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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Sep 12. 2020

53. September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53


도무지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것들도 결국은 쇠락한다. 힘을 잃고, 기세가 꺾인다. 그 옛날 로마가 그랬고 나폴레옹이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뿌려대던 비도, 동력을 잃게 하는 무더위도 어느덧 그리운 옛일의 범주로 서서히 이동 중이다. 아, 물론 맹렬히 전파되고 있는 이 지긋지긋한 바이러스는 제외하고.


반팔을 입으면 살갗이 약간 서늘한 찰나의 아침, 긴 셔츠나 블라우스 혹은 얇은 카디건, 따뜻한 음료를 감싸 쥘 때 적당히 데워지는 온도. 내가 가장 설레어하는 9월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정국이와 남준이 생일이 있고, 영화 <브레이크 더 사일런스 Break the Silence: The movie>도 개봉하고, 10월에 예정된 콘서트와 관련한 어떤 답을 받을 9월이다.



8월 31일


밤. 끔뻑끔뻑. 졸린 눈을 비볐다. 11시까지는 책도 보고 TV도 보며 어떻게 버티긴 버텼는데, 11시가 지나자마자 연신 하품이 새어 나왔다. 파블로프의 개는 그릇과 발소리로 조건반응했지만 내 조건은 고작 숫자 11이다. 평소 같았음 무리 없이 바로 침대에 누웠겠지만 1시간을 잘 버틴 뒤 9월 1일 '땡' 하자마자 정국이 생일을 축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버텼다. 끔뻑끔뻑.


이게 뭐라고. 맞다. 인생과 덕질은 이 무수한 이게 뭐라고의 연속이다.


59분 11초.. 59분 26초.. 59분 49초.. 59분 58초.



9월 1일


00:00. 숫자들이 모두 0으로 바뀌고 날짜가 넘어갔다. 2020년 9월 1일, 정국이의 24번째 생일이었다. 본인의 생일이지만 우리가 더 행복하게 보냈으면 좋겠다는 시즌 그리팅 속 정국이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정국이 역시 가장 좋은 날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일 축하 트윗 글을 올린 지민이의 다정함을 확인하고 부끄러울 새 없이 '정국아 생일 축하해'란 말을 내뱉었다. 아, 이제 드디어 눈을 붙일 수 있다. 일상에 의식(儀式)을 의식(意識)하게 하는 나의 우상이자 나의 제물이여.


평소에 멤버들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석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꿈을 꾸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내 무의식의 욕망이 그대로 투여된, 그것도 설렘으로 점철된 꿈이었다. 끝 맛이 아직도 달다. 아직 덜 깬 몽롱한 기분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조금만 더 눈을 감고 스토리를 연결시키고 싶은데. 그럼에도 출근은 해야 하니 시간을 확인하려 핸드폰 화면을 켜는데 어라? 트위터에 위버스 알림이 무수히 많이 떠 있다. 다들 새벽 새 정국이 생일 축하를 격하게 했나 하는데 뭔가 반응이 다르다.


빌보드 Billboard HOT 100 1위

<Dynamite>, BTS


세상에.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 백 1위에 방탄소년단 이름이 있다. 차트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정국이에게 최고의 생일 선물이라며 이제야 잠에 든다는 남준이의 시간과 빌보드 1위 신난다며 정국이가 엄청난 선물 받는다는 석진이의 시간은 새벽 3시, 이게 현실이냐는 태태어를 쏟아내는 태형이의 시간은 새벽 4시, 아직도 잠 못 들고 있다는 윤기와 아직도 울고 있다는 지민이의 시간은 새벽 5시였다. 아마도 정국이는 자신의 생일이라 더욱 말을 고르지 못하고 형들과 함께 울고 웃고 있었겠지. 채 추스르지 못한 날 것의 감정이 우수수 터져 나온 멤버들의 메시지를 다시 보니 새벽 내내 잠 못 들고 환호했을 멤버들의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정말 그럴만했다. 세상에.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1위다.


