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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Dec 18. 2020

56. 우리의 2020년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56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조바심을 내던 때가 있었다. 이방인으로서 모든 감각이 날 서 있는 게 좋아서, 똑같은 하루를 섬세히 살아내는 게, 내내 이어폰으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게, 먹고 마시는 일과 좋은 것을 보려는 고민만 하는 게 좋아 자주 짐을 꾸렸다. 아르바이트로 용돈 벌이를 했던 스무 살 남짓의 그때도 그랬고, 업무가 바쁜 서른 살 남짓의 그때도 그랬다. 비행기에 몸을 싣거나 고민 없이 풍경에 젖어드는 것을 여행이라고 한다면 나는 스무 살 남짓 이래로 처음, 여행이 없는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독립한 집에 가구와 가전을 채워 넣기 위해서, 멤버들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먹고 마실 집들이의 후유증을 감안해서 등의 이유로 휴가를 써왔는데도 남은 휴가가 8일이었다. 한 장 남은 달력을 앞뒤로 넘겨보며 적당한 날짜를 골라 휴가 상신을 올렸고, 연차 보상이 없는 만큼 8일의 휴가는 순식간에 결재됐다. 일단 내긴 냈는데. 계획 없는 휴가를 보내는 것도 처음인 한 해다.


평일 오전 10시의 아침. 업무 카톡이 울리지 않았으면 무심코 지나쳤을 시간. 부서 카톡방 알림을 끄며 느지막이 일어났다. 밤늦게까지 콘서트 영상을 보고 잤더니 몸이 무겁다. 환기를 시키고 청소기를 돌리고 커피 한 잔을 내렸다. 리모컨을 돌리다가 멈춘 채널에선 철 지난 예능 프로그램이 재방송 중이었다. 그걸 잠시 넋 놓고 봤다. 간단히 점심을 챙겨 먹고 웹소설을 읽었다가 그마저도 무료해져 하릴없이 와인을 꺼내 왔다. 바깥 활동을 자제하면서 자연스레 술이 늘었다. 


매일 집에서 텔레비전만 봤더니 돌리는 채널마다 안 본 프로그램이 없어 결국 유튜브에 접속했다. 배경 음악으로 틀어놓기 위해 경연 프로그램 클립 영상을 재생시킨 뒤 다이어리를 챙겨 왔다. 3일 정도 밀린 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빼곡한 1월과 느슨한 2, 3월과 듬성듬성한 4, 5, 6월까지 쓴 뒤 차츰 방치했던 게 그동안의 다이어리였는데 올해는 방탄소년단 시즌 그리팅 육공 다이어리 덕분에 매일 조금이라도 꾸준히 기록했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화면에선 참가자가 재해석한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페이지를 넘겨 오늘 날짜를 찾는데 넘기는 장마다 검은 글씨가 가득하다.  


 2월 26일. 제임스 코든 쇼 카풀 가라오케 방송. 어떻게 앉아서 라이브를 이렇게 하지? 점심은 카이센동으로 간단히 혼밥. 외근이 많아 혼자 운전을 많이 했는데, 덕분에 애들 노래 많이 듣는다. 이런 날.

 3월 31일. 머리 자르고 뿌리 염색. 항공권 취소(이렇게 투어는 물 건너간다). 중고로 구매한 메모리즈 2017 도착. 오늘 코든 쇼는 홈 페스타. 달려라 방탄 에피소드 98 파자마 파티 2.

 4월 19일. Rainy day. 방방콘 이틀 차, 오전에 호텔 체크아웃하고 히츠마부시 포장해 집으로 컴백. 이틀 차 방방콘은 집에서 마무리한다.


간단하게 단어 몇 개만 적어놓은 날이 있고, 구구절절 감상을 나열한 날이 있다. 부동산에 처음 방문한 날짜가 있고 월드 투어 취소 공지가 올라온 날짜가 있다. 올해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고 습관처럼 말하던 사람의 거짓말 같은 하루하루가 이 안에 담겨 있었다. 삶은 살아지고 있었다.


적응은 무서운 단어라 절대 잊을 수 없을 2020년이라고, 오래오래 기억날 2020년이라고 말하지만 벌써 어떤 날들은 까무룩 해지고 있다. 바이러스로 세상이 마비되었던 것은 잊히지 않을지언정 그럼에도 살아냈던 삶에 대해선 이러다 어물쩡 넘어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기록한다. 그들의 오늘과 그들의 2020년에 대해서. 그들의 오늘과 그들의 2020년에 함께 묻은 나의 오늘과 나의 2020년을 위해서. 삶은 살아지고 있었고, 그게 2020년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1월



뉴욕 현지 시간 12월 31일 오전 9시 50분, 한국 현지 시간 12월 31일 밤 11시 50분. 뉴 이얼스 라킹 이브(New year's rockin' eve) 무대에 서기 위해 뉴욕에 도착한 멤버들은 한국 시간에 맞춰 새해를 축하하고자 부스스한 모습으로 호텔 방에 모였다. 굵직한 연말 무대를 마무리하고 바로 건너간 뉴욕의 피곤한 아침에도 한국의 새해를 함께 챙겨야 한다는 듯 이른 시간에도 큰 목청으로 새해 인사를 건네 왔다. 뉴욕 현지 시간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새해 카운트다운을 세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모인 타임스퀘어의 가장 중심에서 방탄소년단은 그 수많은 인파와 함께 다시 한번 2020년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시차로 발생한 두 번의 1월 1일은 이토록 소소하고도 화려했다.


뉴욕 스케줄을 마치자마자 한국에 도착해 골든디스크 시상식에 참석했고, 골든디스크 역사상 최초로 디지털 음원과 음반 부문 모두 대상을 거머쥐었다. 시상식 다음날, 윤하의 곡에 남준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Winter Flower(雪中梅)>가, 그다음 날엔 정규앨범 <Map of the soul : 7> 발매 안내 공지가 나왔다. 아무도 외로울 거라 말하지 않았던 높이에 대한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난 <Map of the soul : 7>의 컴백 트레일러 <Interlude: Shadow>와 한 마리의 흑조를 각자 마디마디 나누어 짊어진 듯한 <Black Swan>이 이후 순차적으로 선공개됐다. 


