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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un 02. 2021

57. 사진 일기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57


인생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단어를 꼭 하나만 꼽는다면, 그것은 '타이밍'이다. 공부도, 사랑도, 기회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온전한 내 것이 되기 어렵다. 갑자기 웬 타이밍이냐고? 5개월간 덕후 일기에 손 떼고 있던 내게 온 예감이 반짝이며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페스타와 소우주 공연을 앞둔 이 타이밍을 놓친다면, 글 쓰는 덕질을 영 틀려먹었다고, 그러니 지금 바로 쓰라고.


일상에 스민 덕질이라 글을 쓰기 어려웠다는 핑계도 한차례 써먹었으니 솔직하게 쓴다. 그냥 그간 글을 쓰는 동력보다 소비하는 동력을 열심히 굴렸다. 감상은 감탄으로 대체했고, 표현은 SNS에 올리는 사진으로 대신했다. 새로 쓸 글의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쓰고 지우기를 수차례.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5개월이 지났다. 시간은 기다리지도 않고 참 성실하게도 흘렀다.


지난 5개월을 어떻게 기록해놓을까 고민하다 케케묵은 그림일기 하나를 떠올렸다. 그날에 있었던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선택한 뒤 최선을 다해 그리고 한 두 문장의 감상을 덧붙였던 일기. 네모 칸이 있는 일기장은 없고 그날에 있었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흐릿해졌지만 핸드폰 사진첩에 약간의 흔적이라도 남아있으니 그림일기 대신 사진 일기로 밀린 방학 숙제하듯 써보고자 싶었다. 이 마음을 먹고 나서야 첫 문장을 쓸 수 있었다.


페이지 절반을 차지한 네모 칸 하나에 어떤 것을 그려 넣을까 신이 나서 크레파스 색을 고르던 그때처럼 핸드폰 사진첩 스크롤을 올려 어떤 사진을 선택할까 고민했다. 뭉툭하게 닳은 초록색 크레파스로 나뭇잎을 그리며 그림일기를 채워가던 웅크린 몸, 그때의 거실과 햇빛, 부유하던 먼지가 낮은 조도의 조명, 거슬리지 않게 틀어놓은 음악, 밝게 빛나는 핸드폰 불빛, 움직이는 검지 손가락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2021.01


1월 1일이 되면 새로 맞이하는 한 해에 대한 기대감만큼 설레는 일이 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와 함께 찾아오는 남준이의 글이 그것이다. 방탄소년단의 RM으로서, 스물여덟의 김남준이란 청년으로서 다듬고 쓴 문단들은 한 해를 남준이처럼 잘 살아보고자 하는 다짐을 갖게 한다. 남준의 표현대로 처마 끝에 노을이 걸린 오후 다섯 시 즈음 도착한 남준이의 글.


(중략) 이 추운 겨울에도 많은 분들의 사랑과 애정 어린 시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또 한 번 가슴에 새겨보면서, 쉽게 꺾이지 않겠다 결연히 혼잣말해봅니다. 아무도 없어도 내가 듣고 있습니다. (중략) 끝내 사랑이라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지만 무언가 더 좋은, 닳고 닳지 않은 말들을 찾아 헤매어 이렇게 또 쓰네요. 지칠 법도 한 나날들 속 이 피로한 여정에 기꺼이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중략)



언젠가 남준이가 올려준 사진 한 장. 자신의 책장을 찍은 흑백 사진. 낯익은 책들 중 읽는 당시 글이 너무 좋아 몇 번이고 추천 글을 쓰게 했던 <모멸감>을 발견했다. 자신이 이루어갈 것들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남준이의 일면을 보는 듯해 몇 년 만에 다시 이 책을 꺼내 들었다. 겸손과 공경은 상호적이어야 하며 일방적으로 행해지거나 강요될 때 횡포가 된다 말하는 이 책을 서양미술사와 장자, 이상 소설 전집과 달과 6펜스와 더불어 읽었을 남준이를 생각했다. 기분이 알 수 없게 몽글해졌다. 


누군가가 쓴 글처럼, 남준이 같은 사람을 만나려 하기보다 내가 남준이 같은 사람이 되도록 애써보려는 한 해. 더도 말고 그렇게 되어보자고.