원래 멤버들 생일이나 데뷔일 등 기념할 만한 날엔 누구보다 좋은 하루를 보내려 노력한다. 그리고 보통 그 노력에 감응하듯 좋은 하루, 그러니까 조금의 터덕거림 쯤이야 다 별 거 아니고 조금의 스무스함이 최고의 것이 되는, 저 좋을 대로 자의적인 해석이 불쑥불쑥 끼어드는 하루를 보낸다. 그런 날이 한 해 최소 일곱 번이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 구구절절 글을 썼던 적도 있으니까.


정국이 생일에 빌보드 1위란 경사가 겹친 하루라니. 아침부터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귀찮아 댕강 묶어버리는 머리도 오랜만에 고데기로 정성스레 정리하고 화장도 신경 써서 했다. 평소에 잘 꺼내 입지 않는 '꽤 차려입은 듯한 느낌'이 드는 블라우스에 치마를 골라 입었다. 오늘은 정국이 생일이니까. 충분한 이유였다.


앞 범퍼를 무리하게 들이밀고 끼어드는 차를 '바쁜 일이 있나 보네' 관대하게 양보했고, 백그라운드 음악처럼 늘 틀어놓는 방탄소년단의 노래도 가사 하나하나 곱씹으며 따라 불렀다. 가사 하나하나에 이리 뭉클 저리 뭉클했다. 오전 근무하는 동안 공들인 화장 효과인지 정국이 효과인지 '얼굴 좋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고, 사무실에 고개를 빼꼼 내민 타 부서 선배가 "아미, 축하한다" 내미는 인사를 전달받았다. 멤버들이 열심히 해서 얻은 성관데 그들의 덕후란 이유로 내가 축하받는다.


LED 전광판엔 정국이 생일 축하 영상이, 길거리 배너나 광고판엔 정국이 생일 축하 멘트가 곳곳에 있을 삼성역의 한 호텔에서 여러 카페와 전시 등을 보고 들어온 지친 다리를 쉬며 정국이의 생일을 기념하려고 했었는데. 점심시간에 컵홀더 이벤트를 진행하는 회사 근처 카페에 들러 음료를 테이크 아웃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노랗고 빨간 원색의 컵홀더 속 정국이가 짓궂은 얼굴로 주름지게 웃고 있다. 아무렴 어때. 그곳이나 이곳이나 마음은 그대로다.


회사에 돌아오니 입구 바로 앞쪽에 자리가 딱 하나 비어 있어 콧노래를 부르며 주차를 했고, 인더숲(In the SOOP) 투명 포토카드가 배송되어있어 기분 좋게 상자를 뜯었다. 연습실에 모여 앉아 정국이 생일 축하 케이크와 빌보드 1위 축하 케이크에 연달아 촛불을 부는 단체 브이 라이브를 통해 부은 눈을 한 채 들뜸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다음 할 일이 안무 연습이라는 멤버들을 봤다.  


업무가 빨리 끝나 조금 일찍 퇴근해 와인숍에 들렀다. 매번 사는 소비뇽 블랑을 고른 뒤 매장을 둘러보는데 정국이가 마신 이후로 품절 대란이 있었던 와인 비고르(Vigor)를 발견했다. 이 와인숍은 직원들을 모두 알 정도로 닳게 드나든 곳인데 비고르를 발견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쩜 오늘인가 했다. 작년 이맘때, 이 비고르를 사기 위해 정말 많은 와인숍을 돌아다녔었는데. 고른 소비뇽 블랑은 원래 자리에 가져다 두고 비고르 두 병을 골라 계산했다. 정국이를 닮은 작은 토끼 모양의 컵 케이크 하나도 샀다. 모든 이유를 막론하고 이거로 됐다.