한국에 잠깐 머물던 멤버들이 다시 한번 미국으로 출국한 뒤인 1월 22일. 4월 한국에서부터 시작되는 월드 투어 일정이 공개됐다. 공연에 목숨 거는 팀인 만큼 새 앨범과 함께 진행할 스타디움 투어에 대한 포부가 대륙과 도시를 넘나드는 빽빽한 일정에서 드러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놀라운 뉴스들이 들려왔다. 방탄소년단이 미국에 출국한 이유 중 하나가 그래미 시상식에 퍼포머로 참석하기 위해서였음이 알려졌고, 62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방탄소년단은 빌리 레이 사이러스, 래퍼 릴 나스 엑스와 함께 <올드 타운 로드 올스타즈(Old Town Road All-Stars)> 협업 무대를 가졌다. 단독 무대는 아니었지만 다음 스텝을 추구하게 만드는 도약이었다. 그리고 무대를 마친 뒤 브이앱 라이브 방송을 통해 팬들과 함께 축배를 들었다.


미국에 출국해 있는 동안 <ON>, <Black swan> 뮤직비디오를 촬영했고, 미국 토크쇼 프로모션에 참여했다. 이즈음 현대 미술 작가와 협업한 무료 전시 <Connect BTS>가 오픈되었고, 작년 9월 뉴질랜드에서 촬영한 <본 보야지(Bon voyage) 시즌 4>의 촬영분과 <달려라 방탄>은 계속 방송되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태형이는 틈틈이 라디오 형태를 띤 브이앱 라이브 방송을 찾아왔다. 


새 앨범 발매, 그래미 시상식 퍼포머 참석, 월드 투어 준비. 분명 2020년의 포부는 그 어느 해보다 담대했다.





2월



2월 3일. <Map of the soul : 7>의 두 번째 컴백 트레일러 <Outro:Ego>가 나왔다. 같은 앨범이지만 <Interlude: Shadow>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결국 이 길로 흘렀을 운명과 당위에 대한 솔직한 긍정이 가득한 호석이 다운 음악이었다. 스타디움 투어에서 이 노래를 꼭 함께 떼창 하고 싶어질 즈음, 드디어 북미 투어 티켓팅 날짜가 다가왔다. 미국 현지 시간에 맞춰 티켓팅에 참전해 제일 가고 싶었던 시카고와 뉴욕 공연 티켓팅에 성공했고, 이 투어의 시작 서울 잠실 콘 추첨 역시 그라운드 좌석에 당첨됐다.



미국 체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컴백과 투어 준비에 몰두하고 있을 즈음, 호석이의 생일이 있었다. 자신의 작업실에서 라이브 방송을 통해 조촐하게 자축했고, 나를 비롯한 팬들은 호석이의 생일을 기념하고자 분주한 주말을 보냈다. 콘셉트 포토, 트랙 리스트 공개 등 디데이를 함께 세 오며 기다린 <Map of the soul : 7>는 2월 21일, 선주문 402만 장이란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발매됐다. 퍼포먼스를 기대하게 하는 <ON>, <욱(UGH!)>이나 라이브로 실제로 들으면 첫 음부터 마음을 어지럽게 할 것 같은 <00:00 (Zero O’Clock)> 등 처음부터 끝까지 역시 좋지 않은 곡이 하나도 없는 앨범이었다. 이렇게 또 마음이 잔뜩 잠긴 앨범을 이 음악들을 선물 받는구나, 벅차 오른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독감처럼 지나가는 유행 바이러스일 줄 알았던 코로나 19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졌다. 오랜만에 한국 음악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지만 관객석이 텅 비었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공허함이 찾아왔다. 잠실 콘서트 티켓팅이 예정대로 진행되었지만 티켓팅이 있은지 사흘 만에 코로나 19로 인한 공연 취소 공지가 올라왔다. 5월부터 시작되는 북미 투어의 개최도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윤기가 코로나 19 예방 및 피해 복구를 위해 1억 원을 전국재해구호협회에 기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팬들 역시 뜻을 모아 콘서트 티켓 취소 금액을 연이어 기부하기 시작했다. 누구를 탓하기보단 그 누구도 고통받지 않고 하루빨리 이 상황이 극복됐으면 하는 마음이 모아졌다.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통째로 빌려 찍은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의 <ON> 무대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일단 웃자'는 석진이의 말과 앉은자리에서 옥타브를 넘나드는 라이브를 선보인 정국이가 화제가 된 <더 레잇 레잇 쇼 위드 제임스 코든(The Late Late show with James Corden)>의 <Carpoll karaoke> 등이 2월 말에 공개되었다. (올해가 거의 마무리되는 상황에서 돌아보니 지미 팰런은 <ON> 라이브 무대를 실제로 관람한 유일한 관객이었다.)


무대 앞 실재하는 팬들이 사라졌고, 무대 위 실재하는 방탄소년단이 사라졌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일상이 차츰 분리되어가는 2월. 그래도 곧 괜찮아질 거야 막연한 기대심으로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리둥절한 우리의 2월이 그렇게 지났다. 




3월



독기를 품고 데뷔했던 초기를 지나 차츰 오는 반응에 설레어하던 시기가 도래했고 앨범 판매량과 기록에서 정점을 찍고 나니 불안하고 어지럽고 무서웠던 날들이 찾아왔다. 여러 생각과 말들과 상황을 통해 이젠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고 그 즐거움 자체를 느낄 준비가 되었더니 아뿔싸 세상이 마비되었다.


사상 초유로 관객이 없는 음악 방송을 진행해야 했던 멤버들은 차선책으로 브이앱 라이브 방송을 택했다. 음악 방송을 앞둔 대기실에서 짧게라도 인사를 건네기 위해서였다. 정국이와 석진이와 윤기가 찾아오면 다음엔 남준이와 태형이었고, 또 지민이와 호석이었다. 회사 아티스트 룸에 모여 앉아 곧 있을 윤기의 생일과 지난 뮤직뱅크에서 실수했던 태형이의 '기다려 기다려'를 놀리기도 하며.


휴가도 내고 성대하게 즐겨보려던 윤기 생일은 생일 축하 라이브 방송과 집에서 간단히 샴페인 한 잔 하는 것으로 갈음했고, 각자가 자신만의 해석을 충분히 해석할 시간을 주고 난 뒤 찾아오는 남준의 2시간 여 앨범 비하인드 라이브 방송은 몇 번이고 다시 봤다. 