1월 중순. 남준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브이앱 라이브를 진행했다. 약 40분의 시간 동안 이런저런 근황과 이야기를 나누며 현재의 상황이 영원할 건 아니기에 다시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보고 싶음을 견뎌가겠다던 남준이 자신의 책상에 놓인 액자 하나를 보여주었다. 이전엔 연습실에서 땀에 젖은 일곱의 사진을 가족사진으로 두었었는데 최근에 사진을 바꿨다는 거였다. 그렇게 우리의 화면에 불쑥 나타난 건 2019년 부산 매직샵 공연 사진. 


오랜만에 공연한 한국, 게다가 부산, 게다가 야외, 게다가 올 스탠딩. 부산의 하늘 아래 같은 언어를 쓰며 정말 교감하며 즐겼던 무대였다. 부산 매직샵은 내가 직접 갔던 공연들 중 단연코 최고라 꼽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남준이에게도 그랬을까. 남준의 책상 위에 자리 잡은 가족이 일곱에서 수천 명으로 늘었다. 


각자가 아닌 함께 지나 온 시간임을 이렇게 무심히 확인시켜주는 남준이가 눈 오리를 만들려고 1년을 기다렸던 남준이와 동일인물이라는 걸 가끔 잊는다. 역시 힘들이지 않고 감동을 주는 방법을 아는 사람답다. 입장 번호가 늦어 오히려 360도로 둘러진 무대의 끝자락에 자리 잡아 구석구석 이동하는 멤버들을 가깝게 볼 수 있었던 부직샵. 그즈음 나는 그때 찍은 사진과 영상을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보다 직장 동료와 더 많은 생활을 공유하는 나이. 삶의 형태가 많이 달라진 친구들보다 흉 볼 직장 상사가 같은 직장 동료가 더 편해진 나이. 1월의 어느 토요일, 마음 맞는 직장 동료 둘과 함께 가까운 바다를 찾았다. 쉬지 않고 내리 운전하면 1시간이면 닿는 바다였다. 드라이브하기 좋은 음악을 틀고, 별 거 아닌 시시콜콜한 농담을 건네는 차창 밖은 오랜만에 맑게 개어있었다. 


미리 검색해놓은 허름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조금 더 이동하니 금세 바다였다. 동해바다처럼 드넓은 수평선이 있지도, 남해바다처럼 유려한 능선들이 보이지도 않지만 별들을 흩뿌려놓은 듯 섬세하게 빛나는 해수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시린 바닷바람에 옷깃을 여기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그러다 촉촉하게 젖은 모래 위에 자리 잡고 글씨를 썼다. 뭘 쓰냐 묻는 동료들을 향해 씩 웃어 보인 뒤 쓴 세 글자와 그 뒤에 붙인 하트 하나. 여기까지 와서 이런 걸 적냐는 타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 신발이 살짝 나오게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써야지' 하고 쓴 게 아니었다. 파도에 부서지기 전까지 그 자리에 계속 새겨있을 이름이라면 도무지 이 이름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어서 썼다. 내 이름도, 각 멤버의 이름도 아닌 우리를 묶는 이 이름 말고는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썼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찍은 사진을 돌려 보며, 모래사장에 새긴 이름을 SNS에 올려 보며, 이 얼마나 무해한 덕질인가를 되새겼다. 답답할 때 근교의 바다를 도장 깨듯 다녀보는 것도 괜찮겠단 생각을 하며.



2021.02



원래도 좋아하는 와인이지만 그 와인에 의미를 부여하면 더욱 좋아진다. 호비 생일 하루 앞둔 저녁, 작년 지민의 생일에 호비가 올린 사진에서 발견한 FREI BROTHERS를 꺼내왔다. 작년 지민이 생일에 마트를 돌아다니며 찾아 사다 놓은 와인이었다. 호비 생일까지 약 다섯 시간이 남은 저녁. 시간은 충분하기에 두 병의 와인을 오픈했다. 퇴근하자마자 주문한 숙성회도 딱 알맞은 시간에 도착했다. 달방을 틀어놓고 한 잔, 회 한 점에 한 잔, 작년 호비 생일 브이앱을 보다가 한 잔. 술술 마시다가 12시가 되기 전에 뻗어버린 건 함정.


