지민>



눈만 봐도 사르르 웃음이 나는 사이, 별 거 안 해도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는 사이, 보고 있던 팬들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서로 좋아서 죽는 사이, 개개인의 예능감이 탁월하다거나 웃기는 말재주가 있다거나 하지 않는데도 본인들끼리 노는 것 자체가 재미인 그룹. 


"다들 막 재밌진 않는데, 그냥 보다 보면 재밌어." 


그러나 최근 그 말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 예능감이 탁월하고, 웃기는 말재주에 잔망 섞인 움직임이 추가된 '막 재밌는' 한 멤버의 존재감이 도드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탄생화 '조팝'꽃의 발음을 조심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멤버 지민이다. 


미국, 브라질, 영국, 프랑스 <Speak yourself> 투어를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한국의 여름. 일 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던 멤버들에게 모처럼 찾아온 고국의 따사로운 여름이 무척이나 달았을까? 이 즈음 촬영한 제작물엔 멤버들의 하이텐션이 곳곳에 묻어 있다. 최근 공개된 <달려라 방탄>의 97번째 에피소드는 파자마 파티가 주제였는데 멤버들의 하이텐션이 극에 달하던 2019년 여름에 촬영한 만큼 달방 레전드 에피에 단박에 손꼽힐 재밌는 회차였다. 


종류별로 준비된 파자마 중 흰 티셔츠에 꽃무늬가 자잘한 일바지를 선택해 입은 지민이. 일렬로 앉아 제시어를 맞추는 게임을 하는데 '보라해'란 제시어가 엉뚱한 그림을 거쳐 '아미'란 답이 나오자 만약 이걸 틀렸다고 하면 우리를 아미를 부정하는 거라며 "이럴 거면 데뷔 안 했지"라며 벌러덩 뒤로 누워버리고, 흰 양말을 신은 왼발 바닥에는 땡그란 두 눈 아래 'wow'를, 오른발 바닥에는 물결무늬 눈썹 아래 'Hmm'을 써놓곤 발을 번갈아 올리며 음- 하- 음- 하- 잔망을 부린다. 


팬들이 궁금해할까 찾아온 브이앱 라이브에선 도저히 참지 못 해 화장실을 다녀온 뒤 머쓱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세꼬시에 소주 한 잔 마시는 게 제일 맛있다며 성대를 긁는 굵직한 목소리를 낸다. 요즘 지민이 무슨 말만 하면 와하하- 멤버들의 웃음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모두가 지민이 어떤 말을 할까 집중하고 있는 것만 같다. 


2014년, LA로 향하는 비행기에 탄 방탄소년단. 카메라를 든 호석이 영어 프리토킹 시간을 주도하는데, 앞자리에 앉은 지민이 뒤돌아 앉아 띄엄띄엄 교과서 영어를 내뱉자 호석이 말한다. "지민 is very no fun" 그에 맞춰 남준이도 한 마디 거든다. "지민 you got no jams"


2020년, <ON> 막방을 앞두고 찾아온 브이앱 라이브에서 지민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성실히 호응하던 호석이 결국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항상 지민이 말에 다 터지죠. 요즘 지민이가 제일 웃긴 것 같아. 지민이 향기만 맡아도 웃겨"라고.


노 펀 노 잼 지민이가 대유잼 지민으로 변신했다. 최근 지민은 2020 시즌 그리팅, 윤기가 선사했던 상 이름 그대로 '너무 웃긴' 멤버가 됐다. 요즘 지민이 때문에 정말 웃겨 못 산다.



2. 최고의 Flex상, <김석진>



챙겨 볼 프로그램이 없어 내내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3월 7일 토요일 저녁, 괜히 이 앱 저 앱 눌러가며 시간을 버리던 중 띠링, "민슈가 생일 2일 전♡"이라는 제목의 브이앱 라이브 방송 알람이 떴다. 방송을 통해 자주 봐 와 익숙한 사무실에 편안한 차림으로 둘러앉은 멤버들이 보였다. 순식간으로 흐를 시간의 상대성을 체험할 시간이구나. 하는 것을 모두 멈추고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미국에서 먼저 진행된 스케줄에 대한 소회, 세 편이나 찍은 뮤직비디오 촬영 비하인드, 앨범명 숫자 7에 맞춰 각자 가장 좋아하는 일곱 가지 꼽기 등 말 많아 소년단답게 물고 물리는 오디오로 꽉 채운 1시간의 방송이었다. 방송 내내 정신없이 웃느라 광대가 다 아플 지경이었는데 특히 브이앱 라이브 제목에 맞춰 이틀 후인 윤기의 생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단연 압권이었다.