이 즈음 오프 더 레코드로 투어 스케줄에 물음표로 적혀 있던 6월 13, 14일 공연이 대구로 예정돼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작년 부산에 이어 올해는 대구구나 싶었다. 페스타의 정점이 될 공연이 대구란 소식에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광주 슈퍼 콘서트와 부산 매직샵을 통해 자신의 고향에서 진행되는 공연에 멤버들이 얼마나 신나 하는 지를 직접 눈으로 봤던 터라 제발 그땐 공연이 무사히 이루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컴백 무대가 마무리된 후 지민이 브이앱 라이브 방송을 두 번 더 찾아왔다. 못 본 사이에 손목엔 자신의 생일이자 방탄소년단 데뷔일인 숫자 13과 양 팔꿈치에 각각 young, forever를 새긴 채였다. 보이스피싱을 흉내 낸 태형이와의 전화 연결도, 화장실 다녀오고 멋쩍은 표정으로 서 있던 지민이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방송을 시작하는 지민이도 챙겨볼 수 있었던 나날들.


컴백도 했고, 역대급으로 기록도 세웠고, 투어 준비도 성실히 하고 있는데도 이게 뭔가 싶은. 공연을 안 하면 뭐 하지? 공연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이 상황이 계속되지? 적응하지 못한 3월은 그렇게 여상하게 지났다. 




4월



취소된 잠실 콘서트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이틀의 방방콘이 있었다. 방탄소년단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방탄소년단의 첫 번째 콘서트 <Red bullet>부터 최근의 <Love yourself> 콘서트까지 연이어 관람할 수 있는 온라인 축제였다. 이미 절판된 데다 그마저도 물량이 없어 DVD 하나당 수십 만원을 부르는 중고 판매자들의 탄식이 들려오는 듯했다. 



멤버들의 브이앱 라이브 방송도 중간중간 계속됐다. 달고나 커피 만들기, 아미 밤 커스텀 하기, 게임(저스트 댄스 Just Dance) 즐기기, 잇진 등 집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테마로 한 작은 배려가 담긴 방송들이었다. 


여상한 3월을 지나오며 멤버들은 공통으로 수렴한 답을 내놓았다. 이렇게 마냥 괜찮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에 빠져 매번 실망하고 괴로워하지 말고 지금의 이 기분을 담는 음악을 만들자고, 그렇게 앨범에 담아내자고. 그렇기에 새 앨범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브이앱 라이브가 아닌 셀프 일기 형식을 빗대어 작금을 기록하는 로그에 담겨야 했다. 4월 17일.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작업실에 앉은 남준의 로그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콘서트 취소와 연기에 따른 결론은 그럼에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고, 그걸 그간 안 했던 방식으로 앨범 작업을 진행해보며 그 과정을 로그로 담아보겠다 했다. 


4월 24일엔 자신의 키 만한 캔버스에 물감 작업을 하는 윤기의 로그가, 4월 28일엔 너른 연습실에서 나 홀로 춤 연습을 하는 호석이의 로그가 나왔다. 특별한 말 없이 각자 그림과 춤을 그리고 출 뿐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할 것. 그들이 우리에게 몸으로 주는 메시지였다. 


멤버 전체가 모여 앨범의 주제를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에 대한 논의도 이 즈음 진행됐다. 위로나 공감, carry on이라는 키워드와 모두가 힘들지만 삶은 어쨌든 끝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몇 곡을 넣을지 어떻게 유닛을 이룰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쉴 법도 한데. 가만히 멈춰 있으면 안 된다는 듯, 뭐라도 해야 한다는 듯 그랬다.


4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오랜만에 대학 친구를 만나기로 해 길을 나선 그 저녁, 윤기 역시 꿀 에펨의 슙디로 오랜만에 돌아왔다. 친구와 안부를 물으면서도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있을 윤기의 목소리가 궁금해 대화가 몇 번 헛돌았던, 그렇게 윤기다운 따뜻함이 가득했던 방송이었다. 이 날을 시작으로 매주 멤버 한 명씩을 게스트로 한 꿀 에펨이 계속됐고, 멤버들이 전부 모인 마지막 꿀 에펨은 6월 13일, 방탄소년단 데뷔 기념일에 진행되었다. 



4월의 마지막 날. '하하핫' 외엔 아무 설명 없는 사진 두 장이 트위터에 업로드됐다. 바구니에 딸기 몇 개를 담아 든 윤기가 밝게 웃고 있는 사진 한 장, 저 멀리 윤기가 딸기 바구니를 이고 쫑쫑거리며 걸어오는 사진 한 장이었다. 추후에 호석이가 멤버들 전체가 함께 딸기 하우스 안에서 찍은 사진을 업로드해주었고, 뮤직비디오 콘셉트를 상의하는 로그에서 이 날이 여행과 같았다고 말한 것을 통해 공식적인 스케줄이 아닌 멤버들의 휴식이었음이 알려졌다. 4월의 끝자락엔 그렇게 함께였을 시간이 담겼다. 회사가 소장한 고사양의 카메라가 아닌, 서로의 핸드폰에 찍고 찍힌 시간들이. 




5월



앨범은 계속해서 작업 중이었다. 더 많은 음악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윤기의 강력한 추천으로 지민이 음악 PM을 맡게 되었고 태형이는 비주얼 총괄 PM을 맡게 되었다. 멤버들끼리 서로 나눈 의견을 빠른 타자 속도로 정리하는 지민이와 앨범 재킷은 자연스러움에 맞추면서도 콘셉추얼하고 완벽하게 스타일링 된 화보와 각자의 방을 구현한 세트가 추가될 것으로 정리한 태형이와 호석이, 남준의 논의 과정이 역시 로그에 담겼다. 윤기의 하얀 캔버스가 검고 푸르게 칠해지는 과정과 서툴지만 천천히 건반을 누르는 석진이의 피아노 연습도 지켜보았다. 아미 멤버십에 들어갈 화보 촬영도 이맘때 이루어졌다. 