비고르냐 샴페인이냐 한참을 고민하다 와인 셀러에 오랫동안 보관돼 있던 샴페인 떼땅져(Taittinger)를 꺼냈다. 그래도 역시 축하엔 보글보글 샴페인 거품이 있어야 한다. 와인잔에 쪼록 샴페인을 따르고 인터넷 TV를 연결해 빌보드 핫백 1위 기념 라이브 방송을 다시 틀었다. 큰 화면으로 보니 퉁퉁 부은 멤버들의 눈이 더 잘 보인다. 멤버들에게 돌아가며 전화해 고생했다고, 우리 성공했다고 내내 울다가 아침 일곱 시에 지쳐 겨우 잤다는 지민이는 정말 기운이 다 빠진 피곤한 얼굴을 기꺼워하고 있었다. 토끼 얼굴 옆에 정국이 사진을 꽂은 뒤 조촐하게 자축하고 샴페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티는 안 냈지만 사실 모니터를 다 했다고,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한 많은 이벤트들이 열리고 있음을 안다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정국이의 인사를 보며 샴페인을 한 잔 두 잔. 별로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와인 한 병이 훌쩍 비었다. 지난 콘서트 영상을 찾아보다가 마지막에 멈춘 영상은 작년 매직샵이 끝나고 찾아왔던 정국이의 라이브 방송. 와인의 얕은 취기에 기대 솔직한 말을 꺼내놓던 정국이와 그런 정국이를 다 이해할 것만 같았던 그 밤이 그대로 녹아있다. 이날 이후 정국이는 혼자 찾아오는 라이브 방송을 하지 않고 있다. 저렇게 편히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을 정국인데, 사실 누구보다 바라고 있을 정국인데. 잔뜩 취기가 오른 나는 급기야 조금 울고 말았다. 그럼에도, 역시, 정국아. 생일 정말 축하해. 그 마음 하나만은 변함이 없어서.



9월 3일


독립이 가장 실감이 날 때가 와인을 꺼내 온 뒤 인터넷 TV를 연결할 때다. 엄마가 즐겨보는 드라마가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맘 편히 자유롭게 덕질을 하는 나를 자각할 때면 스스로를 무한히 칭찬해주고 싶다. 오늘 업로드된 <Dynamite> 안무 연습 영상 하나에 와인이 수 잔이었다. 방탄소년단의 음악 스펙트럼 범위는 항상 기대를 뛰어넘는다. <ON>과 <Black swan>, <Dynamite>가 공존한다. 따라 해 보면 안다. 저 '쉬워 보이는' 동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각자의 개성이 가미된 채 딱 맞는 군무가 '쉬워 보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팔다리를 뻗고 찌르며 흔드는 <Dynamite>의 디스코가 이렇게 밝고 유려하다. 발소리 하나 나지 않을 것처럼 가볍게 뛰고 스텝을 밟는 멤버들을 본다. 이번에는 호석이에 집중해서 한 번, 다시 남준이에 집중해서 한 번. 3분이 넘는 영상이 질리지도 않게 최소 7번이었다.  


비슷하고도 다른 날들은 계속되었다. 태풍이 한 차례 지나갔고, 아침과 저녁은 더욱 선선해졌다. 아직 한낮은 몇 걸음 걷기가 버거울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내리쬐고 있지만 참을만한 정도다. 도무지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것들도 결국은 쇠락한다. 힘을 잃고, 기세가 꺾인다.


수요일 밤엔 JTBC에서 방송되는 인더숲과 위버스에서 공개되는 인더숲을 봤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남준이와 윤기가 읽은 <아몬드>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다. 독서가 좋아지는 이 계절, 어느덧 가을이다.



9월 9일


일찍 잠에 들어 새벽에 깬 줄 알았는데. 창 밖으론 내리는 세찬 빗소리가 잠을 가지고 달아났나 보다. 입 안으로 한참 혀를 굴려 큰 가래를 뱉는 듯, 자잘한 소음 끝에 천장을 찢을 것 같은 거센 천둥이 우지끈 쳤다. 번쩍이는 천둥에 의식을 한 번 빼앗기고 나니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현재 시간 새벽 2시 32분.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켰다. 트위터 앱을 습관처럼 켰더니 촬영 현장으로 보이는 곳에 일곱이 아웅다웅 모여 크게 환호하는 영상이 공식 계정에 올라와 있다. 알람이 안 떠 있어 전혀 몰랐다. 빌보드 핫백 2주 연속 1위. 그 기염을 다시 한번 즐기는 얼굴들이었다. 21세기, 빌보드 핫백 차트 1위에 핫샷으로 데뷔해 2주 연속 1위를 기록한 그룹은 방탄소년단이 최초란다. 어느 팬의 말마따나 항상 지금이 가장 최전성기인 줄 알았는데, 그걸 방탄소년단이 보란 듯이 뛰어넘는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투어를 했을 시긴데, 그럼에도 일이 있는 게 어디냐는 호석이와 남준이의 대화가 실린 인더숲 방송을 봤고, 남준이 생일 전 컵홀더 이벤트를 하는 카페를 다녔다. 카페 가까운 곳에 주차한 차에서 나와 테이크 아웃만 얼른 해서 들어오는 짧은 동선들이었지만 역시 생일을 앞둔 때 이만한 이벤트가 없다. 남준이가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쪼록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준이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드라이브를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1시간이면 닿는 바다에 아침 일찍 도착해 한적한 바닷가 끝자락에서 남준이의 믹스테이프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케이크 하나와 샴페인을 사 오는 드라이브 코스. 좋아하는 노래들을 선곡해 듣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샴페인을 마시고, 좋아하는 남준이를 생각할 하루.


