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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Oct 25. 2020

54. 시간을 달리는 소녀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54



나는 보통의 평범한 취향을 가진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기에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에 비교적 쉽게 감화된다. 인스타그램에 자주 언급되는 책은 대체로 다 재밌었고, 요즘 '핫'하다는 카페도 대부분 만족해한다. 남들이 맛있다고 하는 것들은 내 입맛에 대체로 잘 맞아하고 최근 구매한 접시는 가장 많은 판매량을 자랑하는 품목이다. 내가 사랑하는 방탄소년단도 빌보드 1위 가수 아닌가.


그러나 영화만큼은 예외다. 남들 다 본 <명량>이나 <극한직업>, <7번 방의 선물>, <부산행> 같은 영화도, 전 세계가 시리즈로 열광하는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도, <인터스텔라> 같은 SF 대작 영화도, 박찬욱 감독 작품도 다 안 봤다. 그렇다고 확고한 취향이 있어 특정 감독이나 특정 장르를 파는 것도 아니고, 선댄스영화제 수상작이나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같은 작품들을 선호하는 것도 아니며 특정 평론가의 평점에 결정을 맡기는 편도 아니다. 이유 없는 구미가 당기는 영화여야 한다. 이를테면 배경이 파리라거나, OST가 귀에 확 꽂힌다거나, 선호하는 특정 관에 걸려야 한다던가 하는.  


대체 언제쯤 질릴 수 있을까 싶던 <위플래쉬>나 이제 대사를 줄줄이 외우는 <미드나잇 인 파리>, 영화의 배경을 직접 찾아다니는 여행을 하게 한 <킹스맨>이나 <비긴 어게인>, 여운에 젖어 며칠을 헤맸던 <벌새> 등은 그 이유 없는 구미 덕에 만난 영화다. 그리고 이런 영화를 남들 다 본 <신과 함께>나 <타짜>, <범죄도시> 같은 영화를 숙제처럼 찾아보는 대신 다시 보고 또 본다. 적게는 몇 번, 많게는 수십 번씩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영화관에서 n차 관람을 한 유일한 애니메이션 영화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내용은 이렇다. 문과냐 이과냐 진학의 진로에 놓인 평범한 고등학생 마코토는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 타임리프 능력을 얻게 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가다 전철에 부딪힐 뻔한 순간, 직전으로 돌아와 사고를 면한 경험을 한 마코토는 묘한 기운에 사로 잡히지만 곧 자신이 갖게 된 놀라운 능력에 적응하게 된다. 아주 사소한 방식으로. 좋아하는 푸딩을 몇 번이고 다시 먹고, 지각을 면하고, 노래방 이용 시간을 원하는 때까지 늘리고, 시험 점수를 올리고, 창피한 실수를 만회한다.


온 세상이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만 같았던 마코토. 그러다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 치아키가 ‘사귀자’는 고백을 해온다. 친구 사이가 깨지는 것이 두려운 마코토는 타임리프를 통해 고백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으로 시간을 돌린다. 매듭짓지 않은 채 시간만 돌리는 선택을 한 마코토는 그럼에도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난다는 것을, 완벽한 하루란 건 없다는 것을, 그리고 타임리프를 사용할 횟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한 번을 쓸 수 있는 타임리프 능력을 '타임리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용도로 쓴 마코토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고스케를 더 이상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울부짖고, 그 순간 고스케를 살려낸 치아키의 비밀을 알게 된다.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작품을 보러 왔다가 현재의 삶이, 마코토가 좋아져 이 여름을 함께 보낸 치아키는 다시 원래의 삶인 미래로 돌아가기 전, 마코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현존하지 않은 2D 캐릭터에 이토록 설렐 수가 있을까. 앞으로 펼쳐질 유한한 나이 듦에 이토록 초연해질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매번 똑같이, 완벽하게 설레는 이 한 문장. 노을 지는 아라카와강, 저 멀리 다리 위로 지나다니는 차량들, 어떤 마음으로 이 문장을 꺼냈을까 싶은, 긴 머리로 가려 보이지 않는 두 눈과 멀어지는 치아키. 헤어짐에 결코 눈물만 남기지 않게 한 이 마지막 장면을 위해 이 영화를 또 보고, 또 똑같이 설렌다.