5월은 특히 윤기에게 누구보다 특별한 달이었다. 윤기가 프로듀서 및 랩 피처링을 맡은 아이유의 <에잇>은 발매되자마자 음원 차트를 석권했고, 2016년에 이어 4년 만에 두 번째 믹스테이프를 발표했다. <대취타>를 포함해 총 10곡이 충실히 담긴 앨범이었다. 웬만한 떡밥도 담담히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지금까지 중 가장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했던 디데이가 바로 이 믹스테이프 발매였다. 5월 17일, 어두운 배경에 흐릿한 실루엣 위 굵은 글씨의 D-7을 보고 일주일 뒤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했었는데 D-7이 발매일을 의미하는 게 아닌 어거스트 디(Agust D)의 두 번째 믹스테이프 D-2를 말하는 것이었다니. 페스타와 겹치지 않게 당초 예상보다 한 주 더 당겨 발표한 D-2는 그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에게 던져졌다.


<대취타> 뮤직비디오를 찍으면서도 매주 꿀 에펨의 슙디가 되었고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이어졌던 <인 더 숲(In the SOOP)> 촬영 중간에도 위스키 한 잔을 함께 하는 D-2 앨범 비하인드 브이앱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바이러스 탓만 하기엔 바이러스라 가능했던 것도 있었다. 그게 '덕분에'든 '때문에'든 말이다.



집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테마로 한 소소한 브이앱 방송도 계속되었다. 카네이션 만들기, 비즈 팔찌 만들기, 스크래치 엽서 만들기 등 사무실 한편에 자리 잡아 두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걸 보다 보면 저런 작은 즐거움을 느껴보고자 하는 충동이 일곤 했다. 특히 스크래치 엽서를 만들고 이후 자장면을 먹는 남준과 석진의 방송은 레전드로 회자될 정도로 재밌는데, 어거스트 디 노래 가사 중 '아직도 여전히'와 '어떻게 생각해'를 말끝마다 이어 붙이며 끅끅 웃는다거나 피땀 눈물을 '인정 눈물'로 뜬금없이 개사에 터지는 등 둘이 함께 있는 내내 웃음 기운이 떠다닌다. 밖에서 보면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얼굴이 일그러져 마음먹고 재생시키게 되는 마성의 영상이다. 


지민이가 외쳤던 대체 불가. 맞다. 대체 불가한 시간이 만들어내는 것도 있다.  




6월



우리에게 6월은 가장 중요한 달이다. 방탄소년단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달, 지금을 있게 한 달. 달력을 한 장 넘기자마자 페스타는 시작된다. 6월의 첫날, 2018년 썸머 패키지 촬영지 사이판에서 찍은 <Airplane pt.2>의 영상이 공개되면서 2020년 페스타의 막이 올랐다. 


자정에 맞춰 올라오는 떡밥들을 기다리느라 팬들이 본격적으로 잠을 줄여야 하나 고심하던 때 멤버들은 춘천에서 <인 더 숲(In the SOOP)> 촬영을 계속했다. 호석이와 지민이 한 짝씩 나누어 그린 흰 캔버스 운동화와 같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찍은 태형이와 지민이의 셀카는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였다. 5월 말부터 이어졌던 <인 더 숲> 촬영이 끝난 뒤 일상으로 복귀한 윤기는 다시 꿀 에펨을 진행했다. 6월 첫 주 게스트는 정국이었다.


코로나 19로 대면 졸업식이 어려워지자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나 유명인사가 졸업생과 가족, 지역사회를 축하한다는 일종의 가상 졸업식 <Dear Class of 2020>를 기획, 진행한다고 유튜브 오리지널에서 발표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과 미셸 오바마, 비욘세, 케이티 페리 등과 함께 방탄소년단이 이 라인업에 포함됐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자리 잡은 멤버들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는 서툰 청춘들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바로 Life goes on. 맞다. 앞으로 방탄소년단이 꾸준히 전할 그 메시지. 이때가 시작이었다. 


<Airplane pt.2> 영상에 이어 <Dionysus> 리허설 캠, 포토 컬렉션, <Still with you>, 우리가 쓰는 프로필, 콘셉트 포토 및 인터뷰 영상, 노래방 <Map of the soul; 7>, <방탄 생파> 등의 페스타 떡밥이 매일매일 주어졌다. 그렇게 페스타의 디데이인 방탄소년단 데뷔 기념일이자 방방콘 더 라이브 하루 전 6월 13일엔 멤버 전원이 참여한 꿀 에펨이 방송되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건 외부가 아닌 결국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그 어떤 곳보다 내가 머무는 집이 소중한 곳임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로시의 모험을 담은 <오즈의 마법사>가 마지막 꿀 에펨의 메인 테마였다. 



석진이는 짬을 내 친구 결혼식 사회를 봤고, 호석이는 로그를 통해 <BE> 앨범 중 노래 <병>을 살짝 스포 하기도 했다. 지민이와 정국이는 숙소에서 엉망인 김밥을 만들기도 했고, 다양하게 필터를 바꿔가며 로그 안 같은 로그를 찍은 태형이도 있었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스포일러와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스케줄이 곳곳에 담겨 있었던 6월. <Dear Class of 2020> 축사 중 사실 한참 달리다 어느 섬에 갇힌 기분이라고 그러나 섬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고 말했던 윤기의 언어가 맴돈다. 너른 스타디움 대신 국립 중앙 박물관 앞마당에서 부른 <봄날>과 <Make it right>은 섬에 있기에 가능했다.




7월



다 알고 있는 척 해도 사실은 잘 모른다. 석진과 태형, 지민이 '무파사'를 외치며 영화 <라이온 킹>의 하이에나 흉내를 내던 작년 석진의 생일 브이앱 방송을 USB에 넣어 여행지에 챙겨갈 정도로 닳게 봤어도 그 흉내가 <달려라 방탄> 더빙 편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1년이 넘은 지금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쉬는 날 없이 대부분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는 멤버들의 말을 이럴 때에야 겨우 실감한다. 그렇게 꼬박꼬박 숙제처럼 찍어 온 <달려라 방탄>은 드러나는 스케줄이 없던 7월, 매주 방송이 되었다.


