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Apr 04. 2020

43. 바이러스가 바꾼 일상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43



[현대카드 PRIVIA 항공]

[Web 발신]


회원님이 요청하신 환불 접수

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환불처리는 접수일로부터

7~30일 정도 소요됩니다.

(항공사/결제수단에 따라 상이)

현대카드 PRIVIA 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콘서트 보러 가러 예약한 뉴욕, 시카고, 바르셀로나행 항공권의 환불 처리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줄줄이 도착했다. 지난주엔 취소한 호텔 결제 금액이 고스란히 환급되었다.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이토록 달갑지 않았던 때가 또 있을까 싶다.


한국 콘서트 취소가 결정된 2월까지만 해도 해외 콘서트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괜찮을 거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러스가 잠잠해지기는 커녕 WHO가 팬데믹을 선언할 정도로 장기화되고 있다. 3월로 예정되었던 유럽 콘서트 티켓팅은 일단 4월 말로 미뤄졌고, 미주 콘서트 일정은 전면 연기됐다. 전체 일정이 불투명해졌다. 취소된 항공권 중 일부는 수수료가 발생했다. 콘서트를 꿈꾸게 했던 쓰린 대가(代價)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 티켓팅한 미주 콘서트는 좌석은 그대로 유지된 채 공연 일정만 변동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추후에 공개될 콘서트 날짜에 맞춰 출국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아,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결과다. 뉴욕, 시카고, 바르셀로나 콘서트 일정에 맞추어 여행을 다녀오고, 여름 이후 바빠질 업무를 그 힘으로 처리하고, 일이 마무리되는 겨울엔 시상식이나 연말 무대를 챙겨보거나 참여하며 마무리할 예정이었던 올해의 결심들이 와르르 사라졌다.


기약 없는 기다림 그래도 내게는 소중해, 너를 느낄 수만 있다면 영원히 너를 기다릴 수 있어


오래전 좋아했던 노래의 가사 한 줄이 귓가에 맴돈다. 명확한 기약 없는 기다림. 영원히 기다릴 수 있다지만 가만히 있다가도 한숨이 나고, 이따금씩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듯 멍한 기분이 든다. 나조차도 이런데 멤버들은 어떨까. 그런 상대적 마음으로 허무함을 누른다.


바이러스가 일상을 완벽히 지배했다.


제목을 훑고 표지를 확인하고 목차와 작가 약력을 읽고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뒤 책을 구입하고 나면 왠지 어느 정도 책을 읽은 느낌이 들어 책장에 그대로 꽂아놓는 경우가 많다. 어느새 이렇게 책이 또 쌓였지. 빈 공간 없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 앞에 섰다. 이 정도면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사는 행위를 더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잠시 고민하다가 밀란 쿤데라 책을 빼어 들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안 읽고 내내 꽂아두고만 있을 것 같은 두께였고, 그 두께는 일이 없는 회사에서 하루 종일 붙잡고 있기 딱 좋은 정도였기 때문이다. 가방에 책을 넣는 것으로 출근 준비를 완료했다.


상반기에 계획되었던 행사가 모두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 고로 바쁘게 진행할 업무가 없어져 갑자기 시간이 붕 뜬 채 지낸지도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이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체할 만한 기획도 없다. 게다가 우리 회사는 재택근무가 본질적으로 불가하다. 취재원들을 만나거나, 주조에서 방송을 송출하거나, 영상물을 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안의 이유로 시스템 자체를 외부에서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일은 없으나 매일 출근을 해야만 하는 회사에서 뾰족한 답이 없는 회의를 하고, 근근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언제 쓰일지 모르는 제안서를 작성하다가 대부분을 책을 읽고 퇴근한 지 오랜 날이 지났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추리 소설 한 권을 이틀 만에 독파한 게 어제였다. 아침 일찍 간단한 결재 서류를 작성하고 나니 또 시간이 남는다. 가방에서 밀란 쿤데라 책을 꺼냈다. 이 책은 또 얼마 만에 다 읽게 될까. 뿌듯하다기보단, 그냥 모든 것에 무기력하다. 요즘 부쩍 느낀다. 내가 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구나-라고