아침에 일어나서 새로 올라 온 글들을 확인하니 호비 생일 라이브는 역대급이었나 보다. 브이앱 라이브 서버가 폭발해 두 번을 더 연결해보고, 그것도 안 돼 유튜브 라이브를 진행했더니 이마저도 먹통. 최종의 최종으로 다시 켠 브이앱을 통해 생일 축하를 함께 나눈 라이브를 진행했었단다. 작년을 기점으로 팬덤의 규모가 훅 커졌다는 게 이런 데에서 실감 난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콘서트 포도는커녕 포도 냄새도 못 맡게 생겼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알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멤버들이니.



멤버들의 생일이 껴 있는 달이 되면 두 번 설렌다. 생일을 적극 축하해 줄 생각에 한 번, 그 축하를 핑계로 아주 좋은 하루를 보낼 거라는 기대에 한 번. 유독 눈이 많이 내렸던 이번 겨울, 쌓인 눈이 채 녹지 않아 종종걸음을 걸어야 했던 2월 18일은 호비의 생일이었다.


이 길의 끝에 있는 댄스 학원을 다니느라 수도 없이 걸었을 충장로 한복판에 전 세계 팬들의 메시지를 담은 HOPE 조형물과 HOPE WORLD, Chicken noodle soup 벽화, 아미밤을 비롯한 소장품이 전시되었다. 인파가 북적이지 않는 시간에 찾아 사진을 찍고, 팬들에게 감사함을 전달하는 호비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비슷한 마음으로 도착한 다른 팬들이 찍는 사진에 걸리지 않게 이리저리 피하면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혼자 점심도 제대로 챙겨 먹고 컵홀더 이벤트를 하는 카페에 들러 긴 주문 줄을 기껍게 기다리고, 멤버들의 사진이 크게 걸린 필라 매장 앞까지 빙 돌아 걸었다. 나고 자란 이 도시를 더욱 사랑하게 만든 나의 히어로. 


우리의 햇살, 선샤인 호비의 생일 축하하기 위해 벼르고 별렀을 사람들. 브이앱과 유튜브 서버를 폭파시키는 걸로 화력을 보여준 이 마음들. 우리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여전히 힘껏 응원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몸짓들. 그게 몸서리치게 좋았다. 해피 제이홉 데이. 



독립해서 좋은 장점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덕질이 삶에 있어 중요한 사람에게는 독립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감히 얘기할 수 있다. MTV 언플러그드 공연이 방송되는 날, 시간도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왔다. 독립을 한 궁극적인 목표가 덕질은 아니었으나 이럴 때마다 희열에 찬다.


원래도 잘했지만 이렇게 잘했나 싶다. <Dynamite>도, <Blue & Grey>도, <잠시>도 놀랐지만 <Fix you>라니. 잘해야 본전인 레전드 곡을 선택한 이 자신감, 게다가 저음과 고음 파트를 완벽하게 나눠 이룬 하모니라니. 방탄소년단의 인기 비결을 분석하며 SNS의 활용, 팬들과의 소통을 꼽는 사람들의 눈 앞에 들이밀고 싶은 무대였다. 무대를 잘하니까 눈이 갔고, 눈이 가니 궁금해졌다. 궁금해지니 찾아봤고, 찾아보니 좋아졌다. 방탄소년단의 SNS를 찾기까지의 과정엔 그들이 본업을 잘하는 가수라는 정체성이 먼저였다. 그리고 방탄소년단, 그걸 점점 더 잘 해낸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바로 다시 재방송하는 언플러그드 공연을 한 번 더 챙겨보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MP3 재생목록에서 콜드플레이를 검색했다. 회사에 도착하는 대로 방탄 버전 Fix you 음원을 추출해야겠다. 어딘가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을 배경 음악 하나가 이렇게 또 추가됐다.



2021.03



돌이켜보면 방학식날과 더불어 가장 고대하던 날이 생일이었다. 고심해서 초대한 친구들과 평소엔 엄마가 잘 사주지 않는 칼로리 높고 영양가 없는 음식들이 가득한 생일상에 둘러 모아 갖고 있는 옷 중 제일 예쁜 옷을 입은 채 '와줘서 고마워'라 말하는 특권을 가진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날. 나이가 들면서 생일은 그저 여러 날들 중 그냥 이름이 다른 날 정도가 되었다. 가끔 엄마가 미역국 끓이는 걸 깜빡하고, 나도 미역국을 굳이 챙겨먹지 않아도 상관없는 그런 날. 