노래 연습을 하는 지민이에게 연습실을 내어준 석진은 초밥을 먹는 잇진으로 팬들에게 안부를 물어왔고, 남준과 호석은 어느 촬영 스튜디오에 앉아 앨범 재킷을 촬영할 카메라를 선정하는 회의 과정을 로그에 남겼다. 앨범의 작은 부분까지 직접 관여하는 모습이 차근차근 기록되어 쌓이고 있었다. 


춘천의 펜션을 통째로 빌려 촬영했던 <인 더 숲(In the SOOP)>도 이 달에 공개되었다. <달려라 방탄>의 촬영 시기가 들쑥날쑥한 것에 비하면 <인 더 숲>은 가장 최근 멤버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예년처럼 해외로 나가 <본 보야지>나 썸머 패키지 등을 찍진 못했어도 '우리나라도 예쁜 곳이 참 많다'는 감상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매 끼니와 하루 놀거리만 고민이던 유유자적한 일주일의 <인 더 숲>은 <달려라 방탄>이나 <본 보야지>와는 또 다른 멤버들의 하루를 엿볼 수 있게 했다. 


7월 27일로 날짜를 막 넘긴 늦은 밤. '꿀 FM <지진정의 R.A.D.I.O 라디오> #중대발표'란 이름의 브이앱 라이브 방송이 시작됐다. 이름은 지진정이었지만 멤버 전원이 참석한 방송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아무 말 대잔치 끝에 이 늦은 밤 모두가 모여 앉은 이유가 공개됐다. 현재 앨범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고 이 앨범은 하반기에 발매할 예정이나 이 과정에 톡톡 튀는 신나는 곡을 만나게 되었고, 이 힘든 시기에 당장 활력을 주고 싶은 마음에 싱글 발매를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계획했던 것들이 무산되며 느낀 허탈함과 무력감 끝에 우리만의 돌파구를 찾아보는 시도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8월 21일에 발표될 것이란 새 싱글 곡이 바로 <Dynamite>. 역시 다 알고 있는 척 해도 사실은 잘 모른다. 이렇게 항상 모르게 만드는 방탄소년단이 좋다. 그들의 사랑 방식이 좋다. 




8월



Dynamite, Dynamite, Dynamite.


<인 더 숲>과 <달려라 방탄>, 그리고 멤버들이 올리는 트위터나 위버스 포스트를 보는 것 외엔 특별한 일 없이 보내던 8월은 <Dynamite>의 뮤직비디오 티저가 공개된 8월 19일을 기점으로 완벽히 달라졌다. 내내 <Dynamite>였다.


파워풀하고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화려한 군무의 <ON>이나 근사하게 유려한 <Black swan>도 좋지만 무게감을 내려놓고 무대를 편안히 즐길 수 있는 <작은 것들을 위한 시>가 주던 행복감을 알기에 서로 눈도 마주치고 웃고 신나게 뛰어 움직일 <Dynamite>라 더 반가웠다. 


온갖 빛나는 것들의 향연, 그 향연을 만들어내는 것이 빛나는 나라는 가사에 꼭 맞는 디스코 풍의 댄스곡이라니. 왜 지금 이 시점에 이 노래여야 했는지 명확했다. <Dynamite>의 발매가 가져온 최초, 최고라는 기록은 이 명확함에 뒤따르는 부차적인 숫자들일 뿐이었다. 


<Dynamite> 본 뮤직비디오 외 B-side 뮤직비디오(무한도전 '완전 남자다잉'편의 노홍철의 스킨 바르는 법을 따라한 지민, 태형, 정국 덕에 화제였던 뮤직비디오다. 이 영상을 보고 나면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자꾸 노홍철을 소환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멤버별 Sing with me, 뮤직비디오 스케치 및 코멘터리 등의 영상이 순차적으로 공개됐다. 밝은 곡이니만큼 촬영 현장엔 내내 웃음이 스며 있었다. 그걸 보는 우리도 똑같은 표정이었을 테다. 이러라고 급히 <Dynamite>였겠지. 그 마음에 또 웃는다. 


재킷 촬영을 끝낸 앨범 작업은 상당 부분 진척되었다. 정국은 피독 프로듀서의 지휘 아래 자신이 만든 노래 <Stay>를 녹음했고, 멤버들은 함께 모여 뮤직비디오 내용을 논의했다. <인 더 숲>을 촬영했던 것처럼 하루 날을 잡아 편안한 모습을 담는 것에 모두 동의했고, 숙소와 온라인 콘서트, 스케줄 스케치를 담는 건 일단 의견으로 청취했다. 멤버들이 동의하고 고민한 내용은 뮤직비디오 감독이 될 정국과 비주얼 PM 태형이 대표로 회사 스태프에게 전달했다. 역시 이 모든 내용은 로그에 담겼다.


뮤직비디오 내용을 논의하던 멤버들의 헤어 스타일을 보면 남준이는 색이 진한 파란색이고, 태형이는 색이 옅게 빠진 듯한 금발이다. 이때 헤어가 깔끔하게 정리된 것으로 보면 <Dynamite> 뮤직비디오 촬영 시기가 이 즈음인 듯하다. 이 로그의 촬영 시점이 8월이었으나 영상 공개가 9월에 이루어진 이유다. <Dynamite>라는 곡을 내놓고도 새로 나올 앨범 뮤직비디오 내용 회의에 바로 들어가는 가수. 음악에 진심이기에 방탄소년단이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Dynamite> 이전의 8월엔 내내 <Still with you>에 앓았다. 개인적인 감상이 많이 담긴 글이지만 2020년 8월의 나는 이러했으니 아래의 글도 여기에 붙인다. 

8월, 무더위 대신 <Still with you>나 <Dynamite>가 먼저 떠오르다니. 얼마나 멋진 덕질인가.




9월



앞으로 9월 1일은 정국이 생일뿐 아니라 빌보드 Hot 100 1위 가수 된 날이라는 수식어를 더 넣어 기념해야 한다. 한국 시간 9월 1일 새벽, 빌보드 Hot 100 차트 가장 높은 곳에 방탄소년단의 <Dynamite>가 이름을 올렸다. 차트를 확인하느라 늦게까지 잠들고 있지 않았던 멤버들은 감격에 젖은 정제되지 않은 소감을 트위터와 위버스를 통해 업로드했다. 그 날 오후 연습실에 모인 멤버들은 라이브 방송을 통해 정국이의 생일과 빌보드 Hot 100 1위를 팬들과 함께 축하했다. 감격에 젖어 한참을 운 뒤 늦게 잠들었던 몇몇 멤버들의 눈이 퉁퉁 부은 채였다. 