당초 예정대로였다면 윤기의 고향 대구에서 열릴 슈퍼 콘서트가 다음날 있을 예정이었다. 모처럼 본가에서 가족과 생일을 보낼 계획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됐다는 윤기에게 "우리랑 밥 먹기로 한 거 아니었냐"며 멤버들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던 윤기가 그새 분위기를 읽고 "우리도 가족이긴 한데",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저희의 소박한 바람이다"라며 떠드는 멤버들 중 제일 신나 하는 석진을 향해 "그래, 진 형이 쏘는 걸로 하자"며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허허 웃으며 말을 돌리려는 석진을 향해 이미 잘 먹겠단 인사를 하는 멤버들. "너희들이 먹는 거라면 금덩어리도 입 안에 넣어줄 수 있다"는 석진의 말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3월 9일로 넘어온 새벽. 자고 일어난 뒤 맞이할 윤기 생일엔 무얼 하고 지내야 잘 지냈다고 소문이 날까 하며 침대에 눕는데 방탄소년단 트위터 계정에 두 개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하나는 불 붙인 케이크를 들고 식사 장소로 들어오는 지민이의 영상이고, 하나는 계산대 앞에 선 석진이의 결제 영상이었다. 브이앱 방송이 있던 다음 날, 인기가요 방송이 끝나고 먹는 저녁 자리에서 다 같이 윤기 생일을 기념했고 그 자리를 정말 석진이 계산했음을 알리는 거였다.


"총 합해서 87만 8천 원입니다." 


월드 와이드 슈퍼스타에게도 87만 8천원은 큰 돈인지 영상을 찍고 있던 호석이 흐에- 놀란 소리를 냈지만, 스태프들의 식사까지 포함한 금액이니 '이쯤이야' 하는 표정의 석진이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석진이 내민 카드가 VVIP에만 발급되는 초 프리미엄 블랙 카드인 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꽤 화제가 됐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에 석진에게 폭 안고 떨어지는 지민이와, 찐 찐- 노래를 부르는 호석이와 "왜 얼마 나왔어?" 머쓱하게 묻는 윤기가 함께 한 화면에 담겼다. 


장난으로 시작되었어도 이왕 뱉은 말인 만큼, 게다가 낚시 메이트이자 좋아하는 동생의 생일을 기념하는 만큼 석진이 제대로 한 턱 쐈다. 월드 와이드 슈퍼스타 김석진, 정말 제대로 플렉스 했다. 뿌잉 뿌잉 뿌잉- 



3.  베스트 거절상, <민윤기>



홍콩에서 열릴 시상식 <MAMA>를 하루 앞둔 2015년 12월 1일의 저녁. 빼곡히 비쭉 솟은 화려한 마천루의 야경을 창 밖 풍경으로 등진 윤기가 브이앱 라이브를 켰다. 근황 이야기가 이어진 뒤 윤기가 호석이와 함께 유닛으로 찾아오는 콘텐츠 <화개장터>에서 할 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팬들에게 추천을 받아보겠다고 했다. 동시에 접속한 많은 팬들이 각자의 의견을 빠르게 제시하기 시작하자 호텔 가운을 입은 도시남자 윤기가 그 상큼한 민트색 머리와 가장 반대되는 시크한 목소리로 답을 하기 시작했다.


"랩 강좌? 아, 안됩니다. 랩을 하는 순간 정적이 되더라고요"

"메이크업 쇼? 메이크업은 제가 직접 하는 게 아니니까요"

"비트박스? 할 줄 몰라요"

"사투리? 동생들이랑 겹쳐서('만다꼬') 어렵습니다"

"뮤비 해석? 음, 안됩니다. 뮤비는 여러분들의 해석에 맡기는 거예요"

"코에 500원 넣기? 와- 너무 한다 진짜"


묻고 답하는 10분 동안 총 64번을 거절한, 바야흐로 전설의 '거절 민윤기' 선생이 탄생한 날이었다. 