"초는 몇 개 필요하세요?"

"큰 거 두 개랑 작은 거 아홉 개 주세요."


꼭 직접 전달할 케이크를 사는 기분으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쥐어 들었다. 모양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히 들어 조수석에 올려놓은 뒤 평소보다 조심스레 운전을 해 집에 돌아왔다. 뭉근한 생크림 사이사이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윤기 사진 중 으뜸으로 좋아하는 셀카 한 장도 슬쩍 끼워서. 


주인공이란 마법에 취해 잊고 있던 장면들.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되었을 때, 엄마를 졸라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받은 용돈을 들고 이 인형이 좋을까, 저 과자 선물 세트가 좋을까 아니면 차라리 문구를 살까 고민하던 집 앞 문방구, 친구 어머니가 불 붙여 가져다준 케이크 초를 함께 불고 피자를 나눠먹던 친구의 집, 생일상을 물려놓고 서로 누구를 좋아하는지 묻고 까르르 숨넘어가던 친구의 방. 주인공이 되어 축하를 받는 것보다 주인공을 축하하는 일들이 훨씬 많았고, 그 각각의 날들이 웃음으로 가득했었다. 


그때처럼. 진심으로 윤기 생일을 축하할 수 있어 좋았다. 



마음껏 내 취향대로 꾸민 집이 생기니 더 심한 집순이가 되었다. 쉬는 날 현관문은 배달음식이 도착했을 때나 분리수거를 하러 나갈 때만 열고 닫을 정도다. 그런 나를 집 밖으로 향하게 하는 건 먹고살기 위한 출근과 기념해야 할 윤기 생일. 


찰나 같아 찬란한 이 봄의 하루를 붙잡는 방법. 꽃시장에서 고른 튤립과 자나 장미, 프리지어, 창문 열고 어거스트 디 노래 크게 듣는 차 안, 아이스 아메리카노, 라디오처럼 흘러나오는 윤기 생일 브이앱 라이브, 목청껏 따라 부른 생일 축하 노래.


민윤기란 이름으로 충분했다.


사 온 꽃은 한동안 윤기 꽃이 된다. 윤기 튤립, 윤기 프리지어, 윤기 장미. 그러니까 이렇게 "윤기 튤립이 오늘은 꽃잎이 많이 벌어졌네. 베란다에 좀 둬야겠다.", "방에 윤기 프리지어 향이 가득해"



국내 예능 프로그램에 거의 출연하지 않는 데다 그마저도 짧은 인터뷰 정도가 다였던 방탄소년단이 유퀴즈에 단독으로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모든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랜만에 나오는 예능이기도 하고, 프로그램 성격상 가벼운 흥미 위주가 아닌 좀 더 진솔함을 담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학교에 등교하다가 외모 덕에 캐스팅을 당했던 석진이의 일화나 서울에 상경한 지민이를 처음 마중 나갔던 호비의 "혹시 지민 씨?"하고 묻던 이야기나 불확실한 미래를 붙잡을 수 없어 연습생 시절에도 알바를 했던 윤기 일화 등 모르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우리도 이렇게 재밌는데 잘 몰랐던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재밌을까 했다. 서로에게 관대하고 어떤 상황에든 최선을 다하는 애들이란 거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잘 몰랐던 사람들은 얼마나 놀랄까 했다. 


프로그램 오프닝에 한옥의 나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멤버들을 보자마자 오래 회자될 프로그램이 될 것을 예상했고, 그동안 방탄소년단에 대해 잘 몰랐었다며 이번에 입덕 한 것 같다는 지인들의 쏟아지는 메시지로 그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았다. 하아. 이렇게 팬들 또 늘었구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지인들에게 가입해야 하는 SNS 목록과 먼저 챙겨봐야 하는 달방 리스트를 보내는 며칠을 보냈다. 


시청률을 잡기 위해 전체 공연 순서 제일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방탄소년단을 배치해놓고도 상을 주지 않았던 그래미 시상식도, 국내 내로라하는 명 MC가 진행하는 스튜디오보다 자신들끼리만 모여 앉아 멤버에게 듣고 싶은 말이 "너 참 잘생겼다", "형의 따라쟁이예요"에 멤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네가 제일 좋아", "우리 모두 너를 좋아해", "사랑해"라는 KBS 토크쇼도 챙겨봤던 3월.


봄이었다.