<Dynamite>는 9월 내내 빌보드 Hot 100 차트 초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첫째 주에 이어 둘째 주도 연이어 1위를 기록했다. 이번엔 남준의 생일 선물이었다. 셋째, 넷째 주에는 한 단계 떨어져 2위를 기록했다가 다시 9월 마지막 주엔 1위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했다. 반짝 떴다 사라지는 휘발성 노래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냈다. 


<Dynamite> 활동은 사전에 녹화한 영상들로 대체되었다. MTV VMAs, NPR Tiny Desk Concert, iHeartRadio Music Festival, 유엔 총회 연설 등 출연을 확정한 무대만 해도 이러했다. 특히 지미 팰런의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에서는 매일 한 곡 이상의 무대와 게임 등을 진행하는 닷새간의 BTS Week를 진행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BTS Week를 통해 방탄소년단은 경복궁 근정전의 <IDOL>, 경회루의 <소우주>를 비롯해 <Dynamite>, <Black swan>, <Home>의 무대를 선보였다. 각 곡의 분위기에 맞춰 배경을 완벽하게 꾸렸음은 물론이었다. 지미 팰런은 이런 방탄소년단을 향해 매일 밤 놀랍고 환상적이며 아름다운 무대를 선사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보냈다. 


국내에서도 활동을 이어갔다. KBS 9시 뉴스와 팝 전문 채널인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했다. 2019년 스타디움 투어를 다룬 <Break the silence>가 극장 개봉되었고, 온라인으로 개최된 롯데면세점 콘서트의 엔딩 가수로 참가했다. 


할 일은 계속된다. 9월 첫 주, 멤버들은 을지로와 구덕 역 등지에서 복고 콘셉트의 2021 시즌 그리팅을 촬영했고 온라인으로 개최될 콘서트 준비도 틈틈이 했다. 새 앨범은 어느새 패키지까지 최종 완성되어 멤버들이 직접 확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직접 손글씨로 쓴 가사지와 랜덤 없는 포토 카드와 셀프 촬영한 화보집까지. 기획 단계부터 마무리까지 자신들의 의견이 투영된 앨범이 그렇게 완성되고 있었다. <Dynamite>의 활동과 콘서트가 끝나고 나면 곧 팬들에게 전달될 앨범이다. 


2020년 9월을 돌아보면 이렇게 기억될 거라고, 나는 아래와 같이 덕후 일기 <53. September> 편에 썼다.


2020년 9월을 나는 어떻게 기억할까. 지긋지긋한 바이러스도, 무기력에 빠지는 지난한 시간이 아닌 빌보드 Hot 100 1위, 24시간 동안 가장 많이 본 유튜브 기네스 기록, 정국이와 남준이 생일, 런던 스픽콘 DVD, 스쿨 러브 어페어 스페셜 에디션, 방방콘 프포 같은 것들로 가득할 것이다. 기억하고, 춤추고, 흐리지 않았다는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의 가사처럼. 경계는 무너지고 다 함께 부르던 그 목소리처럼.





10월



대체 언제 또 이렇게 준비를 했던 걸까. Jason Deluro의 <Savage Love>에 정국, 윤기, 호석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리믹스 버전이 달을 넘겨오자마자 공개됐다. 반응은 뜨거웠다. 10월 셋째 주, 빌보드 Hot 100 1위는 <Dynamite>를 2위로 밀어낸 <Savage Love> 방탄소년단 리믹스 버전이 차지했다. 이쯤 되면 빌보드 Hot 100 1위가 멜론 24 hits 1위보다 쉬운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바이러스가 이렇게 지루하게 우리 일상을 점령하게 될 거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 했다. 적어도 날이 추워지면 실재를 마주하며 환호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루고 미뤄진 <Map of the soul ON:E> 콘서트는 결국 고작 이틀, 그것도 온라인 개최로 최종 확정됐다. 이 투어 준비를 못 해도 몇 달은 했을 텐데. 방탄소년단의 무대를 직접 본 적 없던 수많은 이국의 팬들이 이 유대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텐데. 방탄소년단뿐 아니라 수많은 스태프들이 참여하여 준비해왔던 콘서트가 너무나 아쉬운 엔딩을 준비하고 있었다.


괜찮은 척해 왔지만 사실은 억울한 생각을 했었다는, 왜 하필 이런 때란 물음이 쉬지 않고 자라났음을 얘기하며 눈물을 수습하지 못하는 지민이와 화면 가득 화상으로 연결된 팬들의 모습과 함성에 이거였지 했다는 정국이와 한 때는 꿈이었으나 이제는 너무 작아 보이는 체조 경기장과 그 경기장을 누비는 멤버들과, <No more dream>과 <Dynamite>가 공존한 셋 리스트와 그걸 보며 웃고 울던 내가 있었다.



지민의 생일이 있는 10월을 우리는 찜토버라 부른다. 지민이 생일만으로 10월 전체를 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생일 축하 이벤트는 코로나 19로 없어졌지만 컵홀더를 증정하는 카페나 생일 축하 광고, 그리고 각자 저마다의 방식을 통해 지민의 생일을 기념했다. 연습실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지민이와 말없이 기타 연주에 집중한 윤기의 브이앱 라이브 방송이 각각 있었고 뮤직비디오를 찍고 나서의 감상을 짤막하게 전하는 정국의 로그가 있었다. 기록의 힘은 누구보다 방탄소년단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듯.


10월엔 멤버들 다 같이 건강검진도 받았다. 남준은 골격근량이 늘어 운동을 한 보람을 느꼈다고, 호석은 멤버들이 키 측정할 때 모두 목이 신기하게 늘어나는 기린이 된다고 슬쩍 전달했다. 팀 내 최단신을 담당했던 지민은 이번 건강검진을 통해 키가 늘어 윤기보다 컸음을 신이 나서 알리기도 했다. 서로 키를 비교하고, 체지방률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앞으로 건강 잘 챙겨야지 다짐도 했을 멤버들의 건강검진 장면이 눈에 훤했다.