집에 돌아오자마자 운전할 때 들으면 좋을 곡 30곡을 모아 재생목록을 만들었다.

D-3. 남준이 생일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9월 12일


커튼 새로 들어오는 빛이 밝다. 빛이 '밝다'. 분명 주말 내내 비가 온다고 그랬는데. 그래서 드라이브를 포기하고 어젯밤 남준이 생일 전야 기념으로 거한 축배를 들었는데. 드문 드문 짙은 구름 사이, 푸른 하늘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다. 취기로 부은 눈을 비비며 푸른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기상청을 믿지 말고 내 일정을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아쉬움에 한숨이 푹 나왔다. 어쨌든 하늘은 좀 올려다봤네. 남준이가 한 해 중 하늘이 가장 예쁜 날인만큼 하늘을 보라던 문장 하나를 본의 아니게 실천했다.


이미 오전의 많은 시간이 지났다. 간단히 식사를 차려먹었다. 남준이 생일을 축하한다는 석진이의 목소리도, 그걸 따라 하며 팬들도 목소리를 직접 내어 남준이의 생일을 축하해줬으면 좋겠다는 챌린지를 툭 던진 태형이의 목소리도 들었다. 작년에 자필로 쓴 엽서로 '우리가 한 시간이라도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던 남준이는 올해 'Happy birthday to me'라고 귀엽게 자축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이 갭을 당해낼 도리가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집 안에서 즐길거리를 찾아 나섰다. 어제 배송 온 아니 에르노의 <사건>을 단숨에 읽었고,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봤다. 일주일 밀린 다이어리를 정리했고, 빨래를 돌려 널었다. 최근 바꾼 섬유유연제 덕에 집 안에 은은히 향기가 남았다. 쓰레기봉투 하나를 꾹 눌러 묶어 내놨고 청소기를 돌렸다. 드라이브 송을 모은 재생목록은 배경음악으로 틀어두었다. 여차 하면 내일 바다를 가도 괜찮을 것 같다.


앨범이 발매되고 나서 찾아오는 남준이의 개인 라이브 방송을 좋아한다. 가사 대부분을 직접 쓰는 남준이기에 남준이가 골라낸 단어와 표현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하나하나 소중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아직도 해가 지지 않은 오후. 이른 시간이지만 다시 한번 남준의 생일을 자축할 샴페인을 꺼내와 내가 좋아하는 남준이의 라이브 방송을 켰다. 작업실에 앉아 첫 번째 트랙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진한 커피 한 모금을 넘기는 남준이의 턱과 손가락과 눈과 입술.


지난 목요일, KBS 9시 뉴스에 방탄소년단이 출연했다. 오랜만에 직접 출연하는 국내 방송이라 KBS는 방탄소년단이 방송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대기실 이동, 보도국을 지나 뉴스 스튜디오에 출연하는 동선 전체를 유튜브로 라이브 중계했다. 방송국에 도착해 체온 측정을 하고 손소독제를 바르고 이동하는 방탄소년단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건 의외의 현타. 자기들끼리 슈퍼스타 된 것 같다고 쫑알쫑알 떠드는 방탄소년단은 그대로인데, 무수한 스태프들, 카메라가 스칠 때 고개를 내리며 순식간에 벌레처럼 사라지는 무수한 사람들, 지나는 복도마다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찍는 직원들 등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 명치에서부터 불쑥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다. 화려한 조명 아래 말고 일반 형광등이 켜 있는 사무실에서 누구보다 멀쑥한 멤버들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정말 멀구나' 했다. 급한 업무가 없어 시간도 충분했는데, 뉴스 스튜디오에 도착해 인터뷰를 시작하는 때에 유튜브 창을 껐다. 가깝진 않아도 멀지 않다 생각했던 이 거리감이 너무나 초라했다.