10월 10일, 11일, 이틀간 열렸던 <Map of the soul ON:E> 콘서트가 끝이 났다. 아미 밤에 노트북에 TV까지 제대로 각 잡고 봤던 첫날과 달리 이튿날 공연은 오후 4시라는 시작 시간이 주는 밝음에 다소 어리둥절하게 봤다. 티켓팅을 하고, 공연 당일 채비를 하고, 공연장에 도착하고, 기다리고, 그 분위기를 느끼고, 소리 내어 열광하고, 숙소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모두 공연에 포함되는구나 했다. 물론 그럼에도 행복했지만.


체조경기장을 360도로 두른 전광판 속 팬들의 얼굴과 함성 소리가 이제는 좀 적응됐는지 <IDOL>에서 <Dynamite>로 이어지는 앙코르 무대는 멤버들의 활기로 가득했다. 사방으로 뻗어있는 무대를 뛰어다니던 그때, 명확하게 들려온 한 문장.


"미래에서 만납시다"


나는 드디어 현존하는 치아키를 봤다.






추석 연휴를 허무하게 보냈다. 타지에 흩어져 사는 친척들 모두 각자 집에서 연휴를 보내기로 했고, 어딜 돌아다니기도 마땅치 않은 시기라 내내 집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차려 먹고 예능 프로그램을 돌려보다가 와인을 꺼내 마시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거나 화장 안 한 맨 얼굴에 마스크만 끼고 드라이브 스루로 커피 한 잔을 사서 오거나 잠깐 본가에 들러 갈비찜을 먹거나 했다. 하루하루 시간은 성실하게도 지났고, 생산적인 일이라곤 하나도 없이 5일의 연휴가 지났다.


이제는 좀 익숙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은 채 어느덧 10월. <Speak yourself> 투어가 끝나자마자 모두가 올인해 준비했던 <Map of the soul ON:E> 콘서트도 결국 비대면 온라인 개최가 결정됐다. 날짜는 10월 10일과 11일, 그것도 고작 이틀 2회 공연. 혹시나 오프라인 공연이 개최될까 싶어 연차 휴가를 아끼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열흘이나 남은 연차 휴가는 어떻게 써야 하나.


그럼에도 콘서트가 포함된 이 이틀을 추석 연휴처럼 아깝게 보낼 수는 없었다. 바닷바람도 쐬고 오고, 오는 길에 맛있는 음식도 먹고, 그렇게 기운 얻어 콘서트를 즐겁게 봐야지 싶었다. 지도 어플을 열어 가까운 바다를 검색해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좁고 답답한 서해보단 깨끗한 남해가 좋을 것 같은데.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이동하면 보성까지 금방 닿는 것으로 나온다. 그래, 이것부터다.


가을 하늘은 나 같은 파워 집순이도 움직이게 한다. 막상 당일이 되니 이도 저도 귀찮아져 좀 쉬다가 콘서트를 볼까 싶었는데 커튼을 젖히고 푸른 하늘을 보자마자 무조건 가야 했다. 씻고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 나왔다. 마음이 급해 서둘렀더니 준비에 4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가을 추(秋)와 밀 추(推)가 같은 음을 가진 것이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 '글 쓸 때 들으면 좋은 음악', '뉴욕에서 듣는 음악' 등 여러 재생목록을 만들어 놓은 MP3에서 '드라이브 송 모음' 재생목록을 플레이했다. 첫 곡은 <Dynamite>. 내비게이션을 작동시키고 출발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고속도로를 무난하게 달려 율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날 좋은 토요일 오전이라 붐빌 줄 알았는데 몇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래놀이를 즐기는 것 외엔 무척 한산했다. 걸음을 바삐 옮겨 해수욕장 끝자락에 다다라 마스크를 벗었다. 바다 냄새를 이렇게 온전히 맡아본 게 언제쯤인가. 가방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기대 세웠다. 동영상 녹화를 눌러놓고 그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이런 하루의 기록이 필요했다. 적어도 이런 하루는 있었다고 남겨야 했다.