 

드러나지 않은 촬영이 많았을 10월이다. 윤기의 어깨 수술이 예정된 11월 초 이전, 7명이 함께 한 인터뷰나 촬영이 이때쯤 진행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버랜드에서 찍은 아메리카 갓 탤런트(America's Got Talent)의 <Dynamite> 무대나 팝업 스토어 방문, 영화 <Break The Silence> 코멘터리 녹화, <BE> 앨범 리뷰, 수능 응원 영상, 잠실 주경기장을 통째로 빌린 AMAs 무대, 대한항공 여객기를 세트로 활용한 <더 레잇 레잇 쇼 위드 제임스 코든(The Late Late show with James Corden)> 무대, <에스콰이어> 잡지 화보에도 모두 윤기가 함께 있다.


오래 집을 비우는 엄마가 끓여 놓고 나가는 사골국처럼 재활로 떨어져 있을 것을 대비해 정성스러운 떡밥을 양껏 준비해놓은 윤기 덕에 그나마 덜 아쉬운 연말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이런 상황 '덕분에'든 '때문에'든 이로 인해 말미암아 가능했던 것들이 있다. 이런 빈 시간이 아니었음 수술 없이 매번 아픔을 마주하며 갔을 윤기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다가올지 모른다. 삶은 그래서 살아낼 가치가 있다. 




11월



팝업 스토어에서 판매하는 물품보다 위버스 샵을 통해 구매할 수 있는 물품의 가짓수가 훨씬 많고 편리한데도 팝업 스토어를 찾았다. 멤버들이 팝업 스토어를 다녀 가며 남긴 '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직접 본다는 것만으로 방문 이유는 충분했다. 예약한 시간에 맞춰 팝업 스토어에 방문해 디스플레이된 내부와 멤버들의 메시지를 감상했다. 


그 날 오후, 집으로 내려가기 전 늦은 저녁으로 먹을 음식을 포장하고 있을 때 윤기 어깨 수술 기사가 떴다. 얼마 있지 않아 윤기가 수술을 해야만 했던 경위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 글을 올렸다. 공백이 생기지 않게 최대한 수술을 피하고 재활과 주사로 버텨왔으나 무대만 서면 악화되는 상황이 반복되니 두려워져 결국 수술을 결심했고, 재활에 전념하여 빠른 시일 내에 우리를 만나러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Map of the soul ON:E> 콘서트에서 왼 팔을 들어 올리지 못했던 윤기의 모습이 겹쳐졌고, 데뷔 전에 발생한 오토바이 사고에서 이제라도 벗어날 윤기의 홀가분함에 대해서만 생각하고자 애썼다. 이럴 때 부모님한테 어리광 부리는 막내아들로 편안한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생각과 함께.


11월 20일. 무려 8개월 만에 앨범 <BE>가 공개됐다. 이런 2020년이 아니었으면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앨범. <Life goes on>을 비롯한 전곡이 2020년, 현재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앨범 발매 다음날, 한쪽 어깨에 보호대를 찬 윤기가 찾아왔다. 발매일에 맞춰 진행된 전체 브이앱 방송에 전화 연결로 참여하긴 했지만 혼자만 빠진 게 아쉬웠을 것이다. 걱정하고 있을 우리에게 괜찮다 보여주고도 싶었을 것이고.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서 얼굴을 보인 윤기는 팔이 아프고 불편하다고 얘기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리어 누굴 걱정하냐고, 푹 쉬고 낫는 것에만 전념하라는 내 댓글은 읽기도 벅찬 다양한 언어의 물결에 금방 휩쓸렸다.


덕계못. 덕후는 계를 못 탄다는 절대불변의 진리는 메이플 스토리 외길 인생 김석진 선생 앞에선 맥없이 스러진다. 지난 8월, 패션 브랜드 비욘드 클로짓과 메이플 스토리가 컬래버레이션한 카디건을 입고 메이플 스토리 캐릭터 인형을 든 석진이 사진을 업로드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촬영한 것으로 보인 영상이 공개됐다. 방탄소년단이 아이디어를 내고 넥슨에서 구현할 메이플 스토리 아이템 제작 컬래버레이션이었다. 게임에 대한 설명을 막힘없이 쏟아낸 석진은 남녀공용 한벌 옷, 부유 신발 등 '메잘알' 아이디어를 제공했는데, 이는 메이플 스토리 유저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내며 '갓겜주'란 별칭을 얻어냈다. 행복한 덕업 일치 현장이었다.


한국 시간 11월 25일 새벽. 63회 그래미 어워즈의 후보가 발표되던 시간. 남준, 지민, 태형, 정국은 숙소 거실에 모여 앉아 후보 발표 방송을 시청했다. 다양한 부문을 지나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부문의 공개가 시작되자 주먹을 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화면을 뚫어져라 보거나 옆에 앉은 멤버의 다리를 붙잡으며 긴장감을 감췄다. 후보의 이름이 하나씩 불리고 드디어 세 번째, <Dynamite>와 함께 BTS의 이름이 불렸다. 시상자로, 공동 퍼포머로 참석했던 그래미 어워즈. 이번엔 당당히 후보다. 소파에 튀어 오르듯 놀라거나 함성을 지르거나 도리어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는 네 사람의 리액션이 영상에 담겼다. 


달뜬 얼굴의 멤버들은 그 날 오후 연습실에 모여 앉아 샴페인 한 잔으로 가볍게 자축했다. 그리고 바로 안무 연습을 하러 갔다. 11월 중순, 음악 PM으로 최종 정리하는 지민의 라이브 로그를 통해 방탄소년단이 바로 연말 무대 준비에 돌입했음이 알려진 터였다. 매 연말 무대마다 다른 곡 해석을 내놓으며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게 하는 방탄소년단답게 그래미에 노미네이션 되는 날에도 잠깐 축하하곤 바로 연습이다. 물론, 그러니까 방탄소년단이지만.


사전에 녹화한 무대 영상들이 11월 내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잠실 주경기장을 대관하고, 무대 효과를 위해 실제 폭죽을 터트리고, 대한항공 여객기를 섭외하고, 에버랜드를 빌려 찍은 무대들이다. 비용보단 좋은 퍼포먼스, 좋은 무대에 대한 열정과 정성이 먼저다. 물론, 그러니까 방탄소년단이지만.