회사와 집 딱 가운데에 영화관이 위치해 퇴근길에 영화 한 편을 보고 퇴근하는 유일한 낙도 사라졌다. 폐쇄된 공간에 두 시간이 넘게 앉아 있는 것만큼 '사회적 거리두기'와 먼 게 없기 때문이다. 곧장 집으로 도착했더니 아직도 창 밖이 환하다. 팬들을 만날 수 있는 행사가 없기 때문에 요즘은 <달려라 방탄> 새 에피소드와 가끔씩 찾아오는 브이앱 라이브, 위버스 댓글 외엔 덕질 떡밥까지 없다. 벌써 반을 읽은 책은 회사 책상에 두고 왔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활자와 싸움했더니 퇴근해서까지 책을 찾고 싶지 않다. 뭘 하지. 결국 또다시 와인을 꺼내왔다. 이렇게 중독의 길로 빠지는 건 아니겠지.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 최근 몇 번이고 다시 본 <본 보야지> 뉴질랜드 편을 다시 틀었다.


"아- 방탄소년단 보고 싶다."


맞다. 사실은 이게 제일 문제다. 눈 앞에 움직이는 방탄소년단이 너무나 보고 싶은 밤이 또 하루 지났다.






레모나 한 봉지를 꺼내 먹은 뒤 지민이의 얼굴을 잘라 다이어리에 붙였다. 멤버들의 얼굴이 붙어 있는 레모나 봉지를 쓰레기통에 그냥 버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다이어리에 붙인 뒤 그 밑에 간략한 일기를 쓰고 있다. 하루에 레모나 하나, 일기 하나. 이번엔 정말 제대로 써 볼 거야 하는 의욕으로 쓴 일부와 생각날 때 가끔씩 띄엄띄엄 쓴 일부만을 채운 일기장만 못해도 열 권이 넘는데, 이 방법 덕에 4월이 지나와서도 매일 꼬박꼬박 일기를 쓰고 있다. 포근한 연두색 니트를 입은 지민이의 얼굴 밑으로 펜을 놀렸다.


침대, 에어컨, 텔레비전, 세탁기, 침대, 소파...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저서 <자기만의 방>을 통해 여성이 자유롭기 위해선 '고정적인 소득'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와인 셀러, 전자레인지, DVD 플레이어, 식기류...


나는 지금 방 세 개가 딸린 내 집을 가정하며 무엇부터 채워 넣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책상은 식탁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고, 소파는 생각보다 우선순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선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적어볼까.


침과 공기를 통한 비말형 감염인 코로나 19의 기본적인 방역 방법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중요해진 요즘이 되니 <자기만의 방>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앎과 차원이 다른 필요성을 피부로 느낀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의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 결과물인지를 매일 매 시간 깨닫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취직을 한 뒤 부모님 집에 다시 돌아온 내게 대부분 이렇게 말했다. "집값 안 들고 얼마나 좋냐"라고. 나도 동의했다. 공중에 흩어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는 월세를 그저 아끼는 정도가 아니었다. 월세만큼 다른 걸 할 수 있었다. 여행을 갔고, 맛있는 걸 사 먹었고, 장바구니에 물건을 하나 더 넣어 결제했다. 나는 고정비용이 거의 없는 월급의 대부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썼다.


남동생이 타 지역에 정착하고, 여동생이 결혼을 하면서 내 집에 대한 우선순위는 또 한 칸 뒤로 밀렸다. 새벽같이 일을 하러 나간 뒤 초저녁부터 잠을 청하는 엄마와 일반 회사원인 내 일상 패턴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선배들이 하도 성화여서 든 청약통장은 그저 적금을 넣는 정도로만 여겼고, 분양이나 전세, 매매 등의 단어는 그저 뉴스의 한 소재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 정도면 불편 없이 충분하잖아" 했으니까.