그러다 그날 밤, 뉴스에 출연한 방탄소년단의 인터뷰를 본방 사수한 뒤 그들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방탄소년단은 항상 그대로 있는데 혼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북 치고 장구치곤 왜 그 모든 탓을 멤버들에게 돌려버리고 마는 걸까. 이런 상항이 아니었다면 <Dynamite>가 탄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기는 호사다마를 믿는다고, 밤이면 그림자가 길어지지만 언젠가 다시 해가 뜬다고 믿는 만큼 현재 최선을 다하겠다는 남준이의 마지막 인터뷰. 해가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분명 해는 뜬다고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말을 하는 그들.


샴페인 한 모금에, 남준이의 방송에, 소파 테이블 위로 계속 한자 안(安)을 그렸다. 남준이가 존재함으로써 느끼는 이 안도, 안심, 위안에 대해 생각한다.


남준이로부터 받은 게 너무 많다. 남준이가 쓴 가사 하나는 인생의 모토가 됐고, 남준이가 추천하는 책들과 전시는 관심사를 늘리게 했고, 삶을 대하는 남준이의 태도는 전진하는 향상성에 대해 생각하게 했고, 읽고 쓰는 일상을 긍정하게 했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을 새기게 했다. 새로 산 샴페인 잔 안에 샴페인의 거품이 보글보글 살아 있다. 남준이 생일에 좋은 샴페인 한 병을 마실 예정이었고, 그렇다면 그 샴페인 맛을 더욱 좋게 할 잔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문한 잔이었다. 곧 운전면허 학원을 다닐 예정이라며 운전을 하면 어떤 점이 좋냐고 묻던 어떤 분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지만, 운전을 하지 않던 삶으로 돌아가진 못할 거라고.


기분 좋게 샴페인 몇 잔을 마시고, 꼭 남준이 생일에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어 남준이의 라이브 방송을 배경음악처럼 틀어놓으며 다음과 같이 쓴다. 방탄소년단을, 남준이를 알고 나서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았지만, 방탄소년단을 모르던 삶으론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남준아, 더 좋은 말을 찾아내지 못해 미안한 남준아. 우리 남준이가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

누구보다 좋은 하루 보내길 바라며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



P.S


집콕하다 보니 영화를 더 많이 보게 됐다. 영화제 수상작이나 개봉일을 놓쳤던 영화들을 부담 없이 하나씩 꺼내보는 재미가 집콕의 재미가 되고 있다. 이틀에 한 편 정도는 눈물을 쏙 빼거나 마음을 쏙 빼앗거나 인상을 흔드는 영화 한 편을 선택해 본다. <가버나움>이나 <사울의 아들>, <아무르> 같은. 보통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들이기에 TV를 끄고 침잠하기도 하지만, 빨리 그 여운을 털어버리기 위해 가볍고 익숙하고도 좋은 영화를 찾아 틀어버리기도 한다. 첫 영화로 선택한 <케빈에 대하여>의 잔상을 얼른 잊고 싶어 리모컨을 돌렸다. 결국 또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였다.


약 10분 여의 오프닝은 파리가 왜 파리인지 단박에 보여준다. 파리를 가장 파리스럽게 담았다. 에펠탑, 센 강, 개선문, 샹젤리제 등 파리에 가보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알 만 한 관광지 외에 시테섬, 몽소 공원, 그랑 팔레, 오페라 갸르니에, 방돔 광장, 비라켕 다리 등 파리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아련하게 기억하는 주요 스팟들이 재즈 선율에 아득하게 녹아 있다. 당장에라도 소르본 대학 근처의 노천카페로 날아가고 싶게 하는 노스탤지어. 어떤 영화인지 보자- 하고 낀 팔짱을 스르륵 풀게 하는 마법 같은 시간이랄까.