해수욕장의 끝에서 끝까지 몇 번을 걸어 다니며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 들은 뒤 신발에 묻은 모래를 털고 나와 다시 차 안으로 들어왔다. 적당히 달구어진 기분에 콘서트 보기 딱 좋은 날이다. 시동을 거니 <Danger>가 때맞춰 흘러나온다. 드라이브에 이만한 곡이 역시 없다. 볼륨을 크게 키웠다. 한동안 바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충분한 1시간이었다.


모래 먼지가 묻은 신발을 닦아 정리한 뒤 집으로 들어왔다. 밥을 챙겨 먹고 반신욕도 하고 나니 금세 나른한 오후의 빛이 스몄다. 콘서트 시작 1시간 전. 콘서트를 볼 수 있는 사이트에 접속했다. TV로는 메인 캠에 고정했고, 노트북으론 분할 화면을 세팅했다. 아미 밤에 건전지를 넣어 불을 밝혔고, 재방송이 없는 공연이기에 그때그때 차오르는 감정과 공연 셋 리스트를 기록할 노트도 챙겼다. 물론 와인도 함께. 노트북을 켜는 동시에 번개맨을 틀어달라 쫓아오는 조카와 환호성을 조금만 터트려도 '언제 철이 들까'하는 엄마의 눈초리를 예상해서 지난 방방콘은 숙소를 예약해서 봤었다. 막연했던 독립을 실행시킨 최후의 계기였던 방방콘 다음의 콘서트를 독립한 내 집에서 보는 구나. 바이러스가 큰 일 했다.  


7시. 화면이 전환되고 현장으로 연결됐다. 고적대의 화려한 등장으로 시작한 첫 곡은 아직 관객이 있는 상황에서 한 번도 선보인 적이 없는 <ON>이었다. <N.O>와 <We're bulletproof pt.2>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작정했었구나' 했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군무와 비트. 이걸 솔져 필드나 멧 라이프에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욕지기처럼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돌출무대 바로 앞 구역으로 티켓팅을 다 마친 상황이었는데, 무대를 사방으로 가로지르며 부서져라 공연하는 멤버들의 숨결을 지척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지나오지 않은 후회들이 감상을 방해했다. 올드 스쿨 패션을 입고 단상 위 교탁에 선 느낌으로 부른 <Persona>나 다 태워버릴 듯한 세트와 어우러진 <상남자>나 뮤직비디오 배경을 그대로 차용한 <Shadow>나 지민이의 독무를 아름답게 살린 <Black swan>도 '이건 실제로 봐야 하는데', '취소한 티켓이 너무 아깝다' 하며 봤다. 집중이 쉽지 않았다.


순백 같았던 유포리아 정국이는 근육질의 몸을 드러낸 <시차>의 정국이가 되었고, 스노볼 속 인형 같았던 세렌디피티 지민이는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이 되어주겠다는 마성의 <filter>가 되었다. 말 그대로 어린 왕자가 된 석진이는 언제나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MOON>이었고, 회전목마에 올라탄 그때의 자신을 마주한 태형이는 <Inner child>의 세련된 퍼포머였고, 다양한 색을 입은 호석이의 <Ego>는 각자의 이야기를 하나로 통합하고 매듭짓는 마무리였다.


체조경기장이 이렇게 작았나. 360도로 연결된 무대, 4개의 커다란 메인 스테이지, 연동된 화면으로 나타난 적어도 5천 명은 넘어 보이는 팬들의 얼굴. 슬로건과 아미 밤을 들고 열심히 응원하고 있는 팬들의 얼굴을 가까이하고 싶어 눈을 못 떼는 멤버들의 모습을 봤다.


직접 마주하고 보는 공연보다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른 것 같다. 벌써 마지막 곡을 앞두고 팬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시간. 차례가 된 지민이 마이크를 드는데 벌써부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인간 박지민보다 방탄소년단의 지민으로서 항상 준비된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지민이 채 정제되지 않은 부산 사투리로 팬들의 모습에 너무 즐거워하는 멤버들을 보자 앙코르 때부터 집중하지 못했음을, 사실 왜 하필 이런 때 바이러스로 콘서트를 하지 못하게 되고 예정된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된 건지 억울해했음을, 이렇게 공연이 정말 하고 싶었음을 고백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하고 싶은 말들이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지민이기에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곡절을 지나왔을까 싶어 함께 울었다. 우리 모두에게 괜찮지 않았다고 말하는 순간이 필요했다.