2021.04



JTBC4를 통해 방송된 다큐멘터리와 공연 영상을 보다가 시카고 미술관에서 찍었던 이 고흐의 자화상을 다시 찾아봤다. 윙즈 투어 시카고에서 제일 좋았던 곳이 시카고 미술관이라 꼽았던 태형이 자신의 얼굴에 브이를 한 채 사진을 찍었던 작품이다. A4 보다 작은 크기의 캔버스, 주황색과 짙은 청색이 대비되는 색감, 힘이 느껴지는 붓 터치, 고단한 일생이 담긴 처연한 눈동자. 나는 2019년 직접 찾은 시카고 미술관에서 이 고흐의 자화상 앞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시카고는 내 여행 리스트에 한 번도 올랐던 적이 없는 도시였다. 오래전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 본 회색 도시 시카고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으나 방학이나 휴가 시즌이 되면 파리나 베를린, 방콕 등이 우선이었다. 시카고까지 직항으로 가는 비행기도 없고, 치안에 대한 얘기가 왕왕 도는, 게다가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닌 시카고를 가야겠다 마음먹은 건 순전히 방탄소년단 때문이었다. 공연 티켓과 비행기, 숙소 예약을 순서대로 마친 다음에야 시카고에 갈 만한 곳들이 있는 가를 검색했다. 여름휴가로 스페인도, 이탈리아도, 하와이도 포기한 순간이었다.


랄프 로렌 레스토랑의 균형 잡힌 서비스와 삐쭉한 마천루를 내려다본 존 핸콕 타워의 전망대, 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입은 학생들의 행렬이 가득했던 네이비 피어와 방탄소년단 스픽콘 팝업 스토어, 멤버들이 다녀간 노스 밀워키 애비뉴와 솔저필드 스타디움, 그리고 시카고 미술관은 근래 갔던 그 어떤 여행지보다 좋아 아직도 종종 시카고 이야기를 꺼낸다. 


어쩌면 내가 평생 가지 않았을 수도 있던 도시 그 시카고에서 공연과 여행을 함께 즐기며 유영했던 시간들. 나는 방탄소년단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 



뉴욕 시티필드에서 있었던 럽셀 콘서트는 특히 지민이에게 많은 것을 남긴 공연이었다. 표현하지 않게 겪고 있던 회의감을 내내 마주하고 있었을 2018년. 그렇게 맞이한 10월의 뉴욕 시티필드 공연은 무대 끝에 주저앉아 굵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게 만든 매개체로서의 무대였다. 스타디움에 가득 찬 관객들과 어둠이 내린 공연장, 그곳을 밝히는 수많은 불빛들을 보며, 자신이 왜 이 힘든 길을 선택하게 됐는가를, 그러나 결국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당위를, 그 기꺼움에 대해 자각하고 만 순간. 지민이 2018년의 마지막 날에 자작곡 <약속>을 내놓았던 건 그 자각을 여기서 이만 매듭짓고 훌훌 털어내겠다고 우리와 스스로에게 '약속'하기 위함이었을 거이다.


우는 지민의 얼굴을 휴대폰으로 찍은 뒤 SNS에 '모두 각자에게 각각의 의미가 있었을 공연. 그 각자 중에 지민이가, 그 각각의 의미에 지민이가 있었던 공연'이라 섰다. 그리고 이 길을 포기하지 않아 준 지민이를 생각하고 부끄럽게 조금 울었다. 아직 우리 서로 주고받고 싶은 게 많이 남았으니 조금만 더 함께 가자는 이기적인 마음을 두어 스푼 섞은 채. 



나는 소비뇽 블랑이나 리슬링 같은 화이트 와인이나 샴페인, 까바를 즐겨 마신다. 잠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다 붉은 레드 와인이 담긴 와인잔을 건드려 이불에 한껏 쏟은 후 취하더라도 좀 덜 티 나게 취해보자는 이유로 화이트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입맛이 자리 잡은 케이스다. 현재 갖고 있는 와인 셀러는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구분하여 저장할 수 있는데, 나는 전체를 6도로 맞춰놓고 대부분 화이트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을 구비해놓고 있다. 주기적으로 쟁이는 레드 와인 비고르만 예외다.