멤버들의 생일만큼 나서서 기쁜 날이 어디 있을까. 생일 이벤트 카페를 돌아다니고, 케이크에 초를 불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그 누구보다 멤버의 행복한 하루를 염원하는 가장 이타적인 하루를 보내게 되는 날. 올해 시즌 그리팅 다이어리엔 멤버 각자의 생일에 각 멤버들은 '팬들이 이것 하나쯤은 즐기며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은 메시지 하나씩을 남겨놓았는데 윤기는 자신의 생일에 치킨을 먹으라고 적어놓았다. 누구보다 잘 지킬 자신이 있지 하며 배달 앱을 넘겨보는 일요일 저녁, 브이앱 알람이 울렸다. 축하를 함께 나누고 싶은 팬들의 마음을 헤아려 자신의 생일 하루 전, 브이앱 라이브로 윤기가 찾아왔다. 


석진이 쏜 삼겹살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와 바로 방송을 한다는 윤기는 고양이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고요하게 팬들의 글을 읽은 뒤 차근차근 답변하기 시작했다.  


"선물 받은 거 알려주실 수 있어요? 선물 안 받았는데. 주지도 받지도 않는, 네 그렇습니다"

"12시까지 하실 건가요? 그건 3시간을 해야 하는 거니까 좀 무리일 것 같고"

"(옷의) 노란색 예뻐요! 이거 노란색 아닙니다 주황색이에요"

"귀걸이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그냥 끼던 거 낀 건데"

"(의자에 걸린) 핑크 플리스 누구 거예요? 제 거 아니에요 누구 건지 모르겠는데"

"향수 사용하세요? 향수 거의 안 써요"


거절 민윤기 선생은 여전했으나 우린 안다. 


"홀리 잘 지내요? 네 아주 잘 지냅니다"

"립 정보 좀? 저흰 립을 안 쓰고 다 색깔 있는 립밤 발라요 립글로스라고 하나요? 그런 거 발라요"

"수학 싫어요! 저도 수학 진짜 싫어했어요 숫자에 약해서"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맛이 뭐예요? 과일맛이요. 예전 편의점에서 팔던 저렴한 오렌지맛 바 아이스크림 스타일로 아삭한 것, 그런 스타일 좋아합니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 넷플릭스에 있는 <아이리시맨> 봤어요 아직 다 보진 못했는데"


답이 없거나 답을 줄 수 없는 질문은 그저 뛰어넘을 뿐이다. 답이 있거나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엔 무심히, 별 거 아니라는 듯 답할 뿐이다. 거절이 아니라 아닌 것에 아닌 거라고 한 것이다. 간단, 명료, 그리고 솔직. 윤기는 늘 그래 왔으니까.


그런 윤기를 보고 있던 중, 어느 팬이 쓴 문장 하나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윤기를 잘 몰랐던 아미들은 거절에 상처 받았지만, 이젠 뭐 "옥케이! 다음 질문!" 이런 상태'라고.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올라오는 팬들의 물음 중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으로 뽑아내어 맞는 건 맞다, 아닌 건 아니다 성실히 답 하고 있는 사람이 윤기라는 걸 우린 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눈을 휜 채 웃으며 그 예의 낮은 목소리로 "안 돼요" 하는 순간 사랑은 더 커진다. 


정말 이렇게 거절이 밉지 않은 남자, 민윤기가 처음이다.  



4. 카페인 권장상, <김남준>



블록마다 공원이 있어 언제든 광합성을 하거나 무료 미술관이 즐비해 언제고 시간을 낼 수 있는 나라가 아닌 만큼 마음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을 우리는 어렵게 찾아냈다. 놀거리가 충분치 않은 곳에서 자라난 신개념 광장인 카페(cafe)는 공원이자 미술관, 바(bar) 역할을 모두 하는 곳으로 바쁜 일상을 잠깐 쉬게 하는 우리의 유일무이한 공간이 되었고, 업무를 하는 중간이나 점심을 먹고 난 다음, 혹은 일부러 짬을 내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은 부지불식간에 우리 일상의 일부가 됐다. 