그런 줄 알았다, 지금까지.


영화를 보거나 서점에 들르지 않고, 카페를 가거나 약속을 갖지 않고 집으로 곧장 퇴근하면서 엄마랑 부딪히는 일이 많이 생겼다. 우선은 와인을 마시는 내게 훈계가 시작됐다. 가게를 열기 위해 새벽에 출근하는 엄마는 보통 저녁 일곱 시가 넘으면 잠을 청한다. 내가 간단히 볼 일을 보고 퇴근하면 일곱 시 반 즈음. 간단한 안주거리를 준비한 뒤 와인 한 잔을 하며 방탄소년단 영상을 보기 시작하는 시간은 엄마가 숙면에 빠진 뒤인 여덟 시. 서로 터치할 것 없이 각자의 밤을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었는데 내 퇴근 시간이 빨라지면서 이 시간이 겹치게 된 것이다.


꼼짝없이 집에 붙어 있어야 하는 주말은 더 했다. 배달 음식으로 매운 음식을 시키는 것도, 아침 일찍 세탁기를 돌리는 것도, 노트북에 붙어 있는 것도,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도 쉽게 다툼의 빌미가 됐다. 맏딸인 내가 결혼한 여동생이나 독립한 남동생에 비해 덜 자란 자식 취급을 은연중에 받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장을 볼 땐 언제나 내가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도, 배달 음식을 늘 내가 대표로 결제하고 있었다는 것도, 집에 필요한 물건이나 가전제품이 생기면 그것 역시 항상 내가 챙겼다는 것도 불현듯 인지했다. 월세를 내지 않는 경제적 이득만큼의 소임을 어떻게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이 많지 않은데 이상하게 몸이 더 피로해 오늘은 푹 잠을 청하자 싶은데 코로나 19로 한 달 넘게 외출을 삼가고 있는 조카가 아침 일찍부터 방문을 넘어와 놀아달라 떼를 쓴다. 거실로 나가니 어질러진 장난감이 한가득이다.


일상에 자유가 배제되니 가장 필요한 건 다름 아닌 나만의 공간이었다.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나 투자의 개념은 모두 부차적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때에 하고 마음 편하게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예측 가능한 동시에 안정적인 곳. 이 이유만으로 모든 설명이 끝난다.


DVD 플레이어, 빔 프로젝터, 고사양 스피커, 장식장...


칸이 모자라 레모나 한 봉지를 더 뜯어먹었다. 비타민 허용량이 다소 초과됐다. 이번엔 태형이의 얼굴을 잘라 지민이의 옆에 붙인 뒤 밑으로 추가 리스트를 적어 나갔다. 게다가 나는 취미와 특기 모두 방탄소년단 덕질인 덕후 아닌가. 자기만의 방은 덕질을 위해 더욱더 필요하다. 출근 준비를 할 때면 매직샵 DVD 영상을 플레이하고, 퇴근하고 나선 빔 프로젝터로 <달려라 방탄>을 보고, 주말이면 고사양 스피커에서 방탄소년단 노래나 멤버들이 추천한 노래를 근사하게 듣고, MD들은 일정한 기준에 맞춰 장식장에 정리해 놓고 사는 것만큼 훌륭한 덕질 라이프가 어디에 있으랴. 거실 한쪽엔 LP를 틀 수 있게 시스템 해놓아도 괜찮겠다. 그동안 꽤 많은 바이닐을 모아놓은 데다 방탄소년단도 처음으로 <ON> 바이닐을 선보였다. 자주 틀지는 못 해도 가끔 분위기 내고 싶을 땐 딱일 것 같다. 장식장 옆에 LP라고 간단히 적었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니 사무실에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도 줄어든다. 월급 루팡도 하루 이틀이지 바쁘지 않은 사무실에서 업무 시간을 버티는 것도 모두에게 고역일 테다. 오늘도 정시보다 조금 이른 퇴근이다. 뒷 축이 무겁게 퇴근하는 부서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체온을 체크하느라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어야 하는 안내실 직원께 인사를 하고 나왔다. 여러 개의 출입구를 봉쇄하고 메인 입구만 열린 터라 빙 돌아 주차장으로 걸어왔다.