팬들이 있지만 없는 공연. 콘서트 하는 느낌이 사실 덜 들었다고, 50%의 재미를 느꼈다는 석진이의 솔직한 표현에 공감하며, 공연이 끝나가서 아쉽지만 내일이 남아 있다는 위안으로 마지막 곡 <We are bulletproof: the Eternal>을 따라 불렀다. 또 겨울이 와도, 누가 날 막아도 걸어가겠다는 가사를 곱씹으며.  


몇몇 공연 후기글을 찾아보다 늦게 잠들었더니 눈도 늦게 떠졌다. 나눠 받은 종이 슬로건이 행여 구겨질까 조심히 안은 채 꽉 막힌 공연장 출구를 천천히 빠져나와, 질서를 지켜달라 외치는 지하철 안내원의 지시에 맞춰 잰걸음으로 지하철에 올라탄 뒤, 오늘 누가 어땠고 어디서 좋았고 재잘재잘 공연 감상을 나누는 팬들의 이야기를 조금 듣다가, 이어폰으로 오늘 공연했던 노래들을 크게 들으며 숙소에 도착해, 미리 사다 놓은 와인 마시며 트위터에 올라온 홈마들의 프리뷰 사진을 저장하고, 그러다 멤버들이 올린 셀카나 글을 확인하고, 다음날 콘서트를 위해 적당한 때에 잠들자 하며 무겁고도 가벼운 몸을 뉘인 밤이 아닌데도 그랬다.


어떤 평론가가 그랬다. 자신은 책을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니라 책의 표지를 보고, 소개글을 읽고, 목차를 읽고, 주문을 하고, 기다리고, 책을 꽂아놓는 모든 행위가 독서에 포함되는 거라 생각한다고. 내게 콘서트가 그랬다. 티켓팅을 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현장에 일찍 도착해 분위기를 느끼고, 공연 시작 전 뮤직비디오에 응원법을 점검하고, 공연을 보고, 끝나고 돌아오고, 그 공연을 곱씹는 모든 행위가 콘서트였다. 집에서 화면으로 보는 콘서트는 콘서트가 맞고도 아니었다.


일찍 일어나 빵집에 들러 갓 구운 빵도 사 오고, 영화도 한 편 챙겨볼까 했던 것이 다 귀찮아졌다. 이벤트 존에 일찍 도착해 럭키 드로우에 참여하거나 선물을 받기 위해 부스를 찾아다닐 필요도 없는 공연인데 뭐하러 기운을 빼나 싶어 졌기 때문이다. 나른한 오후의 빛이 새어 들어오는 침대 위에 누워 오수를 청한 뒤 일어나 밀린 예능 프로그램 몇 편을 봤다.


이렇게 밝은 때 보는 콘서트라니. 오늘 시작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커튼을 쳐도 어둡지 않은 거실. TV로 인터넷을 연결한 뒤 사이트에 접속했다. 아미 밤은 그대로 넣어놨다. 전원을 켜도 밝지 않아서였다. 아미 밤의 불빛에 비해 햇볕은 너무나 강렬했다. 뒤늦게 챙겨 먹은 식기류를 설거지하고 오니 공연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활감이 묻은 공연은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공연 초반, 한쪽 팔을 쓰지 못한 채 공연하는 윤기가 눈에 밟혀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다섯째 곡인 <상남자>에 들어와서야 드디어 두 팔을 모두 쓰며 윤기가 춤을 추자 그때야 겨우 안심하고 무대를 보기 시작했다. 멤버들에 집중된 화면으로 공연을 볼 수밖에 없으니 도리어 멤버들의 좋거나 불편한 상황들이 더 눈에 잘 보인다. 현장에서라면 내 감상에 취해 보지 못했을 장면이다.