벌써 8년 차 직장인이 되고 나니 카페인이 주는 여유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아침 출근길에 드라이브 스루에 들러 산 아메리카노 한 잔이 없었다면 아침 회의 내내 졸린 눈을 감출 수 없었을 테고, 점심 후 갖는 커피 타임이 없었다면 30분 만에 점심을 다 먹고 바로 사무실 책상 앞에 앉게 했을 테고, 업무 중간중간 마시는 커피 한 모금이 없었다면 바쁘면 바쁜 대로 무료하면 무료한 대로 보내는 오후 시간을 버티게 하지 못했을 테다.


내가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실감하는 때가 이런 카페인의 위안을 느낄 때다. 그리고 누구보다 카페인의 힘을 찬양하며 음미하는 멤버가 남준이다. 


매 앨범이 발매될 때마다 남준은 앨범을 만들면서 느낀 것들이나 가사에 담긴 이야기, 녹음하면서 겪은 비하인드 에피소드들을 전달하는 브이앱 라이브 방송을 진행한다. 이번 앨범 <Map of the soul:7> 이 발매된 뒤에도 역시 작업실에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와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터라 겨우 몇 곡에 대한 리뷰를 했을 뿐인데 40분이 훌쩍 지났다. 말을 하면서 마시다 보니 벌써 커피 한 잔이 순삭 됐다. 이럴 때 카페인이 필요하다며, 커피를 리필해 오는 동안 화장실도 다녀오고 쉬는 시간을 갖자며 빈 의자를 덩그러니 남긴 채 남준이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수 분이 지난 뒤 천군만마를 얻은 듯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남준이 작업실에 다시 들어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든 채였다. 자리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마셨다. 그렇게 다시 긴 리뷰를 이어나갔다. 카페인의 힘을 빌어.


2019 시즌 그리팅 다이어리 중 남준은 자신의 생일 때 팬들이 즐겼으면 하는 것에 자전거 타기, 공원에 누워 하늘 보기에 이어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 잔 마시기를 적었다. 생일 기념 팬들과 게임을 하고 있는 석진이를 찾아올 때도 남준의 손엔 커피가 들려 있었고, 뉴질랜드로 떠난 <본 보야지 4>에선 역시 한국인이라면 아메리카노라며 너스레를 떨며 매일 커피를 챙겨 마셨다. 가사 작업에 몰두하는 남준이나 친구와 골똘히 대화를 나누는 남준이나 오랜만에 한강을 찾은 남준이를 상상할 때면 그 곁에 놓여있을 커피가 자연스레 따라온다. 


커피는 맛이 다가 아니다. 원두의 향, 손안에 쥐어지는 온도, 따뜻한 첫 모금, 몸 안에 퍼지는 기운,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기호식품이다. 커피 한 잔을 내려 책상 앞에 앉았다. 카페인이 흡수되니 미뤄뒀던 글의 다음 장을 왠지 잘 써 내려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딱 남준이처럼 사유하고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향을 맡고 온기를 느끼고 카페인이 주는 각성에 힘을 얻을 남준이를 떠올린다. 


속도의 미덕이 꾸준함의 미덕만큼이나 중시되는 곳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생각하게 하는 사람. 김남준, 당신을 카페인 권장의 왕으로 임명합니다.



5. 위버스 뉴 출첵상, <김태형>



화장실에 가고 싶어 깬 새벽 사이에, 모처럼 만난 친구와 저녁을 먹던 중에, 한창 업무를 하던 오후에, 잠들려고 누운 늦은 밤에 띠링 도착하는 메시지.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한다. 위버스 알람이구나, 오늘도 태형이 왔구나, 하고.


팬들과의 소통을 위해 마련된 위버스가 공식 카페의 역할을 대체한 지 꽤 되었다. 오랜 역사가 쌓인 카페가 공지사항을 알리는 용도로만 쓰이게 된 것은 아쉽지만, 어쨌든 공식 카페보다 가벼운 플랫폼인 위버스는 역설적이게도 멤버들이 쉽게 댓글을 달고 글을 올릴 수 있는 새로운 소통 공간이 되었다.