길이 헤밍웨이를 만나는 <폴리도르 polidor>며, 낡은 콜 포터의 LP를 발견하던 생투앙 벼룩시장과 길이 오래된 푸조 차를 타고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 생 에티엔 뒤몽 성당까지. 몇 해 전 파리 여행 때 나는 이 영화 속 주요 장소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2018년, 러브 유어셀프 Love yourself 투어를 위해 파리를 찾았던 태형이 생 에티엔 뒤몽 성당에서 찍은 사진을 업로드했었다. 길이 오래된 푸조를 기다리듯 계단에 기대어 눕거나 기다렸던 푸조를 잡아 타듯 오른팔을 쭉 뻗은 사진이었다. 역시. 맞다. "역시"였다. 공연을 위해 떠나와 휴식을 취하는 것도 부족했을 짧은 시간임에도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의 장소를 굳이 찾은 태형이었다.


가브리엘과 함께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걷는 길의 뒷모습과 그 조명을, 왠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파리의 밤을 상상하게 하는 발걸음으로 영화가 끝이 났다. 몇 번째 다시 봤는지 셀 수 없지만, 머지않아 이 영화를 또 찾아볼 것임을 안다.


내게 첫 파리는 20대 초반, 가벼운 지갑과 그에 반해 튼튼한 다리로 만난 곳이었다. 상상과 현실의 갭이 크지 않은 그림 속 도시. 풍족하진 않았어도 가진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마음을 열었던 곳. 맥주 한 캔씩 마시며 여행의 피로를 풀던 어느 민박집의 주인 언니가 괜찮은 분위기의 바를 추천해주었다. 그 자리에서 마음이 맞은 나를 포함한 여자 셋은 그 즉시 숙소를 나서 지하철을 탔다. 바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골목 속에 있었고, 주인 언니가 호들갑을 떨만한 규모나 분위기가 아니라서 우리는 조금 실망을 했었다. 뭐 여기까지 온 거 나갈 수도 없으니 서버가 안내해 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마르가리타니 모히토니 만만한 이름의 칵테일을 한 잔씩 시켰다.


나이 든 부부도, 삼삼오오 모여 앉은 젊은 친구들도, 우리처럼 완연한 이방인들도 제각각 놀던 그때, 바의 배경음악이 익숙한 노래로 바뀌었다.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 테이블이 각각 섬처럼 놀던 그 바의 분위기가 일순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칵테일을 나르던 서버 한 둘이 소리 높여 노래를 따라 불렀고, 그 목소리에 손님들이 테이블 너머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어느덧 모두가 한 목소리로 떼창을 했다. 우리도 예외는 없었다. 국적도 언어도 완벽히 사라졌다. 전주가 흐르는 동시에 들썩이던 어깨, 팔을 올리며 흔들던 율동, 익숙한 후렴구를 너나 할 것 없이 부르며 눈이 마주치면 함박웃음 지던 그 순간.


Ba de ya say do you remember

Ba de ya dancing in September

Ba de ya never was a cloudy day


스산한 2월의 파리였지만 그 순간 우리는 가을로 물드는 9월의 파리에 있었다.


Ba de ya say do you remember

Ba de ya dancing in September

Ba de ya never was a cloudy day


2020년 9월을 나는 어떻게 기억할까. 지긋지긋한 바이러스도, 무기력에 빠지는 지난한 시간이 아닌 빌보드 핫백 1위, 24시간 동안 가장 많이 본 유튜브 기네스 기록, 정국이와 남준이 생일, 런던 스픽콘 DVD, 스쿨 러브 어페어 스페셜 에디션, 방방콘 프포 같은 것들로 가득할 것이다. 기억하고, 춤추고, 흐리지 않았다는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의 가사처럼. 경계는 무너지고 다 함께 부르던 그 목소리처럼.


이제 콘서트 공지와 영화 개봉 일자가 남았고, <Dynamite>가 그랬듯 전혀 예상치 않은 것들이 이번 달에 찾아올지 모른다. 맞다. 방탄소년단이 있는 한 9월, 아니 10월, 11월이 이럴 것이다.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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