12월



시간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잘도 흘렀다. 12월 1일, <Life goes on>이 빌보드 Hot 100 1위에 올랐고, 윤기까지 함께 모인 연습실에서 멤버들은 큰 환호성으로 기쁨을 전달했다. 같은 날 <Dynamite>는 Hot 100 3위에 올랐다. 


석진이의 생일을 하루 앞둔 12월 3일 밤, 갑자기 노래 하나가 업로드됐다. <Abyss by JIN>. 석진의 자작곡이었다. 방탄소년단 유튜브 공식 채널을 통해 <Abyss>를 들으며 자신의 생일이면서도 팬들에게 선물을 주는구나 하던 즐거워하던 차, 공식 블로그에 추가로 적어놓은 석진의 글을 보게 됐다. 아름답고도 슬피 우는 나를 마주하며 그런 너, 나를 더 알고 싶다고 말하는 가사를 나보다 음악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잘하는 분들이 많은데 자신이 빌보드 Hot 100위를 하고 이 기쁨과 축하를 받아도 괜찮은 걸까, 그렇게 깊이 들여다보니 사실은 마음이 힘들어 내려놓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번 아웃이 찾아왔을 때 쓴 것이라는 설명이 들어간 글이었다. 


팬들은 우리를 좋으려고 보는데 굳이 우리의 힘들고 아픈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고 한결같이 말해왔던 석진이었다. 자신의 생일이기에, 그 관용에 묻어 꺼냈을 이야기. 나도 모르게 석진이는 항상 괜찮을 거라고 속단하고 있었다.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쉽게 믿었다. '잘 만들 자신도 없고 결과물이 좋지 않으면 어쩌나, 나는 이미 그러면 안 되는 위치에 와 버렸는데'란 석진의 무게감을 외면한 건 아닐까 미안했다. 안 그럴 거 알지만 가끔씩 이렇게 한 번씩 그 심연을 우리에게 토해내줬으면 싶다고, 모르는 척 토로하면 두 팔 벌려 안아줄 테니 너무 혼자 감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조금 울고 말았다.  


태형이가 윤기를 비롯 주변 지인들에게 석진이 생일 축하 멘트 영상을 모아 석진의 생일 선물로 전달했단다. 그 마음 그대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석진의 생일 축하하고 있다고 큰 소리로 말하고 싶다. 12월 4일. 석진아 생일 축하해. 태어나줘서 정말 고마워. (석진이는 그렇게 자신의 생일날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숙소 거실에 앉아 평소의 석진이로 브이앱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그런 석진의 모든 모습이 좋다.) 


12월은 바야흐로 시상식 시즌이다. 멜론 뮤직 어워즈를 시작으로 MAMA, 더팩트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탈진하는 <MIC drop>으로 마무리했던 2017 MAMA와 국악을 접목시킨 <IDOL>을 남긴 2018 멜론 뮤직 어워즈, 거대한 무대 장치를 동원해 규모의 무대를 보인 2019 MAMA, 멜론 뮤직 어워즈, 골든디스크 등 매 연말마다 레전드 무대를 만들어낸 방탄소년단은 2020 멜론 뮤직 어워즈에선 <Black Swan> 페어 무대와 마이클 잭슨 디스코를 오마주한 <Dynamite>의 댄스 브레이크, 2020 MAMA에선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통째로 쓰는 <ON> 무대와 AI로 등장한 윤기를 준비했다. 


상을 받기 위해 무대에 올라선 멤버들은 모두 개인 마이크를 들고 마스크를 쓴 채였다. 이런 무대가 더 익숙해지기 전에 얼른 우리의 함성을 들려주고 싶다. 묵혀두었던 함성을 마음껏 발산해 전율을 일으키고 싶다. 이후 이어진 더팩트 시상식까지 방탄소년단은 시상식 내 존재하는 모든 대상을 거머쥐었다. 당연했다. 


해외 매체 인터뷰 내용과 <Dynamite> 홀리데이 리믹스 버전 공개, 역시 사전에 제작한 무대 영상들이 계속해서 공개 중이고 가요대축제며 가요대전, 그리고 레이블 콘서트도 남았다. 아직 태형의 생일이 남았고 진행 중인 스케줄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지만 이쯤에서 12월을 정리한다. 태형이 생일이 다가오기 일주일 전부터 행복할 거고, 태형이 생일이 지난 일주일도 그 여파로 계속 행복할 자신이 있으니까. 굳이 더 많은 글자를 남겨놓지 않더라도 분명 그럴 테니까. 



P. S


우리는 모르겠지만 항상 스케줄을 하고 있다는 말, 지금 받고 싶은 선물이 있다면 '하루 휴가'라던 말.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항상 우리를 위해 스케줄을 소화하는 방탄소년단 때문에 <달려라 방탄>이, 각종 인터뷰와 화보가, <방탄 밤>과 <방탄 에피소드>가, 시즌 그리팅과 메모리즈를 받아 본다.


짬이 나면 전시를 챙겨보고, 믹스테이프 작업을 계속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멤버와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고 습관처럼 말하던 사람의 거짓말 같은 하루하루가 남듯 그들의 하루하루도 성실히 남았다. 삶은 내게도, 방탄소년단에게도 살아지고 있었다. 


25,000자에 달하는 이 편을 나흘에 걸쳐 썼다. 잊지 않으려 부랴부랴 정리했다. 유튜버와 트위터, 위버스와 브이앱을 넘나들며 혹시 놓쳤던 스케줄은 없는지 확인했다. 큼지막한 이벤트들은 다이어리에 따로 기록을 해놓아 그나마 수고스러움이 덜했다. 기록해놓았던 일기가 아니었으면 한 달은 족히 걸렸을지도 모르는 글이다. 


삶은 계속된다 말하는, 이에 도달했던 마음을, 그리고 실제로 삶을 계속 살았을 그들의 여느 해처럼 뜨거웠던 2020년이 이렇게 저문다.


올 한 해, 그럼에도 삶을 살았던 나는 그 삶에 방탄소년단이 언제나 함께 있어 행복했다.


미우나 고우나 삶을 살게 해 준 2020년. Adieu!




*



덕후 일기를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미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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