작년 9월,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한 달이라는 긴 휴가를 처음 받았다. 각자 가족들과, 친구들과, 혹은 혼자서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작업도 하고 마냥 쉬기도 하며 이따금씩 사진이나 글을 통해 팬들에게 근황을 알리곤 했는데, 그중 석진이는 거의 매일 위버스에 접속해 글을 쓰고 댓글을 남기며 생존신고를 했다. 이 노력을 인정해 '위버스 출첵상'을 받기도 했다. 휴식기의 멤버들을 그리워할 새 없게 만들어준 석진이의 노력이었다. (위버스 출첵상에 상금은 없냐고 너스레를 떨던 석진이의 반응이 화룡점정이었다. 팬들의 글에 아재 개그 듬뿍 담은 썰렁한 답을 달며 껄껄 웃었을 석진이가 쉽게 상상됐다.)


그런 석진이를 지금의 태형이 능가하고 있다.


입덕 한 지 얼마 안 된 팬에게 "기다릴게요 콘서트에서" 답하고, 오늘 무슨 노래를 들을까 묻는 팬에게 pink sweat$의 <17>이나 Ruel의 <Face to face>를 추천하고, 막 강아지를 입양한 팬이 이름을 고민하자 "입이 어두우니 꼬마 어때요 꼬믄 마우스" 라 정해주고, 구몬 아냐는 팬의 물음에 "하몽은 알아요" 농담하는 댓글을 하루가 멀다하고 꼬박꼬박 달고 있다. 


특히 최대한 많은 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본다며, 다양한 게임을 시도했다. 그러다보니 너무 게임에 중독이 되는 것 같다며 본인이 없어도 팬들끼리 게임을 할 수 있게 사비를 들여 장도 만들어놓았다. 방제를 불쑥 툭 던지거나 조금의 센스를 발휘하면 맞출 수 있는 비밀번호를 걸어둔 게릴라성 게임도 진행했다. 쉬는 날, 자신이 좋아하는 걸 팬들과 같이 하자고 귀엽게 찾아오는 것이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거실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며 함께 보자고 얘기하고, 좋아하는 음반을 추천하며 함께 듣자 얘기하고, 연탄이와 함께 하거나 와인 한 잔 하는 일상을 함께 공유한다고 얘기하고, 퇴근길 차 안에서 찍은 어두운 풍경 사진을 찍어 올리며 이 시간을 함께 하자고 얘기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될 수 있으면 자신과 함께 게임하며 집에 있자는 거였는데 게임을 하기 위해 20시간이 넘게 기다리거나 PC방을 찾아가거나 하는 팬들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고, 그 생각을 못했다며 앞으론 자중하겠다는 글로 단순히 함께 즐기는 것 이상의 의도가 있었음을 나중에 밝힌 태형이다. 젠 체 하지 않은 사려로 가득한 태형이만의 표현 방식에 다시금 감동했다.  


태형이는 최근 가장 좋아하는 일곱 가지에 팬들과 위버스 소통하기, 아미들과 게임하기를 꼽았다. 이런 감동덩어리가 정말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6. 거셀의 정석상, <정호석>



[일단 무슨 일을 하든 걱정이 안 된다]


어떤 팬이 쓴 문장만큼 호석이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무대에서 삑사리 한 번 난 적 없고, 춤에 대한 자부심 강하고, 본업을 잘하는 데에서 오는 자존감도 높은 데다, 술을 못 해 허튼 일 저지를 일도 없다. 지금도 마르고 탄탄한 몸을 가졌지만 최근 필라테스를 시작할 만큼 관리도 확실하게 하고, 취향도 확실해 옷이며 액세서리며 자신에게 딱 맞게 꾸미기도 잘하고, 지칠 만도 할 텐데 어떤 환경에서건 웃음을 잃지 않는다. 무대 매너? 대박이고, 라이브는 괴물 수준으로 잘하며, 멤버들이 입을 모을 정도로 깔끔하고, 귀여울 땐 또 엄청 귀여우면서 안무 팀장으로서 엄할 땐 또 엄청 엄하다.


내가 쓰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정말 어쩜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다. 자기 관리의 정석이자 다정함의 정석, 프로페셔널함의 정석이자 귀여움의 정석. 호석이 앞엔 그 어떤 단어가 붙어도 정석이 된다. 