후, 그동안 안 모으고 뭐 했지

뭐 했긴. 여행 다니고 공연 보고 맛있는 거 먹으며 덕질했지


풍족한 통장 잔고만 있으면 자기만의 방 구하기야 별 거 아닌 일이다. 그러나 훤히 아는 내 통장 잔고 규모에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 슬며시 나타났다가 존재감 있는 두둔 앞에 꼬리를 내렸다. 그 모든 경험들 덕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걸 부정할 수 없으니까. 런던의 샹그릴라 호텔 앳 더 샤드의 욕실에서 거품 목욕을 하며 내려다본 타워브리지와 템즈강이 얼마나 반짝였는지, 시카고 랄프 로렌 식당에서 주문한 필레 미뇽의 육질이 얼마나 부드럽고 맛있었는지, 뉴욕의 타임스퀘어 야경이 얼마나 많은 위안을 가져다 주었는지, 혼자서 즐기는 홍콩 디즈니랜드가 얼마나 재밌었는지 다 아는 오늘의 내가 되었으니까. 그 과정들로 경험과 사고를 얻었다. 멋지게 상상했던 것들의 실제는 별 거 아닐 수 있음을, 사소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것일 수 있음을 알게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진 이 경험들이 내 인생에 우선순위가 아니었던가.


여행도 쉽지 않고, 바깥을 돌아다니며 허튼 사치를 부릴 수 없는 날들이다. 얕은 통장 잔고야 뭐,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니까. 게다가 이제 그 우선순위를 바꿔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부터 하면 된다. 차에 시동을 걸고 지민이가 브이앱 라이브에서 추천한 Sufjan Stevens의 <Should Have Known Better> 노래에 맞춰 차를 출발시켰다.


자기만의 방에서 더욱 풍족한 덕질을 해야지. 글도 쓰고, 영화도 보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내키면 와인을 마시며 생산적인 동시에 소비적인 일상으로 가득해야지. 물론 앞으로 신중해야 할 결정의 순간들이 많이 남은 만큼 너무 급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다. 어쨌든 지금 나는 지금을 인지하지 않았던가. 정 답답하면 나와서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이 작은 공간도 있다. 무기력했던 일상이 깨끗하게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불분명했던 어떤 지표가 하나가 건져 올려진 기분이다.


코로나 19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마비되자 도리어 탄소 배출량이 큰 폭으로 감소돼 기후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계절성 감염병인 눈병과 독감 등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관광객들이 줄어 관광업에는 많은 타격이 생겼지만, 수상 버스나 곤돌라 등의 운행이 멈추면서 60년 만에 운하가 투명해졌다. 코로나 19가 인간에겐 바이러스지만 자연에겐 백신이라던 어떤 댓글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엔 이유가 있는 법인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게으른 성장을 하고 있던 내게 독립이라는 목표를 세우게 했다. 아직 준비할 게 한참이나 남았지만 시점은 확실하게 결정했다. 그때까지 차근차근 노력해 갈 것이다.


코로나,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될 것 같다. 콘서트를 못 보게 한 주범이라는 굴레까지 함께 씌워서.




P.S


바이러스가 무력한 일상도, 내 집에 대한 열망과 목표도 가져왔지만 살도 가져왔다. 집에 오래 있으면서 냉장고를 여닫는 횟수가 늘어나고 부엌에서 사부작 거리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요즘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확찐자' 라고도 한다던데.


바이러스가 확실히 일상을 점령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42. 킬링 파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