비고르는 저 검붉은 색이 말해주듯 닫히고 무거운 타닌이 느껴지는 거친 이탈리아 와인으로 내가 선호하지 않은 류의 와인이지만 2019년 6월, 이틀 차 부산 매직샵이 끝나고 브이앱 라이브를 찾아온 정국이가 꺼내온 와인이 비고르란 이유만으로 구입의 이유는 충분하다.


4월 17일. 두 번째 방방콘이 있던 날. 비긴즈 콘서트에서 부산 매직샵, 스픽콘 상파울루까지 비고르를 포함한 두 병의 와인을 천천히 마시며 방구석 콘서트를 즐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가는 공연장, 점점 성숙해지는 멤버들의 피지컬, 그에 맞춰 노련해지고 멋있어지는 무대 매너. 8년의 시간을 압축해놓은 방방콘을 보며 나도 흥얼흥얼 취해갔다. 


역시 저 비긴즈 콘서트를 갔어야 했다, 그때부터 팬이어야 했다, 고 웅얼웅얼. 비긴즈 콘서트 스탠딩에 선, 수저 준 높은 안목을 가진 팬들을 향해 치얼스. 



2021.05



용산역으로 출발하는 KTX를 예매할 때 나는 보통 왼쪽 자리를 예매한다. 스쳐가는 건물들의 숫자가 많다 싶다가 어느 순간 한강이 펼쳐지고, 63 빌딩과 잔뜩 밀린 올림픽대로를 봐야 서울에 도착했구나 싶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KTX를 예매할 땐 오른쪽 자리를 예매할 것이다. 스쳐가는 건물들의 숫자가 많다 싶다가 어느 순간 한강이 펼쳐지고, 잔뜩 밀린 올림픽대로와 하이브 사옥을 봐야 서울에 도착했구나 싶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브 인사이트를 방문하기 위해 정말 오랜만에 서울을 왔다. 비가 퍼붓듯이 쏟아지는 토요일이었다. 인사이트 입장 전 여유 있게 도착한 터라 미리 예약해놓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들러 조용히 작품 감상을 한 뒤 빠져나왔다. 시간에 맞춰 동시에 입장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라 늦지 않기 위해서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에게서 BT21의 캐릭터가 불쑥 보인다. 이런 행렬이 참 오랜만이었다.


첨단 시설을 갖춘 어느 공장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 지정된 공간에서 지정된 시간 안에 즐겨야 하는 터라 바삐 움직였다. 대취타 안무 연습 영상과 Fake love의 악기 화음 쌓는 과정, 블랙 스완 영상에 멤버들 작업실을 본떠 놓은 화면도 좋았지만 가장 오래 머물러 있던 파트는 방시혁 대표가 직접 메모하며 읽은 데미안의 일부를 pdf로 저장해놓은 패드였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버리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에는 'young forever'가, '내가 냉소를 보내는 모든 것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으며'에는 '위악'이, '그것에 자신을 믿고 내 맡겨봐!'에는 'never mind'가 적혀 있었다. 화양연화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자리에서 가장 오래 시간을 보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며 MD 상품 중 제일 핫한 에그타르트와 포토카드를 사서 나오며, 바로 추가 예약을 했다. 다음 방문 시엔 봤던 영상은 재빨리 패스하고 데미안에 적힌 필적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확인할 예정이다.



부러 약속한 것도 아닌데 같은 날 30분 간격으로 예약을 한 지인과 만나 성수동의 한 식당으로 이동했다. 브레이크 타임을 한 시간 정도 앞둔 때에 부랴부랴 도착하게 된 터라 조용한 식당에 민폐를 끼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미리 예약해놓은 우리 테이블을 제외하고 시끌벅적 만석이었다. 주문한 와인 한 병을 한 시간 안에 빠르게 마시며, 각자 사 온 포토 카드를 꺼내 사진을 확인했다. 이번 사진 참 잘나왔다.


자리를 옮긴 해방촌에서도 와인을 주문했다. 왜인지 팬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엔 옷이나 차림에 더 신경 쓰게 되는 터라 아침 일찍부터 고데기로 머리에 잔뜩 힘을 줬는데. 하루 종일 오락가락 내리는 덕에 앞머리는 축 쳐지고 바짓단도 보기 싫게 젖어버렸다. 그러나 와인과 일상에 스민 덕질 이야기에 흐트러진 차림새는 잊힌 지 오래. 예매해놓은 KTX 시간대를 늦게 조정한 뒤 와인 두 병을 기어코 함께 더 마신 뒤 일어났다. 우리가 함께 마신 건 와인이 아니라 아마도 공감이었다.