얼굴을 크게 찍은 셀카와 달리 거울에 비친 자신을 찍는 거울 셀카(거셀)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거울에 나와 함께 비친 배경이 내가 현재 있는 곳이 어딘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설명하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해 이제 막 도착한 LA에서, 짐을 다 싼 캐리어 위에 앉은 호텔에서, 아직 의상으로 갈아입지 않은 방송국에서, 한창 연습을 하고 있는 연습실에서, 대기실로 완벽히 탈바꿈한 공연장에서 호석이는 거울 셀카를 찍어 팬들에게 보여준다. "저 곧 촬영하러 가요", "한국으로 출국하려고 준비 다 했어요", "콘서트트 너무 기대돼요" 거울 셀카 한 장에 모든 말이 스며있다. 디테일이 많고, 화려한 색감이 가미된 자신의 사복을 보여주는 것도 덤으로 얹어서.


호석이가 찍는 거울 셀카 배경은 대부분 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공간이다. 애써 있는 체하지 않아도, 부러 자신하지 않아도 호석이의 거셀에선 그게 느껴진다. 여기에 또 이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거셀의 정석이라고. 


호석이에겐 긴 문단이 필요 없다. 


[일단 무슨 일을 하든 걱정이 안 된다]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호석이의 딱 반만 닮고 싶다.



7. 기적의 다리상 , <전정국>



나는 아직도 가끔씩 방탄소년단이 왜 좋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젠 다들 그러려니 한 지 오랜데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겐 이게 궁금한가 보다. 3n살이면서,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쩜쩜쩜 하고. 


"우선 노래들을 본인들이 직접 만드는데 가사도 그렇고 노래가 너무 좋고요, 무대를 참 잘해요."


덕후로서의 삶이 살아온 날과 거의 비슷한 내겐 나를 향한 '왜 저러지?' 하는 뉘앙스가 조금의 타격도 없긴 하나 혹여 다른 덕후들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 적당한 선에서 이 정도로 대답하곤 한다. 처음부터 대답이 궁금해서 질문한 건 아니었다는 듯 금세 대화 주제가 넘어간다. 립스틱을 덧바르려 꺼낸 파우치엔 BTS 로고가 쓰여 있고, 핸드폰 화면은 멤버들 얼굴에 차키엔 주렁주렁 콘서트 MD가 걸려 있는 걸 보고 내 대답을 어떻게 느꼈을지는 그다음 문제다. 그쯤 속으로 생각한다. 방탄소년단이 왜 좋냐니요, 일단 얼굴 봐요 얼굴.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


가까이 보거나 멀리 보거나, 오래 보거나 짧게 보거나. 외모 되고, 실력 되고, 성격 다 되는 멤버들이기에 지금 국내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보이 그룹이 됐다. 특히 핸드폰 카메라로 막 찍혀도 반짝이는 멤버들을 마주할 때면 방탄 얼굴 부심에 어깨뽕이 가득 차오른다.


좋은 카메라로 공들여 찍은 화보나, 정성 들여 보정한 사진이나, 장점을 잘 부각하기 위해 크롭 한 사진보다 팬들이 막 찍은 핸드폰 카메라 사진을 보면 더 그렇다. 뷰 파인더를 오래 들여다보며 결정적인 한순간을 포착한 것이 아닌, 두 눈으로 담느라 제대로 찍히는지도 모른 채 핸드폰 카메라를 수없이 막 누른 사진들에도 흐트러진 모습이 하나 없기 때문이다. 아니 화보보다 되려 더 잘생겼다, 비현실적 이게도. 


1초도 허비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무대에서 몸을 항상 긴장시키고 있기 때문일까. 무대와 스탠딩석 거리가 가까웠던 홍콩 콘에서 찍힌 못 보던 사진을 오늘 또 발견했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의상, 안무를 하듯 흩날리는 머리카락, 팬들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눈, 타이트한 바지로 드러나는 탄탄한 몸매. 와, 어쩜 이럴 수 있지. 별 수 있나. 또 저장, 저장, 저장. 정국이가 또 정국이 했다.


미국의 대표 토크쇼 중 하나인 제임스 코든 쇼에서 방구석 공연을 주제로 한 홈 페스트(Homefest)를 방송했다. 존 레전드, 두아 리파, 빌리 아일리시, 안드레아 보첼리 등 쟁쟁한 라인업에 방탄소년단 역시 이름을 올렸다. 한국 시간으로 3월 31일 오전, 자신의 차고지를 스튜디오로 꾸민 제임스 코든의 인사를 시작으로 배경만 소박한, 화려한 공연이 시작됐다.