방탄소년단은 칼 군무를 자랑하는 팀이지만, 각각의 그루브로 군무를 더 살리는 팀이라 할 수 있다. 전체 동선과 박자는 딱 떨어지게 맞지만, 그 사이사이 개개인의 개성이 일정 부분 묻어나게 춤을 춘다. 이 개성이 방탄소년단을 다른 그룹과 다르게 만든다. 힘을 줄 곳과 뺄 곳이 같이 있는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의 무대를 보다 보면 방탄소년단의 차별성이 여기 있구나 싶어 진다. <Love yourself> 콘서트를 보고 나온 방콕 라차망칼라 경기장 뒷 길에서 막 공개된 티저 영상을 통해 처음 들은 이 <작은 것들을 위한 시>는 영원히 나를 2019년 4월의 방콕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정국이의 시차는 어제보다 더 익었고, <00:00>의 라이브는 더 안정적이었다. 어제 공연이 끝나고 바로 모여 모니터링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연예인이 아닌 가수, 무대 위의 퍼포머로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멤버들이라 더없이 소중하다.


방탄소년단을 있게 한 노래들, <DNA>, <쩔어>에 이어 <No more dream>으로 본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자신의 데뷔곡이나 초창기 앨범을 부끄러워하는 가수들도 있는데, <On>에서 시작해 <No more dream>으로 끝나는 셋 리스트는 자의든 타의든 항상 자신들의 처음을 잊지 않으려 하는 멤버들의 다짐이 드러나 있다. 약간의 정돈이 있은 뒤 앙코르곡 의상으로 갈아입은 멤버들이 다시 무대 위에 등장했다.


어제 팬들의 모습을 한 번 봤었다고 그새 환경에 적응한 멤버들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무대 전체를 뛰어다녔다. 어느새 어둠이 내린 시간, 아미 밤을 켰다. 하얗고 둥그런 빛이 꼭 작은달 같다.


체조경기장을 360도로 두른 전광판 속 팬들의 얼굴과 함성 소리를 배경 삼아 <IDOL>에서 <Dynamite>로 이어지는 앙코르 무대는 멤버들의 활기로 가득했다. 사방으로 뻗어있는 무대를 뛰어다니던 그때, 명확하게 들려온 한 문장.


"미래에서 만납시다"


저쪽 무대에서 이쪽 무대로 걸어오는 남준이 자신을 향해 있는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당장 내년을 가늠할 수 없고, 기약할 수 없고, 무엇이든 속시원히 확답할 수 없는 때에 미래라고, 우리에겐 다음이 남아있다고 무겁지 않게, 장난스럽게, 그러나 진심으로 말한 것이다. 그게 언제냐고 묻는 태형이에게 남준이는 이렇게 답했다.


"몰라 금방 오겠지"


이토록 귀엽게 현존하는 치아키라니.


맞다. 예매해 둔 버스 시간에 맞추려 늦어지는 앙코르곡에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됐다. 내내 서 있거나 걷지 않아 불편하지 않았고, 콘서트 MD며 나눔 받은 부채 등을 챙긴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차비와 숙소 비용을 아낄 수 있었고, 티켓팅에 마음 졸이지 않을 수 있었다. 직접 만날 콘서트를 더욱 기대하게 했고, 그렇기에 모두 울지 않고 웃으며 마무리할 수 있었다. <Map of the soul ON:E> 콘서트는 미래를 향해 가는 도중, 지치지 말라고 목을 축여준 오아시스였다.


그 미래가 언제든 내 미래엔 방탄소년단이 있다. 타임리프 능력이 없었어도 언젠가 치아키의 고백을 받고, 우정과 사랑을 고민하며 성장했을 마코토지만 타임리프 능력 덕에 그 시기를 일찍 당겨 여러 후회를 줄일 수 있었다. <Map of the soul ON:E> 콘서트가 없었어도 덕질은 계속됐을 거지만 <Map of the soul ON:E> 콘서트 덕에 여전히 공연에 진심인 멤버들을 확인하며 이 덕질의 원천을 되새길 수 있었다.


내가 똑같이 돌려줄 차례다.

너희가 미래에서 기다린다면 나도 현존하는 마코토가 되어 이렇게 말해야겠다고.


"응. 금방 갈게.. 뛰어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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