이런 날을 위해 모은다, 샴페인을. 영어 싱글 <Butter>가 공개되는 날, 부리나케 집에 도착해 프랑스에서 직구한 샴페인 R.H.Coutier를 꺼냈다. 오후 1시부터 내내 흥얼거렸더니 영어 가사임에도 입에 금세 붙는다. 뮤직비디오 티저를 보고 퀸의 <another one bites the dust>과 같은 느낌일까 싶었는데 방탄소년단만의 노래였다. 아미가 항상 우리 뒤에 있다는 가사와 안무도, 존경과 헌신의 의미가 담긴 손등 키스도,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정국이와 곡 시작부터 비주얼 쇼크를 가져다준 석진이도 그냥 다 마냥 좋다. 이럴 때 음악에 대해 좀 더 알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감상을 좀 더 대단하게 표현해낼 수 있을 텐데.


뮤직비디오가 안주가 되니 토스티 한 샴페인이 꿀떡꿀떡 잘도 넘어간다. 방탄소년단이 없었던 일상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저녁이다.


<Butter> 첫 무대는 빌보드 시상식에서 공개됐다. 당연하게도 국내에서 사전에 찍은 영상을 송출하는 형태였다. 현지 빌보드 시상식은 마스크를 쓴 관객이 일부 들어온 형태의 라이브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관객 없는 스튜디오에서 찍은 <Butter>영상과 현지 라이브 공연 영상이 자연스레 교차됐다. 공연은 양방향 소통이라는 걸 우리 확실히 깨달았으니 제발 멤버들에게 관객과 묵혔던 함성이 터져 나오는 공연장을 돌려줬으면. 


아차, 뮤직비디오에 감춰져 있던 <Butter> 댄스 브레이크는 치명적인 섹시 버전이었다. 음, 이건 우리끼리만 보고 싶긴 하다.



좋아하는 음식에 햄버거를 꼭 꼽던 태형이, 만덕동 맥도널드에 앉아 햄버거 세트를 먹던 어린 정국이는 이제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발매되는 방탄 세트(BTS meal)의 주인공이 됐다. 시그니처 색인 빨간색 대신 보라색으로, 맥도널드 로고 옆에 방탄소년단 로고가 함께 포장된 포장지로 탈바꿈하여. 방탄 세트가 출시되지 않은 나라의 아미들은 기존 맥도널드 봉투에 방탄 로고를 손수 그려가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한국 출시일은 5월 27일 목요일. 방탄 세트는 맥모닝 시간이 끝난 오전 10시 30분부터 판매였다. 나는 일찌감치 점심 약속이 있다고 회사를 빠져 나와 방탄 세트를 구입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콜라는 컵에 옮겨 담은 뒤 세척하고 맥너겟을 접시에 옮겨 담아 포장지를 닦아 따로 빼놓느라 부산을 떨다 "이게 뭐라고" 하며 웃었다. 이게 뭐라고 아침부터 시계만 쳐다봤고, 이게 뭐라고 급히 서둘렀고, 이게 뭐라고 먹는 것보다 포장지를 먼저 챙겼다.


그 '이게 뭐라고'의 향연. 이게 아니었으면 그냥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 먹고 휴게실에서 하릴없이 시간 보낸 뒤 사무실로 돌아와 평소와 다름없이 일하고 퇴근했을 날. '이게 뭐라고' 덕분에 드라이브 스루로 커피가 아닌 햄버거도 주문해보고, 보라색 풍선과 방탄소년단 노래로 가득한 매장을 사진에 담고, 비슷한 시간에 방탄 세트를 먹고 있는 사람들과 동질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맞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좋다. 나는 수없이 많은 '이게 뭐라고'를 외치며 덕질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게 뭐라고', '그 므시라꼬'와 닮아있네.




P. S


다음 글은 또 뭐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새벽 사이 <Butter>가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했다. 기념하고 남겨야 할 일들이 앞으로 계속될 것임을, 고작 이 정도 써놓고 글감 없다고 토로하는 거냐 말하는 듯한 타이밍이다. 타이밍 놓치지 말고 꾸준히 써 가야겠다. 물론 속도는 변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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