애완견을 안거나, 가족이 배경으로 등장하거나, 편안한 차림을 한 가수들의 공연이 있은 뒤 방탄소년단의 차례가 됐다. 루즈한 사복을 입은 멤버들은 연습실을 배경으로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선곡했다. 다른 가수들과 달리 안무가 있는 곡이지만 홈 페스트의 취지를 살려 힘을 조금 뺀 채였다. 집에서 즐기는 듯 부담스럽지 않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중 올블랙에 갈색의 워커에 포인트를 준 착장, 짧은 패딩 아래 존재감을 내뿜는 스키니하고 긴 다리의 정국이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화려한 카메라 스킬과 조명이 없어 도리어 더 멋있다. 막 찍힌 핸드폰 사진들을 보며 느꼈던 그 감정 그대로다. 이렇게 찍으니 정국이 잘생긴 거, 몸매 예쁜 거, 특히 다리 긴 거, 비율 환상인 거 너무 잘 알겠다. 짧은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가끔 내 다리를 힐끗 내려다보며.


이 방송 직후 트위터의 월드와이드 트렌트에 'Jungkooks'이, 한국 실시간 트렌드엔 '전정국 다리'가, 미국 실시간 트렌드엔 'Jungkooks'와 'Jungkooks legs'가 동시에 올랐다. 한국과 미국 포함 전 세계 총 50개국의 실시간 트렌드에 정국의 이름이 올라왔음을 기사로 확인했다.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이때다 싶어 다들 자신들이 저장한 긴 다리의 정국이 사진을 트위터에 업로드 하기 시작했다. 그 날 저장한 사진들이 사진첩에 아직도 한가득이다.


힘주어 찍지 않은 그 짧은 영상으로, 그렇기에 잘생긴 존재 더욱 드러나 전 세계 트위터 트렌드를 장악한 정국이와 꼭 뻗은 정국이 다리에게 이 말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정말 기적의 다리다.




P.S



2020 시즌 그리팅 촬영장, 고생한 멤버들을 위해 각자 한 명씩 이름을 붙인 상을 전달하는 작은 어워즈를 개최했다.


정국은 태형에게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그 이상일 것 같은데 또 지금 다시 상상해보니 그 상상보다 훨씬 더 상상 그 이상'을, 태형은 남준에게 '최고의 도움상'을, 남준은 정국에게 '뉴 슈퍼 라이징 울트라 메가톤급 그레이트 완전 황제 킹왕짱 쩔어 싱송라(싱어송라이터)상', 석진은 호석에게 '제2의 리더상'을, 호석은 석진에게 '김석진상'을, 윤기는 지민에게 '요즘 너무 웃겨 상'을, 지민은 윤기에게 '정상'을 수여했다.


멤버들의 일상에 웃음을 주고, 자작곡을 만들 때 도움을 주고, 현재 작업 중인 곡을 꼭 공개했으면 하는 마음 등의 이유로 이름 붙인 상이었다. 이름은 다 달랐지만, 멤버에게 느낀 고마움이 담긴 건 매한가지였다. 시즌 그리팅 촬영분의 한 꼭지일 뿐이었지만 상을 수여하고 수여받는 동안 모두 신이 나서 웃었다. 상 이름을 곱씹어보기도 하며.


2019 연말 시상식에서 가장 많이 이름을 불린 가수는 방탄소년단이었다. 일곱 멤버의 손이 부족할 정도로 트로피를 가득 쥐었다. 대상보단 인기상의 의미를, 상의 개수보단 열심히 투표해준 팬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멤버들을 봤다. 시상식에서 받은 상과 트로피는 지금 잘 하고 있다는 칭찬이자 더 열심히 하자는 다짐의 원천이 되었을 테다. 


서로 주고 받는 작은 상에도 행복해 웃었던 만큼 앞으로 수여받을 여러 상들의 의미를 자주 상기해줬으면 좋겠다. 인증받은 적 없고 권위 없고 대표성 없고, 쓸데없고, 명분까지 없는 내 맘대로 어워즈는 여기서 마무리한다. 


아, 역시 방탄소년단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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